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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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white,#2d2f34>'''김용옥(金容沃)'''
'''출생'''
1948년 6월 14일 (75세)
충청남도 천안시[1]
'''본관'''
광산 김씨
'''학력'''
보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철학 / 학사)
국립대만대학 (철학 / 석사)
도쿄대학 (철학 / 석사)
하버드대학교 (철학 / 박사)[2]
원광대학교 (한의학 / 학사)
'''호'''
도올(檮杌)[3][4]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
17만 1천명
1. 개요
2. 경력
3. 행적
3.1. 성장기
3.2. 학창 시절
3.3. 대학원 시절
3.4. 교수 임용 후
4. 성격 및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
5. 김용옥의 외국어 실력
5.1. 번역가로서의 김용옥
5.1.1. 노자를 웃긴 남자
6.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
6.1. 정치적·사회적 발언
8. 가족 관계
9.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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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옥(金容沃)은 대한민국의 순수문학 작가이자, 문화예술 평론가, 철학자, 한의사 및 前 기자, 前 대학교수, 고전학자, 사상가이다. TV대중강연으로 유명해졌다. 고전학 외에도 한의학, 연극, 시나리오, 칼럼니스트, 기자 등 여러 영역을 탐구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무조건 되는 대로 건드리지는 않았고, 공부의 일환으로써 자신이 직접 각 분야에 참여해 경험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기철학 제2원리가 '''"인간의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다.
머리를 빡빡 깎은 이유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여 매일 아침 방을 쓸 때 머리카락이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또한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을 보면 단순히 그 이유만이 아니라 스님들처럼 머리를 편하게 하여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이유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삭발 이전 사진을 보면 보통 교수들과 비슷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 한복을 입고 나오는 이유는 그는 한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은 두루마기 한복은 김용옥의 어머니가 지어준 것으로써 고려대학교 학생 때부터 입고 다녔다고 한다. 승려는 아니다.[5]

2. 경력


'''기간'''
'''경력'''
1968년 3월 ~ 1972년 2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학사논문
문학사. 버트런드 러셀의 논리원자주의
1972년 3월 ~ 1972년 8월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72년 9월 ~ 1974년 6월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 철학연구소
석사논문
노자 '자연'철학 중 '무위(無爲)'의 기능(功能)
1974년 9월 ~ 1977년 2월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석사 졸업
석사논문
왕선산의 동론 (王船山의 動論)
1977년 2월 ~ 1977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
1977년 9월 ~ 1982년 6월
미국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 박사 졸업
박사논문
왕부지의 철학(The philosophy of Wang Fu)
1982년 ~ 1986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1982년 부교수로 임용, 1985년 정교수 승진)
1990년 3월 ~ 1996년 2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 졸업
1996년 ~ 1998년
대학로에서 도올한의원 운영
'''학교 및 연구소'''
'''직위'''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 교수
용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한의학 담당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
미국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철학분과위원장
중앙대학교
석좌교수
순천대학교
석좌교수
세명대학교
석좌교수
한신대학교
석좌교수

3. 행적



3.1. 성장기


유복한 개신교 예수교장로회 가정의 여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6][7]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산부인과 의사였다.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집이 부유했기 때문에 수많은 목사와 장로가 다녀갔으며, 유영모나 함석헌을 직접 보며 자랐다고 한다. 김용옥의 부모는 전 재산을 교회에 헌금하고 자식들에게는 일원 한 푼도 상속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21살 많은 큰 형과 신앙생활을 같이 한 이가 다름 아닌 장기려 박사.
그러나 사실 이도 당연한 것이 그는 중고생 때는 양아치여서 공부보다는 무술 연마에 힘썼고, 등교 열차에서 패싸움에 참여하거나, 학교 땡땡이치고 영화를 보러가거나, 상당한 당구 실력, 대학생 때도 술 마시고 여자 기숙사에서 행패를 부리는 등 전형적인 학교 양아치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학문에도 뜻을 품었는지 이마누엘 칸트노자 등의 책을 독파하고, 영어 공부에도 매진하여 당시 토플 성적이 전국 1위였다고 한다.

3.2. 학창 시절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보성고등학교 때 마침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잠시 고등학교 교편을 잡은 허혁 선생에게 영향을 받는다. 도올의 책들에는 종종 허혁 교수에 대한 존경이 표시되고 있다. 허혁 교수는 후에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 이후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성서신학을 가르치게 된다. 1965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경제학과(현 농경제사회학부) 입학시험을 쳤으나 수학 시험에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둬 낙방하고, 2차로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건강상 이유로 고려대 생물학과를 중퇴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가 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너의 성향상 전제가 확실한 학문인 신학보다는 무전제의 학문인 철학이 어울린다"는 은사의 말을 듣고 한신대를 또 다시 중퇴하게 된다. # 그리고 68년 고려대 철학과에 편입한다.
중고생 때 운동을 과도하게 하다가 대학생 시절 끔찍한 관절염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군대도 면제되었다. 당시 한의사 권도원의 치료로 몸이 회복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철학체계를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 나중에는 원광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한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8] 철학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의학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한의학과에 들어간 것은 교수 사임 이후. 1990년 43살의 나이에 원광대학교 한의학과 예과2학년으로 학사편입하였다. 예과2년에 편입하였기에 졸업을 위해서는 유급을 하지 않는 한 본과4년까지 총 5년을 다니면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의대 학제 상 최소필수교과이수를 위해서는 사실상 6년을 다녀야했다. 49살인 1996년 한의대를 졸업, 동년에 한의사국가고시를 통과하고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

3.3. 대학원 시절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에는 외국 유학에 나서는데, 국립타이완대학에서 석사, 도쿄대학에서 석사,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었다. 즉, 중국과 일본, 미국의 최고 수준의 대학원에서 공부했다는 의미다. 중국 본토, 즉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는 채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라 대만 유학이 중국 철학이나 중국 어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대만=(자유)중국이었다. 그래서 김용옥이 유학 경험를 회상하는 글에서도 '대만 유학'이 아닌 '중국 유학'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하버드 유학시절 분석철학의 거장 콰인은 학위수집벽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조크를 던졌던 일도 있다. 학위수집(?)에 대해 그 자신은 "학벌 때문에" "콤플렉스 때문에"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건 그 당시에 서양도 아니고 "동양철학"을 배운다고 하면 "주역"이나 운운하며 점이나 치는 사람이란 편견이 많았고 지금도 비슷하지만 '동양철학을 배웠다고 하면서 학벌이라도 없으면 학계에 명함도 못 내밀기 때문에'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의견이 있다. 김용옥은 한국의 학연, 지연, 혈연 문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각종 동창회에도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대만 유학 시절에는 대만으로 유학 온 정통 유대인과 붙어 다녔는데, 이 친구를 통해서 유대교와 유대인의 문화를 철저하게 느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예루살렘 성전 폐허에도 가까이 안 간다고 한다. 옛 지성소 터에 들어가면 야훼에게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전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김용옥이 한국 기독교의 구약적 성향을 지독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버드대학교 유학시절 그의 지도 교수 벤자민 슈워츠 또한 유대인이었다.
사실상 젊은 시절을 해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생활과 사고의 방식이 한국인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나는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용옥 스스로 그 자신이 쓴 책 『석도화론』에서 젊은 시절부터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백남준을 일컬어 "해외에서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전의 한국인의 모습을 보존한 화석 같은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 그리고 한국방송에서 했던 『도올의 논어이야기』에서 자신은 미국에 있을 때에 미국 사람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한국인처럼 행동했으며(교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등), 다양한 사고를 흡수하였지만 그 삶의 방식은 언뜻 보기에 자유분방해보이는 미국식이 아니라 매우 철저한 유교적 삶의 자세를 유지했다고 말한 바 있다.
본인은 하버드 철학박사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받은 학위는 동양학이다. Doctor of Philosophy를 직역해서 철학박사라고 하는 것 같다. 근데 또 동양학 박사라고만 칭하기엔 애매한 부분도 있다. 김용옥의 박사 논문은 철학자 왕부지에 대한 것이었다, the philosophy of Wang Fu, 논문의 성격상 분명 하버드 대학의 동양철학의 전문가가 박사학위 논문을 검증하고 박사학위를 받을만한 실력으로 서명했다는 뜻이다. 동양권 철학에 대한 기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게 타당할듯하다.

