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1. 개요
西人.
조선의 붕당의 한 축. 사림의 동서 분당 당시 형성돼 인조 이후 주도권을 잡은 당파이다.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북학파 등의 원류가 된다.
이보다 서인의 출발에 대해 잘 알려주는 글귀는 없다.
2. 역사
2.1. 서인의 집권 기간
- 동,서분당 시작부터 이이의 죽음까지 : 동,서분당 (1575년) ~ 율곡 이이의 죽음 (1584년)
- 기축옥사 때부터 송강 정철의 건저 사태 때까지 : 기축옥사 (1589년) ~ 정철의 실각 (1591년)
- 유성룡, 윤두수, 정철, 유홍, 이양원, 최흥원 등의 서인, 남인 연립 전시 내각 :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유성룡의 영의정 제수 (1593년) ~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 (1598년), 윤두수 역시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 (1599년)
- 인조반정 이후 갑인예송까지의 서인 집권 : 인조반정 (1623년) ~ 갑인환국 (1674년)
- 노론과 소론을 망라한 범 서인 집권 : 경신환국 (1680년) ~ 기사환국 (1689년)
2.2. 세부 내용
2.2.1. 시작
1575년경 초창기 사림(명종 대에 이미 정계에 진출한 인물[2] )이 모여 출발한 붕당이다. 분파의 계기가 된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에 있었다고 해서 서인이라고 한다. 심의겸은 명종의 처족(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사화를 한 번 막은 사림의 공로자였다. 그는 훈척이 될 수 있음에도 사림의 길을 걸은 곧은 선비로 명망을 얻었었는데,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김효원 등과 대립하면서 순식간에 훈척 나부랭이로 찍혔다. 곧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섰다. 흔히 국사 시간에 붕당의 대립을 이조전랑 자리다툼 정도로 외우는 사람도 많은데,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립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10년도 안 돼 양상이 계속 달라진다.
명종 대의 사암 박순이나 송강 정철 등은 훈구파 들이 일으킨 사화 때문에 고생한 사림들이었다. 중종 대의 훈척들을 명종과 선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찍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혁명적 변화는커녕 훈구파 때와 실질적인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후배 사림들은 아직 고려의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던 당시 조선 서민 곳곳에까지 어떻게 하면 유교 왕도 정치를 이식할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열심당원??)이었다. 이들은 선배들의 노고를 알아주기 보다는 현실 정치에 안주하는 선배들을 대신해, 조광조가 꿈꿨던 유교적 이상세계를 자신들의 손으로 조선에 만들고 싶었다.
붕당의 근본적인 이유 즉 붕당의 시초가 왕의 혈통 즉 정통성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왕실 최초로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이자 후궁의 손자인 선조가 즉위하자 붕당이 꿈틀거렸다. 왕의 외척인 심의겸을 통해서 왕권을 견제하려는 서인과 이에 맞서 외척 세력을 척결하려는 동인으로 갈라진다. 정통성이 약한 왕이 즉위할 경우, 왕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이는 숙종의 경우와는 결이 다른데, 숙종이 신하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힘은 그가 정비(正妃) 소생으로 원자로 태어나 세자로 자랐고 그리고 즉위하였으니 정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숙종의 정비(正妃)인 인현왕후는 아들이 없었으니 이후 왕통(王統)을 둘러싸고 피바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2.2. 이율곡 영수 등극 및 동인의 득세
이 상황에서 아직 젊은이(?)들인 율곡 이이, 성혼의 기호학파[3] 는 사림 운동이 꼭 원리주의화 되는 것보다는 군자들의 당여라는 기치 아래 함께 가자는 주의였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림은 이런 주장에 등을 돌렸다 . 이이는 화합을 말하는 뒤에서 자신을 천거해준 노학자 백인걸을 감히 학문이 기만 세고 거칠다고 선조에게 혹평을 해, 가뜩이나 꼰대 많고 서열이 중요한 유교적 조선 사회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 율곡 이이가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니 될 리가 없었다. 이이는 나름대로 당쟁을 평등하게 해결한다고 한 것이 사실상 다수인 동인에게는 서인만 편드는 것으로 보였던 것. 결국 이이는 1582년(선조 15년)에 서인 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붕당에 뛰어들었고, 결국 서인은 이이와 기존의 성혼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학파로서의 붕당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동인이 절대 우세한 상황이었다[4] . 초창기 동서 대립은 동인의 정치 개혁 요구에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서인으로 찍어 두들겨 패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예로 명종, 선조 대의 명재상 사암 박순은 정승 자리를 14년이나 버텼건만 이율곡을 변호했다가 찍혀서 사직서를 내야할 정도였다. 애제자 정개청과 제자들이 모두 등돌리는 치욕도 겪어야 했다. 다만 율곡 이이가 별세하기 전에는 서인이 정권을 잡고 동인이 약간 우세한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율곡 이이가 별세를 하면서 정권도 동인에게 대거 넘어간다.
