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사포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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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1] 이 당시 비행 학교에서 주로 지도받았던 인물은 이후에 여성 에이스가 되는 발렌티나 스테파노프나 그리조누보바(Valentina Stepanovna Grizodubova; Валентина Степановна Гризодубова)[2] 라고 한다. 소련 공군에 복무를 시작한 것은 1933년 부터였고 일반적인 조종사로 복무하다 스카이다이빙 교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공군을 떠나기 직전에는 정치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출신 성분이 성분인 만큼 대숙청 기간에도 큰 문제 없이 지나간 것 같다. 이후 1940년에 소련 북해군 소속 비행대로 지휘관 자격으로[3] 이직하게 된다. 독소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해군 조종사였던 셈이다. 이 해군 비행단이 I-16을 장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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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포노프의 I-16기체.
인간적인 면에서는 대인배로 통했다고 한다. 적기를 공격할 때, 일부러 반쯤 손상시키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으며[4] , 부하가 제대로 격추시키지 못 한 폭격기를(데미지를 입었지만 비행은 가능했다.) 마무리 하고 그 킬을 부하에게 미뤄주는 등 그야말로 관대하였던 비행 단장이었다고 한다. 다만, 가끔은 부하들에게 미끼 역할을 하도록 저공에서 선회하라고 지시한 뒤 낚이는 독일군 기체들 뒤로 강하하면서 페이크다 병신들아!!를 연출하기도 했다. 어쨋든 이 와중에서도 불운하게 격추된 부하들은 없었다고 한다.
주로 사용한 전법은 역시나 일격일탈 전법. 대숙청 이후 탈탈 털리고 있었던 소련군 중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개념가이였던 셈이다. 바로 윗 문단에서도 나오듯이 선회가 빠르고 저속 기동성이 좋았던 I-16을 몰면서도 일격일탈 전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당시 소련군 조종사들의 훈련 정도가 높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현명한 판단으로 보인다.
영국이 렌드리스를 통해 호커 허리케인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 양반의 부대가 그걸 장비하게 되어 직접적으로 영국군 조종사들과 면담할 기회가 있어 서로 허리케인과 I-153 차이카를 소개해 주었다. 이 때 영국군 조종사들도 작전을 같이 수행해 주었는데, 영국측에서도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다만, 허리케인 기체 자체는 소련의 혹독한 환경에서 운영하기 어려웠다. 일단 중고 기체들이었고, 에어 필터가 장착되어 있지 않았던지라 해빙기에 활주로 환경(엄청난 먼지) 때문에 엔진이 제대로 작동을 못 했다. 어쨌든 이를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사포노프는 여기다 소련제 20 mm ShVAK과 지상공격용 로켓을 장착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이렇게 개수된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영국군이 아프리카에서 써먹었던 것처럼 지상공격기로 활약했다.
이후 미국에서 P-40E 키티호크를 제공받아 기종 전환을 하게 되는데, 허리케인에 비해 더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다. 역시 이 또한 동장군 기후 하에서 운용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력한 화력과 내구성, 품질 좋은 무선 장비는 호평했다고 한다. 게다가 엔진 신뢰도가 이 동네에서는 별로 좋지 않아서, "글라이더의 기적"이라는 비꼼을 받기도 했다.
어쨋든 허리케인보다 우수한 성능 덕에 이 기체로 기종 전환을 했는데, 이것이 복선이 돼버린다. 1942년 5월 30일에 최후의 비행을 하게 되었는데, 일단 편대장이 기체 트러블 때문에 먼저 귀환하게 되었고, 사포노프 자신도 2대나 격추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결국 얼어붙은 동토의 강으로 추락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독일군 전투기에 당했다는 설과, 수투카의 후방 기총에 당했다는 설, 그리고 엔진 트러블 이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대인배치고는 어이없는 최후를 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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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추모하는 기념 우표
어찌되었든 이 사람에게 지도받았던 해군 조종사들은 정예급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영웅 칭호를 받는 조종사도 여럿 배출되었다.
