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끼 사건

 


1. 개요
2. 사건 경위
3. 재판과 그 이후
4. 관련 작품


1. 개요


ひかりごけ事件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홋카이도에서 일어난 식인 사건. 사건의 명칭은 소설가 타케다 타이쥰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쓴 1954년작 단편소설 <반짝이끼(ひかりごけ)[1]>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건을 가리키는 별도의 공식 명칭은 없다. 굳이 명명하자면 '난파선 선장 인육식(人肉食) 사건' 정도로 부를 수 있겠다.[2] 또한 식인 관련 사건으로는 최초로 실형이 선고된 사례이기도 하다.[3]
다만 사건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맞으나, 후술될 이유들로 인해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입소문을 통해 전해진 부분이 상당히 많다.

2. 사건 경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일본 제국 육군 소속의 징용선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홋카이도 오타루로 향하던 도중 시레토코곶(知床岬)[4] 인근 해역에서 풍랑으로 인해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징용선에 탑승한 선원 7명은 배에서 탈출하여 시레토코 반도의 페킨노하나(ペキンノ鼻)[5]라는 바위곶에 가까스로 도달했으나, 혹독한 홋카이도의 한겨울은 실로 견디기 힘든 악조건이었다.
선장 A(당시 29세)는 도중에 다른 선원들과 떨어졌지만 초소로 추정되는 작은 오두막을 발견하여 일단 그곳으로 피했다. 얼마 후에는 선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B(당시 18세)도 눈보라를 헤치고 A가 있는 오두막에 도달했다.[6] 두 사람은 이후 근처에 있던 다른 오두막으로 옮겨가 한동안 그곳에서 지냈으나, 극단적으로 굶주린 상황에서 점차 체력이 소진되어 더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B는 굶주림과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B가 사망한 뒤 A는 살아남기 위해 '''죽은 B의 시체를 먹는''' 끔찍한 선택을 하고 만다. 애초에 탈출 당시부터 최소한의 비상식량조차 챙기지 못했던데다 이들이 있던 장소 주변에는 민가가 없었기 때문에 A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남은 A는 이듬해인 1944년 2월 인근의 라우스 마을(羅臼町)[7]에 사는 한 어부의 집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A를 두고 사람들은 '기적의 병사'라며 치켜세워 주었으나,[8] 경찰과 군 내부에서는 A가 살아 돌아온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점과 A의 석연치 않은 언동을 근거로 식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기 시작했고[9] 일부 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1944년 2월 18일 경찰은 A가 처음 도착했던 페킨노하나에서 현장검증을 실시, 북부에서 당시 선원 중 한 명(취사 담당 인부)의 동사한 시신을 발견하여 회수했다. 그러나 군부 측이 경찰에 함구령을 내리면서 수사는 중단되었고, 5월에 접어들어 A가 겨울을 났다고 알려진 오두막의 소유주가 오두막 근처에서 사과 상자에 담긴 B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백골을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페킨노하나 북부에서 2명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선원 2명의 행방은 끝내 찾지 못했고, 이 2명에 대해서도 식인이 의심되었으나 A는 이를 부정했다.
A는 동년 6월에 살인 및 사체손괴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선원 1명의 시체를 먹은 사실은 인정했으나 살인 혐의는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3. 재판과 그 이후


검찰은 A를 사체손괴 혐의로 기소했다. 일본 형법상 식인 관련 처벌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식인에 관한 시시비비는 가려지지 않았으며, 8월에 A에 대해 극한 상황으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가져올 법도 한 사건이지만, 언론에는 사건 관련 보도가 전혀 되지 않았으며 당시의 재판 기록이 모두 파기된데다[10] 그나마 남아 있던 수사 기록마저도 전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 때문에 이 사건은 이후에 덧붙은 무수한 억측과 소문들이 사실인 양 전해지게 되었다. 전후 라우스 향토사에 난파선 사건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내용의 상당 부분이 팩트보다는 지역민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데다, 전술된 관련 자료 소실까지 겹쳐서 지역민들의 증언과 실제 사건의 일치 여부를 충분히 검증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타케다 타이쥰의 <반짝이끼>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소설의 내용이 실제 사실로 잘못 알려졌고, 결국 A가 선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인육을 먹었다는 설까지 마치 정설인 양 널리 퍼지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A는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린 상황에서 식인을 했다는 사실은 명확히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식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는지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람을 먹는 짓을 한 내가 고작 징역 1년이라는 가벼운 처벌로 끝날 리가 없다", "나는 사형을 당해도 모자라다"는 등 평생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식인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절벽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 페킨노하나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4. 관련 작품


사건 명칭의 유래이기도 한 타케다 타이쥰의 단편소설. 1992년 쿠마이 케이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며, 단 이쿠마에 의해 2막의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작중에서 실제 사건의 A에 해당하는 인물의 재판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의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기 때문에 이 재판 장면은 작가의 완전한 창작이다.
[1] 죄를 지은 사람의 머리 뒤에는 빛나는 고리가 나타난다는 작중 설정에서 따 온 제목으로, 한국에는 201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작중에서 아사 직전의 상태가 된 선원이 선장의 머리 뒤편에 빛의 고리가 떠 있는 모습을 보고 "옛날부터 사람 고기를 먹은 자에게는 머리 뒤에 빛나는 고리가 나타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듣기로는 그 빛이 '반짝이끼'를 닮았다더라"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반짝이끼는 동굴 등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자라는 이끼의 일종으로, 평소에는 발견하기 어렵지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빛나는 모습이 달리 보인다는 점에서 유래하여 일부 창작물에서는 '죄인의 증표'로 묘사된다.[2]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속칭 '도가니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유사한 맥락.[3] 다른 식인 사건으로 치치지마 식인 사건도 있지만 이쪽은 전쟁범죄라는 특수한 사례인데다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살해해서 인육을 먹은 상황이고, 반짝이끼 사건의 경우는 후술하겠지만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은 사례기 때문에 같은 식인 사건이라도 동일선상에 놓기에는 어폐가 있다.[4] 홋카이도 동부에 위치한 곶. 지명은 아이누어로 '땅의 끝'을 의미하는 '시리에토크(シリエトク)'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인근 시레토코 국립공원 내의 특별보호구역인 관계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어 일반 관광객은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고, 우토로항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이나 관찰 선박을 타고 해상에서 관람해야 한다.[5] 아이누어로 '밝은 곶'이라는 뜻의 '페케레 놋(ペケレ・ノッ)'에서 유래한 지명.[6] 나머지 선원 5명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소설 '반짝이끼'에서는 생존자가 선장을 포함한 4명으로 묘사되나, 이는 작가의 창작이다.[7] 시레토코 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마을로 지명의 유래는 '짐승의 뼈가 있는 곳'이라는 뜻의 아이누어 '라우시(ラウシ)'. 실제로 라우스 마을 일대는 과거 아이누족의 사냥터이기도 했다.[8] 하지만 A의 실제 신분은 군인이 아니라 징용된 민간인이었다. 육군 징용선 선장이라는 점 때문에 군인으로 알려진 듯.[9] A는 후에 오두막 안에 아주 약간의 미소 등이 남아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정황상 처음에는 이것을 먹으면서 버티다 이마저 떨어지고 B가 사망한 뒤 그 시체를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10] 위에서 언급된 군부의 함구령 때문으로 추정된다. 다만 후에 재판 기록의 사본이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