3.4. 교수 임용 후


[image]
(1982년 고려대학교 정교수 시절 )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고려대 철학과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학생들과 함께 최루탄을 많이 마셨고, 사실상 시위를 위해 조직되는 각종 학생모임의 지도교수를 여러 개 겸직했다고 한다. 이후 1986년 직선제 개헌, 언론 사상 표현 자유 등을 요구하는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내에서 비난을 받은 후 '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교수직에서 떠났다. 당연히 이때부터 고려대와는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듯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2011년에 드디어 고려대에서 강연초청을 받아 한 차례 강연을 했다.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 용인대학교, 뉴잉글랜드복잡계연구소 철학분과위원회, 중앙대학교, 순천대학교, 원광대학교 등에서 교수 등으로 활동하였고, 문화일보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 중에도 보수적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중앙일보 기자직도 그런 친구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 중앙일보 사장과 친분이 있다. 당시 신문기사는 중앙일보 편집장이 식겁할 내용이 많았다. 조중동과 반대 성향에서 일하는 몇몇 언론인들이 김용옥을 욕하다가 김용옥이 쓴 기사를 보고는 침묵했다고 한다. 중앙일보가 상대적으로 입장을 중도적으로 포지셔닝 한 뒤에는 "좌우를 통섭하는 성격"을 지닌 신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김용옥은 「언론은 "민족자결" 눈떠라」라는 글과 관련, 자신의 글을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을 통해 알리고 싶었으며[9], 그 이유는 보수언론을 읽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글을 가장 읽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아무리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에 자신의 글을 올려봤자 정작 그 글을 읽어봐야 할 사람들은 맨 『조선일보』 보느라 자신의 글을 읽을 기회가 없으니, 자기가 먼저 『조선일보』에 글을 올리고 싶다는 것. 이건 마치 김용옥 스스로는 텔레비전을 안 보고, 텔레비전을 싫어하지만 책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강의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이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011년에는 한신대학교에서 명예학사졸업장을 받고 , 석좌교수로서 동양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 목사[10]가 될 학생들이기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수업의 시작과 끝에는 열렬한 기도(…)를 했다고 한다.

4. 성격 및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


김용옥의 등장은 한국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애초에 김용옥은 외국에서 공부하다 왔기 때문에 국내에서 선후배 관계 같은 것이 별로 없었고, 본인도 그딴 거에 신경 안 쓰는 편이라, 사정없이 말을 갈기다가 여기저기서 상당히 욕을 먹었다. 특히 상당수의 한국학자들을 순식간에 일본학자 짝퉁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과거 한국학계는 일본의 연구성과를 표절한 경우가 많았다. 일각에선 김용옥이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나, 한국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로서 학계 전체가 흔들릴 것이 분명한 상황이니 만큼 그 이상은 자제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실력 있는 학자들이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게 싫어서 당시에 강의 초청이 들어와도 수백 명의 청중과 당시 돈으로 거금인 100만 원 정도의 초청료가 없으면 초청을 안 받는다고 공표한 적도 있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젊었을 때는 자신을 깔아뭉개려는 자들 때문에 더더욱 거칠게 맞불을 놓는 행동을 했고, 그만큼 잘난 척도 많이 했는데, 이런 일들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고 한다. 환갑이 넘고 나니까 한국의 어디를 가든 사회적으로도 존중을 받는 위치가 되었고, 자신도 철이 들어서(?) 과거보다는 얌전하게 살 수 있게 되었고, 글도 예전보다는 정갈하게 쓰게 되었다고 한다. # 물론 얌전해졌다고는 해도 보통 학자들보다는 훨씬 발랄하다.
원래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매우 안 좋게 생각했는데, 어차피 텔레비전이 생활의 중심으로 들어온 이상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TV 강의에 출연하여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특히 1999년 11월부터 2000년 2월까지 EBS에서 방영된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의는 EBS 역사상 최고 시청률(7.2%)을 기록해 인문학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2000년 10월부터 2001년 5월까지 KBS에서 강의한 <논어이야기>는 평균시청률 10%대였으며, 2000년 12월 8일 방영분은 15.6%를 기록하기도 했다. 인문학, 특히 철학 관련 강의나 서적이 한국에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김용옥 특유의 발음과 어투를 패러디한 개그 프로(KBS출신 개그맨 최형만)가 있었을 정도로 강의할 때 정말 열정적이다. TV 강의 이후로 대중적으로 상당히 유명해졌다.
노자 강의를 할 때 김용옥의 해석이 틀렸다면서 각지에서 한문도사(…)들이 너도나도 책을 냈으나 다 묻힌 지 오래다. 중국고전학이 한국에서 얼마나 안 좋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자신있게 쓰여있으나 과연 김용옥의 노자해석이 학계에서 주류로 인정받고 있는가 물으면 전혀 아니다. 김용옥 본인이 와서 서술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이런 대경실색할 '다른 역서를 다 묻어버렸다'라는 황당한 표현이 가능한지가 의문.
김용옥의 해석을 섣불리 수용하는 것도 위험하다. 김용옥이 한국에서 동양철학의 거목이라 불리는 고 김충열 교수를 비판한 일이 있는데(김용옥은 또한 고려대 재학시절 김충열 교수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했다) 김충열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잠깐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2007년에는 인터넷 강의까지 영역을 넓혀서 HOOZ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본인은 TV강의보다 인터넷 강의가 훨씬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 사이트에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학문을 축적해놓고 죽을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이 유튜브 중심으로 정착함에 따라 2009년에 개설한 이래로 특강이나 일상 위주로 영상을 업로드하던 도올TV에 2019년부터 기존 HOOZ 강의들을 전부 재업로드하고 HOOZ는 영업종료하였다. 2020년 말 현재는 자신의 노자 연구의 최후의 집대성이 될 것이라는 노자 강의를 새로 촬영하고 있다.
김용옥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대중적 활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김용옥 본인은 대중과의 소통이 없는 학문은 '''문명의 액세서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액세서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 그래서 현시대 김용옥은 순수 학문계통인 철학자로써 학계,전문가 그룹과 다소 떨어져있는 대중들 사이에 끼어있는 일종의 에듀테이너역할을 한다. 전문가들이 불편하거나 귀찮아서 잘 설명해주지 않는 철학적 이론과 이념을 대중적인 시각으로 번역해서 쉽게 알려주고, 여기에 김용옥 특유의 캐릭터성까지있어서 대중 몰입도와 지지도가 같이 높은 학자로써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
예를 들어 헤겔 연구가들은 헤겔철학을 완전히 분석해서 대중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언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과거에는 이러한 시도를 아무도 안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헤겔을 이해했다는 프라이드 때문에 대중들에게로 내려가려 하지 않고, 헤겔의 봉우리 위에서 대중들더러 올라오라고 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 김용옥 본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은 언어는 그냥 개소리일 뿐'''이라고 말하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견해는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정작 본인이 제대로 대중들을 위한 철학 서적을 썼냐하면 전혀 아니다. 헤겔을 제대로 이해한건 본인 정도밖에 없을거라는 파천황적 발언 정도만 책에 반복해서 써져있을뿐 그래서 대체 그 이해한 바가 뭐인지를 전혀 서술을 안 하고 있다. 전형적인 속물지식인의 행태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안 듣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궁금한 게 있으면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다. 그리고 직접 강의 중에 질문을 하면 다 듣고 답해준다. 김용옥의 저서를 보면 누구한테 이런 내용을 배웠다, 누구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외국에 이런 학자가 있다, 좋은 학자가 있는데 책 사서 읽어줘라는 등의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런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고, 언론에서 시끌벅적한 부분만 알려지고 있는 것.
그의 과격한 발언 중에는 자기 자랑을 하는 부분도 꽤 많고, 고매한 이야기를 너무 간단하게 툭 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문의 영역의 경우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말을 '''원래는 이 말은 이렇게 쉬운 뜻임''' 식으로 해설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오성(悟性)'이라는 표현은 그냥 이해력이나 비슷한 개념을 의미하는 'understanding'을 번역한 것인데, 이때 번역하는 놈들이 '''괜히 있어 보이려고''' 오성이랍시고 번역했다는 것.[11] '깨달을 오(悟)'자라는 것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12]
정말로 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근, 현대적 학문 용어가 한자어로 번역된 것은 대부분 19세기 일본 학자들에 의한 것인데, 당시 식자층은 어려운 한문 어휘를 예사로 구사했으며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서구 사상의 언어를 최대한 한자라는 의미 패러다임 안에서 받아내고자 노력했다. 즉 당시로서는 그냥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시대가 지나 번역이 낡은 것이 됨으로써 오늘날의 독자, 학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이라면 모를까 오늘날에 와서 굳이 어렵게 '오성' 같은 표현을 들먹이며 입문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하다는 점에서 '''있어 보이려고 지랄한다'''는 도올의 주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13] 이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아 그런 거였구나" 하고 듣지만, 해당 분야에 있던 학자들은 "잠깐! 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뭐가 되냐?"가 돼버린다.
물론 오성이라는 개념이 오래 통용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김용옥은 오성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저런 말을 한 것뿐으로 그렇다고 해서 학계에서 해당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학자들이 스노브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반평생을 배웠으니 그게 더 편해서 그런 거지... 그래도 차츰 개선되는 중이라 최근 칸트철학에서는 애매한 '오성' 대신에 '지성'이라는 번역어를 도입하기도 한다.[14]
예전 신학 논쟁 때도 김용옥을 불쾌하게 생각한 신학자들은 김용옥의 말이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며, 일도양단으로 자신이 최종결론을 지었다는 듯한 태도는 보통사람들로 하여금 김용옥의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서 비판한 일이 있다. #.

