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전투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 제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여 벌인 전투. 세계 전쟁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작전 중 하나로 명성이 높다.터키군이 돌격할 때면 그들은 대개 알라를 외쳤다. 그럼 우리는 '개새끼들아 덤벼봐라! 우리가 네놈들을 알라에게 데려다주마.'라고 맞받아쳤다. '개새끼(Bastard)'[5]
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외쳤는지 한 터키인은 '개새끼'가 우리가 믿는 신들 중 하나의 이름인지 궁금해했다'''.(When the Turks charge they usually cry ‘Allah, Allah’, and our boys reply ‘Come on you bastards, we’ll give you Allah’. From the frequent use of this word ‘poor old Turk’ wants to know if ‘Bastard’ is one of our gods.)
터키어로는 가까이에 차낙칼레[6] 라는 도시가 있기 때문에 차낙칼레 전투(Çanakkale savaşı)라고 칭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갖는다. 증조할아버지 시절엔 총부리를 겨눴던 사람들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고(...). 오스만 제국어로는 Harb-i Umum-i Çanakkale(하르비 우무미 차낙칼레).
영국군이 중심이 되어, 호주군과 뉴질랜드군로 구성된 영연방군(ANZAC, Australia and New Zealand Army Corps)이 참전했다.
2. 배경
당시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 등에 대항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덴마크는 중립을 선언하고 카테가트 해협에 기뢰를 쏟아부어서 배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렸으므로 러시아를 통하는 길은 위험천만한 북해항로와 지중해를 통한 흑해항로 밖에 없었다. 이 흑해항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지나야만 했으므로 다르다넬스 해협과 오스만 제국의 선택이 전쟁의 향방을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동맹하여 영국,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자, 흑해항로는 폐쇄되고 말았다. 당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는 물류량이 수에즈 운하를 능가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급증한 상태였는데, 이 길이 끊기면서 러시아는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올 수 없어 순수 자력으로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졸전에 졸전을 거듭하여 전선이 계속 밀리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서 식량을 들여올 수 없게 되어 허리를 졸이게 되었고, 이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을 낙마시켜서 러시아와 통로를 뚫어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 오스만의 참전 자체도 영국과 윈스턴 처칠의 삽질이 작용했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자신들의 국력이 어떤 수준인지 잘 알고 있던 오스만은 정말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이 구입하려던 전함 2척을 영국이 먹튀하며 노골적으로 오스만을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이를 노린 독일이 오스만을 압박했고 결국 내부의 반영 여론까지 겹쳐서 참전하게 된 것. 자세한 내용은 애진코트와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글을 읽어볼 것.
이 때, 오스만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지배받아온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을 벌이면서 내부 문제부터 시급했는데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파병하면서 거대한 적군들과 죽기살기로 싸워야 했으며, 군 상층부들은 이 와중에 자기 배를 채우느라 오스만군 작전지휘체제도 상당수 동맹국인 독일 제국 육군 장군들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스만 사병들은 당연히 이방인인 이들 독일인 장교들의 지휘를 잘 따르지 않았기에 그들도 엉망이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 육군 대장 잔더스 장군이 바로 이 차낙칼레 주둔 오스만 육군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도 오스만 육군 장병들이 그다지 따르지 않았기에 곤란해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케말 육군 대령(바로 훗날의 아타튀르크)이 잔더스 장군의 지휘안을 잘 조율하면서 참모장 격으로 오스만 육군을 잘 다독였기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잔더스 장군도 이 30대 후반의 젊은 대령을 꽤 높이 평가했다.
작전 시작 자체가 오해가 좀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당시 영국 해군장관(First Lord of Admiralty, Board of Admiralty[7] 를 총괄하는 직책) 윈스턴 처칠은 십수 척의 전함과 수십 척의 수송선, 순양함 등으로 이뤄진 대함대를 몰고 적의 저항을 간단히 씹으며 그대로 터키 해안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병력을 상륙시켜서 최종적으로는 이스탄불까지 밀어버린다는 작전을 내세웠다.
