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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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명종 시기의 문신.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자 정난정의 남편이기도 하다. 자(字)는 언평(彦平). 군호는 서원군.[1] 조선 전기의 간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연산군 10년인 1503년에 태어났다.[2]
명문인 파평 윤씨 집안 사람으로 중종 28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후 권신 김안로에게 찍혀 내쳐졌다가 김안로가 숙청된 이후 복직해 외척으로서 세를 불려 나갔다.
그는 실제로 정략에 뛰어났는데, 권신인 김안로가 자신을 문정왕후와 엮어서 숙청하려 하자 먼저 선수를 쳐 김안로를 엿먹였고 몰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썼다.
2. 권력을 잡다
벼슬에 오른 후에 세자 이호를 밀어주는 윤임 일파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밀어주는 소윤의 정쟁에서 당연히 명종 쪽에 줄을 섰다. 이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파직되었다가 8개월만에 인종이 붕어하면서 복직하여 소윤의 영수로서 세를 키웠고 형인 윤원로를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이러한 권력 차지는 물론 누나인 문정왕후가 든든한 뒷배경 역할을 해줘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을 비롯한 대윤 일파(사림 세력 포함)를 모함하여 역모죄로 제거했다. 이후 공신이 되고 형마저 숙청하면서 20년 권세의 길을 닦았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는데 당시 뇌물로 받은 쌀이 썩어나[3] 유기 그릇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4] 이외에도 농장이 많았고 서울에만 자신 소유의 대저택이 10여 채나 되었으며 노비, 곡식 등 모든 것이 완비되어 있었다.
명종 6년에 우의정으로 임명되자 윤원형이 예의상 한 차례 거절을 표했는데[5] 이후 영의정부터 3사까지 나서서 "윤원형만한 인물이 없습니다."라며 상소를 올렸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척하며 우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보통 왕이 "나 왕 그만두고 세자한테 물려줄래"라고 하면 신하들이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며 왕권을 강화하는 이벤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하로서 이러한 이벤트를 진행할 정도로 권력을 쥐고 전횡을 부렸다.
3. 횡포
당시 모든 관료의 임명과 진급, 죄수의 처벌이나 방면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뇌물이 넘쳐흘러 뇌물을 가득 실은 배가 수도인 한양으로 정기적 운항을 할 정도였는데 일반 상선도 아니고 군함을 징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또한 바다를 메워 땅을 넓히는 간척 사업을 진행해 땅을 자신의 사유지로 사용했고 국유지도 사유지처럼 사용하는 등 간신의 끝을 보여줬다. 또한 공포정치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등 김안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는 한때 소윤에서 윤원형 급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소윤의 맹장으로 그의 저돌적인 성미 때문에 대윤과 다른 대신들은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어린 명종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강직한 대신이었던 유관 등의 주도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무슨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문정왕후를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충수가 되어 이기, 정순붕 등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유관, 유인숙, 윤임 등은 사사되고 그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으며 이에 휘말린 종친 계성군 등도 죽었다. 유배가 풀려 돌아온 윤원로는 각종 위험한 발언과 행동을 일삼았는데 "문정왕후는 늙었으니 이제 곧 내 세상이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대비전의 말'''이다.", "난 한명회와 같아서 날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인종은 우매하여 어서 죽어야 한다." 따위인데[6] 하나같이 폭탄 발언들이다. 특히 '''문정왕후의 위엄을 저해하는 발언'''까지 한 바람에 윤원형의 싸바싸바가 먹혀들었고 문정왕후는 윤원로를 유배시킨 다음에 몇년 후에 사사해버린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윤백원이 포스트 윤원형으로 떠오르던 권신 이량에게 빌붙어서 복수를 하고자 했으나 탐욕만 많은 이량에게 실망한 명종이 이량을 숙청해버리면서 같이 숙청된다.