5. 김용옥의 외국어 실력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강연을 할 수 있으며 여러 차례 강연을 했다. 도쿄대학의 경우는 일본어 배운 지 4달 만에 입학했다고 한다. 한 강의에서도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중국어와 일본어는 할 줄 알아야 하며, (영어권 사람들에 비해) 배우기도 어렵지 않다. 그 다음에 영어까지 해서 기본 4개 국어는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 외에 철학자의 기본(?)과도 같은 독일어도 원서를 읽을 정도가 된다. 철학 고전 텍스트와 용어들이 독일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서양 철학을 전문적으로 학위 단위 이상으로 공부한 사람이면 독일어 원전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철학과 학부과정에서도 독일어 원전 해석이 보통 텍스트 강독 관련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고전학자답게 고대 그리스어도 사전을 보면서 읽으면 원전 독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성서 번역도 원전 어학실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한복음 강해'에서 고전 그리스어 원전과 영어 RSV(Revised Standard Version) 성경 판본을 토대로 이를 국문 번역하고 주석을 달은 바 있다.
또 고대 인도산스크리트어도 사전을 보면서 읽으면 원전 독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김용옥은 그의 저서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에서 산스크리트어 시대의 지역어인 팔리어 삼장을 원전 관련 주석으로 활용했다.

5.1. 번역가로서의 김용옥


김용옥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항상 강조하는 것이 '''번역'''이었다. 주요 고전이나 국내 과거 문헌들을 전부 한국어로 번역해야 국학이 이루어진다는 것.
국내 학계에서는 번역의 가치를 잘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며, 번밀레라는 속어가 이 실태를 반영한다.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어학 실력부터 길러야 하고 지리한 번역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실속은 없으니, 기존 학계에서는 번역을 그저 전문적 지식이 떨어지는 자들이 전문으로 하는 일이라고만 여기고, 대부분 논문 제작을 주류로 여겼다.
한편 불경 번역과 관련해 자신의 강의 중 현장보다 쿠마라지바가 더 뛰어나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김용옥의 저서의 상당수는 고전 번역이며, 그의 번역은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료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작 본인은 번역보다는 자기 학설을 개진하는 데 더 매진해 왔으며, 그의 번역서 중 높은 평가를 받는 책도 없다.[15] 천병희 교수 등 정말로 번역에 힘써 온 학자들과 대조적이다.