3. 진행
...여기까지는 좋았을 것 같지만 계획이 지나치게 원대했기 때문에 반발이 엄청났다. 독일 육군의 지원으로 완전히 요새화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해군이 막대한 함포사격으로 해안포 진지들을 제압하고, 그를 이어서 육군이 상륙해서 잔존병력을 소탕하면서 이스탄불까지의 진로를 열어야 했다. 한마디로 육해군의 절대적 협력이 필요했는데, 육군의 주력을 구성할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사령관 카든 제독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처칠은 해군만으로 그냥 밀어버리겠다는 단독작전을 수립해버린다. 일은 이미 이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영국군 상층부는 오스만 제국군을 너무나도 얕잡아 보고 있었는데, 특히 오스만군의 화기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 육군이 저격수도 없다고 저격수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 육군은 마우저 7.92mm 총으로 무장한 저격수 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시골에서 어릴적부터 총으로 늑대나 온갖 동물을 사냥하면서 사격솜씨가 출중했는데, 결국 이들 저격수 부대에게 영연방군은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저격수 부대로 맞섰다. 하지만 적지않은 피해를 당하고 적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3.1. 다르다넬스 해전
Battle of Dardanelles N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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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군의 포격
상륙 당일인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미 이곳을 요새화하고 있던 잔더스 장군 지휘 아래, 오스만군의 요새 해안포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다. 결국 1주일간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전함 3척이 침몰하고 다수의 순양함 등이 격침당해 피해가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연합군 함대가 입은 피해의 다수는 포격이 아닌 기뢰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군의 포격이 무력한 것은 아니다. 당시 연합군 해군도 오스만군이 해협에 잔뜩 깔아둔 기뢰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기뢰 제거를 담당한 함선들은 '''징발된 민간인 함선들에 민간인 선원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이 오스만군의 포격에 겁먹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뢰 제거는 영영 불가능해지고 만다. 결국 카든 제독이 작전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었으며, 다시 3월 18일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16척 중 5척이 침몰하는 참담한 실패였다. 결국 이번에는 영국함대 총사령관인 피셔 제독이 처칠에 대한 불만표시로 사퇴해버렸고, 당연히 처칠도 그 책임을 물어서 잘렸다.
물론 해군의 포격으로 오스만 육군 역시도 피해가 적지 않아 그대로 밀어 붙이면 싸움을 해볼 만했으나, 처음 처칠이 강행했을 때부터 해군 단독 작전이었기 때문에 상륙할 육군 자체가 없었다. 영국 육군 중동 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군을 도와서 진격한다는 육해군 연합작전으로 변경한 것이 이미 1차 공격이 실패한 3월 12일이었고, 준비 부족 때문에 2차 공세가 실패할 때에는 병력 자체가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결국 상륙작전은 4월 25일에나 펼쳐졌고, 오스만 제국군은 병력을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 전투를 다르다넬스 해전이라고 부른다.
3.2. 상륙작전의 시작
그 6주간의 시간 동안, 무스타파 케말 대령의 오스만 육군은 보충병을 받아들여 다시 한번 전투력을 회복한 뒤였다. 이 때 추가로 충원된 오스만군 병력이 10만. 요새포와 해안포도 다시 재구축했기 때문에 앞서한 공격은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케말 대령은 장병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한다.
그리고 상륙작전은 뒤늦게 다시 강행된다. 그런데 영국 육군과 해병대는 해안에 첫발을 디딘 뒤에야 이 지역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임을 깨닫게 된다. 해안의 폭이 워낙 좁아서 상륙한 영국군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고지대에 위치한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에 맞는 지경이었음에도 영국군은 당초 계획대로 병력을 차분히 그 속으로 밀어넣었다(...)."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그렇게 쳐발리던 와중 결국 수뇌부에서 내놓은 작전이 야포들을 이용한 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서 오스만군을 참호에서 교착시키고 그때 그나마 좀 상태가 멀쩡한 오스트레일리아 보병사단이 일제히 고지로 돌격해서 참호를 뺏고 전진한다는 아주 지극히 간단해보이는 작전이었다. 의도는 좋았고 성공 가능성도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개시 하는 날에 하필 '''야포를 지휘한 사령관과 보병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시계가 싱크로되지 않았다!''' 해군의 함포사격은 애저녁에 끝나버렸고, 함포의 화망을 바탕으로 돌격했어야 할 육군이 튀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해군의 엄호사격은 다 끝난 뒤였다. 만일 여기서 다시 야포사격을 하고 보병대가 돌격했으면 될 수도 있었으나 외부의 전황을 모르는 최고사령부는 그냥 씹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은 몇 m도 달리지 못하고 기관총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결국 단 하루만에 오스트레일리아 사단 중 8천명이 무인지대의 백골이 되었고 1만 8천 명은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8][9]
그리하여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거기다 보급을 두 세계대전 동안 다 책임진 미국이 참전하기 2년전이었으므로 보급이 정상일리 만무했고 물조차도 현지에서 구하지 못해 멀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오는 물탱크에 의지해야 했다. 즉 한정된 보급쿼터 중 상당량을 식수에 할당해야 했다는 거다. 그 자리만큼 총탄 보급량은 줄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영국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 투입하였고, 당연히 박살이 나는 수순을 무한 반복했다. 전투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히려 오스만 군이 요새에서 튀어나와 연합군을 해안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연합군은 해안가에 상륙시킨 병력이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는 총알도 포탄도 모두 바닥이 났지만 그들 모두는 '''"오늘 우린 죽기 위하여 싸운다!"'''을 외치며 착검돌격을 가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론 이들은 착검돌격 전에는 정말로 돌을 내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이때 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Hüseyin Avni Bey)가 장검을 쳐들고 맨 먼저 달려나갔고, 연합군의 총격에 그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부연대장이 연대장의 장검을 쳐들고 진격했다. 대장부터가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니 사기가 오른 연대원들도 착검돌격하여 결국 전원 장렬히 전사했다. 이 집념어린 착검돌격에 연합군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육상돌격을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연합군이 병력 피해를 감안하고 묻지마 돌격을 했더라면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스만군은 당시 총알부족 및 여러 문제에 빠졌지만 연합군들이 신중을 기하느라(물론 이들도 위에 열거한 여러 사정과 문제도 있었지만) 오스만군은 병기와 탄약을 추가 보급받을 시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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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
