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사회와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성과 생명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2. 생애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현 통영시 문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2]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으며 홀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3] 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에 대한 분노는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렇다 보니 이후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었다. 소박 맞은 모친이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 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 학창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고등여학교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 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거제 출신의 김행도[4] 와 중매 결혼하고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경리는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한 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정식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경리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 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고등여학교 선배였던 김동리의 부인네 집에 친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말해버리면서 본의 아니게 박경리의 글이 김동리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 당시 박경리는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상(想)은 좋지만 아직 (완성은) 안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5] 당시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며 친구를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계속 작품을 가져와 보라고 말했고, 이후에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던 시기였는데,[6] 습작을 들고 문예 살롱을 찾아오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경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고,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살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일어나고 부터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안 하겠으니 자신이 제출한 원고를 모두 돌려 달라고 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김동리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 문학[7] ' 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는다. 박경리가 제출했던 습작들 중 '불안지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원고를 김동리가 가지고 있다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수록된 '현대 문학' 지를 우연히 '''자기 작품이 수록된 줄도 모르고'''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못 알아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추천을 두 번 받아야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첫 추천을 받고 부터 비교적 늦은 편인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다시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박경리는 이후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밝히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불신시대'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6,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장편 소설을 많이 썼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 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 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박경리는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해왔던 당대의 한국 작가들과는 다르게 예외적으로 장편을 많이 쓴 작가로서, 그가 쓴 장편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20여 편에 이르고, 특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은 명작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표류도,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등을 썼는데, 나머지 장편 소설들의 경우는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박경리는 1958년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한 다음 다음날 또다시 화재라는 액운을 만나 사과 궤짝의 살림 살이나마 다 날려버렸다. 그때 마침 딸아이는 중학교 입시의 시기였으므로 울었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박경리는 글을 쓰고 또 써서 “영화 원작료다, 인세다, 원고료다 하며” 돈을 벌었다. 박경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구러 하는 동안 나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디다 쓴 일도 있지만 소설가란 내게 천직이었던 모양으로 나는 어떤 직장이든 붙어있질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박경리를 걱정했다. “김말봉 선생님께서도 신문사를 그만둔 일을 꾸중 하셨고 내 자신도 어쩔 참인지 다만 막막하기만 했다.” 박경리는 이른바 ‘인기’나 ‘출세’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학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의심과 자문자답은 나를 허황하게 흩뜨려 놓고 보다 깊은 고독과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는 경향을 짙게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 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 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 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 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1969년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써냈다. 사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집필에만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 장편 소설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토지를 집필하던 중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딸이 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15일 밤 9시 40분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는데, 김훈의 수필 중에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8] 라는 제목으로, 김지하 시인이 풀려났던 그날 추운 겨울 바람 속에 생후 10개월 된 손자[9] 를 업고 나와 택시를 대절해 놓고 사위를 기다리던 박경리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글로 담아낸 소품이 있다. 하지만 김지하는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 온 차를 타고 가버려 길이 엇갈렸다고. 김지하가 석방된 2월 15일은 백기완 시인도 함께 석방되었는데, 교도소에서 백기완이 6년 전에 국민투표 법 위반으로 벌금 10만원 형을 선고 받은 전과가 있는데 그걸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고 하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금 모금을 하는 와중에 교도소 정문 앞 광장까지 와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내서 옆에 있던 대학생에게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며 준 다음 대절해온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2003년 토지에 이어지는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현직 대통령인 이명박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 문화 훈장을 직접 추서 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이었다. 5월 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랜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 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 먹어도 파 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박경리는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10]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는데, 그 때 박경리가 살던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그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미래캠퍼스 내의 청송관(인문예술대학 건물) 옆에는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청송관 내부에는 북카페 토지 라는 공간이 생겼다 북카페 안에는 박경리의 유품 일부도 전시되어있다.
사후인 2011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1회 수상자인 최인훈을 시작으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응구기 와 티옹오(케냐) 등이 수상했다.
