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방한민은 1900년 1월 16일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 북촌리(현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에서 아버지 방규석(方圭錫)과 어머니 조현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방달주(方達周)는 선략장군과 종2품 용양위부사과를 역임하였고, 백부(伯父)인 방관석(方觀錫)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양반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 방규석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 임술 농민항쟁 시기에 태어나 조선 고종 22년(1885년) 무과에 합격하여 이후 해방영(海防營) 간역(看役)에 임명되어 토목공사 감독을 맡았다가 상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기도 했다. 1908년 민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면민들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한일병합 이후에도 15년 동안 강경면 및 성동면장을 맡았다. 방규석이 1926년 1월 논산군수 후지이에 의해 사직권고를 받았을 때, 성동면 주민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부당한 사직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며 면장 유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방한민은 천성이 온순하고 영특했으며, 다섯 살 때 서당에서 수학했고 여섯 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과정을 마치고 보습과 2년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공주농림학교(현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졸업한 후 수원권업모범장(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약 1년간 잠업을 공부하고 실습했다. 그는 19세에 김해 김씨 김현규의 딸 김한배(金漢培)와 결혼했고 슬하에 독자 방준영(方駿榮)을 낳았다. 1919년 동경에 있는 니시하라(西原) 잠계 전문학교에 유학했으나 몸이 아파 학업을 포기하고 1년 후 고향으로 되돌아와 요양했다. 그는 3.1 운동 후 사회주의 이론서들을 접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자로 변모했다.
2.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
1920년, 방한민은 서울에 상경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그는 조선일보의 사회부 기자로서 최국현, 홍덕유 등 반일사상이 투철한 젊은 엘리트 기자들과 더물어 반일기사를 작성했다. 또한 그의 형 방한승은 동아일보 창립 기자를 맡았고, 동생 방한호는 중외일보 기자를 맡아서 방씨 3형제가 모두 기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방한민은 일제의 문화정치가 매우 위선적이라고 생각했고 일제와 친일 부역자들의 죄악상을 가차없이 폭로함으로서 민족의 가슴에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0년 6월 9일자 기사에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심각(深刻)된 대혈한(大血恨)의 진수(眞髓)>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방한민은 이 기사에서 '왜놈'이라는 표현에 강조점을 찍으며 일제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 기사를 비롯해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시리즈르 10회 연재했지만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 총독부는 그가 쓴 기사를 문제삼아 조선일보사에 발행정지를 수차례 명했다. 그러나 방한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1920년 7월 12일 3.1 운동 관련자 48인의 공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되자 무기명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일찍이 일본 군마의 발굽에 함부로 짓밟힌 조선 민중은 누구누구할 것 없이 모두 일본 군인을 두려워하였고 총과 칼을 무서워하였다. 그뒤로부터 일본정부는 군인을 내어 보내 당시의 통감부로 하여금 조선 전체의 땅덩어리를 한 손에 주무르고 저신민족 전체를 총끝과 칼끝으로서 주무르려 하였다. 조선민중은 눈물을 흘리며 발발 떨기를 오래하였다. 우는 아이가 울 때에 아이고 '''왜놈''' 온다 한 것이 울음을 그치는 오직 한가지 모책이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만 보아도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아이고 '''왜놈'''하고 달아난다. 그러한 것을 보더라도 능히 알바이거니와 그동안에 일본사람이 총과 칼로서 조선민족을 쓸어 죽이려 한 것은 밝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라. 총과 칼로서 인도와 정의로 삼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말할 수 없이 조선 민족을 학대하고 조선민족을 멸망케 하려 하였다.