그 덕분에 나중에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어린 활약으로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리면서 연대장의 이름을 딴 훈장을 제정하고 이 연대를 명예부대로 헌사했다. 하지만 부대를 재건하지 않고 영원한 명예부대로만 남겨뒀다.[10]
그리고 몇달에 걸쳐 결국 지지부진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 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임되었고, 후임인 찰스 먼로 장군은 이듬해인 1916년 1월 작전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해야 했다.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30만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했고, 오스만군 또한 32만명의 병력중에서 2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2.1. 57연대 총원 결사에 대한 반박
반박글(부흥카페)
반면 이런 주장도 있다.
이에 이 얘기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의 미화일 가능성도 있다는 반론이 있다. 57연대 공훈비도 갈리폴리 전역 종료 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메기도에서 전멸한 이후에야 터키에 공훈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
3.3. 협상국의 탈출작전
일단 퇴각이 결정되긴 했지만, 무려 10만이 넘는 연합군 병사들이 갈리폴리 반도에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이 갑자기 철수작전을 진행했다간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던 오스만군이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고, 철수하느라 정신이 없는 연합군 진영에 오스만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라도 한다면 사기도 낮고 부상병도 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몰살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퇴각을 결심한 찰스 먼로 역시 이 작전을 진행하면서 30~40% 가량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볼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결국 연합군은 윌리엄 버드우드의 지휘아래 필사적인 기만작전을 펼치게 된다.
일단, 위에서 말했듯 대규모 철수는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연합군은 군함으로 꾸준히 물자를 운송하는 척 하며 조금씩 병력을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군함들은 모래로 가득 찬 보급품 상자를 평소와 다름 없이 실어 날랐고, 연합군 병사들도 오스만군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군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방식엔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눈으로 비추어지는 모습은 그런대로 위장할 수 있어도, 10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소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점점 고요해지는 연합군 진영을 오스만군이 의아하게 여겨 소규모 정찰 분대를 보내기라고 한다면 병력이 빠져 듬성듬성한 참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연합군의 상황은 곧장 들통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 버드우드는 오히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 오스만군을 완벽하게 속일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철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며칠전부터 전방 군인들에게 그 어떤 소음도 내지 말고 자리를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스만군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 수가 많던 적던 상관 없이 남은 탄약 양 따위는 신경도 쓰지 말고 미친듯이 총알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명령 덕분에, 연합군 진지가 고요한것은 사람이 적어져서가 아니라 오스만군의 공격을 유도하려는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오스만군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했고, 실제로 병사가 상당수 퇴각해 대부분의 참호는 텅 빈 상태가 된 순간에도 오스만군은 연합군의 반격을 우려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오스만군을 철저하게 속였는데, 오스만군 진영에 최대한 가깝게 온갖 부비트랩, 지뢰, 화약 등을 매설한 다음 마지막 병사를 태운 배가 해안을 떠나기 직전 점화 스위치를 눌렀다. 일반적인 참호전에서 상대방의 포격은 곧 상대방의 보병들이 파상적인 공격을 펼칠 전조였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폭발을 적의 엄청난 포격이라고 오해한 오스만군은 한참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연합군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필사적인 기만작전 덕분에 철수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연합군은 찰스 먼로의 예상과 달리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갈리폴리 반도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 작전 이후 전쟁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철수 작전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종차별이나 다름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영국군은 철수하는데는 성공하나 앤잭 병사들은 '''그냥 놔두고 떠나버리게 된다.''' 때문이 앤잭 병사들은 더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본국으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4. 영향
터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이집트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갈리폴리에서 승리함으로서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결국 터키 국내는 별다른 피해없이 온존될 수 있었고, 전후에 벌어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배후지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11]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터키의 승리'''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당연히 영웅이 된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이후로 군에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세력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 뒤 무너져가는 오스만 제국에 혁명을 이끌어 왕조를 엎어버리고 귀족정치와 부패를 척결하였다. 그후 새로 탄생한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터키의 국부로 지금까지도 칭송받고 있다.
