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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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당군이다. 실질적으로 북한의 국군 역할을 한다.
1948년 2월 8일에 창설되었으나, 1978년부터는 항일 빨치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강조하기 위해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했다는 날인 1932년 4월 25일로 창설 시기를 앞당겼고, 해당 날짜를 '건군절'로 지정해 공식화한다. 그런데 2018년 1월 22일 북한 정부 발표를 통해 건군절을 둘로 분리하여 4월 25일은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2월 8일은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나누고 2018년 2월 8일 열병식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2월 8일이 평창 올림픽 개막 하루 전날로 남북한 합동 전야제가 있는 날인데 이와 연계하여 북한 체제 선전을 하려는 목적인 듯하다.
주요 전술로는 총력전, 배합전, 대량 선제 기습 공격 전략, 속전속결 전략이 있다. 총력전은 우리가 아는 총력전의 의미를 넘어 국가의 모든 분야를 전쟁에 종속시키는 전술이고, 배합전은 전면에서 주력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특수부대가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상대 전선의 안팎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전술이며, 선제 기습 공격 전략과 속전속결 전략은 전쟁 발발 시 빠른 기동력으로 적을 공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는 전술로 4차 중동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6] 군 자체에서 "조선인민군"이라는 신문을 발행한다.
2. 상세
조선인민군은 설립 초기부터 김정은 시대 이전까지는 북한 전체의 군대가 아닌, 조선로동당이 소유한 군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이라는 집단의 국군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공산주의 국가의 당군(黨軍)이나 인민군의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국가 수준의 군대는 부르주아지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압제의 도구에 속한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오랜 이론에 근거하여 국군의 개념을 부정했다. 그 대신 혁명의 전위주체인 공산당을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무력집단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당군이나 인민군의 개념이다.
이건 다르게 보면 이론상으로는 모든 정당들이 자신들만의 군대를 소유할 수 있다는 뜻이긴 하지만 대체로 공산 국가들은 공산당 일당 체제로 굴러간 탓에 다른 야당이 자신들만의 군대를 소유하기는 커녕 야당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기껏 있어봐야 사실상 '우리는 일당 독재 체제가 아니다'라고 보여줄 목적으로 만든 가짜 야당인 관제야당 정도나 존재했을뿐.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인민군은 원래는 북한의 공산당인 조선로동당에 속해있었다. 정확히는 북한의 내각 구조 중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를 만들고 그 조선로동당의 당원 중 하나인 김일성이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김일성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조선로동당의 일원으로 엮여있는 구조였다. 즉 원래대로라면 김일성은 북한 정권에서 군사 부분만 담당하는 당원 중 하나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김일성이 정권을 휘어잡으면서 내각의 주요 자리들을 '겸임'하는 식으로 북한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로동당 전체가 김일성의 수족이 되었고 조선인민군도 사실상 김일성의 사병 조직이 되었다.
이런 '명목상으로산 조선로동당 군대이고 실질적으로는 김씨 일가의 사병 조직인' 구조는 김정일 시절까지는 유지되었다가 김정은 시대에 국방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를 신설하여 모든 업무를 이관함으로서 그 구조가 크게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국방위원회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북한의 최고 기관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조선로동당의 하위 부서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명목상으로도 공개적으로 조선로동당과 아예 별개의 조직으로 독립시키는 의도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하위 부서이지 최고권력자의 개인 사병이 아니다'라는 가면조차 완전히 벗어던진셈. 이것이 시사하는바는 그동안은 김씨 일가가 국방위원회 대표가 되는 과정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로동당의 거수 투표를 거쳐야 했던 것을,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이 김씨 일가의 후계자는 다이렉트로 국무위원회 대표 자리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은 세습 국가가 아니라는 가식도 완전히 탈피하고 점점 더 세습 왕조로 변해버렸음을 입증한 셈.
현대 한국에서 한국전쟁을 다룰 때 조선인민군을 인민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전쟁 당시에는 공산군이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냉전 시기에는 소련 혹은 중공의 꼭두각시 군대라는 멸칭으로 북한 괴뢰군[7] , 줄여서 북괴군(北傀軍)이나 아예 괴뢰군이라고 주로 불렀었다. 이 북괴군이란 용어는 1980년대에는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도 등장한다. 군사정권 때까지는 이것이 한국 정부나 한국의 언론 한국군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명칭이었으나 현재는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의외로 북한 주민들도 인민군을 공산군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이런저런 역사적 특성들이 바래지면서 이제는 '북한군'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2.1. 군사적 전술
- 4대 군사노선
- 4대 주요전술
- 집결: 한미연합군의 중심부에 전투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작전
- 기습: 휴일이나 야간, 새벽, 평일 출퇴근 시간 때 기습 공격하는 작전
- 전멸: 한미연합군에 대한 반격으로 적군의 부대 재편을 방지하여 전멸, 소탕하는 작전
- 후속 전연군단의 전선을 돌파하여 기계화 군단이 후방을 침투, 점령한다.
- 12대 전투원칙: 사실 상당히 뒤떨어진 원칙이다. 화력을 압도하고, 지형을 활용하는 등 한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사용했던 작전으로 현대전에서는 '영공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공군력이 상당히 처참한 수준이라... 그나마 북한 입장에서 쓸만한 건 화력압도와 후방 교란 정도...그래서 북한이 지금까지도 열심히 특수부대와 방사포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전멸소탕: 한미연합군의 후퇴로 부대재편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 기습돌파: 야간, 악천후를 틈타 기습한다.