2.2.3. 서인의 반격과 임진왜란
1584년부터 1589년까지 정권은 동인 독차지였으나 기축옥사로 인해 반전되었다.[5] 사화 이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정여립의 고향인 전주시를 중심으로 전라도 지방 출신 선비들이 줄줄이 형장으로 끌려갔다. 서인 천하가 열리는 찰나 정철이 선조의 후계자 문제(건저 문제)로 실각하고 다시 정권을 잃었다. 그래도 정권만 내놨지 서인은 다들 목이 붙어있었다. 정치적 결사체로서 힘도 여전했던 걸 보여주는 것이 1590년 일본 통신사 정사 황윤길이다. 선조가 서인, 동인 셋트로 일본에 보낸 걸 보면 서인은 결코 몰락하진 않았었다.
임진왜란 때 서인은 전쟁을 예견(정사 황윤길)하고 동인은 그러지 못했다(부사 김성일)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동인들의 실책으로 볼 수는 없다. 동인인 서장관 허성[6] 도, 무장 황진[7] 도 정사 황윤길의 주장에 동감했었다. 단, 김성일의 말이 한 시가 급했던 상황에 붕당의 대립을 표면에 드러내게 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대중적으로는 조선이 준비를 전혀 안 하고 초반에 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전쟁이 미구에 닥칠지 모른다는 것은 느끼고 준비를 했지만 20만 폭탄 드랍까지는 대비를 못 했다는 것이 옳다. 이 정도 규모의 외침 사례는 고려 초 거란의 침입 이후 처음이었다. 조선이 가장 근래에 접한 대규모 외침인 을묘왜변에서는 수군은 고전을 했지만 정작 상륙한 왜구들은 화살비에 녹아 내렸다. 그래서 육지는 성곽 보수 및 동원 체계 점검에 신경쓰고 수군은 왜선을 크기와 내구성에서 누를수 있는 신형 전함 판옥선을 개발했다. 조총의 존재와 위험성은 물론 한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활에 비해 사정거리가 짧고, 연사력이 없으며 우천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일본이 이런 한계를 실전을 통해 극복한 상태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삼단격을 개발한 일본의 연사 전술이나, 우천 시에도 어느 정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고안된 장치 등이 그것.
마찬가지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백의 종군 문제 등도 동, 서인간의 권력 다툼보다는 선조의 의중이 강하게 비쳐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작 북인 이산해와 이순신의 후원자인 남인 유성룡을 비롯한 모든 조정 관료들이 죄다 이순신을 까내린 점을 상기해보라! 당시 조정에서 이순신을 옹호하는 사람은 이원익[8] 이나 정탁[9] 정도였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희한하게도 이순신을 보필한다는 최측근이라 평가되는 안위와 기막히게도 악연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일 중요한 경상 우수사를 원균한테 하는 것이 누구 배경으로 이루어졌을까? 물론, 위 논란에서 동인들과 야합하여 나온 결론이겠지만, 후에 나오는 상황까지 염두한다면, 녹둔도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일이 반역죄로 사형 당할 수준급 거짓말한 것이 물증으로 들통났음에도 유야무야한 것처럼 적을 얕잡아보는 패턴이 붕당 내 이기주의로 무시되었다는 해석이 강하게 제기될만한 요소이다.
