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 개요
1918년부터 1941년까지 존재한 소련 러시아 SFSR의 자치 공화국. 볼가독일인 노동자 코뮌이 1924년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으며, 1941년 기준 면적은 28,400㎢, 인구는 60만명. 수도는 포크롭스크(Pokrovsk, 독일어로는 Kosakenstadt로도 불림)였으나, 1931년 이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따 엥겔스(Engels)로 개명되었다.[4] 볼가 독일인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북쪽은 러시아 SFSR의 사라토프 주, 남쪽은 볼고그라드 주(당시 스탈린그라드 주)와 접하고, 동남쪽은 카자흐 SSR과 접했다.
행정구역은 1941년 기준으로 엥겔스 시와 22개 칸톤(Canton)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때 독일어 사용 등의 자치를 누렸으나, 1941년 8월 28일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해체되고 말았으며 그곳에 남은 독일인들은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리고 9월 7일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은 사라토프 주에, 남부 일부 지역은 볼고그라드 주에 흡수되었다. 독일어 지명들도 대거 숙청되었는데 가령 발처(Balzer)는 붉은 근위대의 도시라는 뜻의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Красноармейск)로, 마리엔탈(Mariental)은 소베츠코예(Советское)로, 젤만(Seelmann)은 로브노예(Ровное)로 바뀌었다. 1964년 볼가독일인이 복권되면서 공화국 재개설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미 동독이 있기도 해서 소련 중앙은 재개설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카자흐스탄 일대에 독일인들이 많이 주거했기에 독일인 자치주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카자흐인의 반발로 검토만 되고 취소되었다. 소련 말기에 전연방 독일계 소련인 사회 «르네상스»(Всесоюзное общество советских немцев «Возрождение»)가 결성되어 다시 한번 자치공화국의 부활 운동을 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2010년 기준 사라토프 주에는 독일계 러시아인이 1만 2천여명, 볼고그라드 주에는 1만 7천여명이 산다.
[image]
2. 인구
- 1939년 인구통계 (총인구 606,352명)
- 볼가 독일인 - 366,685명 (60.5%)
- 러시아인 - 156,027명 (25.7%)
- 우크라이나인 - 58,248명 (9.6%)
- 카자흐인 - 8,988명 (1.5%)
- 타타르인 - 4,074명 (0.7%)
- 모르도바인 - 3,048명 (0.5%)
- 벨라루스인 - 1,636명 (0.3%)
- 중국인 - 1,284명 (0.2%)
- 유대인 - 1,216명 (0.2%)
- 기타 - 5,146 (0.8%)
3. 같이 보기
[1] 동독의 그것과 똑같다.[2] 1931년 포크롭스크(Pokrovsk)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따 개명.[3] Ernst Reuter. 독일 본토 사람으로 1차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힌다.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해 이 때 볼가독일인 ASSR을 수립. 귀국 후 독일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지도부와의 의견 대립으로 쫓겨났고, 이후 마그데부르크 시장 등을 지내다 나치가 들어서자 터키로 망명. 종전 후 '''초대 서베를린 시장''' 역임.[4] 정작 엥겔스 시는 1939년에도 러시아인이 인구의 58%였고, 독일인은 21%에 불과했다. 물론 독일인 다수 지역인 곳도(마르크스슈타트의 경우 독일인 86%)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