- 화력압도: 장사정포 미사일 화력을 전투 초반에 집중적으로 투입해 수도권 주민들의 혼란과 공포심 조장을 위한 목적
- 기동력: 국군이 기동을 중지한 틈을 타 공격한다.
- 후방방어: 전투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안전 지대 확보 목적
- 후방교란: 남한 전력의 분산을 위해 후방을 교란시켜 특수군의 전력을 극대화한다.
- 협동작전: 육해공군의 협동 작전
- 전투편성: 사다리꼴 모양으로 편성한다. (제1선 5/9전방, 제2선 3/9후방, 제3선 1/9예비) 개전 초반에 전력을 집중화하기 위한 목적
- 연합작전: 대한민국 국군의 '소부대 훈련'과 비슷한 개념이다. 대대, 중대, 소대 모든 부대의 통합 작전
- 병참확보: 전쟁에 있어서는 병참 문제가 제일 크기 때문에 병참부대의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 지형활용: 산악전을 중시한다.
- 사전정찰: 한미연합군 현황을 사전에 정찰한다.
- 침투축선
- 투입전력
- 전방지역: 전력의 70% 이상 배치
- 후방지역: 병력 770만 명의 준군사조직 배치
- 전시체제: 집단군 전환
3. 역사
북한이 세워지기 전부터 역사를 지닌 조직이다. 지금은 열약한 제식 장비를 지닌 군대지만 그래도 1950년대에는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마자 몇 차례 패퇴시키며 경남까지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9] 창설 초기 인원들 중에 일본군, 중국 국민당군[10] , 그리고 독소전쟁에도 참전해 나름대로 실전 경험도 있었던 데다 북한군이 쓰던 무기는 소련에서 지원받은 강력한 무기였다. 또한, 남침을 위해 수년간 소련 고문관이 파견되어 체계적인 훈련과 소련제 제식 장비를 지원받았으니 한국전쟁 초창기 북한군이 보여준 전광석화 같은 남침 속도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녔다. 당장 미국도 초창기 북한군의 훈련 수준과 장비 수준을 얕보고 최초 전투를 벌인 스미스 특임대가 오산에서 박살나고 뒤이어 천안에서 M24 채피 경전차로 T-34 중형 전차[11] 를 맞상대하려고 했다가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고 T-34 쇼크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극동아시아에서 T-34 정도 수준의 기갑 병력을 체계적으로 제식화하여 보유한 국가는 북한이 유일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갑 병력이라고 부르기도 초라한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에 일본은 미국에게 박살난 직후라서 군대 자체가 와해된 상황이었고 중국의 경우 국공내전으로 인해 체계적인 기갑 병력 육성을 못했던 상황이었다.
1945년 10월 21일 소련 제25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보안대가 창설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이 배제된다. 보안대의 임무가 철도안전을 포함한 형태의 임무확대가 되어서 철도보안대가 추가로 창설되는 1946년 1월 16일에 철도보안대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북한군의 기초가 된다. 현재도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신분은 철도보안원을 겸임할 정도로 이 철도보안대가 북한국의 전신이다. 그리고 군내 정치사상 교육과 군사 분야의 간부양성을 위해 1946년 2월 평양학원[12] 과 6월 중앙 보안간부학교[13] 등의 군사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46년 8월 15일 규모가 확대된 보안대를 통합·지도하기 위해 평양에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했고, 9월에는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했다. 1948년 2월 4일에는 민족보위국이 설립되었고, 마침내 북한 정부수립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조선의용군은 1949년 7~8월에 2만 명이 북한으로 들어옴으로써 북한군에 최초로 합류하게 되며, 1950년 5월에 추가로 약 2만 명 가량이 입북한다. 이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한 군대 출신인 경우가 많게 된다. 먼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이탈해 중국 연안 지방으로 간 군대인 조선의용군이 있다. 또 조선의용군과 함께 태항산에서 결성된 화북 조선 독립동맹의 일부 인원도 포함된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도 조선인민군에 포함되는데, 이 동북항일연군은 완벽히 통일된 군대는 아니었고 만주 일대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들을 공산당 주도로 통합한 일종의 통일전선 연합체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제1로군 2군 6사의 대장이었다. 김일성은 이후 만주에서 활동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탄압을 받자, 소련으로 넘어가서 소련 극동군 제88 국제여단에 합류한다. 여기에 추가로 소련에서 활동하던 소련 유학파 등이 모여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부대의 모태가 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선인민군의 뿌리로 소급하기도 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느슨한 분위기의 군사조직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점을 두고 북한에서는 '민족적 단결을 통한 인민의 군대 창설'로 평가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점령되고 나서 북한군이 서울에 주둔할 때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한 간호사나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연안파, 다시 말해 조선의용대 출신 인원들이 김일성과 그의 직통 라인인 소련 극동군 88여단 출신 인물들보다 상당히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안파 군인들은 공공연히 이러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현재 정규군 약 119만 명과 예비전력 총합 약 950만 명을 보유하고 있어 병력 규모상만은 세계 3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수 2700만 명과 대비하면 대략 35%로 군국주의의 궁극적 표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군인의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하지만 그 인원도 그저 부족한 전투력을 메꾸기 위한 조치로 생각될 정도로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4위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그 북한군의 군사력 순위는 기껏해야 20위 후반이는데 40여 개의 나라가 추가되면서 35위로 또 떨어졌다. 평가된 나라가 68개국에서 106개국으로 늘었다만 세계 상위권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포함되어 있었기에 국가 비율만큼 순위가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의 조선인민군과 조선의용군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민군은 북한의 정식 군대고 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 지역에서 자원 또는 징집된 인원으로 편성된 군대를 이야기한다. 당연하게도 이 의용군은 북한 정규군에 비해 차별을 받았고, 휴전 후 포로 교환을 할 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한다.[14]
4.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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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수뇌부 인사들 중 최고사령관, 총정치국장, 인민무력상, 총참모장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다. 당군인 인민군의 특성상 인민무력상의 지위는 그리 크지 않다. 중국은 북한과 달리 국방부장이 한국의 국방장관과 비슷한 직무를 수행한다. 국방부장이 제복군인 가운데 최선임 대우도 받는다. 정치군인화가 심한 북한이라 총정치국장이 강할 뿐이지 다른 공산권에서는 기본적으로는 군대는 국방장관이 관리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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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사진 앞줄의 왼쪽부터 4.5번째가 총참모장 리영길이다. 안경 쓴 양반. 출처.