5.1.1. 노자를 웃긴 남자


김용옥이 한창 TV강의로 유명해졌을 때, 김용옥의 번역이 엉터리라며 김용옥의 오역을 비판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므로 직접 읽어보고 판단할 것.# 그러나 저 오역을 비판한 이경숙의 책이야말로 오히려 '''한문번역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비전문가의 책이다.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연결된 블로그에서 제시된 김용옥의 도덕경 해석은 사실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여러 유명 학자들의 널리 알려지고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는 해석들 중에서 취사선택된 것이다.''' 문제의 책은 김용옥의 취사선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단지 김용옥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몇 천 년 이어온 수많은 유명 주석가들의 해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2) '''이경숙의 해석이야말로 전혀 일반적이지 않으며''', 저런 해석은 텍스트 자체의 해석이라기보다는 1차 텍스트를 바탕으로 주관적인 2차 텍스트를 구성한 다음에야 가능하며, 어학적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해석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영문독해라고 할 경우 영어를 잘 아는 상태에서 그 텍스트를 문법과 글의 맥락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문법을 비롯해서 영어실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사전에서 단어만 찾아 보고 그 의미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해석을 함부로 틀렸다고 판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此兩者同 出而異名'을 김용옥식으로(='''다른 주석가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문체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저런 해석을 부정하는 것은 저자가 한문 자체의 언어적 구조나 수많은 한문문장에서 나타나는 문체의 특징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3) 훈고와 고증에 전혀 기초가 없다는 것이 바로 보인다. 예를 들어 徼의 음이 '요'가 아니라 '교'라고 읽었다고 글자마저도 제대로 못 읽는다고 김용옥을 비판하고 있으나, 徼의 원래 정식 한국한자음은 '교'이고 속음이 '요'라는 것은 전운옥편 같은 전통적 자서에서도 바로 확인된다. '찾다, 요구하다'라는 의미가 아닌 이상 중국에서도 yao가 아니라 jiao로 읽는다. 도덕경 첫장에서 나타나는 徼는 가장자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현대중국어의 jiao에 대응되는 '교'로 읽는 것이 원문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16] 그리고 이경숙은 수많은 노자 연구서들의 해석을 꼼꼼히 보고 장단점을 분석하는 작업에는 관심이 없고 김용옥의 해석에 대한 조롱과 함께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관점에서의 해석만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경숙과 같은 해석은 '''한문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김용옥을 싫어하더라도 결코 곱게 봐 줄 수 없는''' 아마추어의 무책임하고 근거없는 잘못된 해석일 뿐이다. 문제의 책이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불쏘시개도 때를 잘 만나면 히트할 수 있다는 씁쓸한 현실과 함께 글자만 어떻게든 의미를 꿰어 맞추면 한문 문장으로 문제없이 해석될 수 있다는 비전문가와 일반인들의 편견을 드러내 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출판사에서는 책이 나름 팔린다는 이유로 2권을 꾸역꾸역 내놓았다. 물론 2권은 화끈하게 망했다.

6.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


김용옥 본인은 자기 사상의 기본은 도가철학과 중용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물론 동양철학에 국한되지 않기 위해 서양철학이나 인도철학 등도 열심히 공부했으며, 모태신앙인 기독교의 신학 역시 공부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나눠서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폭넓게 여러 사상을 종합하는 입장이다. 그의 동전고전번역을 봐도 니체, 라캉, 하이데거, 데리다, 촘스키 같은 인물들이 인용된다.
김용옥은 자신의 철학체계를 '''기(氣)철학''' 또는 '''몸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김용옥의 여러 서적에 기철학이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고,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도 그의 사상경향이 어떠한지는 그의 책을 읽어보면 대강 알 수 있다. 80년대에 기철학의 2가지 원리를 말하고 있으니,
  1. 인간의 모든 진리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조건(몸)에 구현되어 있다.
  2. 인간의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서양철학에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정신과 육체, 본체와 현상의 문제의 경우 기철학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동양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氣)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본체와 현상처럼 근원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없기 때문. 이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중세 기독교신학 등은 철저히 거부되고, 사실상 서양철학 전반에 신화적인 요소가 깔려있다고 본다.
간단하게 그의 학문적 성향을 요약하자면, 유교불교든 기독교든 제도화되고 권위가 붙기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를 중시하는 편이다. 유교에서는 송나라 이후에 성립된 성리학 체계를 따르지 않고, 불교도 원시불교와 제도권과는 거리가 먼 선불교를 중시하며, 기독교 역시 기독교 이전의 예수운동을 존숭하며,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이른바 '''정통'''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의 다양한 기독교의 사조[17][18]들을 편견없이 연구하는 편이다.
또한 김용옥이 한국 역사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 실학과 관련된 문제였다. 한마디로 실학이라는 개념은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 성리학=전근대의 도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근대로 이행되기 위해 전근대적 학문을 극복하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이 도식에 끼워맞추려고 실학이라는 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흔히 실학자라고 표현되는 조선후기학자들도 알고 보면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애초에 김용옥은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성리학=전근대학문이라는 생각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굳이 근대적 학문을 말한다고 해도, '''왜 성리학이 근대적 학문이 못 된다는 거냐?'''라고 반문할 정도. 2012년에 나온 김용옥의 책 '사랑하지 말자'를 보면 인류의 사상사를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칸트는 이황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다. 칸트의 선험적 선의지라는 것이 퇴계의 이발(理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모더니즘)라고 하는 것의 종착점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서양은 근대의 오류를 고치기 위해 모더니즘의 대안을 내놓았는데 그게 파시즘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 후에는 섣부르게 대안을 내놓지 않고 그냥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변형만 하고 있는 것.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런 서양의 조류를 따라갈 게 아니라 그냥 원래 우리 밑천인 우리 전통을 제대로 배워서 재해석하는 게 낫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일단 확실한 건 '''그가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한다는 것과 자신감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상당한 논란이 되었던 요한 복음서와 토마스 복음서만 해도 이미 세계적으로는 활발하게 연구되는 주제인데, 한국 교회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쉬쉬하며 넘어갔던 것을 김용옥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물론 국내 일부 신학계에서는 논의되고 있었으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용옥이 처음.
성서무오설을 비판한다든지, 태권도 발전과 형성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태권도가 원래 가라데에서 출발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든지[19] 하는 내용도 학계에서 다들 알면서 쉬쉬하던 걸 김용옥이 까발린 것뿐이라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등과 친분이 깊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논어강의 때 출연한 적이 있고, 법정 스님은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의 서문을 써준 적이 있다. 숭산 스님과도 친구 먹은 적이 있고, 요한복음강해 이후로 김경재 교수와 교류하고 있으며, 80년대부터 불교사전을 만들어오고 있는 지관스님과도 친분이 있다. 여담으로 지관 스님이 불교대백과사전을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 내에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김용옥은 방송에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여러 번 안타까워했다. 이게 국내 학계의 현실. 가톨릭대학교출판부의 라틴 - 한글 사전도 허창덕 신부가 몇 십 년을 작업하시다 결과물을 못 보고 돌아가시고 후학들이 완성했다. 사전은 학문의 기본 중 기본이기 때문에 김용옥이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미진한 부분이 많은 게 현실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 14세와 만나 대담을 나눈 적도 있다.[20]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청와대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대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하고는 동창이며 그래서인지 나이차가 있음에도 서로 반말하더라. [21]
국악의 경우도 고려대 철학교수 재직시설 농악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또한 대충 국악계 인사들과만 어울리는 게 아니라,[22] 빈민가 월세집에 살고 있는 아무도 못 알아보는 명인들을 직접 방문해서 음악을 배우거나 그들의 생계를 도와주거나 하면서 정말 구체적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그 명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
알게 모르게 제자들도 상당히 많다. 대학교에서 가르친 경우도 있고, 과거 도올서원을 운영하면서 가르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항녕, 원더풀 데이즈의 음악감독 원일[23], "8체질 의학의 원리"를 쓴 현재 주원장한의원 원장 주석원, 서유구[24]임원경제지 완역을 목표로 하는 정명현을 위시로 한 임원경제연구소 임직원들 등.
지금까지 그가 저술과 방송강의를 통하여 던져놓은 잡설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 호국불교는 지배권력과 결탁한 불순한 전통일 뿐이다.
  • 조선 후기의 실학이라는 개념은 완벽한 픽션에 불과하다.
  • 서양근대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유는 없다.
  • 도덕경은 개인이 아니라 지도자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다.[25]
  • 우리가 서양에서 배워야 할 것은 과학, 민주주의, 자본주의 3가지뿐이다.[26]
  • 성리학은 충분히 근대적 학문이라 부를 수 있다. 단지 자연과학이 부재했을 뿐이다.
  • 조선 말의 혜강 최한기와 수운 최제우의 사상은 서양의 근대사상에 필적한다.
  • 우리 민족은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은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다.
  • 분단된 나라는 독립할 수 없다.[27] 독립운동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첨언하자면 "부모에게서 독립하다"처럼 오히려 무리에서 갈라져 나와 '홀로(독) 서는게(립)' 독립인데 이 부분은 통일과 착각한 듯. 같은 민족에서 갈라져 나와 독립국가를 세운 사례는 널렸으며, 한민족=한국가인 경우는 많지 않다. 결정적으로 한반도는 태초부터 한 나라가 아니었다. 한반도에도 여러 나라가 존재했으며, 단지 무력으로 병합당한 뒤 수백년간 섞이다보니 원래 한민족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조선만 해도 양반노비를 "우린 한 민족"이라고 동등한 취급 하지도 않았으며(양반에게 노비와 같은 취급하면 싸대기 맞는다) 오히려 일제때 태동한 개념이다. 다만, 이 부분은 김용옥이 철저한 민족주의자임을 보여준다.
  • 예수는 인간이며, 야훼를 거부했으며,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28]
  •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는 지혜로운 스승(랍비)일 뿐이다.
진중권이 예전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김용옥이 주체사상과 관련하여 한 말에 대해 심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29] 진중권이 대중만을 선동하여 지식권력을 획책하려 든다고 "미시적 파시즘"이라고 김용옥을 까내리는 한편, 김용옥에게 있어서 진중권은 듣보잡(…)이다. 물론 김용옥이 주체사상을 완전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탠스는 2007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성자립과의 대화에서 대략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아래 내용 참고.
김용옥의 글은 보통 서론이 길다. 특히 번역의 경우 서론이 길어진다. 꼼꼼하게 배경설명, 판본문제, 역대 해석의 문제 등을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되는데, 서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논문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다. 예전 책에는 각주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각주나 미주 없이 그냥 본문으로 다 풀어서 설명하는 스타일로 변했다. 인용한 책은 뒷부분에 인용목록으로 제시하고, 간략하게 그 책에 대한 설명하는 식. "주석서라는 서술의 성격상 일일이 주를 달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라고 말하는 거 보면 김용옥 자신도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은 것에 대해 선학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양.
어차피 오늘날 한국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옛날처럼 고고하게 책만 쓴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다. 과거에는 독서가 거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기 때문에 칸트 같은 사람이 책을 쓰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읽혔다. 게다가 구한말의 동무 이제마도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이 조선의 병폐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은…
앞서 언급했듯이 김용옥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리 고매한 학문이라도 문명의 악세사리로 그치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김용옥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스스로를 대중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신도 너무 저술을 대중적으로 하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현재는 예전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 편이다. 일단 책이 두껍고 비싸졌다.
이외에도 연극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임권택의 《개벽》[30], 《장군의 아들》, 《취화선》이 그의 시나리오.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에서도 출연한다. 김기덕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에 스님 역으로 출연할 뻔 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출연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극에도 관심이 깊어, 극단 미추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며 제작비를 지원하기도 했다.[31] 심지어 전인권, 한대수와 '''록 콘서트'''까지 했다. 한대수와의 콘서트에서 발표한 노래 제목은 '''청춘과 록'''. 모티프는 한대수의 《호찌민》. 2004년에는 안성기와 함께 패션쇼에 참석한 모습이 잡히기도 했다.
국악뿐만 아니라 재즈음악 애호가이기도 해서 대학로에 있는 서울재즈아카데미의 재즈피아노과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종종 자신의 철학 세계와 재즈음악을 연관시켜 강의하기도 한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를 좋아한다고 한다.

