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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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자혜(朴慈惠)
생몰
1895년 12월 11일 ~ 1943년
가족
남편 신채호
자식 장남 신수범 차남 신두범
출생지
경기도 고양시 또는 양주시
매장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상면 신채호 묘소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신채호를 만나다
2.4. 남편을 정성껏 수발했으나....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자혜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의 저서 <산각자 단재 신채호>에 따르면, 박자혜는 1893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박자혜는 1936년 <조광> 잡지에 기재한 '신채호 제문'에서 자신이 1920년에 신채호를 만났을 때 24세였다고 증언했고, 1936년 <신가정>과의 인터뷰에서 1895년생임을 밝혔다. 이로 볼 때 그녀가 1895년생인 것이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또한 그녀의 아들 신수범은 1977년 3월 18일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포상신청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엔 박자혜가 경기도 고양시 출신이라고 기재되었다.
그녀의 부친은 박원순으로 중인 출신이며,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박자혜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했다. 그녀가 궁궐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글, 소학 등 기본적인 글을 공부하면서 바느질이나 요리, 빨래 등을 익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대한제국 왕실은 이왕가로 격하되었고, 박자혜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이후 그녀는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 기에과에 입학해 수신, 일어독본, 습자, 조선어급 한문, 산술, 가사, 재봉, 양재, 자수, 조화, 편물, 도화 등을 익히고 1914년에 졸업했다.
박자혜는 숙명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한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간이생리학, 간이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웠다. 1년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은 그녀는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다. 조선총독부의원은 대한제국의 대한의원을 개칭한 조선총독부 직속병원으로, 초대원장은 일본 육군 군의감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이고 강원영, 오일상을 제외한 모든 고위 간부들이 일본인이었고, 간호사들도 대다수가 일본인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챙겼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2.2. 3.1 운동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한 후, 한반도 전역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인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여기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국내에 전해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세계 열강에 한민족의 독립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학생들과 일반 대중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만세 시위는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었고, 만주와 연해주, 하와이 등지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독립만세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들었고, 이로 인해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총독부 의원 역시 부상자가 연이어 후송되었는데, 당시 그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간호원은 박자혜를 비롯한 18명이었고 남자 의사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연구가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나라를 잃고 일제에게 당하기만 하는 민초들의 설움에 공감했다. 박자혜는 이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와 연계해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했다. 이후 그녀는 피부과의 김형익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함께 일하는 한국인 간호사들을 3월 6일에 옥상에 데려가서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과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간호부는 4명이었고, 박자혜는 그들과 함께 3월 10일에 만세시위에 가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박자혜의 움직임에 대한 밀고를 접수하고 그녀를 "과격한 말을 하고 다니는 사나운 여성"으로 기록했다. 결국 그녀는 체포되어 유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한 덕분에 풀려났다. 이후 내과 김용채, 소아과 권희목, 산부인과 김달환, 연구과 김영오, 외과 신창엽 등 남성 의사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의원을 떠났고, 간호사 4명 역시 직장을 관두고 떠났다. 박자혜도 더이상 일제를 위해 산파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만주에 있는 지인에게 길림성에 있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치도록 한 뒤 2주간의 휴가를 얻자마자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 열차를 탔다. 그녀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우응규를 찾아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웅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줬고, 20일 후 베이징의 친지에게 그녀가 연경대학에 편입하는 걸 부탁한다는 편지 한통을 보내고 노자를 마련해줬다. 박자혜는 즉시 봉천을 떠나 베이징으로 갔고 1919년 4월 또는 5월에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2.3. 신채호를 만나다