사진 인물들을 면면을 보면, 왼쪽의 어깨만 나온 자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며 그 다음은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박도춘''' 당시 조선로동당 비서(군수 담당), '''장정남''' 당시 인민무력상, '''리영길''' 총참모장, '''최룡해''' 당시 총정치국장이다. 맨 앞의 둘은 '''리설주'''와 '''김정은'''이며 김정은과 리설주 사이의 뒤에 선 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17] , 그의 오른쪽에 '''박봉주''' 총리다. 박 총리의 오른쪽은 '''김기남''' 당시 선전선동부장,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부위원장, '''강석주''' 내각 부총리다. 상단 사진은 2013년 12월 17일에 김정일 추도식에 모인 사진이다.
하단 사진은 상단 사진의 1년 전인 2012년 12월 17일 추도식 사진이다. 하단의 인물들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화살표가 붙은 인물을 따라 '''최태복''' 조선로동당 서기(외교), '''김기남''' 선전선동부장, '''김경희, 최영림''' 전 총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리설주, 김정은, 최춘식''' 제2자연과학원장[18] , '''최룡해''' 총정치국장, ''' , '''[19] , '''김격식''' 전 총참모장, '''김영춘''' 전 인민무력부장이다.
사진 두 개를 대조해 보면 알겠지만, 2012년에 추도에 참석했던 김격식, 김경희, 장성택, 최춘식이 2013년에는 불참했다. 또한 2012년에는 미묘한 앞뒤 차이는 있을지언정 김정은-리설주 부부와 다른 간부들이 한 줄에 비슷하게 나란히 섰으나, 2013년에는 김정은-리설주 부부만 확실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나와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참고 영상.
또한 사진을 보면 죄다 육군밖에 안 보이는데, 실제 쪽수가 육군만 많은 구조 탓이긴 하지만, '''인민무력부 근무자는 해공군도 육군 피복을 착용케 하는 규정 때문'''이기도 하다.
2018년 5월 26일 북한 보도로 김정각 차수가 총정치국장에서 물러나고 후임에 평양시당위원장이던 김수길이 대장 계급으로 임명되었음이 알려졌다. 총정치국장이 차수 보직인 점을 생각하면 약간 이례적인 일.
2019년 2월 북한 보도를 통해 리명수 전 총참모장이 최고사령부 제1부사령관으로 김정은에 이은 북한군 서열 2위임이 밝혀졌다. 2020년 10월 리병철과 박정천이 원수로 진급했으며 10월 10일 열병식에서 리병철, 박정천이 군 서열 2, 3위로 언급되었다. 리명수는 사실상 군 원로의 대표격 인물로 취급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동안 김정일 전용 칭호로 봉인되어 있던 장군 칭호의 사용을 장령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허락하고, '민족보위성', '인민무력부' 등 미사여구로 치장했던 국방부서의 명칭을 단순하게 국방성으로 변경하였다.
- 최고수뇌부
최고사령관: 공화국원수 김정은 → 당정군최고지위
최고사령부 제1부사령관: 차수 리명수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원수 리병철
총정치국장: 대장 김수길
총참모장: 대장→원수 박정천 → 합동참모본부 성격.
국방상: 대장 김정관 → 명목상최고기구
호위사령관: 대장 윤정린 → 김정은경호부대
보위국장: 대장 조경철 → 군사안보지원사령부성격
국가보위상: 상장 정경택 → 국가정보원성격 → 2017.7. 취임
사회안전상: 대장 최부일 → 상장 김정호→ 대장 리영길. 경찰청 성격.
최고사령부 제1부사령관: 차수 리명수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원수 리병철
총정치국장: 대장 김수길
총참모장: 대장→원수 박정천 → 합동참모본부 성격.
국방상: 대장 김정관 → 명목상최고기구
호위사령관: 대장 윤정린 → 김정은경호부대
보위국장: 대장 조경철 → 군사안보지원사령부성격
국가보위상: 상장 정경택 → 국가정보원성격 → 2017.7. 취임
사회안전상: 대장 최부일 → 상장 김정호→ 대장 리영길. 경찰청 성격.