어쨌든 임란은 서애 류성룡을 필두로 한 동인 내각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 상황을 이끌었다. 이순신이 갑자기 전라 좌수사에 발탁된 것도 이런 준비의 일환이었다. 서인들 역시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동인들과 함께 병참 문제는 물론 명나라의 원군 뒷수발까지 협력하며 난을 조금씩 극복해 간다. 그러나 동서의 대립은 선조의 뻘짓 속에 그 이빨을 드러내게 된다. 이순신이 모함에 빠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조 자신의 책임이지만 당시 서인의 좌장 좌의정 윤두수 역시 원균을 싸고 돈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단, 윤두수는 선조를 호종한 공은 물론 명나라 망명을 막아낸 공이 있다. 임진왜란을 다룬 매체에서 초장에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다가 이순신이 등장하면서 본격 간신, 악역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한계로 봐야 한다. 원균을 옹호했기에[10] 악역 1위로 꼽히는 윤두수는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필부'라는 막말까지 쓰며 막았고, 700의총으로 유명한 조헌은 정여립 사건 당시 서인의 행동 대장이었다. 당시 서인들이 전쟁의 흐름을 못 읽고 권력 다툼에 매진한 경향이 크지만 그걸 서인 전체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충신은 충신, 간신은 간신" 사관으로 끌고가다보면 졸지에 원균을 동인으로, 이순신을 서인으로(..) 모는 경우도 있다.[11] 이 점도 이순신이 살아 생전 받은 최고위급 직책이 유명 수군 도독이 가지는 의미를 안다면, 서인 원흉설은 한편으로는 생명력을 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명력을 더욱 얻을 수 있는 이중적 요소가 부여된다. 당장 이 호칭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이 어느 왕 때에 직접 시호를 불러, 실록이 기록되었겠는가?
중앙에서는 동인 내각이 관군을 움직이고, 영남에서는 실천유학자 남명 조식의 제자들(동인)이 의병을, 재야의 서인들 역시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왜란이 종료된 이후 정국은 광해군의 측근들인 이이첨 등 북인[12][13] 에게 넘어간다. 영창대군 사사나 인목대비 폐모론 등 문제에서 강경한 북인들에게 밀리면서 서인은 암흑기를 보냈다.
2.2.4. 인조반정
인조반정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반정 공신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의 공서파,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김상헌 등의 청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대부분 청나라에 대한 강화를 주장했으나, 효종 때 김자점이 제거되면서 사실상 사라지고(공서파는 인조 반정 이후 낙당과 원당으로 갈렸고, 김자점의 난으로 갈려나간 쪽은 낙당, 원당은 송시열이 서인을 통합할 때 같이 통합된다.) 청서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인은 숙종 때 환국을 당하기 전까지는 정계의 여당으로 자리잡는다. <당의통략>에 의하면 인조 반정 때 반정 수뇌부는 이런 맹약을 했다고 한다. '''"왕가와의 혼사를 놓치지 않으며, 산림(山林)[14] 을 숭용한다."''' 그리고 반정 이후의 서인 정권은 이 맹약을 철저히 지켜나갔고, 결국 수차례의 환국 끝에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카더라'''.
2.3. 서인의 분열(예송논쟁과 대동법)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 이후 효종이 즉위할 즘에 서인 정권은 산림의 지지를 받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의 산당과 영의정 김육,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 정태화, 원두표 등으로 구성된 한당으로 분열됐다.[15] 산당은 대동법을 극력 반대했고 영의정 김육은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지 않으면 민생이 해결되지 않는다며 대립했다. 이 대립은 김육의 손녀이자 김우명의 딸인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되고, 손자 김석주가 젊은 우의정으로서 나라를 이끌자 대동법을 추진한 한당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피터지는 권력 다툼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것이었고 노골적인 충돌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효종이 붕당 타파를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로 당파를 내세우기가 뭣한 시기였다.
그러나 점차 남인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고 현종 조에는 예송논쟁이라는 키배에서 남인에게 패한다.[16] 이때 김석주는 대동법 때 멀어진 산당과 다시 합당한다.
이후 숙종 때 세 차례 환국을 겪으면서 남인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하나, 끝내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17] 남인은 야당으로 굳어진다.
하지만 서인은 경신환국 당시 노장파(대 남인 강경파, 명분과 민생 중시)의 노론, 소장파(대 남인 온건파, 실용과 북방 개척 중시)의 소론으로 분열되고 서인끼리의 갈등은 경종 대에 연잉군(영조)에 대한 지지 문제로 더욱 표면화됐다.
2.3.1. 영조 시대의 탕평책 그리고 세도 정치의 서막
노론/소론 문서참조
2.3.2. 노론의 분열(시파와 벽파)
벽파/시파 문서참조
3. 서인은 악의 축이었나?