또 자기 첩의 자식인 두리손이란 아들을 살해하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는데 이유가 '''"자신을 조금 화나게 해서"'''(...). 또 집을 찾아온 배다른 동생의 부인을 강간하고 소문이 날까 두려워 그녀를 절에 강제로 보내어 여승이 되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덩달아 그의 노비들도 기고만장해져 대낮에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했다.[7]
4. 몰락과 처참한 말로
이런 권세는 명종 친정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나 1565년 문정왕후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야사에서는 그동안 눈치를 보던 명종이 귀양을 보냈고 귀양지에 물거품이 된 권세를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부인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그에 대한 탄핵 요구가 그야말로 빗발을 쳤는데 명종 20년 8월 3일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의 소를 시작으로 8월 27일 까지 매일 홍문관과 양사에서 귀양보내라고 난리를 쳤고 8월 9일과 8월 15일에는 좌상 심통원, 8월 11일에는 예문관, 8월 14일에는 대사간 박순과 대사헌 이탁, 8월 16일에는 춘흥부 당상 윤개, 8월 16일에는 좌찬성 홍섬과 육조 당상, 8월 17일에는 대호군 정현, 8월 19일에는 독서당 관원 김계휘[8] 등이 릴레이로 요구했다. 단순 귀양 요구에서 중벌 요구에 죄상을 적은 소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명종은 이를 거부하다가 8월 15일에 영의정에서 내쫓고 새로 이준경을 영상에 삼았으며 8월 21일에 윤원형을 파직했지만 요구는 그치지 않았고 새 영상 이준경, 영평 부원군 윤개, 승문원 판교 박승임, 이천군 이수례 등이 벌을 청했고 나중에는 아예 이준경이 백관을 이끌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월 8일 윤원형의 전 장모인 강씨가 딸인 전처 김씨의 억울한 죽음의 범인으로 정난정을 고발하면서 타겟이 정난정으로 바뀌면서 대부분의 윤원형 처벌 요구가 정난정 처벌 요구로 공격 타겟을 바꾸었지만 왕은 이에 계속 침묵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와중에 (그래봐야 완전히 실각한 상태지만) 11월 13일에 정난정은 남의 손에 죽느니 자기 손에 죽겠다고 독을 먹고 자결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귀가하여 그 사실을 안 윤원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다 닷새 후에 정난정 뒤를 따라 자결하면서 탄핵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설에는 자결을 한 것이 아니라 맺힐 대로 맺힌 백성들에게 정난정과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는데 파평 윤씨 종친회에서 조상들의 명예를 위해 이를 덮고 자결했다는 소문을 유포했다는 설도 있지만, 명종실록을 쓴 사람들은 윤원형을 싫어했던 사림들인지라[9] 죽음을 좋게 포장해 줄 이유도 없고, 설사 윤원형의 죽음을 곱게 포장해주자는 여론이 있을 정도로 칭송받는 사람이었다쳐도 조선왕조실록의 특성상 관련 내용이 없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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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는 임금 위에 군림한 척신이었지만, 죽은 후에는 초라하게 묻혔다. 묘는 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
5. 기타
5.1. 애처가?
상당한 애처가였다고 하는데, 정난정을 부인으로 놓고 보면 애처가겠지만, 정난정은 정실 부인이 되기 전에는 '''첩'''이었고[10] 이전 정실 부인은 따로 있었다. 그 부인을 대상으로 본다면 애처가란 개드립은 '''절대 나올 수 없다.''' 참고로 이 정실 부인 김씨는 윤원형에게 학대당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야사나 소설에선 식혜에 독을 타 죽였다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에선 '''김씨를 며칠 굶긴 다음에 독이 든 음식을 한 상 잘 차려주어 독살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김씨의 친모가 이 일로 상소해 고발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이 정실 부인 김씨는 윤원형의 정적이었던 김안로의 5촌 조카였으므로 김안로는 윤원형의 처당숙.[11] 형 윤원로의 아들(이름은 윤백원)이 김안로의 손녀(김안로의 장남 연성위 김희와 중종의 딸 효혜공주 사이에서 태어남)와 결혼했으므로 사돈 관계도 된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김안로의 친척인 본처 김씨의 위태로운 처지가 잘 고증되었다.
참고로 김안로는 조선왕조가 멸망되기 전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밑에 쓰여진 것처럼 윤원형만 복권되는 관계로 정실부인 김씨의 친정집안(특히 김안로) 관계는 묻혀졌다.
5.2. 설화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일화로 인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윤원형의 병조 판서 시절 어떤 무인이 변방의 장수로 임명받고는 감사의 표시로 화살통을 주었는데, 그 무인이 가고 난 뒤 윤원형은 "활도 안 쏘는 나한테 왜 이런 걸 주느냐"며 투덜대고는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다락에 처박아 두었다.[12] 그 무인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화살통을 열어 보셨습니까?" 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가?" 하고 되물었더니 "대단한 것이 들어 있사옵니다."고 다시 답하자 윤원형이 화살통을 꺼내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정말로 귀한 담비 가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윤원형은 크게 기뻐하며 그 무인을 부유한 읍의 수령으로 임명해 주었다.