- 인민군 병종: 전략군, 특수군 별도병종운영, 군종 5개 병종체계
육군: 상장 위성일 → 열병보고대표자
해군: 대장 리용주 → 해군해병사령부
항공반항공: 대장 김광혁 → 항공반공사령부
전략군: 대장 김락겸 → 상장 김정길 미사일사령부
특수군: 상장 김영복 → 제11특수사령부
해군: 대장 리용주 → 해군해병사령부
항공반항공: 대장 김광혁 → 항공반공사령부
전략군: 대장 김락겸 → 상장 김정길 미사일사령부
특수군: 상장 김영복 → 제11특수사령부
- 김정일 운구차 7인방
장성택: 로동당행정부부장 → 처형 퇴진
김기남: 당선전선동부부장 → 고령 퇴진
최태복: 최고인민회의의장 → 고령 퇴진
리영호: 인민군총참모부장 → 처형 퇴진
김영춘: 인민군무력부성장 → 고령 퇴진 혁명화교육
김정각: 총정치국부부장 → 고령 퇴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장 → 총정치국장 복귀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장 → 자살 퇴진 혁명화교육
김기남: 당선전선동부부장 → 고령 퇴진
최태복: 최고인민회의의장 → 고령 퇴진
리영호: 인민군총참모부장 → 처형 퇴진
김영춘: 인민군무력부성장 → 고령 퇴진 혁명화교육
김정각: 총정치국부부장 → 고령 퇴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장 → 총정치국장 복귀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장 → 자살 퇴진 혁명화교육
- 삼지연결의체 8인방 → 2013.11.30 장성택 처형 결의 당시 직책
황병서: 조직지도 1부부장 → 총정치국장 → 2017.11. 처벌, 고급당학교 사상교육 중
김원홍: 국가보위상 → 총정치부국장 → 2017.11. 처벌, 출당퇴출
마원춘: 국방위원설계국장 → 혁명화교육 → 복귀
김병호: 선전선동부부부장 → 승격 건재
한광상: 당재정경리부부장 → 혁명화교육 → 인민무력부후방총국 제810군부대장
박태성: 평안남도당위원장 → 승격 건재
김양건: 당통일전선부부장 → 의문교통사고 → 숙청 의심 → 사망
홍영칠: 당군수공업부부장 → 건재
그 외 군 간부들은 조선인민군/장관급 장교 문서를 참조.김원홍: 국가보위상 → 총정치부국장 → 2017.11. 처벌, 출당퇴출
마원춘: 국방위원설계국장 → 혁명화교육 → 복귀
김병호: 선전선동부부부장 → 승격 건재
한광상: 당재정경리부부장 → 혁명화교육 → 인민무력부후방총국 제810군부대장
박태성: 평안남도당위원장 → 승격 건재
김양건: 당통일전선부부장 → 의문교통사고 → 숙청 의심 → 사망
홍영칠: 당군수공업부부장 → 건재
5. 열악한 내부 사정
6. 여성 징집
2015년부터 여성들에게도 병역 의무가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여성들은 모두 2년 국방의 의무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이것은 루머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만 해도 북한 여성들은 일주일 군사 훈련을 받은 게 전부였다. 예비군에 준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20] 하지만 김정은이 전면적으로 여성들을 징병 대상으로 바꾸었으므로 이제 북한은 일반 여성들도 남자들처럼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되어 7년의 의무 병역(...)을 마쳐야 한다. 물론 여전히 남군(男軍)에 비해 비율은 낮겠지만 기존의 25%라는 수치에서 훨씬 더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비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거의 유례 없는 군국(軍國)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러한 상황이 와버린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출산율이 크게 줄어든데다 극심한 영양 부족을 겪었는데 이 세대의 남자들이 입대할 시기가 되면서 숫자 부족, 기준 미달이라는 문제 때문에 남자만으로는 120만여 명이라는 상비군의 숫자를 충당하기 어려워진 것이 제일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입대 기준을 대폭 낮추거나 복무 기한을 다 채우고 제대해야 할 인간들조차 ''''잡아두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북한의 경우는 이런 것에 항의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남자의 병역 의무를 1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어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방향이 됐다고 한다. 이미 2020년이므로 정상적으로 시행됐다면 상당수 여군이 입대하여 이미 복무 중일 것이다.
아시아프레스의 조사에서는 2020년 기준으로 군 복무가 남자는 11년, 여자는 7년이라고 한다.북한군의 병역 의무
문제는 이게 거의 미친 발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남자를 10년이나 군대에 가둬두는 탓에, 안 그래도 낮은 경제력에 그나마 경제 활동을 해야 할 일손들을 전부 군대로 돌려버린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기존의 북한군조차 원활한 보급을 받지 못해 극심한 식량난과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판에 유지비가 훨씬 많이 드는 여군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있을지는 굉장히 의문이다.
또한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말 그대로 '''청년층 전부가 군대에서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국가의 생산력이 극적으로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남성만 징병하는 일반적인 징병제조차도 모병제 국가에 비해 사회의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판에, 청년층의 나머지 절반인 여성마저 전면 징병한다면 생산성이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불보듯 뻔하다. 이 떨어지는 생산성을 그나마 상쇄하기 위해서는 아직 젊을 때 빨리 사회에 복귀해 일을 할 수 있도록 복무기간이 짧아야 하는데[21] , 북한은 여자조차도 기본 7년, 심하게는 그 이상 ~ '''무기한'''으로 징병해 굴린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여성징병제에 대한 논의가 있긴 하지만, 징병자원 감소 문제로 북한과는 좀 다르다.
