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1. 함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근
2. 통영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근


1. 함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근


성명
박영근(朴永根)
생몰
1885년 9월 15일 ~ 1910년 7월 23일
출생지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
사망지
대구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영근은 1885년 9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8월 23일 전해산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가담하여 호군장을 맡아 군수품을 조달·운반하는 치중(輜重)을 담당했다. 또한 1908년 9월 26일 영광군 불갑산에서, 10월 9일 영광군 장본면 석문 안에서, 11월 3일 적량면에서, 22일 광주군 대치에서, 25일 장성군 자인곡에서, 26일 순창군 내동에서, 12월 8일 삼남면 낭월산에서, 21일 식지면 대안촌에서, 1909년 5월 4일 영광군 육창면 묵동에서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 및 경찰관과 교전하였다.
1909년 5월 28일 전해산이 의병을 해산하자, 그는 그 중 30명을 규합하고 보병총 1정, 화승총 16정, 그리고 다량의 화약과 탄환을 휴대하고 독립 의진을 구성하였다. 이후 6월 8일과 14일 함평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6월 19일에는 영광군 불리면 건두산에서 일본 수비대,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이후 7월 16·17일까지 영광·장성·광주·무장·나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쳤던 박기춘(朴基春)과 김기순(金基順) 등을 1908년 10월과 11월에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1월 영광 불리면 건두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체포되었고, 광주지방재판소에서 1910년 6월 3일 유죄 선고를 받고 공소했지만 1910년 7월 21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교수형을 확정받은 뒤 7월 23일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등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통영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근


성명
박영근(朴英根)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95년 12월 13일 ~ 1968년 6월 18일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동문동
(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1]
사망지
경상남도 통영군
추서
건국포장
박영근은 1895년 12월 13일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동문동(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1926~1927년 경남 도평의원(道評議員)을 재임하던 김기정(金淇正)이 "한국인은 교육이 불필요하며 한국어 통역을 철폐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에 박영근은 1927년 3월 경남 통영에서 박봉삼·박종한 등 10여 명과 함께 친일파 김기정에 대한 시민징토대회를 주최하여 시민들에게 김기정의 매국 발언을 고발하는 한편 김기정의 사퇴 및 추방운동을 전개하고 김기정의 집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는 등 군중집회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박봉삼·박한종 등 1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1927년 5월 규탄문을 배포하는 한편 수천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시민대회를 개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8.15 광복 후 거제경찰서 제3대 경감을 맡아 1948년 1월 16일부터 1949년 2월 3일까지 재직했으며, 이후엔 통영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영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도천동·동호동·문화동·명정동·정량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시인 박경리의 본적이 이 마을이며, 독립유공자 박성일·박태규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