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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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다.
2. 생애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아전의 서자로 태어났고 아명은 응구.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2] 괴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팼다는데 그 이유는 그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3]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4] 하면서 남접의 전봉준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동학군이 시망한 후 최시형과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으로 피신해 지하조직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한 후 도통을 실질로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곧 청으로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했다. 이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한편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에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서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조직이나 다름 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그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정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곧 합방주의자로 변신한 때 손병희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놀, 이용구와 갈등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패거리들을 자르고 조직을 분리한다. 출교당한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고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 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3. 여담
- 손병희는 조선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자기 소유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자동차가 심지어 캐딜락이었다. 참고로 이 캐딜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의 캐딜락과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술할 소문에 비추어볼 때, 천도교 자금으로 꽤나 호화롭게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캐딜락에 관한 일화가 또 있는데 운전석하고 유리벽으로 분리가 되어있는 리무진 버전[5] 이어서 운전자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한 별도의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 손병희의 일화 운운 나온 것은 일제 당국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 계간 '역사비평'에서 3.1 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나 분석을 따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나 기관지에서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나 손병희와 기독교 선교사들 간의 밀착류였다. 전자야 당연히 흑색선전 목적이 짙었고 후자는 3.1 운동의 배후 세력을 기독교계 반일 인사들로 초기에는 봤다는 이야기인데 당대 현장 증인인 윤치호가 3.1 운동에 쓴 일기에 "사이비 교주 손병희가 순진한 사람들 재산 털어먹으려고 독립운동한다고 나서는구나!"라고 쓴 걸 보면 일제가 퍼트린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6] 다만, 윤치호가 '독립운동이 쓸데없이 (시간 → 행동력을) 낭비하는 인생'이라고 비판하는 쟁점을 보며 고려해야 한다.
- 신복룡 교수가 일제의 이런 자료를 분석하고 여러 후일담을 넣어서 어느 신문에서 "3.1 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올렸다. 주제는 민족 대표 33인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이런 손병희의 행각과 민족 대표의 전원 변절[7] 을 들어 비판한다는 점. 문제는 그 신문에서 삽화를 기생이 민족 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천도교 쪽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단행본에서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 한때 방송에서 민족 대표 33인을 희화화한 인터넷 강사 설민석과 유족회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설민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를 하였으나, 유족회는 설민석의 방송 출연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재판부는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또는 수여받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지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고 있는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설 강사에게 손씨 아들에게는 200만 원, 손자에게 150만 원, 증손자에게 100만 원, 현손자에게 50만 원, 그 밖의 민족대표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1인당 25~100만 원으로 해서 총 1,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출처 링크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 문서의 논란 문단 참조.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앞에는 고려대학교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의 내실을 기르게 해 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흉상이 놓여 있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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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자진사공파 44세손[2]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3] 계몽사 위인전에는 이 수신사가 하인의 머리를 말총에 묶고 끌고다니다 이를 목격한 손병희에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으려고'''로 이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초기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고 북접과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5] 21세기 현재에도 최고급 리무진은 운전석과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6] 출처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윤치호 저, 김상태 역, 산처럼 출판사, 2013년[7] 다만 민족대표 33인들 중 20명은 친일 행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변절했음에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