6.1. 정치적·사회적 발언


우선 이승만의 경우는 아주 악랄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승만은 무슨 조직에 들어가기만 하면 분열을 획책하며 조직의 지도자 자리만 차지하려 들었고, 결국 이런 식으로 대통령까지 해먹었다는 것. 김용옥은 20세기 한국의 대통령들을 왕조시대 군주의 연장으로 해석한다.[32][33]
최근에는 아예 이승만을 미국의 괴뢰라고 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경우도 독립운동은 열심히 했고, 젊은 개혁자의 이미지도 있었으나, 결국 자기 야욕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만 남긴 인물로 평가한다. 김용옥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남침이다 북침이다로 따지지 않고, 이승만과 김일성의 콤비플레이(…)로 설명한다. 결국 전쟁 결과 이승만도 살고 김일성도 살고 박정희도 살고, 사람들만 죽어났다는 것(...) 물론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건 말 할 것도 없이 헛소리고 한국전쟁 역시 각종 음모론이 소련 기밀문서 해제를 통해 완벽하게 분쇄되고 김일성의 일방적인 침략임이 명백하게 밝혀진지 오래다.
박정희는 20세기 한국사의 모든 왜곡이 한 몸에 구현된 인물로 평가한다. 그냥 독재자다, 경제발전 잘했다의 문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냉전질서, 산업화, 민주화 등을 거치면서 일어난 추저분한 한국의 역사가 박정희라는 개인으로 상징된다는 것.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정신이 제대로 됐다면 만주에 가서 독립군에 들어가야지 어떻게 한 자리 해 먹겠다고 일본군이 된단 말이냐"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전두환은 거의 쌍욕 수준으로 비난한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을 언급하면서, "서양에서 민주주의는 왕의 모가지를 짜르면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34]
노태우가 당선되었을 때는 그를 칭송(?) 하는 글#을 썼는데, 가만 보면 실상은 "당신 친구를 '''광주''' 금남로에 데려다 놓고, 자식 잃은 할머니가 회초리로 피떡이 되도록 때리게 한 뒤, 당신도 그 회초리에 맞아라.", "민중의 신의를 배반하지 마라."라는 글이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고문으로, 분신으로 스러져간 민주투사의 눈에서 본다면야 얼마나 하찮은 용기로 보이랴마는'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김영삼은 언급도 안 한다.
김대중의 당선에 대해서는 사실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드디어 한국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이 김대중 개인을 긍정적으로 평한 것은 아니다. 임기말 아들들의 비리가 드러나자, 티비 강의 중 "아들 관리를 못했다"고 질책했고, 대통령으로서 민주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도 그를 칭찬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으나, 이후 그가 "대통령 못 해먹겠다" 발언을 하자, "대통령 노릇 못 해먹겠다고? 우리도 국민 노릇 못 해먹겠다!"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고#, 새만금을 막았을 때는 욕설을 퍼부으며 "영원히 저주 받을 사람"이라고 했다. 노무현이 탄핵당했을 때는 당연히 탄핵을 획책한 무리들을 욕했지만, 노무현 역시 비판하였다. 국민들이 진보적 열망을 가지고 그를 뽑아준 것인데 그 스스로 그런 열망들을 좌절시켰다는 것. 그의 저서 《사랑하지 말자》에서 "자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CIA한테 총 맞을 각오는 왜 못 했나?"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김대중과 노무현의 실패가 이명박 정권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그래도 노무현 시대야 말로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며 높이 평가하였다. 노무현은 민주적인 정신과 민주적 절차의 신념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훌륭한 본을 보였다면서 그래도 노무현 시절 사람들은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 지금의 이리 떼들처럼 뜯어 쳐먹으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근 저서를 보면 노무현 개인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었으나 지나치게 '기탄없는' 성격 때문에 장점을 대부분 깎아먹었다고 회고한다.
CIA 음모론에 가까운 발언에서 보듯 미국 등 서구를 악의 축으로 매도하고 반미를 외치기도 했는데, 자식들은 모두 미국 유학 보냈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의 언변 가운데 자극적인 부분들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1945년 8월 15일부터 베트남에서 미국이 물러난 1975년까지[35] 30년간 동아시아는 사실상 일본이 뿌려 놓은 내전의 씨앗이 발아한 내전상태였다고 규정하며, 6.25전쟁도 그러한 큰 흐름 속에서 봐야 하므로 '북한의 남침이라는 사실 자체는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고 본다.[36]당시 중국 공산당 휘하의 조선의용군이 북측에 가담하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남측에 가담하여 동족상잔을 저질렀다는 처참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강연하였다.[37]
한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처음으로 방북한 이후로 이후 TV에서 김정일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실상 그 강연을 보면 개성을 통과하는데 《트루먼 쇼》 실사판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했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려고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북한사회를 매우 불편하게 보는 발언을 많이 했다. 방북 중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성자립이 주체사상을 이야기하며 당이 인민을 지도하는 리더십의 정당성이 수령에게 있다는 식으로 항변하자, '''"수령의 리더십의 정당성은 누가 체크합니까?"'''라고 반박하여 총장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김용옥이라는 것을 밝히니 태도가 급격히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단군 이래 이런 지도자가 없었다. 연산군보다 악랄하다."'''[38] 일찍이 폭력으로 국민을 해친 경우는 많았고, 이러한 폭력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정당한 항거를 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경우는 소송, 언론, 조세 등으로 교묘하게 사람들을 물먹이고, 공기업과 국민의 혈세를 자기들 사유재산으로 집어삼키는 유래없는 야비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는 짓이 너무 교묘하다보니 국민들의 도덕성도 마비되었고,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비판한다.