하다못해 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여자 5년 남자 8년으로 줄인다고 한다.
7. 대외 참전 / 지원 경력
7.1. 직접적인 참전
조선인민군 첫 참전 전쟁으로 북베트남을 소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북한의 슬로건은 '윁남(베트남)에서 미군이 100명 죽으면 남조선에 있는 미군이 100놈 죽는 것이나 같으므로 베트콩을 도와주어야 한다'였다. 1967년에는 전투기 조종사[22] , 1972년에는 공작원을 베트남에 파견해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였다. 기타 수송병, 화학병, 공병 등의 형태로 소규모 참전하였다. 북베트남은 훗날 조선인민군이 요구한 서방진영 군수품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은 중국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때 친중국 정책을 취하던 북한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다만 F-5와 A-37 등의 공군 항공기와 M48 전차, M16 소총 등 각종 육군 무기가 북베트남군에 노획되었고, 이 중 일부는 공산국가로 흘러들어간 점 등을 봤을 때[23] 소량이라도 노획품을 제공했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북베트남에게 인계받은 F-5와 A-37을 국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96년에 귀순한 조선인민군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F-5를 조종한 선임을 맞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지원 말고도 심리전 요원 등이 활동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다만 F-5와 A-37 등의 공군 항공기와 M48 전차, M16 소총 등 각종 육군 무기가 북베트남군에 노획되었고, 이 중 일부는 공산국가로 흘러들어간 점 등을 봤을 때[23] 소량이라도 노획품을 제공했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북베트남에게 인계받은 F-5와 A-37을 국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96년에 귀순한 조선인민군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F-5를 조종한 선임을 맞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지원 말고도 심리전 요원 등이 활동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1973년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24] 당시 이집트에 미사일 요원 30명과 전투기 조종사 및 정비사 50명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사람 중 하나가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북한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당시 대좌). 이때 북한 조종사와 군사고문단들은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군 사령관이었던 무바라크는 대통령이 된 후 은혜를 갚기 위해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를 끝까지 지켜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해인 95년 수교 협정에 서명한다.
비동맹회의에 가입한 아프리카의 제3세계의 여러 국가에 80년대부터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리비아에도 북한의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다. 프란스 알버트 레네 대통령 치하의 세이셸에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동남아시아 브루나이와 캄보디아에서 저격여단 요원들이 경호 업무를 수행했다. 파나마나 그레나다에서도 북한 군사고문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미확인.
7.2. 무기 수출
북한은 1960년대부터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무기를 수출(내지 밀매)하고 있다. 1980년대의 전성기 때는 연간 5억 달러가량을 벌었으나, 2000년대부터 국제 사회의 감시가 심해지자 연간 1억 달러 정도로 수입이 줄어들었다. 뉴욕 타임스는 "북한의 무기는 저렴하면서도 위력적이기에 경제가 어려운 제3세계 국가들에게 딱 맞다"고 평하였다. 러시아제도 싸지 않냐는 말이 있지만 이런 것은 러시아군 감축의 부산물인 폐기병기를 밀수한 것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러시아제 무기들은 절대 생각만큼 저렴하지 않다. 러시아도 한때 미국과 대립할 정도의 국가였으니 만큼 제대로 만들면 절대 허접하지 않다. 소련 시절에 혁명수출 차원에서 싸게 넘겨준 사례가 많았을 뿐...
북한이 수출하고 있는 무기들은 딱히 첨단 기술이 크게 필요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적어도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에게 판매할 정도의 성능은 되는 듯하다. 애초에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은 무기의 질까지 따질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북한제 무기가 아무리 최하급이라 해도, 어쨌든 근본은 제대로 검증된 소련제 설계도를 이용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이니 급조 총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성능이 좋을 것이고, 또한 그런 공산품치고 전 세계에서 최고로 싼 가격을 자랑하니 제3세계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에서는,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 치하의 마다가스카르에 고사기관총 등의 무기들을 대여하거나 수출했다. 2007년 1월 비로봉호를 통해 3,400여t의 무기를 콩고민주공화국에 수출했다. 2009년경 콩고를 향하던 화물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임검당해 T-55 전차 부품 등을 압류당했다.
중동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스커드 미사일, 곡산형 자주포[25] 를 이란에 수출했다. 곡산형 자주포 중 일부는 이라크군에 노획되어 이라크 전쟁에 사용되었으며, 최소 2문 이상이 밀수를 통해 한국군에게 넘어갔다. 1987년 4월 이란에 차호급 경비정(80t대) 3척을 수출하였다. 1990년 11월경 타막골호를 통해 시리아에 스커드 C 미사일 80여 기를 수출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에 M-1985 240mm 다연장로켓을 수출하였으며, 이는 이스라엘군과의 전쟁에 사용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이 북한제 140mm 다연장로켓 BM-14를 사용했다. 2009년 미얀마에 M-1991 240mm 다연장로켓을 최소 14문 이상 수출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런 '알려진' 수출 행위 외에도 비밀리에 '수출'을 행하는 경우도 빈번히 있다. 2009년 무기를 수출하려다가 태국군에 의해 압수되었다. 목적지는 이란, 스리랑카, 우크라이나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RPG-7, 맨패즈, M-1985 240mm 다연장로켓, 대포동 2호의 부품 등이 발견되었다.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당시 벌어진 리비아 내전 도중 리비아 정부군이 퇴각하면서 놓고 간 북한산 무기가 잔뜩 발견되었다. 불도저 부품이라는 식으로 위장 포장을 해서 들여온 건데 포장지에 당당하게 북한의 국명이 영문으로 적혀있는 데다가(...) 완제품 무기에도 한글이 적혀있어서(...) 의심의 여지도 없게 되었다.
