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계 러시아인
1. 개요
독일 혈통의 러시아인들을 일컫는다. 러시아의 황가를 배출할 정도로 '''비슬라브계 소수민족 중 러시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민족 집단'''이다.
2. 설명
2.1. 지리적 근접성
현재 독일은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과거에는 독일인 상인 네트워크가 중유럽에서 동유럽 전역에 거쳐있었다.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시어가 괜히 독일어 계통 언어인 것이 아니다.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은 동유럽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이다. 오늘날 발트 3국과 서부 러시아는 13세기 부터 튜튼기사단이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쳐들어와 찝적거리던 곳이었고, 독일인 상인들의 이주도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튜튼 기사단이 패한 이후 독일 세력의 동진은 저지되었지만, 탈린 등 이 지역 도시들이 한자동맹에 가입할 정도로 독일 문화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구도는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다시 말해, 1945년 이전에는 독일과 러시아/소련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종전 후 독일이 동부 영토를 상실하면서 양국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1918-39년 사이에는 중간에 발트3국이 있었으나 이들은 독일에 편향되어 있었던 나라들이다.
2.2.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
이들 외에도 많은 독일계 귀족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러시아의 귀족이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러시아 이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있었던 일이며 독일계 귀족 외에도 스웨덴계, 네덜란드계 귀족이나 스코틀랜드계 귀족도 있었다. 러시아 작가인 레르몬토프의 부계도 스코틀랜드계. 러시아 제국 시절 많은 독일인들이 러시아에서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었다.
이렇게 귀족이 된 독일인들 말고도 러시아로 이주한 상인이나 농민들의 수도 많았다. 근세부터 근대까지 독일은 인구 과밀로 빈곤 문제가 심각했던 나라들이었고,[1] 독일의 혼란이나 소수종파 탄압/인구과밀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독일인이었던 예카테리나 2세 등은 종교의 자유와 병역 면제 등을 조건으로 걸며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이주해 온 독일인들도 많았다. 이 외에도 러시아 제국이 대북방전쟁에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병합하고 이후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많은 독일인 상인 공동체를 흡수할 수 있었다.
2.2.1. 볼가 독일인
18세기 초 카스피해 북부 볼가강 하류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기록자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자 몽골계 유목민인 칼미크인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에 유목을 해서 생산성이 낮다."면서, 해당 지역의 광활한 땅은 “잉글랜드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버려져 경작되지 않는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해당 기록에 대한 보고가 예카테리나 대제 귀에 들어가자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영내의 칼미크인들에게 과도한 군역을 부과해서 유목을 방해한 후 칼미크인들의 땅에 조금씩 코사크들을 침투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코사크들에 뒤이어 독일계 이주민들이 따라와서 과거 칼미크인들의 영토에서 마을을 건설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1762년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였다. 광활한 자국의 인구밀도도 높히고 가장 주요하게는 중/서유럽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농업 생산력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이주한 사람들이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빈농들이었다. 이때 이주 장려 정책에 의해 이민 온 독일인들은 볼가강 유역(現 볼고그라드 인근)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들을 '볼가 독일인(독일어: Wolgadeutsche, 러시아어: Пово́лжские не́мцы)'이라고 부른다. 당시 서유럽의 빈농들이 신대륙으로 많이 가던 시절, 독일인 농민들은 미지의 신대륙 서부개척보다는 거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 제국의 비옥한 평원지대로 이주를 택한 것이다. 18세기 내내 꾸준히 이민이 이루어져 1897년 기준으로 볼가강 하류 지역에 사는 독일인의 수는 179만 명에 달했다.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칙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 파격적인 특혜를 주게 되는데, 독일인들의 언어, 문화, 자치공동체를 보존과 더불어 '''종교의 자유'''와 '''징집(병역) 면제'''(이민 1세대는 물론 그 후손들까지)를 이주 혜택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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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남부의 재세례파 독일인 가정. 초창기 이주민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출산율이 높은 편이라 인구가 금세 증가했다고 한다.
