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재필은 1884년 7월 12일 경상도 고령현 우촌면 야정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에서 시골 유생으로 1880년(고종 17) 생원시에 급제한 박기열(朴璣烈)[2]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에서 3.1 운동이 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진동에 사는 박영화와 함께 고령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차천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을을 일주한 시위대는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밤 12시를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일제 경찰은 주동 인물 박재필과 박영화를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체포된 박재필은 1919년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고령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6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재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