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철(독립운동가)

 


성명
박용철(朴容喆)
생몰
1904년 1월 22일 ~ 1976년 3월 26일
출생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중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용각의 동생이다.

2. 생애


박용철은 1904년 1월 22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원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철원읍에서 이해종과 함께 동창생들을 이끌고 철원읍 서문거리에 인솔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다음날인 11일에도 시위대를 이끌고 철원역에서 기차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당시 16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철원애국단 조직에 참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독립운동 선전, 임시정부 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으며, 한인으로서 일본 관직에 있던 자들에게 탈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원지역에 200매의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는 등 서울서 제작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2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4년 11월경에는 청년동맹회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3월 26일 상해 3·1당에서 한인청년회가 창립되자 그는 감사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9년 상하이 한국교민단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의정원 회의에서 염온동·염석락(廉錫輅)과 함께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항주(杭州)에서 부활된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여, 기관지 진광(震光)의 발행에 관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45년 충칭에서 김구에 의해 국내 연락대표로 선임되어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해 철원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문과 장티푸스에 시달리다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풀려났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6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용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