또한 북한이 헤즈볼라, 하마스를 대상으로 무기 장사를 한다는 게 확인됐다. 기사.
미국의 대북제재가 심화된 근래 상황에서 무기 수출로가 막히자 소말리아 해적에게 연어급 잠수정을 팔아먹으려던 정황도 포착되었다. 판매는 못했지만 가능성이 확인된 셈. 연어급 잠수정은 나름 '''천안함을 격침시킨 놈이다!'''
7.3. 군사 훈련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 치하의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경호여단을 훈련시켰다.
1983년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치하의 짐바브웨에 교관 130명을 파견해 대통령경호여단[26] 을 훈련시켰다. 이 여단이 무가베의 반대 정파에 대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전과 때문에, 2010년에는 일부 짐바브웨 국민들은 북한을 증오하고 있다. 무가베는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2위)와 김정일(3위)보다 더한 세계 최고의 독재자로 선정된 인물로,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을 세계 1위로 만들었다. 짐바브웨는 끝내주는 '''친북 국가'''로, 관공서에는 주체사상 전집이 놓여 있다든가 무가베의 사진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든가라는 흠좀무한 국가다. 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부통령을 위원장에 임명하여 추모위원회를 만들었고, 심지어 매년 김일성이 사망한 달을 애도 기간으로 지정해놓고 행사를 연다고 한다.
IRA, 하마스와 헤즈볼라, 소말리아 군벌 등의 무장단체를 훈련시켰다.
2007년 5월 콩고민주공화국의 정부군을 훈련시켰다.
현재에도 캄보디아의 왕궁 경호원들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7.4. 기술 이전
1994년~1998년경 이란은 북한의 '로동 1호' 개발비 전액과 부품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기술 이전을 통해 이란의 탄도미사일 'Shahab-3', 파키스탄의 탄도미사일 'Gauri'가 만들어졌다.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게도 미사일 기술을 전파하고 있다.
7.5. 외국과의 조약/관계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은 전쟁 상태에 놓일 때 중국이 자동개입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중국으로서도 미국과의 전면적 대립은 피하고 싶은 상황인 만큼 북한이 핵이나 생화학 무기등을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 사용할 시에는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 계속되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인해 북중관계가 나날이 악화되어 중국 내부에서도 "북한을 포기하라" "군사개입 조항을 삭제하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의 교육기관에서 북한군 장교들이 교육 이수를 받는 등 인적교류를 하고 있으며 공공연한 비밀로서 중국의 비공식적인 군사원조 혹은 지원을 받고있다.
특히, 2조 조항의 의미를 많이 상실을 했는데, 제2조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인줘(尹卓)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일 동맹과 달리 북·중 동맹은 군사 동맹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는 등 이 조항은 이미 중국 정부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인줘 소장은 당시 “중국이 북한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느냐. 중국이 북한 인민군을 지휘하느냐”고 반문했다.
1조에서 ‘조약 당사국 쌍방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각국 인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글대로 계속되는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접경지역 주민들이 짜증이 가득하며, 조약에 위배되는 사항이다.
기타로 모잠비크, 리비아, 쿠바, 몽골 등과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그 외에도 미얀마 군사정부와 모종의 관계를 설립했다. 두 국가 모두 서방권과는 왕따된 형편.
러시아는 과거, 소련시절에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을 맺었지만 보리스 옐친이 김일성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대한민국과의 외교 관개 개선으로 소련-북한간 조약을 무효화 시켰다.
7.6. 북한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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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은 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27]
1985년 당시 소련 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 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KBS, MBC,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었으나,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조선일보, 경향신문1, KBS, MBC, 경향신문2)
당시 회견에 대해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 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KBS, MBC)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사용하려 할 경우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며 강력 경고했다.(KBS, MBC)
8. 군복
9. 계급
10. 편제
10.1. 육군
10.2. 해군
10.3. 항공 및 반항공군
10.4. 전략군
10.5. 특수작전군
10.6. 여군
10.7. 준군사조직
10.8. 예술단
군가 목록에 대해서는 군가/북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관련 문서
- 4대 군사노선
- 근위대(조선인민군)
- 북한/대남 도발
- 서해교전
-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우리 영해에 불질이야
- 연평도 포격 사태
- 창격전투
- 천안함 피격사건
- 서부전선 포격 사건
- 한국군 vs 북한군
- 군복/조선인민군
- 조선인민군/계급
- 조선인민군/차량
- 남북통일/군사 문제
- 북한의 핵개발
-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 징병제/북한
- 조선인민군(신문)
- 6.25 전쟁
12. 출처 목록
- 논문
- 함택영, 1997, 「남북한의 군사력 - 사실과 평가방법」, 국제정치논총.
