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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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킨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치의는 1904년 평안북도 선천군 신미면 삼봉리(현 선천군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되던 1919년, 3.1 운동 당시 그는 고향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다니면서 만세시위를 목격하였고, 민족 독립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에 뜻을 품었다.
1920년 8월 4일, 그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런 기회에 민족의 의사가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마침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파견된 제3대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미국 의원단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선천역 및 선천경찰서 등지에 폭탄을 던진 후 만세시위를 다시 일으켜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렬한 희망이 있음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을 듣고는 이에 적극 찬동하여 구체적인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이 늦어졌고, 미국 의원단이 선천군을 통과하던 시기에 계획을 실행치 못했다. 그 직후 결사대원들과 재차 상의하여 같은 해 9월 1일 결사대원 중 한 사람이 선천군청의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폭탄을 투척하는 한편[4] , 그는 새벽 3시경 선천경찰서로 가서 동행한 이학필에게 밖에서 망을 볼 것을 상의하고 폭탄을 던져 경찰서 건물 일부를 파괴했고, 그 직후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5][6] 등 몇 종류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일단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동지 및 의거에 가담한 선천군 지방 유지들 20여명과 함께 9월 7일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는 주범으로서 자수했다. 근 1년간의 재판 끝에 1921년 7월 2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때 그는 재판정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돌연 일어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크게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쳐 방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1921년 9월 30일 평양형무소에서 '나는 다만 조국을 위하여 죽을 따름이다'고 말하며 성경을 외고 찬송을 부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외부 링크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92년 8월 2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죽산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만채·박병익#s-1·박천규·박치조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24년 9월 30일생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폭탄이 불발되어 실패하였다.[5] 제목은 '적국의 관리에게 고함'이었으며, 그 내용은 '우리는 천하의 대의(大義)와 국가의 위급을 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분투하거늘 너희는 원수의 매(鷹)와 개가 되어 도리어 같은 동포를 해하니 너희가 만일 지금에 그만두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 사정없는 벽력의 불이 너희 머리 위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는 일찍이 주의하여 한편으로 너희 목숨을 보전하고 한편으로 너희 자손을 위해 속속히 사직하고 나오라' 등이었다.[6] 다른 격문에는 '재산가의 의연(義捐)을 청함'이란 내용으로 그 끝에는 '대한민국 2년' '광복군총영'이라는 서명 날인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