2010년 5월 23일 서울 봉은사에서 '코뿔소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동서화통의 깨달음'이라는 특별강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날 불러주는 데가 없다. 한국은 알아서 기는 놈들이 많다.", "보수를 찍어놓으면 일처리라도 제대로 할 줄 알았더니 완전 개판이다!" 등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이 강연에서 노무현의 새만금도 언급하면서 "새만금을 막아서 대운하니 4대강이니 하는 짓도 할 수 있게 된 거다. 노무현은 무덤에서도 반성해야 된다."라고도 말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에 실망한 국민들이 이명박을 뽑아줬는데 이렇게 개판을 치면 남는 건 좌절뿐." "여러분은 어디가서 이런 말 하지 마라. 잡혀간다." "나도 이러다 깜빵 가게 생겼다."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천안함 피격사건와 관련하여 '북한 소행'이라는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에 대해 "0.0001%도 설득이 안 된다"며 "정말 웃기는 개그"라고 정면 비판(출처 : 오마이뉴스)했다. 패잔병 새끼[39]들이, 계급장이나 떼고 나오든가, 개선장군처럼 앉아서 국민을 겁주고 있냐? 일본 사무라이였으면 할복했어야 했다' 라는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했으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1부(신유철 부장검사)에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EBS 중용강의가 진행되는 중 돌연 EBS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방송 중단을 통보했다며 광화문에 나와 1인 시위를 했다. 이후 EBS는 김용옥이 계속 비속어를 사용하고 특정 종교에 대한 편향적 발언을 했다면서, 자신들은 방송중단 통보를 한 게 아니라 상의를 했던 것이라는 식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실제 방송을 보면 알 수 있지만, 2011년 중용강의는 김용옥의 강의답지 않게 비속어나 과격한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심의에서 다 걸러서 방송에 안 나간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니 상식적으로 EBS의 입장이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인 게 사실. 김용옥 "미친놈들…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김용옥은 이후 나는 꼼수다 26회에 출연해 자신의 강의가 중단된 것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나는 꼼수다에서 김용옥은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하며 "아니 어떻게 단군이래 이런 지도자를 가질 수 있는가" "국민들 돈 30조나 되는 돈을 강바닥에다가 처박는 미친 놈이 어디있어!"라는 발언은 해 나꼼수 멤버들을 뒤집어 지게 만들고, 화려한 말빨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멤버들에게 '이빨 0호' '한국 최강의 이빨' 호칭을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EBS는 끝까지 방송하겠다며 GG를 선언했다.
그 이후 다시 한 번 나는 꼼수다 호외9에 출연, 2012년 18대 대선에 대해 말했다. 박근혜가 사실상 대선의 승리자라고 언급하면서도, "적당히 이미지만 잘 꾸미면서 자기 당의 선거만 도왔을 뿐이지 나라를 위해 정의로운 발언을 제대로 한 번도 안 했다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느냐"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경선 때는 대운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면서 이명박 정권 내내 4대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고, 그냥 가만히 이미지 관리만 하면서 대권을 받아먹었다는 것. 박근혜가 당선되면 결국 박근혜 주위에 몰려든 무리들이 적당히 해먹는 환관정치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시간이 흘러 2016년 10월 말이 되자 사실로 밝혀졌다.'''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를 규탄하는 기고를 적었다. 관련 기사
추가로 2012년 대선과 관련해 민주통합당의 여러 후보들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았었다. 문재인은 사람이 맑다고 평가했고, 고발뉴스 대선 특강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국정철학이 다르고 만약에 대통령이 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잘할 거라고 평가했다. 손학규는 콘텐츠가 강하지만 열정이 부족한 편이라고 평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서로 격려하며 분위기를 올려나가야 하는데 그런 식의 단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에 대해서는 대선의 가장 큰 변수라고 말했으며, 안철수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정치라는 게임의 룰을 바꾸려고 하는 처절한 열망에서 나온 현상으로 평했다. 안철수가 당선되는 편이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오면서 정치판이 근본적으로 개혁될 수 있기 때문에 안철수 쪽으로 단일화되는 것이 낫다고 보지만, 전제조건으로 민주당이 그를 포용할 만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가카를 신랄하게 디스. 게다가 방송말미에는 마이클 샌델은 자기랑 게임도 안 되는 놈인데 책만 잘 팔았다고 깔때기를 대셨다.(…) [40]
이외에도 미국식 대통령제가 오히려 거대한 국가권력을 효율적으로 장악하여 말도 안 되는 전횡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낼 때도 많다. 물론 현재 민주주의 체제 말고 다른 대안이 딱히 없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제도를 발전시켰는데도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것.
최근 발간된 중국일기를 보면 역시 시진핑 독재나 전체주의 통치에 대한 빈정거림은 여전하다. 기본적으로 김용옥은 자유 인문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독재나 억압적인 공권력에 대해선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차이나는 도올에서의 방송 발언을 보면 모택동에 대해서는 명필가고 선동을 매우 잘 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 혼자서 무조건 잘 나서 국공내전을 이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든 것도 아니고 ( 이미 중국 각 지역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있기도 했고 서안 사건장쉐량이 중요했다는 걸 강조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전까지는 행실이 좋았지만 세우고나서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으로 악행을 했고 중국이 공산주의를 유지해도 좋지만 천안문에서 모택동의 초상화가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발언을 했다.
등소평에 대해서는 아직 방송에서는 별말 없지만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성장했지만 비리가 늘어난 걸 언급하기도 했고 대약진 운동 이후에 수습을 했던 좋은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천안문 사태를 말하면서 민주화를 억누른 걸 말하기도 했다.
장쩌민에 대해서는 25년간 권력을 누리면서 부정부패 상납을 받는 가장 꼭대기였다고 한다.
후진타오에 대해서는 장쩌민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살다가 임기 후반에 심해진 비리를 처단하고 시진핑에게 명예롭게 전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시진핑에 대해서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더불어 매우 칭찬한다. 서방이나 국내 언론에서 시진핑의 부패 척결이 권력 강화이기만 하다는 걸 부정하고 시중쉰이 어린 나이에 큰 공산주의 조직 세웠던 거나 천안문 사태후야오방을 지지했던 걸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를 시진핑과 중국 지도부는 주석제 부활로 되돌려 주자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나에게 ㄸ을 던졌다고(...)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2017년 10월 30일 방송에서 자신이 오판했던 것을 2018년 5월 4일 방송에서 인정했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친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한겨레
미국은 50년 우방, 중국은 5000년 우방이라는 김용옥 한겨레
주한미군의 주둔문제에 관하여, 1999년 12월 9일 방영된 EBS 도올 김용옥의 알기쉬운 동양고전, 노자와 21세기 강의시리즈 중 '제12강 빔의 철학과 환경오염' 강의에서 도시환경 측면에서 비어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군부대의 철수를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말한 내용은
"...빈 것을 못견뎌.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있냐말이야...나는 미군철수 반댑니다. 왜냐하면 용산이래도 지켜줘야돼. 그거래도 나가며는 거기다 쇼핑몰, 벼라별 박물관 만들고 ...무슨 공원만든다고 하면서 온갖 행정...다 들어설거에요. 미군이라도 있어야지..." Youtube 영상 24:00~24:30