또 한 번은 윤원형이 이조판서일 때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수백 근을 바치고 능참봉 자리를 달라고 했는데 문제는 폭주하는 뇌물과 업무량을 버틸 수가 없었던 윤원형이 하필이면 그 날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발령장을 쓰려고 기다리다 지친 낭관이 윤원형을 깨우며 다음 벼슬 자리를 줄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윤원형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도 못 하고 잠결에 그냥 '고치'라고 답했고, 이 말을 들은 낭관은 진짜 사람 이름이 '고치'인 줄 알고 명단 마지막에 그냥 그대로 '고치'라고 적은 것. 그 뒤 윤원형의 집에 들른 사람의 명부를 뒤져서 그 '고치'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그런 사람이 있을 턱이 없어서 본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녀도 도무지 찾지를 못하다가 엉뚱하게도 '고치'(高致)라는 이름의 가난뱅이를 찾아 참봉 자리를 주자 고치 본인은 꿈에서도 생각 못 한 벼슬을 거저 하게 되어 어리둥절했다고. 이에 윤원형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내색할 수 없었다 한다. 참고로 이 부분은 전래된 버전에 따라 차이가 많이 있으니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덕분에 그 참봉의 별명은 고치 참봉 또는 누에 참봉이었다나.
이런 얘기들에서 보듯 뇌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는데[13] 당시 주된 거래 수단이 쌀이었던 만큼 이 쌀이 너무 많아 썩어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수법이 유기(놋그릇)로 바꿔 축적했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재테크의 달인이라며 깠다(...). 왜 하필 유기냐면 조선 초중기 무렵에는 명나라의 금은 조공을 우려해 금과 은의 채굴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금과 은의 수요가 늘자 그제서야 채굴한 것.
역시 어우야담에 실린 일화로 윤원형이 몰락하기 전 재미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는데, 어느 날 한강 두모포[14] 에서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고래 만한 큰 물고기를 낚아 강가로 끌고 올라왔다.[15] 바닷가에서도 잡히기 어려운 물고기가,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가 한강까지 올라와서 잡혔다는 사실에 경악해서 다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누군가[16] 이를 보고 파자점을 치기를, 윤원형의 형(衡)을 파자하면 양 쪽에 다닐 행(行)이, 가운데 아래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 → 灬)이 빠진 글자가 되는데, 지금 크고(大) 이상한 물고기(魚)가 잡혀 올라온(行)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 이는 곧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와 같게 될, 다시 말해서 그가 몰락할 징조라 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과연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정말로 윤원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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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 외의 여담
선조 대의 동서 대분열의 궁극적 원흉(?)이기도. 무슨 말인고 하니 선조 대에 동서 대분열의 주역인 김효원과 심의겸이 갈등을 빚게 된 기원이 심의겸이 우연히 '''윤원형 집 앞을 지나다가 김효원이 그집 대문에서 나오는 걸 보고 빡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심의겸은 '''윤원형 같은 소인배 집에서 식객으로 밥을 먹는 김효원도 소인배'''라고 규정하여 훗날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소인배라고 맹비난해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져 버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물론 윤원형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심의겸이 서류 결재를 위해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었고 그때 그 집을 드나드는 식객들에게 쓸 무수한 이부자리를 보았다. 심의겸은 한심해하며 그 이부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 중 김효원의 이름이 나왔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벼슬자리 얻자고 권력자 집에 드나드는 한심한 선비'''로 여겼던 것이다. 당시 김효원은 아직 벼슬이 없었지만 재야에서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나중 김효원이 과거 급제하고 신고식을 할 때 대놓고 '''저 인간은 윤원형이네 집에서 빌어먹던 식객이네'''하고 대놓고 디스를 걸었고, 때문에 김효원은 장원 급제를 하고도 몇 년간 한직을 떠돌아야 했다. 문제는 김효원 역시 이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 심의겸을 끊임없이 공격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김효원과 윤원형의 사위가 절친이어서 그 집에 밤늦게까지 과거 시험 공부를 하러 간 것'''이었고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안 심의겸도 후회하면서 서로 화해하고 우정을 나눴지만... 동서 붕당은 이미 두 사람의 불화 수준을 떠나 있었다.
윤원형이 임진왜란의 진정한 전범이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대옥사, 무능한 정치로 인해 관리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드는 등 기강이 쇠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저때 살았던 왕과 신하들이 모든 걸 말아먹지 않고, 전쟁 발발 자체는 막을 수 없어도 국력을 갖추어 고려 시대의 거란 전쟁처럼 초반에 격퇴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전쟁이 장기전이 되고 전국을 휩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형 미이라로 잘 알려진 파평 윤씨 산모 미라와 관련이 약간이나마 있다. 왜냐하면 그 여성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형 윤원량으로 각각 조카 손녀 - 종조부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원량은 소윤계였지만 동생들인 윤원로, 윤원형과 다르게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둥글둥글하여 남을 해코지한 기록은 없다. 사소한일로 탄핵당한 기록은 있긴 했는데 중종실록에 따르면 권모술수가 뛰어난 동생과 달리 어리석고 용렬하였다 한다. 윤원형이 권력에 쫓겨나자 동생을 위로 할려고 집에 방문했는데 만나주지 않았다. 그의 딸은 인종의 후궁이었고 여동생인 문정왕후와 척을 지지 않았다. 명종도 외숙으로 친하게 지냈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은 뒤에도 편하게 천수를 누렸다고. 한마디로 간신이었던 동생 윤원형, 그런 그에 무모하게 맞서려던 윤원로와 달리 그럭저럭 잘 살다 간 셈.