- 최성빈 외, 2005. <북한 군수 산업 개황 보러가기
13. 대중매체에서의 북한군
'''의외로 세계 미디어물에서 자주 나온다'''. 대부분 악의 축으로 등장하며,[31] 각 국가의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인해 중국군이 북한군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32] 현대를 배경으로 등장해 전투를 벌일 경우 엄청난 강군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33] 앞에서 말했듯이 사실 미국이나 서방세계의 가장 큰 적국은 러시아와 중국인데, 러시아는 독재국가지만 민주주의나 자유가 제한적으로나마 있고, 그래도 서양답게 좀 널널한 구석이 있어 자기들이 악으로 묘사되어도 관대하고 그걸 또 수입하기도 하며, 독일과 일본도 2차대전을 다룬 미디어를 잘 수입하나, 중국은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자신들이 묘사되면 수입 금지를 때린다.[34] 그래서 다 만들어놓고 스킨이나 설정, 이름만 바로 북한으로 바꾸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국내 창작물의 경우 북한군을 묘사할 때는 오랫동안 케피 형태의 근무모와 PPSh-41, 이른바 따발총으로 무장한 모습으로 묘사할 때가 많았다. 2004년 개봉한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를 전후해서 이런 클리셰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햇볕정책이 개시된 이후 민주화 세대(60~80년생)들은 북한에 친화적인 감정이 강해지며 북한이 적으로 나오는 미디어에 반감이 강했다.[35] 당시 국내에서 나온 한국전쟁 관련 미디어도 '북한도 사정이 있었다', '얘들도 나쁘진 않았고 미국이 더 나쁘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90~2000년생들부터는 북한이 적국으로 나오는 미디어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국내에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성향 드라마, 영화 등지에서 잘생긴 미남 조선인민군과 남한 여성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클리셰화되었다. 이런 멜로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사실 소련 등 구 공산권 국가 출신의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선/악역을 막론하고 말쑥하고 유능한 미남/미녀로 묘사한 사례는 흔하다. 007 시리즈가 그 예.
13.1. 영화 및 드라마
- 강철비
- 강철비2
- 공동경비구역 JSA
- 007 어나더데이
- 솔트
- 스폰
- 레드 던#s-2
- 백악관 최후의 날
- 천군
- 태양의 후예, 용의자 - 회상으로 짤막하게만 나온다.
- R2B: 리턴 투 베이스
- 연평해전
- 창공에 산다
- 꿈☆은 이루어진다
- 공조
- 6.25 전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
- 6.25 전쟁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
- 사랑의 불시착
- 더킹 투하츠
13.2. 만화 및 애니메이션
13.3. 게임
- 홈프론트 [36]
- 홈프론트: 더 레볼루션
- 크라이시스
- 콜 오브 듀티: 어드밴스드 워페어
- 워게임: 레드 드래곤
- 로그 워리어
- DMZ North Korea
- 모던 컴뱃 3: 몰락한 제국[37]
[1] 1993년부터 사용된 육군 군종기이다.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로농적위군, 전략군, 특수작전군 군종기는 깃발에 쓰여진 문장은 같으나, 군종 상징 색과 도안이 각각 다르다.[2] 각각 창건 직전인 1947년 12월부터 1948년, 1948년부터 1981년 1월 7일까지 사용된 깃발이다. 인공기 도안을 바탕으로 하여 별 대신 북조선인민위원회(당시는 북한 건국 이전) 및 북한의 국장이 그려진 형태이며, 당시에는 근위대를 제외하면 육군, 해군, 공군 3군 공통으로 해당 도안의 군기를 사용하였다.[3]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북한군 병력은 많이 쳐주어야 70만 정도라고 주장한다.#[4] 정확히는 북한 정부의 인구 부풀리기에 대해 폭로하면서 함께 언급했다. http://m.hani.co.kr/arti/politics/defense/723231.html?_fr=gg#cb 학자들의 추정치도 주성하의 그것과 비슷하다 [2021년] 2월 들어 기존 군 의무 복무 기간을 남성 10년에서 8년으로, 여성 7년에서 5년으로 감축한다고 한다. 군 규모가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mbc뉴스(5분 17초부터 확인 가능) : https://youtu.be/OmhQot8nUSg [22p] [5] 북한군 창건 이전인 1946년경에 제정되어 태극기가 폐지되고 인공기로 국기가 변경된 시기인 1948년 7월까지 사용된 군사휘장으로, 당시 인민군의 휘장, 인민군모의 모표, 만경대혁명학원의 전신인 혁명자 유가족학원의 모표로 사용되었으나, 태극무늬가 비과학적이라는 소련의 판단으로 태극기와 함께 폐지되었다.[6] 이상우 『북한 40년: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337[7] 한자로 풀이하면 北韓 傀儡軍[8] 공교롭게도 이들과 대치 중인 국군 또한 5군단이다. [9] 주의해야 하는 것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연이어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군 조직을 축소시켰다. 이에 50년 당시 주한미군은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한국에 지형도 모르는 불상사까지 겹치면서 낙동강까지 밀렸다. 이후 다시 재건된 부대들이 투입되면서 제대로 된 전쟁을 하나 싶었지만 중공군의 공격에 또 다시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하였다.