7. 비판




8. 가족 관계


  • 중국어 음운학 전문가인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의 최영애 교수[41]와 부부이다. 참고로 최영애 교수는 지난 2011년에 정년 퇴임했다. 타이완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1973년에 대학원 선후배 사이로 만나서 첫눈에 반해 3개월 만에 결혼했다고 한다. 부인이 김용옥 교수보다 2년 연상이다. 두 사람이 모두 어학 전문가인 까닭에 중국어 고전을 부부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C.K.System'이라는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법 체계를 함께 고안하기도 했다.
  • 김용옥은 슬하에 큰딸, 둘째 아들, 막내 딸을 두었다.
  • 김용옥의 막내 딸인 김미루는 사진작가인데 2011년 돼지우리에서 누드돼지와 같이 사진을 찍어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다. # 원래 김미루는 예전부터 활동해 오던 작가였다. 김용옥은 딸이 누드로 사진을 찍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했으나 2009년에 TED에서 소규모 강연회를 나가서 자신의 작업을 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한 것을 보고 딸의 작업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용옥이 직접 김미루를 소개한 글도 있다. #
  • 김용옥의 큰아들인 김일중은 국악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큰 딸인 김승중은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다니다가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천체물리학 박사를 한 뒤, 다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고대 그리스 미술을 공부했고, 2013년에 캐나다 토론토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프랑스인 천체물리학자 크리스티앙 메누(Kristen Menou)와 결혼했다.
  • 종손자 원썬은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즉 도올이 원썬의 작은할아버지. 실제로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얼굴이 굉장히 많이 닮았다!

9. 그 외


특유의 목소리톤 및 말투 때문에 개그 소재로 이용될 때도 종종있다. 2000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 사냥의 '놀자와 21세기'란 코너에서 개그맨 서승만이 김용옥으로 분장하여 강의를 하는 개그를 한 적이 있었고, 개그맨 최형만이 이 사람 기믹으로 많이 나온다.
축구선수 뱅상 콩파니와 닮았다.
켄시로와 합성되어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
[image]
2018년 1월 29일부터 2월 8일까지 MBC에서 20분짜리 데일리 토론쇼인 도올스톱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한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물론 김용옥 본인의 의사와는 관련이 없는, 자한당 내부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그만큼 당시 자한당의 인재난이 심각했다는 방증.

