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프리드리히 엥겔스

<colbgcolor=black> 출생
1820년 11월 28일
사망
1895년 8월 5일
종교
무종교(무신론자)
1. 소개
2. 생애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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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사회주의 철학자,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1](Friedrich Engels, 1820년 11월 28일 - 1895년 8월 5일). 독일태생으로 젊은날까지 독일에서 삶을 거쳐 영국에서 활동했다. 마르크스와 지적동료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2. 생애


독일 라인란트의 바르멘시(오늘의 부퍼탈)에서 방직 공장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자신 같은 자본가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엥겔스는 김나지움중퇴하고 브레멘 상사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착취와 법과 결탁한 계급 투쟁 탄압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도이칠란트 통신'에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을 내었다. 1841년에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지원병으로 포병 연대에 들어 갔으며, 베를린대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하며 헤겔리안 좌파가 되었다. 군 복무를 끝마친 그는 영국맨체스터로 건너가 영국 노동 계급의 비참한 삶을 깊이 연구하였고, 차티스트 운동 관련자들과 연계를 맺었으며, 영국의 출판물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앵겔스의 이러한 현실 비평은 마르크스가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롯한, 현실에 맞지 않는 사회주의 조류들을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고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가부장제에 대해 크게 비판하고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류는 본래 모계사회였으나 농업 혁명을 통해 부계사회로 바뀌었다는 이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유산계급 혹은 소생산자 계급 남성의 여성억압의 원인을 남성이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재산을 확실히 자기 자식에게 상속하고자 여성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상속할 재산 자체가 없는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혁명을 통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1844년, 마르크스와 만난 그는 그 뒤로 마르크스의 열성적인 동지이자 후원자가 된다.[2] 마르크스와 함께 의인동맹에 가입한 후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바꾸고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함께 저술하였다. 마르크스 사후에도 그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론의 2권과 3권의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고 제 2 인터내셔널을 설립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도 힘썼다. 말년의 주요정당으로 등극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저서로는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hums und des Staats)』 등이 있다.
사후에는 마르크스, 레닌과 함께 공산주의 3대 위인으로 추앙받았으며(당시 소련이나 동독의 정치행사를 보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3인의 초상화를 함께 배치한 경우가 아주 많다.), 동독군 최정예 부대에 '프리드리히 엥겔스 연대' 이름이 붙었다.

3. 여담


엥겔스는 1863년 1월사실혼 관계였던 아내 메리 번스가 사망했을 때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메리가 죽었다네... 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 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그러자 마르크스는 다음 날 바로 답장을 보냈는데 의례적인 조의를 한 마디 표한 후 곧바로 아이들 학비와 집세 독촉으로 힘들다는 푸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3]

닷새 동안 엥겔스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다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 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 내 모든 친구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일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 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줄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럼 그렇게 하게나!"

엥겔스가 이렇게 크게 화를 내고 경제 지원을 끊어버린 후 3주 동안 마르크스는 돈이 너무 궁해져서 아내와 날이면 날마다 부부싸움을 한 것과 동시에 엄청난 생활고에 처하게 되었다. 1862년까지 마르크스가 뉴욕트리뷴 기자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뉴욕트리뷴이 1857년 공황과 남북전쟁으로 회사사정이 기울어지면서 마르크스도 뉴욕트리뷴을 박차고 나왔는데 이후로 한 동안 엥겔스의 도움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얼마나 심각한 생활고에 처했냐면 아내와 본인은 막내딸을 데리고 런던의 빈민 구호 시설로 들어가기로 했고 딸들은 가정 교사 일자리를 알아볼 정도였다. 더군다나 마르크스가 심각한 악필이라서 철도공무원 시험에도 떨어진 점이나 마르크스가 기사를 썼을 때 엥겔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른 언론사에 취직했어도 엥겔스의 도움은 필수였을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사과 편지를 썼고[4] 엥겔스가 그것을 받아줌에 따라 관계를 회복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후일담이 있는데 연인 메리 번즈의 사망 이후 그녀와 동거하던 여동생 리디아 번즈와 연인이 된다. 엥겔스는 당시의 결혼 제도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리디아 번즈가 죽기 전 종교적 이유로 결혼을 간청하자 혼인 성사를 치르고 혼인 신고를 했다. 리디아 번즈가 죽은 후 마르크스는 지난번의 일과는 달리 엥겔스의 슬픔을 함께 애도해주면서 바르게 처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엥겔스와 그의 아내인 리디아 번즈를 무시하는 농담을 하곤 했다. 리디아가 죽은 지 이틀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투시[5]

와 렌쇼 부인, 펌프스[6]가... 죽은 여자의 잡동사니를 정리했어. 렌쇼 부인[7]이 편지 한 묶음을 발견하고는 물주 선생[8]에게 주려고 했지. 그 자리에 같이 있었거든. 그러자 그 친구가 그랬대. "됐습니다. 태워버리세요! 볼 것 없어요. 날 속일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니까." 피가로[9]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에 렌쇼 부인이 투씨한테 그랬대. "물론 리지의 편지를 본인이 써주고 받은 편지를 읽어주기도 했으니까.[10] 비밀로 할 얘기는 없다고 확신했겠지. 하지만 리지로서는 그래야 할 내용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인간의 진화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당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손보다 먼저 진화했을 거라고 주장했는데, 엥겔스는 그걸 부르주아식 사고라고 비판하고, 인간은 이족 보행을 통해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두뇌가 발달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1] Engels의 정확한 발음은 '엥얼스[ʔɛŋl̩s\]'. 하지만 일본의 독일어 표기 상당수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국립국어원의 독일어 표기법에 따르면 엥겔스가 옳다. 참고로 Engel은 독일어로 천사라는 뜻이다.[2] 딱 한 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이가 나빠진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죽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마르크스가 답장에 돈 좀 꿔달라는 말을 써 넣어 엥겔스가 폭발한 것이다.[3] 마르크스가 이런 편지를 보냈던 것은 메리가 엥겔스에게 어울리는 반려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녀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메리를 우습게 보곤 했다.[4] 참고로 마르크스가 사과를 하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특히 마르크스는 고집 세고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독일인 커뮤니티 사이에서도 수시로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기에 망명자들 사이에서도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고, 친구도 적었다.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서 온 사람이 자식들과 친구 엥겔스를 포함한 11명에 불과했을 정도였다.[5] 엘리노어 마르크스를 말한다.[6] 리디아의 조카딸[7] 리지와 엥겔스 모두 잘 알던 사이였다.[8] 엥겔스를 뜻한다.[9] 보마르셰의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 피가로를 뜻한다.[10] 리디아는 문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