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개청
1. 생애
조선 중기의 학자, 관리. 호는 곤재.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다가 죽었고, 사후에는 노론과 남인의 격렬한 갈등에 휘말린 보기 드문 인물.
정개청은 중종 24년(1529)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봉산 훈도 정세웅과 어머니 금성 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세웅은 훈도[1] 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했고 정개청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해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는데 화담 서경덕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었고[2] 학문에 심취해 결국 금강산의 한 절로 들어가서 학문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단순히 유학만 공부한 게 아니라 역사, 천문지리, 의학, 복서[3] , 산수, 병법, 가무 등도 익혀서 학문에 깊이를 더했다.
선조 7년(1574) 전라감사 박민헌, 선조 16년(1583)에는 호남 출신 영의정 박순이 그를 천거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나주에서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여러 번 천거받아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북부 참봉, 나주 훈도, 전생 서주부를 거쳐 그의 나이 예순이 다 되어 이산해로부터 천거받아 선조 20년(1587)에 곡성 현감을 제수받은 것 정도가 그의 관직 생활의 전부였다.
만년에는 전라도 함평 엄다면의 제동[4] 으로 옮겨 윤암에 집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는 그의 생애였으나...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난이 터지면서 정개청은 말년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혀가 국문장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던 상황에서, 정개청 또한 한양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았다. 정개청은 정여립과 약간 교유가 있었고 집터를 봐준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정여립과 반역을 획책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
조사 끝에 모반에 연루됐다는 혐의는 풀렸으나 다른 데서 문제가 터졌다. 정개청이 압송되면서 그의 집에 있던 모든 저서와 문서들도 압수되었는데, 이것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정개청의 논설문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이 배절의[5] 논설이라고 지목된 것. 이 논설은 동한 즉, 후한 때 절의를 숭상하고 진송 즉, 서진과 남송 때 청담 사상이 유행했음을 비판했다. 절의는 지나치게 독선적이며 청담은 예가 없다고 주장한 것. 이를 두고 정철은 정개청이 절의를 배격했다고 주장했고[6] 또한 겸허설과 논명수유이종 또한 반역적 사상이라 공격받아 선조까지도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요,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로다."라면서 엄벌 의지를 드러냈다.
결국 정개청은 함경도 경원의 아산보[7] 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선조 23년(1590) 6월에 세상을 떠났다.
1.1. 사상
사실 정개청은 조선 후기의 송시열만큼이나 주자의 사상에 매우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처럼 극단적으로 주자를 숭상한 인물은 아니었고, 주자 사상의 전후기가 다른 부분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주자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꼴통스런 성리학자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불교나 노장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생들이 절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절의 물건을 맘대로 훔쳐오는 행태는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의 만년의 거처이던 엄동 근처에 빈 암자가 있어서 제자들이 그에게 그 암자를 학교로 삼자고 제안하자 정개청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거기서 어린 아이들에게 도학을 가르칠 것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불의한 모습을 보이면 어찌 되겠느냐?"라면서 반대한 일화도 있다.