[1] 광제의원 원장인 김치수(金致洙)와 홍희남(洪喜男)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2[2] 실제로는 Ph.D. in East Asian Languages and Civilizations, 즉 동양학 박사에 가깝다. 후술.[3] 도올을 한자로 풀이하면 중국 고대 악수(惡獸)의 하나로 성질이 사나와서 싸우면 물러나지 않는다고도 하고, 또는 가르쳐도 못 알아먹고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멍청이의 이름이라고도 한다.[4] 맹자에 의하면 초나라의 역사서 이름이 도올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등에서 밝혔듯 호의 근본 뜻은 "돌"이다. 어릴 때부터 이해가 느리고 아둔하여 스스로 "돌대가리"라 이름을 지었다는 것. 한글 이름이지만 그 발음에 맞는 한자를 뜻을 생각하여 붙인 식으로 보면 된다.[5] 대학교 3학년 때 출가를 했었다고는 한다. 천안광덕사에서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6] 큰형(김용준 고려대 화공생명공학과 명예교수. 공대 교수로는 드물게 유신정권과 신군부에 의해 두 차례 강제 해직된 적이 있다.)과는 21살 차이, 넷째 누이와는 11살 차이가 난다. 김용옥이 태어났을 무렵 큰형은 이미 결혼했고, 제일 큰 조카랑은 6개월 차이가 났다고 한다.[7] 다만 지금 현재에는 개신교를 믿지 않는다, 그의 기독교 강의는 반(反)기독교 적이므로 조심해야 된다는 말 등으로 반기독교인 설이 많다. 실제로 2007년에 일부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도올 따위가 요한복음을 논할 가치가 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8] 1996년부터 2년간 대학로에서 도올한의원을 운영했다.[9] 그런데 좌절되었다[10] 잘 알겠지만, 한신대기독교 장로회(기장) 미션스쿨이다.[11] 근데 사실 이건 일어중역을 통해 시중에 출판 된 철학책들 탓이 크고, 그냥 철학과만 가도 선생들 부터가 '''오성이란 거, 그냥 '이성(reason or intelligence)'으로 바꾸고 시작하자.'''고 한다. 해당 분야에 전공자들보다 그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이 더 힘든 상황인 것.[12]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의 원어 제목은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다.[13] 요즘 한국에서 강의하는 철학자들은 자기 전공을 공부하려고 본바닥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굳이 아직도 게으르게 '오성' 같은 옛 번역어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14] 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게, 과학용어나 의학용어가 어려운 단어에서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바뀌어 가는 걸 생각하면 된다.[15] 심지어 노자 번역 같은 경우에는 "이 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주의해 가면서 이 책을 읽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혹평한 학자마저 있을 정도이다.[16] 원문의 의미를 이미 굳어져 버린 속음으로 읽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고전을 읽을 때에는 무조건 속음으로 읽지는 않는다. 문맥과 통가자와 정음/속음, 전통적인 독음 등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정음과 속음 중에서 정음을 선택한 것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다.[17] 종교나 신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이론들이며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사조들이다.[18] 다만 다른 흐름도 있었다는 것이지, 공인 이전부터 주류라고 할 수있는 흐름은 주욱 있었고 문서들의 정경여부에 대해서도 의견수렴이 거의 이뤄져있었으며, 당대 기록된 교부문헌, 기도문, 교회간 서신 등의 교차검증으로 초창기의 대략적인 윤곽은 나온다. 비평학계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기타 흐름들을 원시 가톨릭이라 일컬어지는 주류와 대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19] 지금은 꽤 널리 알려진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태권도 관련단체에서는 쉬쉬하고 있었다.[20] 달라이 라마를 오랜 기간 보좌했던 중국계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회고록을 썼는데, 예정에도 없던 사진사를 끌고와서 노령의 달라이 라마에게 플래쉬를 마구 터트려대는 김용옥을 무례하다고 평했다. 사진을 마구 찍는 것도 그렇지만, 달라이 라마에게 대놓고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저한테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달라이 라마 본인은 예정된 스케줄까지 취소해 가며 김용옥과 이틀에 걸쳐 대화를 했다.[21] 이명박 대통령은 41년생, 김용옥은 48년생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연장자. 원래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은 대개 칼같이 형동생을 따지지 않는 편이다.[22]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과 중앙대 총장을 지낸 박범훈 교수와 절친이다.[23] 기자 시절 인터뷰도 했다. #.[24] 정약용과 맞먹는 먼치킨 유학자.[25] 본문에 왕(王)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기존 해석은 이것을 부차적 문제로 취급한 경향이 강했다. 노자철학을 후대의 신비주의적 도교와 일치하면서 '도피적 성향의 개인 철학'으로 여겨진 것. 물론 이게 김용옥이 처음 한 소리는 아니고, 자기도 그런 말은 안 한다. 캐런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에도 유사한 관점이 나온다.[26] 이전 버전에서는 여기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각주가 달려 있었는데, 김용옥이 이 발언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정확히는 서양에서 다른 것은 다 배워 오더라도 제국주의만은 배우지 말자는 것이다. 실제로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국내 학자들 중에 사실상 폴리페서에 가까운 부류 중에는 "한국도 언젠가는 서양식 제국주의를 실현해야만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적절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상 이런 부류를 겨냥하고 한 발언이다. (김용옥 개인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이 부분은 김용옥이 옳은 소리를 한 것이 맞다. 현재 기준으로 한국은 오히려 국제 사회에서 "제국주의를 실행하지 않고도 선진국(Developed Economy)로 성장한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역사학계에서도 19세기 신식민주의의 경우, 막판에는 결국 경제적 이익보다는 그냥 국가들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어 소모적인 면이 매우 강했다고 본다.)[27] 하긴 '독립'이란 말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나는 꼼수다 26화에서 '허리가 잘린 사람이 어떻게 홀로 서느냐'라고 말했다.[28] 물론 학계 주류 입장과 다르다. 기독교의 공식 견해 밖에 비평학자들이 보는 "역사적 예수"상조차도 기존 유대인들, 특히 에세네파와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가까운 심판의 날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설교자 쪽에 가깝지 야훼신앙이나 내세에 대한 거부와는 한참 떨어져있다.[29] 진중권은 1980년대 반독재 학생운동 시절부터 주체사상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해온 인물이다. 조국(현 서울대 법대 교수), 이진경(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와 함께 '주체사상비판'이란 저서를 출간하였고, 이후에도 주체사상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보이는 인물에 대해선 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있다. 주체사상 자체의 철학적 의의, 사상 자체만은 논리적 완결성과 참신함이 있는 '잘생긴 철학'이라는 김용옥의 옹호론과 달리, 주체사상은 의의나 논리구조는 물론 참신할 것도 없는 파시즘 전체주의 사상이며 그 자체가 대한민국의 진보운동, 통일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0]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1991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5개 부문 수상.[31] 이 극단 '미추'가 바로 마당놀이로 유명한 그곳이다. 배우 김성녀, 윤문식, 김종엽을 중심으로 3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극단의 이름 '미추'도 김용옥이 지은 것.[32] 실제로 노년층의 경우 대통령이나 정부를 '''나랏님'''이라고 부르는 일도 드물지 않다. 대통령 선거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의 대변자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성군을 뽑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면도 있고...[33] 다만 김용옥 본인도 시진핑을 초인에 비교하며 동양적 가치를 가진 군주로 묘사하고, 그 군주에게 자신이 등용되기를 바라는 발언을 일삼았던 점에 대해서 군주적 존재 자체에 부정적인건 아니다. 오히려 삼국지 같은 고전처럼 그런 존재에게 모사로서 등용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34] 인터넷강의에서 "프랑스는 역시 대륙인지라 래디컬한 혁명이 일어나는데, 영국은 섬나라라서 타협을 잘한다. 그런 점에서 영국와 일본은 비슷한 성향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영국이 타협적인 면이 강하다는 거지, 김용옥은 현대민주주의가 영국의 대헌장에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김용옥은 일본을 "혁명이 없는 나라"라고 평한다.[35]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것은 1973년이다. 1975년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일을 이룩한 해.[36] 동아시아 현대사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한국 전쟁의 기원 초판에서 주장했던 내용과 일맥상통하다. 하지만 소위 수정주의라고 불리우던 이 견해는 최장집 교수의 제자인 연세대 박명림 교수에 의해서 1990년대 중반에 사실상 무너졌다.[37]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명백한 범죄를 물타기하려는 시도라고 봐도 할 말 없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20세기 초반부터 1945년까지는 서구 열강에 맞서 아시아가 자립하려는 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봐야 하므로, 귀축영미를 상대로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싸움을 벌인 대일본제국의 범죄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는 식의 궤변도 가능하다.[38] 굳이 얘기하자면 연산군보다 악랄하다는 말은 그냥 '''한국 역대 국가지도자 가운데 최악'''이란 말이다... [39] 천안함 전사자가 아니라, 조사단의 장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히려 구체적으로는 불쌍한 국민(천안함 희생자)을 죽인 패잔병이라고 발언.[40] 존 롤즈와 달리 의외로 20대에 하버드 교수가 된 마이클 샌델은 까는 교수님들이 많다. 단순히 기존 이론들을 집대성 했을 뿐 샌델이 최초로 제시한 독창적 논지가 사실상 없기 때문.[41] 최영애 교수의 동생은 최기영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다. 즉 김용옥에게는 손아랫처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