이어 7월 14일자부터는 48인의 심문 모습을 생생하게 게재해 일제의 강압적인 재판 진행을 폭로했다. 그러자 일제는 발매금지를 내렸고 조선일보는 반포 금지를 당했다. 그 후에도 방한민이 계속 일제를 비판하는 사설을 싣자, 결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조선일보사 발행인을 호출해 배일색체의 기자 축출을 강요했고, 방한민, 최국현 등 3명의 조선일보 기자가 해직되었다. 그 후 1921년, 형 방한승의 도움으로 동아일보 편집기자로 입사한 그는 그곳에서도 반일 색채가 짙은 기사와 논설들을 정력적으로 게재했다. 그는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친구여'를 게재했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압수당했다.작년(1919년) 3월 1일 선명한 빛 아래에서 정의와 인도를 이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다가 그대로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오늘까지 신음하여 오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 이하 48명의 공판이 진행되었다. (중략) 푸른날 검정구름 한 조각에서는 눈물인지 핏방울인지 굵은 물 몇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일본 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속에 서리고 서린 담화와 가슴이 아프고 쓰린 심정을 충분히 토로케 하라. (중략) 아! 일본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터놓고 말하고자 하노라. 한일병합 후 과거 10년간에 그대는 총독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중략) 조선 전도에 그물 늘어놓듯 하였던 저 유명한 '헌병제도'는 무엇을 의미하며 조선 전체에 자갈을 물려 일언반구의 심사를 면치 못하게 하였던 저 유명한 '언론탄압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우리는 솔지갛게 말하노라. 이 모든 것은 곧 조선인이 당시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말한 까닭이며 불평의 폭발을 막고자 한 까닭이라 하노라. 그러나 타는 불을 옷깃으로서 가리울 수 있으며 흐르는 물을 손으로 막을 수 있는가? 이 불평은 곧 폭발되고 말았도다.
2.3. 문화신문 창간
방한민은 자신의 기사가 일제에게 계속 저지되자 보다 강력하게 투쟁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일본 도쿄에 건너갔다. 그는 1922년 4월경 니혼대학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해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공부했다. 그는 아침에는 신문배달 및 우유배달을 해 학비를 벌고 낮에는 대학을 다니면서 뜻을 같이하는 유학생들을 모아 '문화신문'의 창간을 준비했다. 방한민은 정창선 등 10여 명과 함께 1921년 6월 15일 경 월간지 <문화신문>을 창간했는데, 그 내용은 '민족성 철학으로 본 조선문화의 장래', '교육의 혁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니가타현 신월 전력회사가 1921년 겨울부터 시나노가와에서 동양 최대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던 중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가 붙들린 조선인 노동자 100영을 학살한 이 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국내와 일본에 있는 조선인 사회단체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고, 1921년 1월 조직된 서울 청년회는 김사국을 보내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방한민 또한 <문화신문>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보도하게 했고, 조선 유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조직해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에 일제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문화신문의 발행 정치 처분을 내리고 방한민을 "공산주의적 사상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이유로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다. 결국 그는 일본을 떠나야 했다.
2.4. 동양학원
1922년 12월 일본을 떠나 국내로 돌아온 방한민은 한동안 아내와 아들 방준영과 지냈지만 1923년 1월 초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그는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이념이 혼재되면서 복잡한 사상적 분화가 일어나고 있는 베이징의 분위기에 그다지 매료되지 못했고, 좀더 구체적인 항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북간도 용정으로 옮겼다. 용정에 도착한 그는 대성학교에서 교사를 맡았지만 일제가 대성학교를 폐쇄시키자 뜻을 같이하는 김정기, 김사국 등과 함께 대성학교의 졸업생들을 모아 동양학원을 설립했다.
방한민은 동양학원내에 사회주의 선전부와 군사부를 조직하고 1923년 8월 12일에서 13일경 일제가 개산툰-용정 사이에 부설한 천도강편 철도 개통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 총독을 암살하고 용정, 국자가 등에 있는 일본영사관과 공관 및 일본 은행 등을 폭파해 일제의 통치기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이를 신호로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내부자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국내로 소환된 뒤 1923년 12월 24일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판결문을 듣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그는 이어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방한민은 소란을 피운 죄가 적용되어 10일간 편지와 책을 읽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청진에서 복역하다가 1924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독방에 수감되어 다른 죄수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대전형무소는 방한민에 대한 신상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했다.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조선사람을 공판한다는 이 자체가 무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본인들은 마치 한일합방이 두나라 백성들의 호의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다. 이건 합병이 아니라 '병탐'인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짓밟는 곳에 자유가 어디에 있고 평등에 어디에 있으며 선정이 무엇이란 말인가?