Борис Феоктистович Сафонов (Boris Safonov) 1916~1942.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 전장에서 활약했던 소련군 에이스 조종사. 총 킬수는 소련군 자료에 의하면 17킬이고, 영국 공군의 자료에 의하면 10킬이다. 다만, 그 숫자가 어찌되었든간에 대부분의 킬을 독소전 개전 당시 구형에 속했던 소련군 기체인 I-16으로 이룩했다는 게 특이점이다.유년기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1] 이 당시 비행 학교에서 주로 지도받았던 인물은 이후에 여성 에이스가 되는 발렌티나 스테파노프나 그리조누보바(Valentina Stepanovna Grizodubova; Валентина Степановна Гризодубова)[2] 라고 한다. 소련 공군에 복무를 시작한 것은 1933년 부터였고 일반적인 조종사로 복무하다 스카이다이빙 교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공군을 떠나기 직전에는 정치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출신 성분이 성분인 만큼 대숙청 기간에도 큰 문제 없이 지나간 것 같다. 이후 1940년에 소련 북해군 소속 비행대로 지휘관 자격으로[3] 이직하게 된다. 독소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해군 조종사였던 셈이다. 이 해군 비행단이 I-16을 장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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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포노프의 I-16기체.
인간적인 면에서는 대인배로 통했다고 한다. 적기를 공격할 때, 일부러 반쯤 손상시키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으며[4] , 부하가 제대로 격추시키지 못 한 폭격기를(데미지를 입었지만 비행은 가능했다.) 마무리 하고 그 킬을 부하에게 미뤄주는 등 그야말로 관대하였던 비행 단장이었다고 한다. 다만, 가끔은 부하들에게 미끼 역할을 하도록 저공에서 선회하라고 지시한 뒤 낚이는 독일군 기체들 뒤로 강하하면서 페이크다 병신들아!!를 연출하기도 했다. 어쨋든 이 와중에서도 불운하게 격추된 부하들은 없었다고 한다.
주로 사용한 전법은 역시나 일격일탈 전법. 대숙청 이후 탈탈 털리고 있었던 소련군 중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개념가이였던 셈이다. 바로 윗 문단에서도 나오듯이 선회가 빠르고 저속 기동성이 좋았던 I-16을 몰면서도 일격일탈 전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당시 소련군 조종사들의 훈련 정도가 높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현명한 판단으로 보인다.
영국이 렌드리스를 통해 호커 허리케인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 양반의 부대가 그걸 장비하게 되어 직접적으로 영국군 조종사들과 면담할 기회가 있어 서로 허리케인과 I-153 차이카를 소개해 주었다. 이 때 영국군 조종사들도 작전을 같이 수행해 주었는데, 영국측에서도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다만, 허리케인 기체 자체는 소련의 혹독한 환경에서 운영하기 어려웠다. 일단 중고 기체들이었고, 에어 필터가 장착되어 있지 않았던지라 해빙기에 활주로 환경(엄청난 먼지) 때문에 엔진이 제대로 작동을 못 했다. 어쨌든 이를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사포노프는 여기다 소련제 20 mm ShVAK과 지상공격용 로켓을 장착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이렇게 개수된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영국군이 아프리카에서 써먹었던 것처럼 지상공격기로 활약했다.
이후 미국에서 P-40E 키티호크를 제공받아 기종 전환을 하게 되는데, 허리케인에 비해 더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다. 역시 이 또한 동장군 기후 하에서 운용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력한 화력과 내구성, 품질 좋은 무선 장비는 호평했다고 한다. 게다가 엔진 신뢰도가 이 동네에서는 별로 좋지 않아서, "글라이더의 기적"이라는 비꼼을 받기도 했다.
어쨋든 허리케인보다 우수한 성능 덕에 이 기체로 기종 전환을 했는데, 이것이 복선이 돼버린다. 1942년 5월 30일에 최후의 비행을 하게 되었는데, 일단 편대장이 기체 트러블 때문에 먼저 귀환하게 되었고, 사포노프 자신도 2대나 격추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결국 얼어붙은 동토의 강으로 추락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독일군 전투기에 당했다는 설과, 수투카의 후방 기총에 당했다는 설, 그리고 엔진 트러블 이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대인배치고는 어이없는 최후를 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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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추모하는 기념 우표
어찌되었든 이 사람에게 지도받았던 해군 조종사들은 정예급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영웅 칭호를 받는 조종사도 여럿 배출되었다.
[1] 개천에서 용난 캐이스로 보일지도 모르나 농장 집단화로 인해 소련의 인구 비율 중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았으며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계급의 군인이 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소련 국방장관을 역임한 안드레이 그레츠코도 농부집안 출신이다.[2]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비행사로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자에 계급도 대령까지 올랐다.[3] 대숙청 이후에 능력 없는 장교들이 지휘관이 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기존에도 지도 경험이 있었고, 비행 경험도 있었던 특이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4] 당연히 킬은 부하에게 미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