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1. 고려시대의 승려, 태고 보우
1.1. 개요
普愚
1301.9.21 ~ 1382.12.24
고려 말의 승려로 초명은 보허(普虛). 조정으로부터 원증국사(圓證國師)라는 법호를 받았다.
1.2. 생애
속세의 성은 홍씨(洪氏)이고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인 홍주 사람이었다. 13세에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를 스승으로 출가해 가지산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한 뒤 불경을 깊이 연구하였지만 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수행에 몰두해 1337년 불각사에서 원각경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버리면 그것을 부동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깨침을 이루었다. 그 뒤 조주의 무자(無字)화두를 참구해 대오하여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창건하였다.
충목왕 2년(1346년) 원나라에 건너가 석옥화상으로부터 임제종을 배워 돌아온다. 연경에서 대관사에 머무르며 황궁에서 반야경을 강설하기도 했는데 석옥은 보우에게 가사를 전해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귀국한 뒤에 중흥사로 와서 머무르다 다시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소설산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보임하였다.
공민왕 원년(1352) 왕의 탄신일을 맞아 보우를 불렀지만 응하지 않자 억지로 사람을 보내 궁중에 머물게 해서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이때 불법을 배우겠다는 왕에게 “임금의 도는 교화를 닦고 밝힘에 있지 부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처님을 지극히 받들어봐야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불법을 받드시려거든 태조께서 세우신 사찰이나 사당을 수리하는 정도로 그치시고 새로운 절을 창건하지는 마십시오."라며 “임금이 간사한 자를 버리고 올바른 사람을 등용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지만 공민왕은 원나라에서부터 모셨던 신하들을 내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1356년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이후 보우는 희양산 봉암사나 가지산 보림사 등지에 머물며 가르침을 폈다. 신돈의 집권 때에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참된 승려(眞僧)가 그 뜻을 얻지만 위태로워지면 삿된 승려(邪僧)가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왕사직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에 가서 머물렀고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기도 했다. 신돈이 실각하고 나자 공민왕은 보우를 다시 국사로 받들며 개경 영원사에 머물기를 간청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우왕 8년(1382년) 12월 23일 제자들을 모아놓고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군수를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라는 말을 남긴 뒤 다음날 “인생 목숨은 물거품처럼 허무하여/ 팔십여년이 봄날의 한바탕 꿈이더라/ 죽음에 다다라 이제야 가죽부대 버리노니/ 붉은 해는 서산에 넘어가노라”(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袋 一輪紅日下西峰)는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향년 82세, 법랍 69세였다. 스님의 사리는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태고암에 나누어 모셨다고 하며 고양의 태고사에 사리탑이 남아 있다.
1.3. 평가
불교의 부패를 개혁하려 하였으며 불교계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한 불교의 통합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임제종은 우리나라에 뿌리내려 주류가 되었다. 한국 불교계에 교리 논쟁을 일으켰던 돈오돈수를 주장한 승려로 조선 시대에는 조계종의 종조는 지눌이 아닌 보우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태고종의 개파조사로 알려져 있다.
1.4. 창작물
신돈(드라마)에서는 임혁이 연기하였다.
1.5. 같이보기
2. 조선시대의 승려, 허응당 보우
普雨, 1509 ~ 1565
명종대에 활약한 승려이다.
철저한 숭유억불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진흥에 앞장서서 사대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그 때문에 문정왕후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죽자 그야말로 살판난 성균관 유생들이 시위하고 조정 대신들이 방관 및 비호를 하니 결국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지에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죽었다. [1] 문정왕후가 보우를 밀어준 데에는 개인적 신앙심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강화된 사림을 약화시킬려는 목적도 있었다. 변협이 자신 멋대로 죽였는데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으니[2] 억울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 앞에는 보우의 동상이 있다. 저서로는 권념요록 등이 있다.
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등장인물
보우(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