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익

 


1. 선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익
2. 서흥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익


1. 선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익


성명
박병익(朴炳翼)

파산(波山)
본관
죽산 박씨
생몰
1890년 3월 12일 ~ 1921년 1월 6일
출생지
평안도 선천군 신미면 삼봉리[1]
(현 평안북도 선천군 삼봉리)
사망지
선천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병익은 1890년 3월 12일 평안도 선천군 신미면 삼봉리(현 평안북도 선천군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공부했고, 1919년 3.1 운동이 선천군에서 벌어질 때 각 고을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독립신문>을 비롯한 선전문 등을 배부하고 군자금을 모금했다. 1919년 9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했고 서무부원 지응진(池應振)의 지도를 받아 선천에서 동단의 지부로 선천청년단(宣川靑年團)을 주도·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이후 동지 규합에 힘써 단원이 100여 명에 달했으며, 그는 전용석(田龍錫)·박치흠·박만채·박천규(朴天圭)·김경두·김용채(金龍采)·계창림(桂昌林) 등과 함께 1920년 4월까지 1,2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선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월 6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병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서흥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익


성명
박병익(朴炳益)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93년 5월 21일 ~ 1978년 5월 21일
출생지
황해도 서흥군 내덕면 상석리[2]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병익은 1893년 5월 21일 황해도 서흥군 내덕면 상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4일 김응률(金應律)·김제원(金濟元)·박병건(朴炳建) 등과 함께 내덕면 하석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해 150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주했고 1978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병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죽산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만채·박천규·박치의·박치조도 이 마을 출신이다.[2]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병건박병삼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