서인을 두고 그 위치 때문에 지방을 동 / 서로 나누어 현재의 영남 / 호남 지역주의에 대입하려는 의도들이 있으나,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이라 전혀 근거 없다. 애초에 어디에 기반을 두건간에 '''붕당을 구성한 이들은 모두 서울에 거주했다'''. 산림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퇴하여 물러났거나 학파의 정통들에게나 붙이는 이야기지 시골 양반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당장 기호학파, 영남학파라는 명칭부터가 20세기에 와서야 등장한 것으로 조선시대 당시에는 기호학파, 영남학파라는 그런 명칭부터가 없었다. 괜히 그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사대문 밖 10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고한 것이 아니다.
막장으로 치달은 조선 말기 실정의 책임을 일당 독재로 돌리는 이들은 서인을 역사의 오점으로 생각하기도 하며 송시열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서인을 그냥 공리공담만 일삼는 꼰대 집단 정도로 폄하한다.
하지만 실제로 서인의 학설은 이이부터 시작된 이기일원론에 기반하여 신분 간 격차를 없애는 방향을 지향했다. 예송논쟁 당시 왕과 사대부를 같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계급 간의 차이를 비교적 적게 잡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며[18][19][20] , 노비 종모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이루어낸 것도 서인이었다[21] .
또한 여성의 권리나 교육에 대해서도 서인 쪽이 오히려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여군 창설까지도 논의했던 송시열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재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사에 참여하고 있는 집이 있다면 과거 본인의 문중이 서인, 특히 노론 쪽에 속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서인 측에서는 <예기(禮記)>의 "제사는 부부가 함께 올린다"라는 구절과 주자가례에서 여자도 남자와 함께 참례하게 되어 있다고 쓰여 있는 점을 근거로 들어 무조건 며느리라고 해도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게 했다. 또한 제사 때에 두 번째로 올리는 잔인 아헌(亞獻)과 밥에 수저를 꽂는 삽시정저(揷匙正著)는 반드시 좨주(祭主)의 부인이 하도록 정해두었다.
노론 집안에서는 여성들에게 <소학>, <열녀전>, <여계>와 같은 책들을 읽혔으며 우암 송시열의 경우 엄청난 양의 계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여성들이 기록한 글들이 대부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소실된 데 비해 노론은 이러한 여성들의 글을 책으로 엮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며 소설을 짓는 것과 독서에도 관대했다.[22] 심지어 당시 노론의 선비 중 하나인 어유봉은 '''남녀의 차이가 없고, 오히려 남자보다 나은 여자도 있다'''는 주장마저 했다!
여기서 유인은 안동 김씨의 여성 문인 김운을 의미하고 군산은 그의 남동생 김숭겸을 말한다. 김운은 김숭겸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으며 그녀의 아버지 농암 김창협도 이를 권장했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노론 문인들(남성들)이 줄줄이 애도문을 보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애도문을 받은 여성으로 남게 되었다. 노론의 여성 교육에 대한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이다.
노론 사부 김종수 등에게 교육 받은 정조도 영조와의 문답에서 여자 역시 지혜로우면 참정의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 양 난 이후 성리학의 경직화 경향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들만의 리그'로 불리는 붕당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은 결국 조선 후기 정치를 장악한 서인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물게 한다. 이를 조선의 정치 체제 자체의 문제로 물타기를 하거나, '동인은 안 그랬는데 서인만 그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강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흔히 이덕일 등이 '노론 사관'이라면서 노론 음모론을 펴며 주류 학계를 까대지만 근거는 없다[23] .
4. 인물
4.1. 역대 영수
- 홍섬, 이탁, 권철
- 심수경
- [24]
- 박순
- 정철
- 정지연
- 심의겸
- 정유길
- 윤두수, 윤근수 형제
- 심수경
- 유홍, 이헌국
- 이항복
- 한응인
- 윤방 - 윤두수의 아들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조정영수가 되었다.
- 신흠, 오윤겸 - 인조 정권 초반기에 서인의 영수였다.
- 이정구
- 김상용
- 이홍주
- 재야 영수 김장생, 인조 반정 이후에 이귀, 김류 등이 조정의 영수로 부상.
- 심열, 홍서봉, 이성구
- 신경진 - 서인의 영수이며 무관 출신 영의정이다.
- 김상헌 - 척화파의 영수
- 최명길 - 주화파의 영수
- 강석기 - 소현세자의 장인이다.
- 심기원
- 김자점(?)[25]
- 서경우
- 이경여
- 이경석 - 인조 말기부터 효종, 현종 때까지 서인의 영수였다.