러시아로의 대이주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한동안 잘 살던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의 정책이 점점 자신들에 대한 특권을 줄여나가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징집 면제 특권의 폐지'''이다. 이로 인해 볼가 독일인들은 엄청난 종교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장교나 기병으로 근무하는 게 아닌 이상 기한 없이 말단 보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이들은 운이 나쁘면 말 그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말단 사병으로 복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물론 병영에 재세례파를 위한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2] 즉 이들에게 병역 의무를 지우는 건 징병당한 사람에게 가족과의 생이별과 배교를 동시에 강요하는 셈이었고, 아무도 징병되지 않으려고 했으니 정부와 큰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볼가 독일인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 다시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그들이 다시 떠나기로 한 곳은 다름 아닌 신대륙. 이주민들은 러시아에서 떠나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문제였기 때문에 새로운 이주 대상국을 택하는 것도 주로 종교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남부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가톨릭 이민자들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갔다.[3]
루터파나 메노파 등 신교 계통 이민자들은 북미로 떠났다. 북미로 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한지/건조형 농업에 맞는 미국 대평원 북부쪽에 정착하게 되는데, 제일 많이 간 곳이 노스 다코타, 사우스다코타이고, 그 다음이 네브라스카 와 캔사스 등이다. 또한 주변 미네소타와 미시건 등에도 많이 정착했다. 캐나다로 이민간 사람들은 알버타주, 매니토바주, 서스캐처원 등에 정착했다. 이들 미국으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들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도 대다수는 '볼가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4] 북미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 중에 메노파들은 또 다시 징집문제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징집 거부로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 후술한 것처럼 국외가 아니라 알타이 지방 등으로 재정착한 재세례파들도 있다.[5]
한편 겨우 정착한 러시아에서 다시 떠나기가 뭐한 사람들은 볼가강 유역에 그대로 남았는데 곧이어 러시아에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난다.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계 이민들이 사는 곳에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주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해 주기도 했는데, 국가무신론을 표방한 소련의 정책으로 기독교 성직자들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지는 등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1921~22년 소련에 대기근이 닥쳐 식량이 부족하자 볼가강 유역의 타타르스탄부터 먼저 식량 공급을 끊는 바람에 많은 볼가 독일인들과 타타르인들 사이에서 수십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1년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며 독소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볼가 독일인들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다.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듯이, 이들도 똑같이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노동 수용소로 이주당하게 된 것. 러시아 본토 내의 볼가 독일인들이 적대국인 나치 독일에 이로운 일을 할 우려가 있는 잠재적인 부역자로 몰렸던 것이다. 스탈린의 볼가 독일인 탄압은 종전 시기까지 이어졌고, 이들의 원주거지에 조성된 공동묘지의 묘비도 다 부숴서 도로포장용 돌로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인 1965년이 되어서야 볼가 독일인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됐지만, 이들은 대부분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물론 1941년까지 존재했던 그들의 자치 공화국의 부활도 불허. 이 때 고향에 못 돌아간 많은 볼가 독일인들이 시베리아나 중앙 아시아에 그대로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이 독일인들의 후손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러시아에 약 60만명의 볼가 독일인이 있으며 카자흐스탄에도 약 17만명 정도의 볼가 독일인이 살고 있다.[6] 그 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있다.
타국 땅에서 서러움을 당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80년대 독일 정부에게 귀국권을 요구해서 많은 수가 독일로 이주하게 된다. 초기에는 독일 정부도 적극적으로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이주한 지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서인지 독일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화도 달라서 독일 내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하자(한국의 조선족처럼) 독일 정부는 90년대부터는 이들의 귀국을 까다롭게 했다. 대신 독일 정부는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내의 독일인들을 많이 지원한다.
