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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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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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59ac><colcolor=#fff> '''관향'''
경상북도 상주시 가은읍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원시조'''
염제 신농씨
'''비조'''
방뢰(方雷)
'''시조'''
방지(方智)
'''중시조'''
방운(方雲)
'''집성촌'''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원정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대원동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설봉리
평안북도 정주시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읍 부거리
'''인구'''
80,445명(2015년)
'''링크'''
온양방씨중앙종친회
1. 개요
2. 기원
3. 상세
4. 분파
5. 항렬자
6. 시조묘, 집성촌
7. 인물
7.1. 관련 문서
8. 여담


1. 개요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방씨의 대부분이 온양 방씨로, 방씨 중 모 방() 자를 쓰는 방씨는 온양 방씨 뿐이다. 현재 한국 내 인구 80,445명으로, 1985년에는 75,290명이었는데, 2000년에는 64,128명으로 줄었다가, 2015년에는 다시 80,445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인구 감소로 다른 성씨들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과 대비된다.
방씨는 온양 방씨 이외에도 남양 방(房)씨(27,454명), 개성 방(龐)씨(851명) 등이 존재한다.

2. 기원


중국 염제 신농씨의 8대손인 유망황제(楡罔皇帝)는 장남 뢰(雷)에게 사패지를 주어 중국 허난성 방산현(方山縣)에 봉했다. 이때 방산현의 '''방(方)''' 자를 따와 성씨로 삼으니, 기원전 2357년[1], 방뢰(方雷)가 방씨의 비조가 되었다.
온양 방씨의 시조인 방지(方智)는 방뢰의 134세손이며, 당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신라 문무왕 9)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설총과 함께 육례 구경의 대지를 밝힌 동방유학의 한 사람이다. 그 후 장씨와 결혼하고 가유현(嘉猷縣, 현 경상북도 상주시)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상주를 본관을 사용했고, 방지의 6세손인 방운(方雲)이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시조인 방지로부터 방운(方雲)까지는 문헌이 없어져서 방운(方雲)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족보에서 자신이 몇세손인가 셀 때는 이 사람으로부터 세면 된다. 시조 방지로부터 세자면 +6을 하면 된다.
상주 방씨, 신창 방씨, 군위 방씨는 모두 온양으로 합본되었다.

3. 상세


신라 경애왕 3년(926년) 견훤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략하여 서라벌은 물론, 방씨의 본관이던 상주 역시 큰 화를 입게 된다. 수도와 상주에 살던 방씨들이 이 때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했고, 가까스로 당시 10살이던 방운(方雲)은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유랑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왕건의 휘하로 들어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광종 14년(963년)에 좌복야[2] 에 제수되는데에 이어 성종 13년(992년)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며 온양, 아산, 신창의 세 고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고, 방씨가 사는 산을 배방산(拜方山, 방씨를 우러러보라)이라 명명했다.[3] 이렇게 되면서 본관이 상주에서 온양으로 옮겨졌다.
고려말 온천부원군 밀직원직학사 국서 방언휘가 재택을 보호하기 위하여 배방산성 성곽을 축조하였고 그 내부 동북변에는 온수군의 유택이 녹봉되었다.
이렇게 중시조의 고생과 노력 덕분에 후손들은 고려왕조 내내 호족으로 분류되어 잘 살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방씨는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된다. 17세손인 방강(方綱)은 김종서의 손녀 순천 김씨과 혼인하였는데, 세조계유정난 때 그 일족이 단종 옹호세력인 김종서 편에서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씨를 숭배한다고 명명한 배방산을 방씨를 증오한다 하여 숭배할 배(拜)자를 배척한다는 배(排)자로 고치고 배방산(排方山)이라 개칭토록 하였으며 방씨제위의 관급등분을 강등시키고 온수군 이하 기타 누대에 걸친 묘역과 산성 저택들을 파괴하고 묘 비석물들을 철페하고 일족들을 멸하기까지도 하였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조선조에서 유명한 방씨는 찾아보기가 힘든 듯 하다. 그 후 숙종조에 온수군의 후손인 양무원종 3등공신 사과 방최일이 산성의 명칭을 다시 배방산성으로 돌려달라고 상소하였으나 왕은 선대왕께서 정한 것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지만 단지 排方의 方자를 芳(꽃다울 방) 자로 인준하라는 답변을 얻는데 그쳤다. 그 후 지금까지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4. 분파


12세
13세
문정공 방우선
文定公 方于宣
장암공 방서
莊岩公 方曙
판서공파
判書公派
간의대부 방현
諫議大夫 方玄
간의공파
諫議公派
안렴사 방훤
按廉使 方暄
안렴사공파
按廉使公派
군위군 방적
軍威君 方迪
태상경공파
太常卿公派[4]
방우번
方于蕃
방가달
方可達
대장군공파
大將軍公派
방득세
方得世
평장사 방신제
平章事 方臣悌
광록대부공파
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 방신우
上洛府院君 方臣佑
상락부원군공파
上洛府院君公派
판서공파가 온양 방씨의 대종을 이룬다.