- 남이웅, 이행원
- 산당 영수 김집, 한당 영수 김육, 조익, 원두표, 이시백, 이시방 형제 등등
- 한흥일
- 구인후
- 정태화, 심지원
- 이후원
- 정유성
- 산당 영수 송시열, 송준길, 한당 영수 김좌명, 김우명
- 홍명하
- 정태화, 정치화 형제, 정지화
- 이경억, 홍중보
- 이완 - 서인의 무관 영수이다.
- 조정 영수 김석주(?)[26] 재야 영수는 송시열이었다가 송시열 사후에는 권상하이후에 노론, 소론 분당이 이루어진다.
- 김수항, 김수흥
- 민유중, 민정중
- 이상진
- 김만기, 김만중
- 이단하
- 조사석
- 남구만
- 이상진
- 정재숭
- 이숙, 이익
- 여성제
4.2. 주요 인물
- 율곡 이이
- 우계 성혼 이이의 친구로 그를 지지해줬던 인물, 그 후의 서인들은 다 이이와 성혼 계열이다.
- 사암 박순
- 송강 정철[27]
- 오음 윤두수
- 중봉 조헌
- 제봉 고경명
- 백사 이항복
- 상촌 신흠
- 추탄 오윤겸
- 북저 김류
- 묵재 이귀
- 잠곡 김육
- 지천 최명길
- 낙서 김자점
- 천곡 송상현[28]
-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 식암 김석주
- 유홍, 한응인
- 김상헌
- 김장생, 김집
- 김천일
- 송시열, 송준길
- 홍서봉, 심열, 이성구
- 이홍주
- 윤방
- 안방준
-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
- 홍명하
- 한교
- 심지원,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4.3. 노론 계열
- 우암 송시열
- 서포 김만중
- 월사 이정구: 노론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연안 이씨다. 월사 이정구 집안은 당대 노론의 영수였던 이천보, 이후, 이성원 등과 같이 많은 노론의 영수를 배출하였다.
- 홍국영: 정조를 다룬 사극에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며 정조의 정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노론 벽파'와 대립각을 세운 덕에 대중적으로는 노론이 아니었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론이 맞다. 애당초 홍국영은 영조 때의 세도가 홍봉한, 홍인한과 같은 노론 명문가 중 하나인 풍산 홍씨. 단 노론 내에서도 노론 탕평파로 분류된다.
- 연암 박지원: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이며 흔히 노론 계열 실학자로 분류된다.
- 풍고 김조순: 본디 노론 시파 계열이다. 정조에게 중용되었고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 추사 김정희: 노론 벽파의 명문가인 경주 김씨. 정순왕후 김씨의 친족이기도 하다.
4.4. 소론 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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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광현: 생몰년 불상. 이이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대과 급제는 못 했으나 왜란 때 공으로 호조좌랑까지 지낸다. 호란 때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킨다[2] 정확히는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 이때 숙청당한 이언적이 동인 계보도의 큰 스승격이 되기 때문에, 동인은 이 시기 외척 세력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다.[3] 경기의 기와 호서(충청도)의 호가 합쳐져서 기호 지방이라고 한다[4] 동인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초기 서인은 훈구파와 타협하거나 훈구파인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권에서 살아남은 기존 사림이 주축이었다. 때문에 훈구파를 몰아낸 동인에게 명분부터 밀렸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 출신이나 훈구파 가문들이 대거 많았고 서인이라는 당 자체가 대윤, 소윤, 기성사림, 온건사림, 노당 등을 모두 합당하여 생긴 당이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면 짬밥 좀 먹은 베테랑 관료는 서인이 많았다는 뜻도 된다.[5] 기축옥사는 서인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으며, 옥사가 확대된 것은 선조의 의도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6] 허균의 배다른 형으로 허성이 적장자, 난설헌 역시 허성의 친동생이다. 허균은 막내로 계처의 아들이었다. 형 누나들과 배는 달랐지만 서자는 아니다.[7] 조선의 뛰어난 육군 장수로 용인 전투, 웅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훗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8] "원균은 탐오하며 애당초 자기 함대 다 때려부수고 달아난 놈 아닙니까?"라고 비판했으며 이순신은 지극히 청렴한 것을 내가 확인했고 말끝마다 겸손한데 원균 그놈아는 뭐 물어보면 발끈거린다며 성격이 글러먹었다고 또 깠다.[9] 잘못을 했더라도 장수를 갈아치우는 법이 어딨냐고 항변했고 선조가 이순신 죽이졈? 하자 신하들이 콜! 콜! 