시베리아 인근 볼가 독일인들의 자치체로는 알타이 지방의 독일인 민족구역과 옴스크 주의 아조프스크 독일인 민족구역이 있다. 다만 이들은 군(郡)급 행정구역이라 과거의 자치 공화국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2.2.2. 흑해 독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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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에 잔존한 재세례파 독일계 가정
열렬한 독일 문화 애호가였던 예카테리나 2세의 이주정책으로 유입된 독일인들은 볼가 강 유역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포함 흑해 각지에 대거 정착했다. 이곳에 정착한 독일인을 '''흑해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의 입지가 약해진 대신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농민 인구 유입도 적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일대에서 탄압받던 독일계 재세례파(후터파) 신도들의 경우는 주로 농민이었다. 위에 설명된 볼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후터파 신도들은 병역거부 교리가 있었고, 예카테리나 2세가 이민장려를 위해 내린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와 '''징집면제 특권'''을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후터파 신도들이 러시아로 이민을 결심한다.
이들과는 별개로 크림 반도 일대에는 고트족[7] 의 후손들이 19세기까지 잔존해 있었다. 테오도로 공국 항목 참조.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는 아직도 우룸인(Urums)이라는 흑해 그리스-고트 혼혈인들의 후손이 남아있다.
2.2.3. 발트 독일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이다. 12세기부터 발트 해 연안에 유입된 독일인 상인들과 뒤이어 들어온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및 그들과 동화된 발트계 민족의 후손들이다. 중세 당시 발트해 연안에 정착한 독일인들은 주로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군인이나 상인으로, 발트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까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발트 현지인들은 농노로, 독일인들은 지주와 상인, 군인이나 성직자 등으로 계급이 고착된 상태였고, 발트 현지인들은 계급이 상승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우고 출신 배경을 숨기면서 완전히 독일인에 동화될 것이 요구되었다.
발트 독일인들은 현지인에 대다수에 해당하는 라트비아인이나 에스토니아인들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이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된 이후에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민족주의가 부흥한 것을 계기로 입지가 크게 악화되었다.[8] 물론 이들의 입지가 하루아침에 약화될리는 없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경우 도회지에서 독일인들이 입지가 상당히 견고한 편이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는 유대인 인구 정착이 소규모처럼 이루어진 편이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라트비아 소총 연대가 볼셰비키에 적극 가담했던 이유도, 발트 독일인들에 대한 라트비아인들의 반감에 있었다.
스탈린 집권 시기에 단체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다가, 스탈린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당시 히틀러와 빅딜을 보면서 대부분 독일로 재송환되었고, 나치 독일은 점령지 폴란드에서 현지 폴란드인들을 추방한 지역에 이들을 집중적으로 재정착시켰다. 그러다가 독소전쟁이 터지고 독일군이 동진을 하니 다시 이들이 추방당한 발트해 연안에 정착시키려고 하다가, 결국 나치가 패망하는 와중에 소련과 가장 가깝던 이 지역의 독일 민간인들은 복수심에 불탄 소련군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나치 패망 이후 독일의 동부 영토 상당 부분이 폴란드에게 떨어지면서 다시 이들은 재추방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 후에도 한동안 이 발트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독일인들과 함께 실향민으로서 긴 세월 동안 문화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한 전후 독일 본토에서 뿌리 박고 다시 정착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심하게 대신 치른 매우 불우한 경우이다.
2.2.4. 캅카스 독일인
러시아가 캅카스 지방으로 진출하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독일인들도 따라 들어왔고, 조지아에도 정착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리하르트 조르게가 있다. 2차 대전 후 볼가 독일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남은 이들도 소련 해체 이후 독일 등으로 이주하면서 현재는 캅카스 독일인 공동체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독일풍 건물만이 그 시대를 증언해주고 있다. 오늘날 캅카스의 구 캅카스 독일인 거주지는 캅카스 독일인보다 볼가 독일인 혈통 이주민들이 더 많다.
2.2.5. 유대계 독일인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들 중에는 아슈케나즈 유대인들도 있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이면서 동시에 유대계 러시아인인 복잡한 혈통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어머니도 유대계 독일인 가계이며 정확히는 독일인과 스웨덴인의 혼혈이다.
