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이름'''
정여립(鄭汝立)
'''본관'''
~
'''출생'''
1546년 조선 전라도 전주부
'''사망'''
1589년 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자'''
인백(仁伯)
'''호'''
죽도(竹島)[1]
1. 일생
1.1.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2. 정여립 사망 이후
3. 기타
4. 창작물
5. 같이보기


1. 일생


조선 시대의 체제 비판적 사상가이자 공화주의자.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동래이고, 전주에서 태어났다.[2][3] 연려실기술에는 전주성 남문 밖이라고 하고, 실록에는 전주성 동문 밖이라고 하였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 수찬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인 정중부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찢어 죽였는데 여종이 이를 보고 정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으며 이후 아버지에게 혼난 정여립이 앙심을 품고 여종이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방약무인한 성격은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도 있다.[4]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정여립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조 대에 조선 전기의 야사들을 모아서 편찬된 대동야승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 역시 전해지므로 정여립은 과격한 면은 있으나 결론적으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는 인물이었다고 봐야 한다.
원래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율곡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인에 속해 있었지만 이이가 죽은 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는 물론 서인의 영수인 성혼, 박순 등을 비판했다. 이는 당대 사람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는데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이가 신사임당 죽음에 충격을 먹고 잠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정여립의 입에서 나와 유학자 이이의 이미지를 엄청 깎아먹었다. 결국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했다거나 스승 이이의 이미지를 깎아먹었다는 등의 얘기는 사실 서인 측에서 주장한 것뿐이다. 율곡 이이 자신부터가 양시양비(兩是兩非)를 주장하며 서인과 동인 어느 측에도 속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그리고 이이가 학문이 높지만 한때 승려 생활에 몸 담은 전력 때문에 출사를 못했으므로 불가에 몸 담았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권한이 막강한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왕의 외척인 심의겸 동생 심충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서인과 동인이 갈라지니 동서 붕당의 시발점이다. 이이, 성혼, 박순 등은 붕당을 꺼려하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후일에도 붕당을 최소화하려 노력하지만 서인으로 분류되고 정여립은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니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심의겸과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과 동인 당색 자체가 없었는데 훗날 소급적용하여 이이의 제자이니 서인이고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겼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또한 박순, 허엽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서인과 동인으로 당색이 달라지니 당색이 학문적 성향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였다.[5]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원인은 간단하지가 않다. 선조는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으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왕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왕권을 견제하려는 세력을 서인으로 보기도 한다. 왕의 외척을 편들면 왕을 위하는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외척의 발호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동인은 서인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동인 입장에서 서인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파기한 세력이고 서인은 왕의 정통성을 이유로 임금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 훗날 예송논쟁의 기저에 정서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서인 측이 정여립을 스승에게 대들었다지만 동인 측이 볼 때 서인은 임금에게 대드는 것이다. 붕당 당시 상황을 단지 노쇠한 기득권 세력과 버릇없는 신진 세력과의 세력 다툼으로 볼 수만은 없다.
당시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동인 측에 의해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던 송익필의 조모가 노비임이 들춰지며 송익필 일가 70여 명이 노비로 환천(還賤)되는 일이 발생한다. 동인 측은 서인 송익필의 부친 송사련이 좌의정 안당과 그 아들들을 고변하여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가로챈 행적을 들어 서인 측을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였다. 안당 부친 안돈후의 노비 첩의 딸이 송사련의 모친이고 송익필의 조모가 된다. 송사련은 신분이 천했지만 안당의 배려 덕에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안당의 집안을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빼았은 건 동인 측에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서인의 책략가로 통하던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된 자신의 일가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 일을 들춰낸 동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여립 사건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다. 송익필과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 가장 뜻이 맞는 사람이 정철이었고 정여립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가문이 동인의 영수 이발인데 이발은 송익필 집안이 노비로 환천되도록 주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익필은 노비가 아니라 조모가 얼자 출신이다. 양인과 천민이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낮은 신분인 천민이 되는 법이기는 하지만 양반과 노비 출신 첩 사이에 낳은 자식을 노비로 한다는 말은 들어보도 못한 말이다. 송익필의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 조선 시대에 노비가 하급 관리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는가?