5. 항렬자


31세
○호(浩), ○순(淳), ○처(處)
32세
동(東), 재(栽), 진(鎭)
33세
○문(文), ○용(容), ○원(源)
34세
찬(瓚), 효(孝), 정(楨)
35세
○석(錫), ○종(鍾), ○혁(爀)
36세
제(濟), 승(承), 규(圭)
37세
○식(植)
38세
병(炳)
39세
○배(培)
40세
호(鎬)
41세
○태(泰)
42세
병(秉)
43세
○열(烈)
44세
기(基)
45세
○현(鉉)
46세
해(海)
47세
○래(來)
48세
희(熙)
49세
○주(周)
50세
용(鎔)

6. 시조묘, 집성촌


수정구 태평동 숯골에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의 15대손 관찰사 방순(方恂)이 처음 살았는데, 방순은 고려말 절의를 지킨 사람으로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하다가 붙잡혀 황해도 금촌에서 죽임을 당했다.[5] 방순의 차녀가 남경문(南景文)에게 출가하면서 숯골에 남씨와 사돈지간이 되고 남씨네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원구 상대원동 보통골에 정몽주 문인으로 상주목사를 역임한 보통(普通) 방유량(方有良)이 정착한 이래 그 후손이 세거하는데, 보통골[보곡동(普谷洞)]은 ‘보통이 사는 골’에서 유래한다. 방유량은 숯골[炭里]에 은둔하였던 방순의 3남인데, 보통골에 분가하여 후손이 세거함으로써 방씨 취락을 형성하였다.
명경과(明經科)를 통해 주서(注書)에 재임 중이던 방이복이 선조 조에 당쟁을 피해 아우인 방이영과 더불어 충청남도 온양으로부터 영천의 오지산곡(五芝山谷)(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로 이거(移居)하였다.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응모가 이곳 출신이다.

7. 인물



7.1. 관련 문서



8. 여담


  • 천방지축마골피: 흔히 조선시대 상놈(천민) 성씨로 알려진 천, 방, 지, 축, 마, 골, 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조선시대 관리직에 오른 문헌이 널렸다는 점을 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09년, 일제가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주었는데. 천민들은 당시 인구가 많던 성씨로 숨어들었다. 그 천민들은 '천방지축마골피'라는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철저히 숨었다. 일본에서도 부라쿠민이라는 천민이 존재하였다가 신분제 철폐로 평민 계급에 흡수되었지만, 그들이 사는 지역이 유지되어 아직까지 구분이 가능하고 차별을 받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광복하고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황폐화되고 관련 문서는 사라지고 사는 곳이 뿔뿔히 흩어지면서 옛 천민의 구분이 불가능해졌다. 이를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의 사회적 순기능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지금도 어느 정도 찾으려면 찾겠지만 전국민중 과거 조상이 천민이었던 비율이 어느정도겠나. 누구도 환영하지 못하는 조사가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방씨라는 건 과거 천민일 확률이 유명 성씨와 비교해 매우 적음을 의미한다.
  • 2010년대 현재 인구 약 9만여명으로, 성씨 순위는 54위에 해당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성씨에 속하는 편이다. 여타 희귀한 성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방씨들끼리 만나면 너무 반가워한다.

[1] 기원부터 따지자면 기원전 24세기까지 올라가는 상당히 오래된 성씨에 속하며, 고조선 건국부터 세는 한국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 한국에서만도 신라 문무왕 때 시작되어 1400년 넘게 보전되고 있으니 한국의 성씨들 중에서도 오래된 편이다.[2] 지금으로 따지자면 부총리, 조선시대로 따지면 좌의정 정도 된다.[3] 아마도 국가 원로로서 꽤 대우를 받았던듯 하다.[4] 군위 방씨(軍威方氏)라고도 한다.[5] 그의 묘는 전의 인하병원 자리에 부인과 합장되었다가 성남시 개발로 1969년 이장했다. 이장 당시 부인의 유골은 흔적이 있으나 방순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고, 유물만 있는 것으로 보아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장(衣葬)으로 지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