2.2.6. 기타 사례
이런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인구나 출처가 부족하다.
- 베사라비아 독일인 : 몰도바의 독일계 주민들. 러시아 제국 시절이나 소련 시절에 이들 중 일부가 러시아로 이주해오기도 했다. 前 독일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의 부모가 베사라비아 독일인이었다.[9]
- 동독계 러시아인 : 냉전 시절 동독에서 소련으로 이주한 이들 및 그 후손들. 명목상 동독이 소련의 우방국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생계형 이민이 많았으며,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 남성이 동독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후 아내를 데리고 소련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 서독계 러시아인 : 냉전 시절 서독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이들 및 그 후손들. 대체로 공산주의 성향 서독 주민들이 망명이민을 온 경우가 많았다.
- 라틴아메리카 독일인계 러시아인 : 라틴아메리카의 독일계 주민들이 다시 러시아로 이주한 케이스. 주로 냉전 시절에 미국의 패권주의나 자국의 반공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소련으로 이주해온 케이스가 많다. 공산권인 쿠바의 독일계 주민들은 쿠바 공산화 이전에는 공산주의 탄압을 피해(특히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시절), 쿠바 공산화 이후에는 생계형 목적으로 소련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많다.
3. 현황
소련 말기인 198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독일계 소련인은 203만 9천 명이었고,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자는 50.8%, 제2언어로 구사하는 자는 45.0%로 합 95.8%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으며, 이는 소련 내 비러시아계 민족 중에서 유대계 소련인에 이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2002년 기준으로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러시아인의 수는 60만 명,[10] 2020년부로 카자흐스탄에는 17만 명, 그 외 우즈베키스탄 등지에도 독일인들이 그 지역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1989년 당시에는 95만여 명의 독일계가 거주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 이들이 대거 독일로 이주하여, 2009년 이후로는 17만여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출신 독일인들은 오늘날 독일 내 주요 이민자 집단 중 하나를 구성한다. 소련 붕괴 이후 볼가 강 연안에 독일인 자치 공화국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러시아 내의 반독 감정으로 무산되는 등 반독 감정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201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은 독일계라는 이유로 소련 시절 대학 진학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모국인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다 보니 독일이 지원을 많이 해 주는 편이다.
사실 독소전쟁 이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에게 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견이 집약된 것이 독일계 러시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다. 부정적인 편견 외에도 기계처럼 정확하다는 식의 이미지도 존재했다.
독일과 거리가 먼 시베리아나 북극과 가까운 지역에 독일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의 H는 러시아어에서는 Г로 표기하기 때문에 하인리히, 헤르만 등 H로 시작하는 독일식 이름들은 게인리흐, 게르만으로 부른다. 예: 알렉산데르 게인리흐. 빌헬름은 '빌곌름(Вильгельм)'으로 부른다.
3.1. 중앙아시아 독일인
스탈린 대숙청과 강제이주의 영향으로 독일계 러시아인(특히 볼가 독일인) 상당수가 오늘날에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역사가 있다. 솔제니친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상당히 근면하였고 이들의 정착지 역시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고 한다. 흐루쇼프 시절에는 독일인 인구 상당수가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계획에 투입[11] 된 적도 있다. 카자흐로 유배된 독일인들은 1970년대 들어 자치공화국을 부활시켜달라고 모스크바로 상경해 청원하기도 해서 1979년 소련공산당에서는 카자흐 SSR에 독일계 자치주를 세우는 안을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카자흐인의 폭동이 일어나 백지화된 적도 있었다.
카자흐스탄 내 러시아인 인구와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 내 독일인 인구 역시 주로 카자흐스탄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2차대전 이후에는 독일어 사용 및 교육이 금지되어 사실상 러시아어만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독일계 러시아인 후손 상당수가 독일로 재이주한 사람들의 경우 독일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오늘날 독일 인구중 카자흐스탄 출신들은 카자흐인보다는 이쪽이 많다.[12] 볼가 독일인들은 가톨릭 및 개신교의 여러 교파를 믿던 이들이었지만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된 독일인들은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 정책 + 반독감정의 여파로 오늘날에는 상당수가 무종교/무신론자인 상태이다. 일부는 러시아인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한다.