하는데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제동을 걸어 이순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10] 옹호라는 것이 경상 우수사 선정에 누가 개입되었나를 강하게 추측할 요소이기도 한데, 선견지명 부분에서 미화다. 엄청나게 미화.[11] 오히려 후대 서인들은 이순신을 상당히 높이 떠받들었으며 원균을 비판하였다.[12] 사실 일반인들에게 이름 알려진 유명 의병장은 서인이 더 많고 실제 따져봐도 호서, 호남에서 일어난 서인계 의병장들이 경상 우도에서 일어난 북인계 의병장들보다 적지않다. 다만 서인계 의병장들은 임진년의 전라도 방어전(웅치, 이치, 1차, 2차 금산 전투)과 2차 진주성 전투 때 거의 다 죽었고 북인 의병장들은 살아서 종전을 맞이한 덕에 의병 활동을 내세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13] 곽재우는 남명 문하라는 이유로 북인으로 곧잘 분류되나 실제론 무당파 내지는 남인에 가까웠다. 그의 의병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은인인 김성일이 남인이고 김성일 사후에도 이원익, 류성룡 같은 남인계 인사들의 후원을 받았고 서인계인 윤두수, 윤근수와도 관계가 괜찮았다. 오히려 북인들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많았다.[14] 재야에 살면서 막강한 학문적 권위와 명망을 지닌 선비들. 주로 지방의 유명 서원이 이들의 근거지로 서원에서 자신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들이 여론 주도층으로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막강했으며, 때문에 영조는 "산림인지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당장 조정에 나와서 이야기해라!" 식으로 대처해 왕권을 높이려 했다.[15] 김육은 대동법을 창안한 사람으로 학식과 경륜은 물론, 공납의 폐단을 없애 서민의 아픔을 줄여주고자 한 사람이었다. 인쇄업을 부업으로 운영할 정도로 재력도 받쳐주는 사람이었다.[16] 하지만 정권을 놓친 기간의 5년과 4년으로 합이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17] 자세히 살펴보면 한당계의 김육의 손자 김석주 같은 인물은 사실상 이 당쟁을 관망하며 캐스팅보더 역할이나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죽고 나서는 한당은 사실상 소멸했다.[18] 물론 이건 신권 정치와도 가깝다. 이는 임금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다.[19] 비교적 서얼 철폐나 노비나 여성 등의 대우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도 거론할 수 있다.[20] 이황의 남인들은 이에 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황의 학문이 건너간 일본은 이념적으로 하극상 따위를 용인하지 않는 철저한 계급 사회를 고수했다.[21] 물론 이건 학파의 영향인 동시에 집권 세력이라서 수세에 필요한 평민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에 이건 처음 노비 종모법을 주장한 이이부터가 그랬으니 말 다했다.[22] 당시 여성들은 심지어 양반가의 규수라고 해도 글월이란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되고, 글을 잘 알아 책을 읽으면 남편에게 좋지 못하다고 하여 기피되었다.[23] 가끔 유림에 노론의 영향력이 강하며 퇴계이황 계열은 연구가 있지만 북인 계통인 조식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부진하며, 양명학 이후의 학문 분파는 연구자도 없고 전공자도 자리가 없을 정도라며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가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했는지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가장 남은 게 많고 정계에서의 족적도 크니 연구가 활발해지고 연구자 수가 많으니 자리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북인은 인조 반정 이후 몰락했고 양명학은 강화학파밖에 없으니 당연히 연구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24] 훗날 서인의 종주로 추앙받긴 했어도 이이 본인은 한 번도 특정 당파의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으며 당파의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동인의 대표적 인물인 이발 형제들도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랐다.[25] 소현세자 사후 명실상부한 조정의 수장이었지만, 대표적인 친청파로 뭇 사대부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당파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무리가 좀 있다.[26] 숙종 즉위 이후에 서인이 숙청당하면서 무게감 있는 서인이라고는 외척을 제외하면 김석주 혼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수라고 보기는 역시 애매하다.[27] 강경파로 동인들을 공격했다. [28]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 동서남북론(東西南北論)의 분열편을 보면 송상현도 서인이라고 나온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