반대로 윈스턴 처칠에게는 '''쿠르드족 독가스 학살 명령'''과 더불어 정치인생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처칠의 정적들은 '''"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라고 말해라, 그러면 대꾸도 못한다."'''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은 이 말만 들으면 엄청나게 화를 냈고, 친구들은 그의 앞에서 이 전투에 관한 얘기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처칠은 이에 대한 책임을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존 피셔[12]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하였으나[13] 결국 해군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했고 예비역 육군 중령 신분에 따라 소집되어 참호전에 투입되었다가 생환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 전후의 처칠을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도 표현되는데, 정적인 핼리팩스가 갈리폴리를 언급하며 처칠을 밀어붙이자 처칠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며(...) 항변하는 모습이 나온다.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고전적인 상륙작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고, 이후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소규모 상륙전 경험과 이 전투의 교훈을 토대로 신개념 상륙함을 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영국도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기는 얻었고, 전간기 시절 미 해군 및 미 해병대와의 공동훈련과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상륙전에 상당한 노하우를 쌓게 된다. 약화되어가는 경제력과 상륙할 곳이 적은 유럽의 지형적 상황 때문에 미국에 비하면 소규모 상륙병단이었지만 그래도 해병대를 계속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해병대의 보병부대를 코만도화해서 특수부대적인 성격을 어느정도 겸비한 유럽식 소수정예 상륙부대로 개편하여, 대규모의 미국식 해병대와는 차별화된 성격의 해병대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해병대 내에 코만도 여단 외에도 별도의 소규모 특수부대인 SBS까지 보유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퇴짜를 놓았던 LCVP 보병상륙정의 전신인 히긴스 보트를 낼름 계약해서 나름 잘 운용을 하는걸 본 미 해군이 다시 사와서 LCVP라는 이름을 붙혔다.[14] 그리고 조선소가 모자랐던 영국 해군의 주문으로 인해 미 해군이 영향을 받았던 상륙함은 상륙선거함과 전차 상륙함, 전차상륙정, 대형보병상륙정이 있다.[15]
이 갈리폴리의 악명(?)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다시 나오는데 도데카니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영국군이 패주하자 처칠은 또 갈리폴리 전투를 재현했냐고 비난을 받았다.
5. 전후
이 전투는 영국뿐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안작(ANZAC, 호주-뉴질랜드 군단) 병력이 약 1만명 정도였는데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총 인구수가 다 합쳐도 5~6백만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총 사상자 22만명, 그 중 사망자만 10만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인적 피해를 본 호주와 뉴질랜드는 다른 영국 식민지와 함께 본국 영국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훗날 외교권과 군사권까지 획득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즉, 이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호주와 뉴질랜드 국민국가의 관념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 저서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젊은이들이 갈리폴리 반도로 종종 여행온다고 한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발생한 안작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의미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전투가 시작된 4월 25일을 함께 기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안작데이(ANZAC Day)로, 한국으로 치자면 현충일과 같은 추모일이다. 처음에는 이 갈리폴리 전투만을 기렸으나 이후 그 대상이 확대되어 6.25 전쟁을 비롯한 안작군이 파병된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공휴일이 되었다.
아래는 아타튀르크가 1934년도 안작 데이에 갈리폴리에 처음으로 찾아온 영연방 국민들에게 한 말이다. 당연하지만 아타튀르크는 터키어로 말했으므로 터키어 원문을 다음과 같이 싣는다. 이 연설문은 훗날 갈리폴리의 묘지와 호주 캔버라의 안작 대로(ANZAC Parade)에 있는 케말 아타튀르크 기념관, 뉴질랜드 웰링턴의 아타튀르크 기념관 등에 세워진 추모비에 새겨졌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아타튀르크가 정말 이 연설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생전에 달리 영연방 병사들에 대해 언급한 것도 없고, 신문기사들에서도 이런 연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953년 이 연설문을 쓴 이브라힘 카야의 인터뷰에서 아래의 문장들이 처음 언급된 것이다.