상술한대로 한 때 95만여 명에 달했던 카자흐스탄 내 독일인들은 1999년부로 35만여 명, 2020년 부로는 17만여 명 대로 계속 감소하는 상태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전체인구의 약 1% 정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카자흐스탄 지역 전체 인구의 6~7%를 구성하던 것에 비하면 인구 비율이 많이 감소했다 하겠다. 그나마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나름 세속화가 잘 이루어지고 언론 자유도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니까 아직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남아있는 거고, 소련에서 독립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경제상황/자유도 등이 카자흐스탄만 못한 관계로 독일이나 러시아 등으로 진작 빠져나간 상태라고 한다. 키르기스스탄 독일인의 경우 주요 정착지인 베르그탈(Bergtal, 혹은 Rotfront), 칸트(Kant)[13] , 토크모크(Tokmok)를 중심으로 소련 말기에는 10만여명에 달했으나 2009년 기준으로 9천여명으로 줄었다.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소련 말기 3~4만명 안팎이었다가 2010년경 수백명 정도 남았고, 투르크메니스탄은 소련 말기 4천여명 수준이었다가 2010년경 2800명 수준.[14]
4. 인물
★ 표시는 유대계 독일인 혈통을 의미한다.
◇ 표시는 제정러시아/소련/러시아 국적이 아닌 인물을 의미한다. 도중에 국적을 바꾼 경우는 최종 국적 기준.
- 게르만 그레프: 블라디미르 푸틴 1기 정권 당시 러시아 재무장관. 2014년부터는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의 총재로 재임 중.
- 베른하르트 슈미트: 광학 기술자, 슈미트-카세그레인 망원경을 개발했다. 에스토니아 태생 발트 독일인이다.(◇)[15]
- 레프 보르가르트(◇)
- 레오니트 크레이체르(★)
- 레온티 베니히센
- 레프 크니페르: 유명 군가 초원의 작곡가. 체호프의 처조카이기도 하다.
- 레프 트로츠키(★)
- 로만 노이슈테터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 리하르트 조르게
- 바실리 바르톨트: 중앙아시아 역사학의 대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련 시절 키릴 문자를 채택한 데에는 이 인물의 역할이 컸다.
- 파비안 고틀리프 폰벨링스하우젠: 러시아의 남극 탐험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남극 대륙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을 딴 벨링스하우젠 해와 벨링스하우젠 남극 기지가 있다.
- 블라디미르 쾨펜: 쾨펜의 기후 구분의 그 쾨펜이 이 사람이다.(◇)
- 세르게이 비테 : 러시아 제국의 첫 번째 총리. 한국에서는 포츠머스 조약 때 러시아 대표로 일본과 교섭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안나 게르만(◇)
- 안드레 가임: 2010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안드레이 코빌라: 로마노프 왕조의 시조
- 안토아네트 존타크: 구한 말에 서울에 '손탁호텔'을 개업했던 그 사람이다. 혈통이 좀 복잡한데 원래는 알자스-로렌 출신의 독일계 프랑스인이었으나 보불전쟁 이후 알자스-로렌이 독일령이 되면서 독일인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로 귀화, 말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 독일에서 사망했다.(◇)
- 안톤 루빈시테인(★)
- 알렉산데르 게인리흐: 우즈베키스탄의 전 축구선수. 독일계 러시아인의 후손으로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이다.(◇)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 대공국 출신이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알렉세이 2세: 전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발트 독일인이다. 알렉세이 2세가 총대주교로 있는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준 국교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 알렉세이 밀레르: 가즈프롬의 회장. 잠가라 밸브 짤에서 푸틴에게 사정을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최측근이다.