1.1.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인망이 높았던 정여립에게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竹島)[6]에 서실을 차리고 활쏘기 모임을 하는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다.[7] 대동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이었고, 이는 정여립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를 겸비한 정여립을 추종하는 동인의 무리가 매우 많았으며,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정여립의 난 당시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간 선비가 호남에는 1,000명, 영남에도 수백명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때 세상에 1,000명이면 오늘날 특정 지역의 과학고, 외국어고 4~5기수를 한꺼번에 쓸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이 옥사를 기점으로 하여 영호남, 특히 호남 출신의 과거 급제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8] 훗날 선조가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하였으나 호남이 정치 아니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후에도 광산 김씨처럼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한 가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옥사를 기점으로 호남 민심이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고 봐야 한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볼때 대동계는 관군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9]
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 사건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먼저 정여립이 도망친 곳이 죽도인데, 정여립은 이미 죽도에서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조정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죽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도로 도망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있던 곳은 전라도 진안인데 '''황해도''' 관찰사인 한준이 상소를 올렸다는 점, 당시 조선에서는 모반사건에 대해 암행어사나 승지 등을 파견해 해당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후, 서울로 압송해 국문을 통해 역모여부를 판단하는 등 엄밀한 조사과정을 거쳤는데 아무런 조사과정도 거치지 않고 군대가 먼저 갔다는 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꾀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그의 대동계가 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2년 전에 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라면 이미 관아에서도 용인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여립의 행동은 모반을 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다.[10]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동인 측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대동계원들과 잔치를 벌이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한다고 생각해 도망치기도 했고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 걸 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쩍기는 했던 모양이다
정여립은 시대를 앞선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즉,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훗날 부각되어 반체제적인 인사로 낙인찍혔다. 이 말 앞에는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정통임을 주장하는데, 주자는 이를 부정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란 말이 붙어있다.[11] 그러니까 여기서 이미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천하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가 놀랍도록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란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국가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 게다가 그는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이 정여립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과거의 사상을 가져온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12] 어찌보면 정여립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나간 비운의 인재'''[13]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여립 모반 사건'이 동인남인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 한 구실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때 가장 앞장서서 동인을 몰아내려 했던 인물이 서인의 정철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조종한 것은 사실상 선조였다.''' 정여립의 난 참조.
동인 측은 이것을 서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고 이 때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교과서에는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선조 수정실록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그가 자결한 이후,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 육시를 당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영조 시기에 작성된 봉사말록이나 남하정이 쓴 동인 계열 당론서인 동소만록에서는 죽도로 놀러간 정여립을 진안 현감 등이 꾀어내 살해하고, 이후 자결한 것으로 꾸며 상소를 올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정여립은 역시 자살한게 맞는걸로 보인다.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2. 정여립 사망 이후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철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대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철이 투옥된 이유는 건저(建儲) 문제, 즉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문제의 총대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인과 함께 건의하려다가 동인 측이 빠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혼자 제기한 셈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산해 항목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건저(建儲)의 당시 조정 상황은 정철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이 이산해, 좌의정이 정철, 우의정이 류성룡이었다. 이산해와 류성룡의 당색을 고려할 때 이건 그냥 정철의 개망 플래그... 정철 정도면 거기서 "신성군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그도 책임이 없진 않다. 그래도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약사발 안 먹고 살아남을 순 있었다. 이산해는 당장 갈아버리자고 했으니까...[14]

