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우

 


1. 중구(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신석우
2. 의병장, 신석우


1. 중구(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신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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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석우(申錫雨)
자 / 호
헌민(獻民) / 우창(于蒼)
본관
고령 신씨[1]
생몰
1895년[2] 9월 2일 ~ 1953년 3월 5일[3]
출생지
한성부 남부 훈도방 수표교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사망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신석우는 1895년 9월 2일 한성부 남부 훈도방 수표교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에서 아버지 신태휴(申泰休)와 어머니 광산 김씨 김태현(金泰鉉)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태휴는 구한 말 무관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과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다. 그는 1915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 출신 이용우(李用雨)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했을 때 계원으로 참여해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유인신문(油印新聞)인 <아등(我等)의 소식>을 발간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며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새 국가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의원 다수가 '대한민국'을 찬성해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그는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國務院)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 의원자격심사위원(議員資格審査委員) 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 뒤 귀국한 그는 1924년 1월 서울에서 최린·김성수·송진우·안재홍·조만식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부친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자금8만 5000원으로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상무이사를 역임했고, 뒤이어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7년 이상재가 별세하자 제5대 사장에 취임했다.
신석우는 사장으로 취임한 뒤 이상협을 고문으로, 민태원을 편집국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르포르타주식 고발기사를 연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다. 1927년 7월부터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새 연재 ‘국경 순사의 독백’은 국경지역에서 벌어진 일본 경찰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그 포악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8년에는 문자보급운동을 개시하고 1929년 7월 제1회 남녀 학생문자보급반 요원을 공모해, 고향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한글 철자법 강좌’를 연재하고, 한글원본을 4만부 발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에는 한글원본 9만부, 31년에는 30만부를 배포했고, ‘한글기념가’와 ‘문자보급가’ 현상공모, ‘춘계 문자 보급반’ 강좌 개설 등으로 운동의 활력을 이어갔으며, 소설가 심훈이 조선일보에서 '상록수'를 연재하도록 했다.
1927년 2월 안재홍·김준연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된 뒤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그해 7월 상하이로 탈출했다. 이후 중국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귀국했고, 1949년 8월부터 대만의 주 중화민국 대사를 1년 4개월 동안 역임했다. 이후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3년 3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의병장, 신석우


성명
신석우(申錫雨)
생몰
? ~ 1908년 12월 30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전라남도 남원군 북흥면 하조동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신석우는 1908년경 유종여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해 전남 남원군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 12월 30일 남원군 북흥면 하조동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에 의해 체포된 뒤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소안공파 24세 우(雨) 항렬.[2]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9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