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박연서는 1893년 12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동(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사기막골)에서 박성호(朴聖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집안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1908년 7월 경성의 보성소학교를 졸업했고 1910년 3월 개성의 보창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9월, 그는 강원도 철원군 남감리회 전도사를 맡아 포교 활동을 수행했다.
1919년 8월 철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2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 8월까지 포천 구역을 담당하였으며, 1924년 9월 장감연합공의회 주관으로 일본 간사이 지방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위해 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1927년 8월 귀국했다.
1927년 9월 잠시 경성 석교교회를 담임했으며, 1928년 1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신보> 주필을 맡아 김춘배, 최경식 등과 함께 1933년까지 편집을 담당했다. 또한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석교교회를 담당하면서 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한편 1933년 가을 YMCA 총무인 신흥우가 파시즘 국가사회주의에 매료되어 결성한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다. 적극신앙단은 개신교 주류였던 서북계열과 대립하다가 조선예수장로회가 이단으로 규정하며 1935년 초 해체된 초교파 신앙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이 해산된 후 친일파로 변질된 그는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최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했다. 그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하는 제2차 시국강연반에 참여해 경기지역 강연을 맡아 신자들에게 일제를 위해 충성할 것을 권유했다. 1938년 4월 종교단체연합회 주최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충후보국 대강연회'에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5월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출범할 때 평의원을 맡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기독교도의 전쟁협력 강도(講道)'에 연사로 참여해 <국민정신총동원과 기독교회>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39년 10월 적극신앙단 계열의 정춘수가 감리교 총리원 4대 감독으로 선출된 뒤 기존 간부를 경질하고 박연서를 포함한 적극신앙단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1940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를 맡았고, 10월에는 선전주임을 맡았다.
1941년 3월 '신체제의 조선감리교단'으로 변경된 총회에서 중앙위원 전도주임을 맡았고, 그해 4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41년 3월에 열린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시국대응 신도대회'에서 연맹 이사로서 신학교육을 맡아 "유대인의 역사와 사양 사상의 배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1년 4월 정동예배당에서 경성교구가 주최하는 천장절 봉축예배를 경성교구장으로서 집례하고 봉축사를 했으며, 그해 10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선전주임을 맡았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경성 중앙교회를 담임하면서 1942년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 재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기독교계 신문을 통폐합하기 위해 조직된 기독교신문협회 부회장 겸 이사에 선임되었고, <기독교신문>의 편집인을 맡았다.
1942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개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 참석했으며, 그해 9월 16일자 <기독교 신문>에 '경축 만주국 건국 10년'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10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장에 재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전필순 목사를 통리로하는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 전도국장을 맡았다. 또한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이사겸 경성교구장을 맡았으며, 1945년 7월 개신교 교파를 통합하여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연성국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목사 직임에서 물러난 그는 1948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맡았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몸이 쇠약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된 뒤 서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50년 9월 19일 병이 악화되어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독립애국단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행적을 고려하여 1963년 박연서에게 건구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1996년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서훈이 취소되었다.
[1] 고향인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동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