우연히 주자서를 읽다가 주자가 "심하다, 사람의 어질지 못함이여! 소가 젊어서는 부려먹고 늙어서는 잡아먹는구나."라는 구절을 접하고 이후 일생 동안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우득록이 있다. 제목은 '어리석어서 늦게 얻은 학문을 정리한 책'이라는 뜻이다. 선조도 우득록을 읽어본 뒤에 "이것은 옛 사람의 학문을 말하는 책이니 돌려주어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주자 사상에 충실했다는 것을 선조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정개청의 몇몇 논설을 트집잡아서 그를 반역적인 인물이라고 몰아붙이고 매도해 죽인 이도 정철과 선조이다.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은 주자의 책을 읽고서 동한의 절의와 진송의 청담의 폐단을 지적했을 뿐인데도, 정철은 군주에 대한 절의를 배격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선조 또한 배절의라고 몰아부쳤던 것. 또한 겸허설은 군자의 겸손을 강조했을 뿐인데 신분제도를 파괴하려 든다고 몰아부쳤다. 사실 정개청은 학문이 높은 사람이면 그가 비록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배우고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이런 것을 엮어서 정개청이 역성혁명을 꿈꾼다고 몰아부친 것. 사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아들 뻘인 기대승과 이기론을 논한 이황도 역성혁명을 꾀한 자가 돼버린다. 정철과 선조가 얼마나 어거지를 부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사실 정철이 정개청을 죽이는 데 앞장선 것은 정철 본인의 원한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가 무성하다. 정철은 아무리 술에 관대한 동양권이지만 실록에서 술고래라 일을 안한다고 하거나 왕이 직접 적당히 마시라는 소리를 할 만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정개청이 그런 정철에게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 나이 어린 후학들이 뭘보고 배우겠나.'라고 충고해서 원한을 품었다는 것. 근본적으로 따져본다면 배절의 운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 정개청과 정철은 성향이 서로 달랐다. 정개청 입장에선 노세노세 좋아하고 풍류꾼인 정철이 청담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반론][재반론]
1.2. 사후의 수난
정개청은 사후에도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의 위패를 모신 사액 서원인 자산 서원이 '''노론과 남인의 정쟁에 휘말려서''' 철거되고 복구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수난을 겪게 된 것.
광해군 때 사액을 받은 자산 서원은 환국 정치가 판을 치던 숙종 때 철거와 복구를 반복했다. 남인이 집권했을 때는 복구되었다가 노론이 집권하면 파괴되는 행태가 반복된것. 숙종은 정개청을 기리는 제문까지 직접 지은 바가 있으나 노론이 집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산 서원 철거를 명했다. [8]
[1] 조선시대 서울의 4학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정·종9품의 교관. 쉬운말로 지방 국립대 시간강사 내지는 조교. 현대의 조교나 시간강사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생각해본다면 조선시대는...[2] 그러나 그의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역시 박순이라 봐야 할 듯하다.[3] 점복술, 즉 점 치는 법을 다룬 책을 말한다. [4] 당시는 무안에 속했다.[5] 절의를 배격한다라는 의미.[6] 절의를 배격하는 것은 바로 왕에 대한 불충이므로 곧 반역이라는 논리였다.[7] 오늘날 바로 그 아오지 탄광이 있는 곳. 그나마 좀 살만한 호남지역과 달리 나이 60인 양반을 한참 위의 함경도 같은 험한 동네로 유배를 보냈다는 건 쉬운 말로 '가서 죽어라' 수준이다.[반론] 다만 정개청이 꾸중했기에 정철이 정개청에게 원한을 가져 죽였다는 건 정개청 제자들의 주장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본다면 사실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다. 이에 정철이 그를 비루한 인물이란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한 것이다.[재반론]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원래 박순과 허엽(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하는 동문이였는데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박순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지지하고, 허엽은 김효원을 밀면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선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당색이 달라지니, 학문적 성향이 당색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였다. 정개청은 화담 서경덕으로부터 수학하기도 하였다. 원래 박순과 허엽의 당파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심의겸,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 동인 붕당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박순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좌의정 남이공(南以恭)과 같이 동인 계열이 많아서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정개청 자신은 뚜렷한 당색없이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였다. 박순이 서인이니 정개청도 당연히 서인이고, 그런데 동인으로 바꿨다는 주장은 서인 측에서 나중에 꿰어맞춘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8]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남인의 중요 정치인이었던 윤선도가 이발의 조카였다는 점이 작용했다. 윤선도는 기축 옥사 때 죽은 인물들을 높이면서 정개청도 높이게 되었고, 생전에 동서 분당과 전혀 무관했었지만 당시 휘말려 사망했던 정개청은 어쩌다 보니 명분이 생겨 남인의 중요한 현인(...)이 돼버렸던 것. 아마 정개청이 죽어서 저 모양을 봤다면 한심하다고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