- 예카테리나 2세
- 카를 네셀로데: 빈 회의 때 러시아 대표로 참석. 그 후 외무장관이 되어 '유럽의 헌병'으로 조롱받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들을 크림 전쟁 때까지 시행한다.
- 카를 베베르: 19세기 말 주한 러시아 공사
- 카티 네셔: 패션 모델(◇)
- 파울 폰 렌넨캄프: 제1차 세계 대전 타넨베르크 전투 당시의 러시아군 사령관. 에스토니아 태생 발트 독일인.
- 표트르 브란겔
- 표트르 3세
- 하인리히 렌츠: 렌츠의 법칙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 헬레네 피셔: 독일의 셀린 디옹이라 불리는 슈퍼스타 가수. 시베리아로 이주당한 볼가 독일인의 후손으로 시베리아에서 출생. 88년 부모와 함께 독일로 귀환.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독일 내 공연에서도 러시아 민요 등을 자주 부른다.(◇)
- 가브리엘 에인세: 부계가 독일계 러시아인의 혈통이다.(◇)
- 베른트 레노: 부계가 독일계 러시아인의 혈통이다.(◇)
- 마티아스 크라네비테르(◇)
-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가톨릭 주교이자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대교구의 보좌주교. 가톨릭 내 보수파 주교로서 성 비오 10세회를 두둔하고 여성 세족례 허용 권고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교구에서 일하는 주교로서는 드물게 강성보수파에 가까운 입장을 가진 성직자로 평가받는다. 2007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자의교서 <교황들>과 2009년 성 비오 10세회 주교들에 대한 파문 제재 철회를 환영을 표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성 비오 10세회의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를 방문하는 등 성 비오 10세회와 공공연하게 교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5. 관련 문서
[1] 독일과 이웃한 네덜란드의 경우 선원들을 독일에서 이주해온 부랑자들이 계속해서 몰려온 덕분에 네덜란드 자체의 인구가 많지도 않았음에도 불구 선원을 보충하기 쉬웠다고 한다. 대항해시대 당시 선원들이 소모품 수준으로 빨리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2] 물론 이는 다른 개신교 교파나 가톨릭을 믿는 볼가 독일인 농민들에게도 마찬가지…[3] 독일계 브라질인, 독일계 아르헨티나인들 중 일부가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한 경우도 있다.[4] 다만 루터파를 믿는 볼가 독일인들은 훗날 다른 독일계나 스웨덴 등 북구계 이민자, 혹은 핀란드계 이민자 등과 통혼하여 정체성이 희석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5] 참조.[6] 소련 붕괴 이전에는 90만여 명에 달했다.[7] 이들은 동게르만계 민족이므로, 서게르만족인 독일인과는 당연히 별개의 민족이다. 고트족을 독일인의 직계 조상으로 여기는 건 북게르만족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아이슬란드인을 독일계로 여기는 것과 다름없다.[8] 자세한 내용은 에스토니아/역사와 라트비아/역사 문서 참조[9] 다만 본인은 나치와 소련의 인구교환으로 부모가 정착한 폴란드 총독부령 하이덴슈타인(폴란드 스키에르비조프)에서 출생.[10] 최대치로 잡으면 150만 명 정도까지 늘어난다.[11] 중국의 대약진운동처럼 대기근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상당수의 목초지를 급속도로 사막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2] 종종 독일 내 극우파들이 카자흐스탄 독일인 이민 인구수까지 중동 출신 이민자로 카운트하여 무슬림 이민자들이 독일을 잡아먹는다 같은 프로파간다 등에 악용하기도...[13] 임마누엘 칸트와는 관계없고, 키르기스어로 설탕을 뜻한다.[14] 참조 :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의 투르크메니스탄 인구통계 관련 문서.[15] 출생지는 탈린 인근의 나이사르(Naissaar) 섬이다. 다만 러시아 쪽에서는 활동하지 않았고 미트바이다(Mittweida)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독일로 이주한 이후로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