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화(1880)

 

성명
박영화(朴英華)
본관
고령 박씨[1]#
생몰
1880년 1월 13일 ~ 1952년 3월 2일
출생지
경상도 고령현 하미면 도진동
(현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2]
사망지
경상북도 고령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영화는 1880년 1월 13일 경상도 고령현 하미면 도진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박재필과 함께 우곡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박차천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이어 마을을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을을 일주한 시위대는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밤 12시를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일제 경찰은 주동 인물 박재필과 박영화를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는 1919년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고령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2년 3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영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부창정공파 24세손 영(英) 항렬.[2] 고령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경회·박기로·박쌍암·박영순·박영우·박정렬·박채환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