3. 작품 목록
3.1. 장편소설
- 토지
- 애가
- 표류도
- 성녀와 마녀
- 은하
- 내 마음은 호수
- 푸른 운하
- 노을진 들녘
- 가을에 온 여인
- 그 형제의 연인들
- 김약국의 딸들 : 196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녹지대
- 파시
- 시장과 전장 : 196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타인들
- 영원한 반려
- 나비와 엉겅퀴
- 창
- 단층
3.2. 단편소설
3.3. 기타
- Q씨에게
- 원주통신
- 생명의 아픔
- 가설을 위한 망상
- 일본산고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4. 일본 문화의 파시즘성 비판
박경리는 반일주의자였고 일본 문예지의 편집장과의 인터뷰 당시에 자신을 '반일 작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일본 학생들이 방문했을 시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12]
일본의 문화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유고집 중에 《일본산고(日本散考)》라고 하여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는 서적이 나온 바가 있다. 1편 '증오의 근원'과 2편 '신국의 허상'은 각각 200자 원고지 25장 안팎으로 완성본이나 3편 '동경 까마귀'는 13장으로 미완인데 딸 김영주에 의해 정리되어 2013년에 발간되었다. 당시는 한일 관계가 냉각되어 있던 시점이어서 김영주 씨가 공개를 결심했다고 한다. 발간 시점에서 15년 전 글로 추정된다고 한다. 박경리는 일본산고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 외에도 전쟁에 대한 일본의 양심에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언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높은 문화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문화는 인류의 공유물이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이 문화인가, 우리 본래의 인성과 생명을 바탕으로 한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기능적 통제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쾌락적 부패의 인자를 가득 실은 것에 문화라는 상표를 붙인 것, 과연 그것은 문화인가 하고 말했습니다.[13]
[14]
박경리는 김용옥과 나눈 대화에서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김용옥에게 '일본은 야만'이라고 주장했다.나는 일본의 양심에 기대한다.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 하여 테러를 당한 시장이라든가 왜곡된 자기 저술을 바로잡기 위해 재판을 건 학자라든가 다나카 씨와 함께 신동아에 글을 쓴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같은 분, 그 밖에도 진실을 말하는 여러분이 계신 줄 안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그런 양심이 많아져야 진정한 평화를 일본은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끝으로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都身勢, 우두머리의 처지) 걱정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얘기는 일본의 경우일 수도, 우리의 경우일 수도 있다.
진리는 아름답고 선하다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진리이며 선하다, 선한 것은 진리이며 아름답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문학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갇혀버린 사회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선함도 진실함도 결여되어 있고 오히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합니다. 하라키리(切服)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복합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대담에서 박경리는 일본문화를 '''야만적이고 가냘픈 센티맨탈리즘에 불과한 로맨티시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자살밖에 답을 찾지 못한다면서 노골적으로 일본문화를 비판했다. 다음은 그 일문일답의 일부를 적은 것이다.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그녀의 소설 토지가 일본에서 반일문학으로 치부된다는' 답변으로 왜 자신이 반일인지 말하였다.'''박경리''': 김 선생!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칼싸움의 계속일 뿐 입니다. 뼛속 깊이 야만입니다.
'''김용옥''': 아니, 그래도 이미 나라, 헤이안 시대때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깊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모노노아와레'같은.
'''박경리''': 아~ 그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에서 말하는 사비니 와비니 하는 따위의 정적인 감상주의를 말하시는군요. 그래, 그런 건 좀 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하지요. '''그러나 그건 일종의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에요.''' 선이 너무 가늡니다. 너무 미약한 일본역사의 선이지요.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입니다.
