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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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브리어 : בְּאֵר שֶׁבַע(베에르 셰바)
아랍어 : بئر السبع(비르 앗사브)
오스만 터키어 : بلدية بءرالسبع(비뤼세브)
성경엔 브엘세바라고 나온다. 브엘세바(באר שבע)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기원에 흥미로운 중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족장이자 성서상에서 원로인 아브라함은 그의 긴 삶 동안 단 한번도 한 장소에 정착해서 머물지 않았는데 양치기로써 변화하는 계절에 따라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몇 달마다 이동하며 방랑했다. 아브라함이 집이라고 지칭한 장소 중 하나는 브엘세바라고 불리는 사막 오아시스였다. 창세기 21장 28절부터, 아브라함은 자신이 남쪽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왕인 아비멜렉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비멜렉의 종들은 아브라함이 양떼를 위해 파놓은 우물을 장악했고, 두 사람은 평화 조약을 맺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브라함은 왕에게 '''일곱''' 마리의 양을 주었고, 왕은 그 대가로 아브라함을 다시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직 히브리어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에만 왜 그들이 이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지었는지 말이 된다. 브엘세바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바로 '''"맹세"(셰부아)'''와 '''"일곱개(쉐바)"'''의 '''우물(베에르)''', 즉 앞의 이야기를 요약한 합성어이다. 요약하면 우물을 일곱 마리의 양으로 되찾아 평화를 맹세한 곳이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위치하고, 이스라엘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다.
2. 지리
베르셰바는 매우 황량한 네게브 사막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도시다. 텔아비브에서 남동쪽으로 115km정도 가면 베르셰바 시내로 들어갈 수가 있고, 거기서 북동쪽으로 120km를 또 가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황량한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에 왜 위치해 있냐고? 그 이유는 마실 수가 있는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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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브 벤 구리온 대학교가 시내에 있으며, 인구가 20만 명을 초과할 만큼 이스라엘 본토에서 8위의 대도시다. 베르셰바 시청의 웹사이트는 히브리어와 영어와 아랍어로 씌어져 있다.
3. 역사
기원전 4000년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7세기 경 이슬람 제국의 팔레스타인 공격으로 폐허가 된 이후 1200년 넘게 버려져 있었다. 이후 이 일대에는 그저 텐트 몇 개 쳐놓은 베두인 유목민의 시장 정도 밖에 영구 거주지가 없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자본과 영국의 시나이 반도 합병으로 위협받게 된 네게브 일대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현재의 베르셰바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9년 오스만 정부가 베르셰바의 건설을 지시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반인 1917년 호주를 비롯한 영연방군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전후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1]
오스만 제국과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거치면서 베르셰바는 인구 수천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였지만 제1차 중동전쟁 이전까지 베르셰바의 인구는 절대 다수가 무슬림이었으며 유대인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UN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에서 처음에는 베르셰바를 유대인 지역에 할당하였으나 무슬림이 절대 다수라는 이유로 곧 번복하고 아랍인 지역에 할당시켰다. 제1차 중동전쟁에선 이집트군이 점령하였으나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철수한 이후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고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합병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현재의 유대인 도시 베르셰바가 자리잡게 되었다.
4. 기후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에는 무려 46도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카더라.
[1] 호주는 지금도 1차대전 당시 베르셰바에서 거둔 승리를 매우 자랑스럽게 기념하고 있다. 2년 전 갈리폴리 전투에서 겪었던 수많은 사상자, 패배를 설욕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17년에는 당시 참전했던 호주군 병사들의 자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베르셰바 전투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