5.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에선 같은 본관인 파평 윤씨로서 나쁜 짓을 다해서 더더욱 싫어서인지[17] 귀양지에서 금부도사가 와 사약을 내릴까하여 불안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지옥에 갔다라고 분노에 찬 결말을 보여준 바 있다. 귀양지에 금부도사가 왔다는 소식에 정난정이 먼저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윤원형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정난정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금부도사는 다른 죄인을 잡으러 가다가 귀양지 근처에 있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러 왔던 것.
-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에서는 한인수 씨가 연기하였다.
- 여인천하에서는 이덕화 씨가 연기하였고, 배우의 연세가 연세인지라 실제 인물과 달리 왕후의 오빠로 설정되었다. 여기에서도 이덕화는 특유의 악역 연기에 대한 발군의 솜씨를 자랑하며 조선왕조오백년 인현왕후에서 보여준 장희재 급의 악역으로 연기해 주신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잠깐 나오는데, 성우 겸 배우이신 최병학 씨가 열연하셨다.
- 옥중화 에서는 정준호가 맡았다.
- 가상역사물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윤임과 수련의 아들인 천윤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유생으로 등장. 이후 수련에게서 홍문관 교리직을 하사받고 그의 누이가 영산군 이전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윤임이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흑화해버리는 것과 달리 이쪽은 그냥저냥 평범하게 나온다.
5.5. 복권
이렇게 간신짓을 한 윤원형도 순종 때 복권 되는데, 윤원형의 복권을 건의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이완용.'''
사실 1907년 한일신협약을 기점으로 경술국치까지 모종의 이유로 간신, 역적 취급받던 인물들을 이완용의 주도로 추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자체는 딱히 매국노 짓은 아니고 어차피 나라도 망해가니 죽은 사람 신원이나 해주자는 의도에 가깝다. 윤원형 이외에도 정인홍, 이징옥, 윤휴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복권되었으며 조선후기 실학의 대명사인 박지원과 정약용 역시 이 시기에 추존되어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윤원형의 묘는 자손들만 알고 있었고 몰래몰래 제사를 지내며 거의 잊혀져 있었는데, 이완용의 이 뻘짓으로 윤원형 자손들이 묘비를 세울 명분을 주었다. 지금은 윤원형, 정난정의 묘비가 초라하지만 세워져 있고, 자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아직도 윤원형의 자손들과 윤임의 자손들은 왕래도 없고 문중행사에서 만날 일이 있어도 무시하고 지나간다고 한다.
6. 당시 사관의 평가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하겠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하여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여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 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서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서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에는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으며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가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 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윤원형 졸기 기사에 대한 사관의 논평.
7.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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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에서 배역을 맡은 이덕화. 왼쪽에 있는 여자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 역을 맡은 강수연.
여인천하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문정왕후의 오빠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배역을 맡은 이덕화의 나이가 많아 보여서 오빠 역으로 드라마를 진행하였다고... 이덕화는 문정왕후 역을 맡은 전인화보다 나이도 13살이나 더 많고 얼굴도 상당히 노안이다. 초반에는 문정왕후 세력이 약해서 윤임, 김안로, 경빈 세력의 눈치를 보지만 후반에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소윤의 영수가 된다. 을사사화로 대윤이 몰락하고, 정실인 김씨도 정난정이 모살한 후 정난정과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역사대로 문정왕후가 죽자 강음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한양 정세를 알아보러 잠시 내려간 정난정이 백성들에게 뭇매를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한다. 사실 이 때 정난정이 죽은 건 아니었고 은사인 당추 스님이 구해서 절에 머물고 있었지만, 윤원형에게 소식을 전한 하인이 잘못 전한 것이었고 정난정도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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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옥중화에서 윤원형 배역을 맡은 정준호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등장, 시작부터 뇌물을 주는 이들로 집앞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 임꺽정의 동평관 침입으로 조선 조정이 곤란해지자 일을 일단 책임자들만 벌하고 드레이크와 주인공에게 명예 관직을 내려 은근슬쩍 덮어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설탕 뇌물을 받고 잉글랜드-조선간 무역성사에 힘을 보탠다.
고우영 임꺽정에서는 메인 빌런인 윤원빈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흑막으로 출연한다. 무예에 뛰어난 조카 윤원빈을 시켜 반대파들을 죽이지만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생기자 조카를 내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