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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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염온동(廉溫東)

추정(秋汀)
본관
파주 염씨[1]
생몰
1898년 5월 1일 ~ 1946년 1월 24일
출생지
강원도 김화군 군내면 읍내리
(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사망지
중국 충칭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상하이
2.3. 난징
2.4. 충칭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염온동은 1898년 5월 1일 강원도 김화군 군내면(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에서 만석꾼이었던 아버지 염문우(廉文雨)와 어머니 밀양 손씨 손문(孫文) 사이의 4형제[2]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업에 임했고 1910년 김화군의 공립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내의 비밀결사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상하이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금화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그는 1921년 4월 28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외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조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독립운동단체와 교류했고,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4년 2월에 개회된 제12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그는 의원 사직원을 제출해 승인받았다. 그가 의원을 그만둔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후 그는 2년간 자신의 직장에서 근무할 뿐 조용히 지내다가 1926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15명의 준비위원들과 함께 7월 9일과 15일 두차례의 준비위원회를 개최해 경제후원회 회칙 등을 마련했다.
1926년 7월 19일,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경제후원회 회칙이 창립총회에서 통과되었고, 염온동은 이유필, 임필은과 함께 회계검사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6년 12월에 중국돈 대양(大洋) 5원을 임시정부 재무부에 애국금으로 납부했다. 이듬해 1927년 12월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염온동은 12월 5일에 중국본부 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엄항섭, 김기진 등 10명과 함께 상하이지부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염온동은 청년동맹회와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며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의 통합을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던 1931년 12월 24일, 그는 제23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강원도 출신 의원으로 보선되어 1935년 11월 2일에 제28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2주간 임시의정원에 계속 불참했다는 이유로 해임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을 정리하는 기록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하면서 어떤 발언을 하고 법안을 제안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2.3. 난징


1932년경, 염온동은 한국혁명당에 가담했다. 한국혁명당은 신익희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각 기관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들과 상하이 한국독립당에 불만을 가진 인사들로 세력을 결집하여 결성한 정당이었다. 그는 성주식, 연병호 등과 함께 주요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상하이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난징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유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932년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상하이에서 활동하기에는 일본군의 감시와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난징으로 피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934년 2월 한국독립당이 만주에서 건너온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했다. 이후 염온동은 신한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신한독립당은 의열단, 한국독립당과 함께 세력을 나란히 했고 1935년 7월 의열단 및 한국독립당 이탈 인사들과 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그 후 그는 민족혁명당 인사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2.4. 충칭


1940년 10월, 염온동은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해 대한광복군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 6월 6일엔 군무부 총무와 과장으로 선임되었고, 1944년 9월 10일엔 군무부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군무부 총무과장 겸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서 맡은 소임을 책임지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을 맞이한 후, 염온동은 중국에 남아있는 광복군을 귀국시키고 교민들의 안전한 귀국을 도모하기 위해 충칭에 남아 잡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1월 충칭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48세.[3]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염온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8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동정공파-물금-천길계 24세.[2] 염만동(廉滿東)·염진동(廉震東)·염연동(廉演東)·염온동(廉溫東).[3] 아들 염낙원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병을 얻어 한동안 끙끙 앓으시던 부친이 주무시던 중 사망하셨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