Uzak memleketin toprakları üstünde
kanlarını döken kahramanlar;
burada dost bir vatanın toprağındasınız.
Huzur ve sükun içinde uyuyunuz.
Sizler Mehmetçiklerle yan yana,
koyun koyunasınız.
Uzak diyarlardan evlatlarını harbe gönderen
analar;
göz yaşlarınızı dindiriniz,
evlatlarınız bağrımızdadır.
Huzur içindedirler ve huzur içinde rahat rahat uyuyacaklardır.
Bu toprakta canlarını verdikten sonra
artık bizim evlatlarımız olmuşlardır."
영국의 과학자인 모즐리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7] 영국 입장에선 정말 여러 방면으로 잃은 것들밖에 없었던 비극의 전투이다.Those heroes that shed their blood
피를 흘린 영웅들이여,
And lost their lives.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여.
You are now lying in the soil of a friendly country.
그대들은 이제 친구의 국토에 묻혀 있다.
Therefore rest in peace.
그러니 고이 잠들라.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Johnnies
여기 우리의 땅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든
And the Mehmets to us where they lie side by side
조니들과 메흐멧들은[16]
Here in this country of ours.
우리의 눈에 다름이 없다.
You, the mothers,
머나먼 나라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Who sent their sons from far away countries,
어머니들이여,
Wipe away your tears.
눈물을 닦아라.
Your sons are now lying in our bosom
그대의 아들들은 우리의 가슴에 안겨
And are in peace.
평온히 안식을 취하였도다.
After having lost their lives on this land they have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은
Become our sons as well.
우리 모두의 아들이 되었나니.
6.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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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가 1981년 조국 호주에서 만든 영화 갈리폴리가 잘 알려져 있다.
280만 호주달러를 들여 제작해 1174만 호주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파라마운트를 통해 미국에도 배급되었다. 멜 깁슨이 주연 중 하나로 27살이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 작품적으로도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반부 호주군이 닥돌하다가 오스만군의 기관총 공격에 거의 전멸당하는 장면이 이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내에서 미개봉작으로 비디오로만 나왔고 MBC에서 1992년 10월 4일 일요일 오후 3시에 갤리폴리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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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작인 터키 다큐멘터리 영화 갈리폴리도 이 전투를 꽤 중립적으로 잘 다룬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샘 닐, 자페르 에르긴(터키 유명배우)이 내레이션을 맡았으며 감독은 톨가 외르넥(Tolga Örnek).
2013년 터키 영화 Çanakkale Yolun Sonu('차낙칼레, 길의 종점')은 터키인의 눈으로 본 이 전쟁을 다룬 영화로 터키에서는 흥행에서 성공했다. 단역이지만 아타튀르크(엔긴 외즈튀르크 분)도 나온다. 이야기는 발칸 전쟁 참전용사인 무흐신(귀르칸 우이군 분)이 동생 하산(우무트 쿠르트 분)이 갈리폴리 전선에 징병되자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청해서 한군두하고 저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도중, 저격에 한번 혼쭐난 영국군 대장이 특등저격수 이글(벤 워윅 분)을 영입하고 그와 라이벌이 되는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체적으로 튀르크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영화지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꽃피는 인간미와 전우애, 마지막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을 감동있게 그리고 있다.
2015년 1월 28일 개봉한 영화 워터 디바이너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에 입대해 이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한 세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적대적 시선으로 가득한 터키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러셀 크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참호전을 위주로 한 갈리폴리 전투 장면이 묘사된다.
그밖에도 2015년 197분에 달하는 TV 드라마인 Deadline Gallipoli가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뉴질랜드에서 <4월 25일, 갈리폴리> https://www.youtube.com/watch?v=3Brujpg_oyU라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인터뷰 형식으로 다큐멘터리 성격이 강하다.[스포일러]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은 그들의 곡 "Cliffs of Gallipoli" 에서 이 전투의 전사자들을 추모하였다.
배틀필드 1의 캠페인 중 한 챕터에서 ANZAC 노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퇴각하는 영국군과 자신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오스만 제국군 요새로 돌격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엔딩 크레딧에서 이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장군들이 터키 공화국을 세우는데 주역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2017년 말에 출시된 Turning Tides DLC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배경으로 한 멀티플레이용 맵 2개가 새로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