스사노오미코토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1892~1927), 미시마(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1925~1970), 가와바다(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 1899~1972)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시티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탈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걔들에겐 호랑이도 없구, 용도 다 뱀으로 변합니다.[15]
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일본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 연령의,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 일본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두 없구요. 일본은 정말 야만입니다. 걔들한테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주의도 없어요. 걔들이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운운하는 국수주의류 민족주의도 모두 메이지(明治)가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zed savages)이지요.''''''김용옥''': 나쯔메 소오세키(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1867~1916)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 나쯔메 소오세키요? '''그 사람은 표절작가입니다.''' 구미문학을 표절해 먹은 사람일 뿐입니다. 모리 오오가이(모리 오가이, 森 鷗外, 1862~1922)가 조금 괜찮긴 하지만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다 있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를 못 볼 뿐이지요. 아니, 우리나라 사학자들이구 민족학자들이구 문인들이 무식하게 유종열(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1889~1961) 같은 '''사쿠라 새끼'''를 놓고 걔가 조선을 좀 칭찬했다고 숭배하는 꼬라지 좀 보세요. 이거 정말 너무 한심헙니다. 아니 걔가 뭘 알아요. 조선에 대해서 뭘 알아요. 걔가 조선 칭찬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근본적 멸시를 깔고 있는 거예요. 걔가 어떻게 조선의 위대함을 압니까?
김용옥은 박경리 어록을 도쿄대학 중국철학과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에게 전달한다. 오가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탓테이루(들어맞는 말이다!)"
일본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 저서 <일본산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일본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 군국주의는 자체로 비도덕적이고 반생명적이었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무엇보다 나는 일본 체제를 반대하지만 일본인을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한편 산문집 '생명의 아픔'에서 일본인을 '''그동안의 일본의 행적에 비하여 단순하고 소심하며 범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 간에 일본과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평했다.[16] 이런면을 종합하면 박경리 선생의 반일작가로서 자의식은 그 실체를 뒤집어 보면 현대적 가치관에서도 지극히 합리적인 차원의 반군국주의, 반전체주의, 생명주의 사상을 그 시대를 살아온 생증인으로서 역사적 부각시키기 위해 '''반일작가'''를 강조했던 걸로 보인다.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영화 마지막 황제의 등장 인물 아마카스를 연기한 경험을 회고하며, 파시스트들이 통념과는 달리 문화적으로는 매우 세련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박경리의 일본 문화 비판은 군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산 증인으로서, 세련된 겉모습에 숨은 파시즘의 야만성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 여담
- 본인의 사상인 생명운동에 대해서 “생명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사조가 나와야 돼요. 사람도 살고 지구도 살리는 일입니다. 내가 인간을 지구의 악성 바이러스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핵무기가 생존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시장에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런 필수품보다는 없어도 될 게 더 많잖아요. 그게 지구를 병들게 하는 거죠. 자원을 고갈시키고. 작가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생명과 생존이 첫째고 정치나 예술은 둘째입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 토지가 완성되자 완간 기념식을 하기도 했다. 1994년 10월 8일 작가의 단구동 집에서 대하소설 완성을 경축하는 잔치 마당이 올려졌다. 이 잔치판에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참석했다. 1992년 대선 때 보여준 건강은 아니었으나 남의 부축은 사양한 채 잔치판에 걸어 들어왔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청계천 복원에 관해서 관계가 껄끄러웠다. 박경리는 본래 청계천 복원사업 계획에 찬성 의사를 표명했었는데 후에 청계천 복원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변경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찬성 의사를 취소하고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 박경리가 문단에 갓 등장한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어느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리던 날, 그가 한 말은 이러하다.