3. 기타



4. 창작물


여러 매체 속에서는 임진왜란의 전초 이벤트 정도의 비중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여립은 그다지 큰 비중은 없으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붕당정치가 묘사될 뿐이다.
  • 2009년판 전설의 고향 8월 11일자 방송인 '죽도의 한'에서도 나오는데, 김갑수가 정여립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다. 애초에 역모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며 자살설 대신 살해설을 택하여, 김규철이 맡은 토벌군 총사 윤흥국의 칼에 찔려 폭포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나온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안내상이 잠깐 나와서 역을 맡았다. 류성룡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류성룡과 언쟁을 벌인 이후에 사라진다. 이후 대동계를 조직해 그들을 이끌고 왜구와 싸우는 장면도 나오기도 하지만 역사대로 점차 조정에 의해 역도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정여립은 자신의 사상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에 절망하고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탔다는 한탄을 한 이후, 시점이 조정으로 바뀌어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퇴장한다.
  • 왕의 얼굴에서 최철호가 역할을 맡았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도 초반에 하차하지만, 정여립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초반에 등장한다. 임재윤이 역할을 맡았다. 중립적인 포지션으로 등장하지만, 지나치게 완고한 태도를 보여 왕을 비롯한 동서인 양측에 비난을 받았고, 오프닝씬이 끝나자마자 목이 잘리고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 징비록에서도 초반부에 등장했지만, 대사 한마디 없이 그저 기축옥사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 것에 그쳤다. 대동계의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장면과, 이후 모반으로 오인받자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한 채 정여립을 잡으러 온 왕의 선전관이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웹툰 포천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잔혹하고 음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같은 작가의 오성X한음에도 등장한다. 이이가 이항복을 총애하는 걸 질투해 일을 벌이는데, 이런 행적이나 훗날의 대동계 조직과 모반이 모두 선조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 이두호 화백의 만화 파문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이 축적한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동쪽(=일본?)과 결탁한 거대한 조직의 수장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이순신이 그 실체가 지어낸게 아니냐는 질문에 사실 더한게 있다는 말로 처리. 다만 연재 중단으로 이후 행보는 미지수.
  • 홍국영의 삶을 그린 대하드라마 왕도에서 홍국영의 가문의 주요한 비밀인 대동계 명단을 보관한 사람으로 나온다. 드라마 판에서는 유동근이 역을 맡았는데 나레이션으로 정여립 모반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폼을 잡다가 칼에 맞아 죽는 걸로 퇴장.
  • 슈타인호프의 한국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 등장한다. 1부에서 연산군에 빙의한 주인공 덕분에 역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영향인지 국왕을 보위하는 비밀경찰 '금위사'의 수장이 되어 있다. '대동계'도 정여립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직한 정보조직의 이름으로 나온다. 일반적인 평가를 반영한 듯 유능하지만 냉혹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주인공이 빙의한 국왕의 개혁에 반대하는 정철 등 서인을 '정철의 난'이라는 역모로 몰아 서인 세력 1만명을 부여주(작중 조선령 북만주)로 강제이주형을 받게 만드나 잔혹한 고문을 일삼은데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까지 역모로 몬 것이 발각되어 본인도 삭탈관직되고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 절치부심하여 해서 야인들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복권되고 해외정보를 전담하는 비밀기관 익문사 수장에 임명된다.

5. 같이보기



[1] 우연의 일치인지 호와 사망지가 똑같다.[2]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의 도로명 중에도 정여립로가 있다.[3] 현재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 생가터가 있다. 태어난 곳은 전주인데 생가터의 지명이 완주군 상관면이라고 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과거 전주시와 완주군은 원래 같은 전주군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도농분리정책으로 인해 도시지역인 전주부와 농촌지역인 완주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4] 당연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라'거나 '내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면 카더라식 야사가 돌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정여립의 목이 날아간 자초지종이 쓰여졌을 것이다.[5] 여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이가 스스로 서인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선조 시대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황조식의 제자들이 이전에 진출한 기성 사림들을 변절자들이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면서 시작된 것이였다. 이이와 성혼은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편합한 젊은 사림들은 조정하려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가지고 비난하면서 조정자들을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해서 서인이라고 낙인찍었다. 이에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대체로 서인의 학통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여립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았음에도 스승을 모욕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앞장서서 주장하였으니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였다.[6]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진안의 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네이버 지도[7] 유학에서는 이상사회를 가리켜 '''대동(大同)'''이라 칭한다.[8] 후술하겠지만, 호남 사림이 완전히 씨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주로 피해를 입은 호남 사림은 전주 일대의 동인 계열 사림들이었고, 무엇보다 옥사를 확대시킨 세력 중에는 서인 계열 호남 사림도 있었다.[9] 남언경은 이때 정여립의 손을 빌렸다는 이유로 한패로 몰려 모반 사건 이후 탄핵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정여립이 무고하다고 생전에 항변했다.[10] 만약 정여립이 진정 모반을 꾀했다면 자신의 계원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11] 이해가 안 된다면, 전근대에는 삼국지에서 천하를 재패한 조조는 난세의 간웅 또는 역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으며 한조 부흥을 내걸었던 유비가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된 것을 생각해 보자. '''정여립은 이와 같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고 조조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이다.'''[12] 역성혁명 등이 얼마나 과격한지 생각해 보자[13] 이런 면에서 신채호가 그를 많이 띄웠다.[14] 참고로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인 사미인곡이 유배문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에 쓰인 작품은 아니다. 세자 건저문제로 귀양간 것은 1591년 2월이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1585년과 1589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