[10] 화북에 있던 조선의용군 출신과 만주에 숨어서 저항하던 소수의 독립군들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은 이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11] 정확히는 1944년에 업그레이드 된 T-34/85[12] 1949년 1월 인민군 제2 군관학교로 개편되었다.[13] 1948년 12월 제1 군관학교로 개편되었다.[14] 물론 그 이전에도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뿌리로 하는 조선의용군이 존재했지만 이건 다른 군대다. 이들이 광복 후 북한에 돌아와서 연안파를 형성한다. 조선의용군의 주요 인물들이 바로 김두봉과 김무정이다.[15] 최고사령관 직책과 더불어 조선로동당 내 군부 통제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직도 겸한다.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때 직함을 총사령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6] 김일성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인민무력부장이 최선임 군인으로 중국의 국방부장과 비슷하였는데, 김정일시대가 되면서 총정치국장이 우선 순위가 되었다.[17] 명색은 북한의 정부수반이다.[18] 한국의 국방연구소에 상당하는 기관이다.[19] 사진에는 'Hyong Yong-chol(형영철)'로 오타가 나 있다.[20] 의무가 아니라는 것뿐 군대를 다녀와야지만 공산당에 입당 자격이 생기고, 출세를 하든 시집을 잘 가든 뭘 좀 하려면 당원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원입대하는 여자들이 꾸준히 존재하긴 했다.[21] 같은 남녀징병제인 이스라엘은 복무기간이 남자 3년가량, 여자 18~24개월가량이고 이나마도 전체 징병 가능 인구의 50% 수준만 징집하기에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조건이 널널하다.[22] 비행 연대 2개[23] M16 소총은 입수 루트가 워낙 다양하긴 하지만 북한도 상당량을 가지고 있다. 국군으로 위장해 침투했다가 703 연대와 조우했을 때 위장한 부대가 갖고 있지 않은 M16으로 무장했던 탓에 공비라는 것이 들통나 실패했던 적도 있을 정도...[24] 욤 키푸르 전쟁[25] M-1978, M-1989[26] 폭풍여단 또는 짐바브웨 제5여단.[27] KBS, MBC, 조선일보,또한 당시 김정일은 "북한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북한이 망하면 세계와 함께 자폭하겠다는" 극언을 내뱉었다고 황장엽은 증언하였다. 또한 당시 북한 당국에서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미국에 포탄하나 떨어진 적 없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다르다"라며 "미국에도 북한군이 상륙할 수 있다"라고 주민들에게 선동하고 있다며 증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경향신문[28] 그 외에 해군과 공군의 사령부 직속인 해군사령부협주단과 공군사령부협주단이 있으며, 준군사조직 중에서도 인민보안부와 조선인민내무군 직속의 협주단과 취주악단이 활동하고 있다. 기타 군단, 사단급 부대에도 약간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예술소조-한국의 동아리 개념-활동을 겸하는 공연 단체를 두고 있으며, 각 단위의 경비소대/중대에는 소규모 군악대가 조직되어 의장대 역할도 겸하고 있다.[29] 문제는 '폭풍호' 떡밥 등을 볼 때 이 책에 대한 신빙성이 0에 가깝다. 일단 저자부터가 사기 치고 중국으로 도망친 양반. 따라서 포병, 기갑 부분의 상당 부분은 제외했으며, 북한군 내에서 상식적일 것 같은 부분만 게재했다.[30] 김정일 유모이던 강보비의 조카. 김일성의 외사촌 친척이며 강성산 정무원 총리의 사위이기도 했다. 장성택 실각설 이후에 교수 직함으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비롯한 종편에 자주 출연하고 있다.[31] 사실 당장 미국의 대통령들이 공화/민주 안 가리고 북한을 악으로 묘사한 바가 적지 않다. 트럼프를 제외하면 미국의 최근 대통령들은 북한을 항상 비판하고 경계했었기 때문.[32] 중국을 악당으로 묘사하면 중국 시장 수출길에 아예 닫혀버리거나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홈프론트처럼 무리수를 둬서라도 바꾸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33] 현실의 열악한 북한군을 그대로 반영해 등장시키면 쉽게 털릴 것이 뻔하기에 긴장감을 위해 일부러 1류 군대도 쩔쩔매는 강군으로 묘사하는 것. 크라이시스에선 미국이나 개발할 만한 첨단 강화복을 만드는 사기국가로 묘사된다..[34] 사실 이는 한국 전쟁을 다룬 미디어가 세계적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엔 잊혀진 전쟁으로 취급했다지만 현재는 존재감이 커졌지만, 한국 전쟁은 시작은 남한VS북한이었지만 점차 미국+UN VS 중국+소련으로 옮겨가며, 현대 중국이 서방국가랑 대놓고 싸운 전쟁인데다, 중국은 현재 UN 상임이사국 소속인데 한국 전쟁은 당시 중국이 UN을 어기고 침략국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역사왜곡 및 미화에 걸림돌이 된다.[35] 사실 현재 30~40대(당시 70~80년대생)들은 운동권의 사상에 감화되며 남북 화해무드를 경험하고 민족주의에 고취되면서 이전부터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 더 나쁜 주적'''이라는 여론이 강했다. 그리고 2020년대 현재에도 그 생각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세대가 인구수가 많아서 세계 반중/반미 여론 조사에서 유독 이 구간에서 타국과 다른 여론(친중, 반미)이 크게 집계되는 경우가 많다.[36] 처음에 초기에는 중국군이 였다가 게임 시장과 항의에 변경했다고 한다.[37] 명목상으로는 러시아 군벌과 파키스탄 테러리스트와 함께 연맹군을 맺고 미국을 침공한 건데 사실상 북한군의 비율이 압도적이라 사실상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