- 영향을 받았던 국내외 작가나 작품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나는 토종이라 외국문학에서 영향을 받을수는 없었어요. 20세 때까지 한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럴 여건도 못 됐구요. 다만 몸에 밴 경상도 사투리가 기둥 역할을 해서 두만강변이나 전라도 사투리도 유리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감각적인 기억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경지로 치면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토머스 울프는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라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달라는 질문에는 "후배문인들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가져야 하고 자기 자신에겐 무자비해야 합니다. 특히 상업주의나 기능에 물들지 말아야 하며 나르시시즘은 문학성의 장애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준이 허물어지고 리얼리즘에 손상이 되니까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작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해. 인간의 본질, 인류의 운명을 고민하는 게 작가가 가는 길이야. 극도의 민족주의에 기대서는 훌륭한 예술이 나올 수 없어."라고 말했다.#
- 박경리는 생전에 어느 강연장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미발표 유고 시 ‘일 잘하는 사내’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거친 풍파를 헤쳐온 삶에 대한 아픔을 진솔하게 토로했다. 일부 청중은 당시 박경리의 대답을 듣고 흐느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본관 뒤 동양학부 건물 옆에 박경리의 동상이 2018년 6월 20일 세워졌다. 2017년 상반기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이 들어간 강좌가 개설된 데 이어 국내 작가의 동상이 해외에 세워진 건 매우 이레적이다. 이것은 2013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슈킨 플라자’에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동상이 세워진 것에 대한 답례이자 한러 우호를 높이는 문화 교류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동상에는 박 작가의 시 <삶>의 마지막 시구인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가 한글과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인터뷰에서 "환경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실 생리적인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뭔가 인공적인 것에는 적응이 잘 안됐어요. 부안 사건은 지역 이기주의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지구적인 문제입니다. 어느 쪽의 주장대로 해결이 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원자력 폐기물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땅에 묻든 묻지 않든 폐기물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원자력발전을 중단하는 것밖에 없어요. 근원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지금 중단해서 마무리될 일이 있고 이미 늦어서 되지 않을 일이 있는데, 지구의 단계가 어디쯤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난화 현상을 보면 시기를 놓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들고요. 한국은 아직까지 성장과 경쟁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데, 난센스예요. 멸망을 재촉하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앞으로라도 모든 생산품을 고급화하고 사람들이 아껴 쓰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싸구려 상품을 많이 생산해 쓰고 버리니까 쓰레기가 많이 쌓였습니다. 돈이 들더라도 고급품을 생산해 1년 쓰던 것이면 한 10년 쓰게 해야 쓰레기가 줄어듭니다. 그럼 실업자가 걱정이라고요? 남는 인력을 환경 인력으로 돌리면 됩니다. 이런 얘기는 뭐, 내 사견이에요. 이 정부에서 꿈이나 꾸겠어요. 그야말로 탁상공론이지."라고 말했다.# 또 "환경 문제를 아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2004년 SBS판 드라마 토지에 대해서 "첫 회는 봤는데 그 뒤로는 안 봐요. 내용이 너무 달라서…"라고 평했다. 또 “‘의관(衣冠)집 자식’을 위관(尉官)집으로 바꾸어놓았어요. 옛날에 위관이라는 벼슬은 없어요. 그러니까 의관집은 옷과 갓을 갖춘 양반집이라는 뜻이에요. 벼슬이 아니거든. 위관이라고 자막 설명이 틀리게 나왔어요. 그런 망신이 어디 있어요.”라고 부정적인 평을 했다.
- 굉장한 헤비스모커로 유명하다. 통영시 남망산에서 이루어졌던 문화 행사에서도 공적 시간 이외에는 담배를 손에서 놓질 않았다고.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에세이 속에서도 언급된다. 담배때문인지는 몰라도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서 “정치와 문학 이야기는 묻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는 얼굴이 필요 없습니다. 작품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죠. 문학 작품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작가가 이러쿵저러쿵 해명을 하는 것은 작품이 미진하다는 뜻이죠. 나는 문학에 관해서는 인터뷰를 하지 않고 생명과 환경에 관한 인터뷰라면 응합니다. 내 작품을 읽고 마음대로 상상하라는 거죠. 굳이 내가 해명할 필요가 있겠어요.”
- 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에 따르면 소설가 오 아무개(원문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았음)가 국어대사전을 통째로 외우겠다고 도전하고 나섰다는[17]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사람 왜 그래? 딱하기도 해라.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낮잠이나 자고 공상이나 더 하라고 해 주지.[18] "라고 하셨다고 한다.
- 위에 언급된 김원보 씨는 90년대 말 PC 통신에서 엑시드맨이라는 판타지 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다. 시대를 상당히 앞서간 작품으로써 원고량이 꽤 쌓였기에 2000년 초부터 출판 계획은 있었다고 하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별 소식이 없다.
- 김지하는 인터뷰에서 박경리에 대해 "역사(歷史)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내가 여쭙고 박 선생이 답을 했는데 경상도 전라도 지리산 등등 민감한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혹시 공산주의자인가 싶어 은근슬쩍 물었더니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었다. 나는 작가들 중에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보았다."라고 말했다.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