연경대학 의예과에 다니던 박자혜가 신채호와 처음 만난 때는 1920년 봄이었다. 당시 신채호는 1910년 4월 국내를 떠난 후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봉천, 베이징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4월 10일 1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부조직 및 인선을 결정했다. 이때 신석우, 조완구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신채호는 반대했지만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걸 허용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승만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박용만에 의해 전해지자, 신채호는 이승만을 격렬하게 비판한 후, 1920년 상하이를 떠나 그해 4월 베이징에 도착했다.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에 착수하던 중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박자혜와 만났다. 이때 신채호에겐 아내 풍양 조씨가 있었지만, 아들 신관일이 우유를 잘못 섭취해 사망하자 아내와 심하게 다툰 후 그녀를 친정으로 보내버린 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박자혜는 신채호의 청혼에 응했고, 두 사람은 베이징의 금십방가(錦什坊街)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이때 신채호는 아내에게 자신은 가정을 등진 남편이니 섭섭해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박자혜는 1921년 음력 1월 첫 아들 수범을 출산했다. 그리고 1922년 둘째 아들을 임신했는데, 신채호는 아내와 자식들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임신한 아들은 유산되었거나 태어난 지 며칠 안되어 사망해서 이름이 따로 붙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셋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했다.
박자혜는 국내로 돌아온 뒤 시내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했고,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 했다. 1926년 12월 인천에 잠입한 나석주가 서울로 상경해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려 했을 때, 박자혜는 서울의 지리가 생소한 그를 물신양면으로 도와줬고, 나석주는 그녀의 도움에 힘입어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한개 씩 투척한 뒤 일본 경찰들의 추격에 맞서다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나 그녀의 독립운동은 1928년 남편이 대만으로 가던 중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면서 끝났다.

2.4. 남편을 정성껏 수발했으나....


박자혜는 지인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방 한 칸을 얻어 큰아들 수범과 함께 살았다. 1936년, <신가정> 기자는 박자혜가 살아가는 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개외집들 틈에 어깨도 펴지 못한 채 옹구리고 있는 어느 초가집 대문 밖에 걸려 있었습니다. 중문턱을 들어서서 안방을 향하고 박자혜씨를 찾었드니 뜻 밖에도 등 뒤 아랫방문 열리며 부인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예상은 하엿거니와 부엌도 마루도 없는 아래채 한 칸 방에 너무도 쓸쓸하게 지내는 여사의 얼굴을 참아 바라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렇듯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아간 그녀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남편으로부터 너무 추워서 견디기 어려우니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그녀는 매달 6원 50전의 월세를 내지 못해 집 주인의 독촉을 받으며 살았으며, 신채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영양실조로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또한 산파업이 제대로 안 돼서 아들과 함께 풀장사, 참외장사, 노점상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전국에서 그녀를 후원하고자 자금이 전달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곤궁한 처지를 해결하기엔 부족했다.
게다가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아내이자 과거에 한국 간호사들의 만세시위 및 동맹파업을 주동했던 그녀를 감시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일본 경찰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이러한 간섭 때문에, 수범은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는 일본 경찰에게 갖은 모욕과 폭력을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1931년 신채호가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두 책의 값이 오십원에 달했기에, 그녀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지만 그 역시 사서 보내지 못했다. 그 후 신채호는 더이상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1934년 박자혜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여사 방문기'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신채호씨가 전형적인 학자이신 만큼 부인의 그 후 생활에는 그렇게 관심은 안가지셨을 것이겠고, 또한 학자로서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는 서책을 차입치 못한 것에, 오해를 품기도 쉬운 일이다. 학자라 할 수 없고나.

박자혜는 그래도 입에 풀칠하나마 자식들을 정성껏 돌봤고 신채호의 10년 옥살이를 수발하며 남편이 석방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서에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박자혜는 수범과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급히 와서 신채호를 만났지만, 남편은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사망했고, 박자혜는 2월 24일 '노조마열차'로 유해를 싣고 귀국했다. 이후 그녀는 집에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심의 심정을 토로했다.

대련이 오죽이나 추웠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해외로 떠났고,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홀로 셋방에서 살다가 1943년 어느 날[1] 세상을 등졌다. 향년 4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자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