신상표는 또 그가 술을 마시지 않고 종교를 믿지 않으며, 독서를 즐기고 사리 판단이 명석하고, 정치적으로도 드물게 보는 온후하고 과묵하고 자만하지 않으며, 또한 일어에 숙달하고 중국어는 회화, 통역 등 유창하며, 영어는 번역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상 평이한 회하는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쓰여 있다. 1924년 4월 4일 조선일보는 '간도사건수령 방한민 신음중' 이란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교육에 대한 사항: 본 기간 서양사, 문예부흥사, 영문 성서 등을 탐독함. 교육에 관해서 항상 서적을 열동하는데 태만하지 않고 본 기간 근대문에 12강 및 영문일역 연구서 등에 취미를 가지고 있음. 교육은 항상 자습 독서에 노력하며 본 기간 진종성전, 일본외교사, 심리학 강의 등을 탐독함.
방한민의 고향인 논산군 강경면 주민들은 이 기사를 읽고 그의 가출옥을 위한 진정운동을 벌였다. 조선일보는 1926년 11월 27일자에 '방한민군 가출옥을 대전형무소에 진정'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실었다.재작년 간도사건의 두령으로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지금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방한민은 금년 1월 이래로 소화불량으로 병감에서 신음중이라더라.
1927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장은 법무국장에게 "지난해 11월 30일 논산군 강경면의 김재형 등 211명, 올해 6월 4일 동면의 박대동 외 108이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보고했고, 1928년 2월 3일 강경면 경찰서장은 대전형무소장에게 방한민이 가출옥의 은전을 받도록 운동 중에 있는데 이미 약 200여 명의 은전을 받고 있으며, 1,000여 명의 조인을 받아서 대전형무소장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결국 대전형무소장은 이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28년 5월 18일 조선총독에게 "방한민의 가출옥을 허가해 주실 것을 바라나이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이리하여 방한민은 형기를 1년 3개월 남겨둔 1928년 6월 2일에 행집행정지로서 출옥했다.간도 용전촌에 있던 동양학원의 강사로 투쟁조직을 가오하하고 각 관공서 등을 파괴하여 요인을 암살하려던 음모가 그 지방 영사관에 발각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의 판결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영 중인 아성 방한민군을 위하여 강경면 유지 일동은 여러가지의 비참한 그 가족의 생활을 들어 형무소 당국에 진정하고 다시 그의 가출옥이라고 될까하여 2백여 명의 연서로 27,8일 경에는 대전형무소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할 터이라더라.
2.5. 재투옥
방한민은 출옥 후 조선일보에 와서 근무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바로 승낙해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929년 6월 12일 새벽 조선 공산당 재건을 꾀했던 안상훈을 비롯한 16명이 당국에게 체포되었을 때, 방한민은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역시 체포되었다. 1929년 6월, 경성 종로경찰서는 관계 피의자 86명을 7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관할 검사에게 송치했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1년 10개월이 지난 1931년 4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고, 방한민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다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7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7년 10월에 출옥했다. 방한민은 모진 고문과 13년간의 감옥 생활로 인해 정신이상자가 되어 서울 대방동에 있는 정신이상자 수용소에 들어가 수감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2.6. 실종
방한민은 1946년 2월 15일 서울 종로2가 YMCA 대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무소속으로 참석했다. 또한 수원농과대학에서 잠사농업을 강의했고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서울 동대문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떠났지만, 이후 실종되었다.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법원은 1968년 2월 9일에 그를 사망 처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방한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