박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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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85. 7. 10. 박생광}}}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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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화가.
평생을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았지만,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놀랍고도 대담한 예술적 변신을 성공해냈다. 토함산 해돋이, 탈, 단군, 십장생, 창, 불상, 단청, 부적, 무당 등 지극히 한국적인 주제를 선택해서, 수묵화에 강렬한 오방색의 채색을 혼합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선보였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구성을 통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성이 마치 들끓어 오르는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장르를 구축해낸, 수묵채색화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호는 내고(乃古). 경남 진주 망경동 1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기준은 동학교도로 농민항쟁이 실패하자 박해를 피해 진주에 정착하였고, 박생광은 망경동 강가 움막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학창시절을 진주에서 보냈다.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 17세의 나이로 일본 교토로 건너가 다치카와미술학원[1] 에서 수업을 받았다. 1923년에는 일본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2] 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근대 교토파’를 대표하는 다케우치, 무라카미 등으로부터 고전과 근대 기법의 결합을 시도하는 신일본화(新日本畵)를 배웠다.
일본에서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명랑미술전, 신미술인협회전, 일본미술원전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광복이 되자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국내 화단에는 일본화풍을 배척하는 주의가 완연했고, 이에 따라 박생광은 은둔 작업 활동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위한 여러가지 실험을 모색하였다. 이러는 와중 1963년에는 경상남도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7년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면서 미술 활동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비로소 한국 민속적 소재를 이용하여 화면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이 때 동경에 거주하면서 일본미술원전의 회원이 되었고, 3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연이은 전시전의 성공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박생광은 '젊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들이 어떠한 작업이냐고 물어보니, '우리 역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1970년대 후반에는 독창적 화풍 정립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양한 기법이 혼재하던 그의 작업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귀국하여 진화랑에서의 국내 첫 개인전을 하였는데, 이 개인전에서 박생광은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샤머니즘, 불교 설화, 민화, 역사 등을 주제로 삼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전시는 '한국적 회화를 현대적 조형성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1981년에는 백상기념관에서도 개인전을 가졌다. 1982년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뉴델리인도미술협회에 초대되어 초대전을 열었고, 1985년에는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 특별전에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란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 피리 불며 즐겁게 길을 떠나는 노인을 그린 〈노적도〉를 그리는 중, 1985년 7월 18일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뒷산에 마련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1주기 회고전이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다.
3. 작품
3.1. 무당
3.2. 모란
3.3. 토함산 해돋이
3.4. 전봉준
3.5. 꽃가마
4. 여담
- 이영 미술관에서 박생광 화백의 그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 천경자는 생전에 박생광에게 " '토함산 해돋이'를 저 주시고, 제 그림 중 선생의 마음에 드시는게 있으면 다가져 가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생광이 말했다. "천여사님. 내 그림이 아직 천여사 그림보다 모자라라는데 그랄수야 없지요. 내가 공부를 더 많이해서 잘 기리면 그 때 가서 바꿀 수 안있겄소."
- 도올 김용옥은 “세상에 내고(박생광) 만한 화가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직 내고를 일본 채색화의 아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그럼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은 독색이고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은 불색이던가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박생광은 늘 입으로 붓을 빨았다고 한다. 후원자인 김이환은 빨간색 물감에 쓰이는 주사가 수은이어서 해롭다고 충고했으나 박생광은 ‘개않다’고 웃었다. 그는 붓 빨기를 통해, 가벼운 색정적인 느낌과 천진성이 배합된 독톡하고도 아름다운 필치를 만들어냈다. 뒷날 그가 후두암 진단을 받았을 때 김이환은 그 놈의 주사가 원수라고 수없이 한탄했다고..
- 박생광이 세상을 떠나자 평소에 친했던 시인 구상이 추모시를 썼다.
>{{{#!wiki style="text-align:center"
추 모 송}}}>{{{#!wiki style="text-align:right"
具 常}}}>한평생 몸과 마음 그림에다 바치셔서
>촛불처럼 스스로를 오롯이 사르시니
>한국화 그 뿌리위에 새 경지를 여셨네
>
>깊은 산 수행인의 탈속한 모습에다
>천성으로 타고나신 보물이 그 마음씨
>가셔도 우리 가슴에 그림 함께 사시네
>촛불처럼 스스로를 오롯이 사르시니
>한국화 그 뿌리위에 새 경지를 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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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수행인의 탈속한 모습에다
>천성으로 타고나신 보물이 그 마음씨
>가셔도 우리 가슴에 그림 함께 사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