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조선)
1523년 ~ 1589년
1. 개요
자는 화숙, 호는 사암.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충주 박씨. 출생지는 전라남도 나주 왕곡면 송죽리이다. 붕당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2. 생애
젊을 적 서경덕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황, 기대승과도 교분이 있었다. 송설체를 잘 썼으며 명종 임금이 '그를 대하면 마치 얼음을 대하는 것같이 정신이 시원해진다'라고 직접 말했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온 외교관이기도 했다.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대제학을 역임하고, 정승은 내리 14년을 하였고, 그중 영의정은 7년을 하였다. 선조는 박순에 대하여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 즉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곧은 절의와 지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찬사를 하였다.
을사사화의 원흉 중 한 명인 임백령이 죽자 그의 시호 짓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충(忠)자를 넣지 않고 공소(恭昭)라는 시호를 지어 깎아내렸다가 죽을 뻔 했다. 목숨만 부지한 채로 광주로 낙향했다. 조정에 돌아와 윤원형과 요승 보우 등의 탄핵에 앞장섰다. 당시 조정에 사림들의 진출을 이끌었으며 이런 공로로 홍문관 대제학 자리를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이이를 매우 높이 평가하며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동서분당 당시 분당을 반대하고, 같은 의견을 가진 이이와 성혼을 두둔했으나 그 때문에 서인으로 찍혀 정승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본래 동문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동인의 영수 허엽(초당 두부 발명자이기도 함)과 이 때 갈라졌다. 애제자 정개청도 등을 돌렸고, 정여립 등 대다수의 후배 사림들에게 공박을 받았다. 재물 관련으로는 깨끗해 청백리에 녹선된 바 있고 정승 자리에서 내려와 경기도 포천에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포천은 시조묘가 있는 대덕이나 아버지의 고향인 광주, 어머니의 고향인 나주 그 어느 곳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박순은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았고 대신 외동딸이 시집간 포천으로 가서 여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3. 여담
그에게는 박응서라는 서자가 하나 있었는데 박응서는 전후 평소 자신과 같은 서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박응서의 무리들은 서얼도 인정해달라는 상소도 올렸으나 무마되자 삐뚤어졌고, 상인을 죽여 금품을 갈취하는 패악을 저질렸다.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은 당시 대북의 영수 이이첨의 눈에 들어 정적 제거의 빌미로 삼게 된다. 계축옥사 참조.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1] 다만 나주는 외가이고 친가(본가)는 현 광주 서구 서창동이다. 이곳은 과거 절골마을이라 불렸으며, 충주 박씨들이 고려 때부터 정착한 집성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