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소재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산108-2번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80년 9월 16일
'''제작시기'''
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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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국보 제201호


1. 개요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호골산 산자락 끝의 암반에 새겨진 불상(마애불)으로 7세기경 신라불상으로 여겨진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위치한 자리에는 본래 신라시대에 세워진 뒤로 조선 중후기까지 명맥을 이어왔던 지림사라는 사찰이 상당한 규모로 있었다고 전하는데,[1] 본 마애불상 바로 옆에는 원래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이 있었고[2] 석조반가상은 그 본래 크기가 약 4m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림사가 상당한 거찰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3] 본 마애불상은 지림사가 폐사된 이후 잊혀져 방치되고 있다가 1947년 주변 부지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4]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주변 바위에 명문과 같은 정보가 딱히 새겨진 것이 없어서 추정이긴 하지만, 발견된 지역이나 제작 기법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7세기 후반 경 신라의 불상으로 보인다. 만들어진지 오래 되었고 자연적인 침식으로 인해 여기저기 손상을 입은 부분이 많아서 불상의 보존상태는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1980년에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었으며, 비바람에 의한 풍화를 막기 위해 1982년에 간단한 보호각을 세운 후로 현재까지 보호각 안에서 보존되고 있다.[5][6]

2. 내용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5m, 너비 4m의 커다란 암반에[7] 새겨진 높이 4.3m의 거대한 불상이다. 다만 조성된지 천 년도 이미 훌쩍 넘었으며 야외 노천암반에 새겨진지라 비바람에 노출되어왔기에 여기저기 깨지거나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본 마애불상이 어떤 부처를 조각한 것인지는 알기가 힘들지만,[8]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이 취한 자세, 얼굴의 형태, 광배#s-1.2의 장식과 주변의 화불들 등은 여전히 어느 정도 알아 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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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특징은, 불상의 몸체가 화강암질 암반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서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아주 도드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반이 되는 암반으로부터 가장 튀어나온 부분은 무려 1.7m나 된다고 하며, 이는 마치 부처가 바위 안에서 막 튀어나와 앉은 듯한 인상을 주거나[9] 기반 암반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석조 불상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다만 (마치 에티오피아 랄리벨라 암굴교회들처럼) 기반 암반을 통채로 파고들어가 깎아내어 가운데 불상을 새길 심만 남긴 뒤 이 심에 불상을 새긴 것인지, 아니면 암반로부터 원래 옆으로 삐죽 나와있던 작은 바위를 본체로 삼아 불상을 새기고 주변을 다듬어서 이러한 효과를 주도록 디자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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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마애불상의 얼굴은 비바람에 다소 마멸돼서 정확한 표정의 디테일은 알기는 어렵지만 둥글넓적한 얼굴형과 눈, 코, 입 등은 비교적 형태를 가늠할 수 있게 남아 있으며 어렴풋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의 머리는 다소 크게 표현돼서 몸체와는 비례가 좀 맞지 않는다. 불상의 몸체는 그 크기에 맞게 위엄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체구는 당당하다. 마멸되어 정확하게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가슴팍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오른손은 여원인[10]수인을 취한 형체이며, 큼직한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손가락이 아래를 향하게 하여 전면을 향해 펼쳐서 시무외인[11]을 취하고 있다. 고대의 불상이 어느 부처를 표상한건지가 불명확할 때는 대체로 수인을 참조하여 특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여원인과 시무외인의[12] 수인은 부처들마다 가리지 않고 두루 취하는 경우가 많은 흔한 수인인지라 본 마애불상의 정체를 밝히는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13]
본 마애불상이 입고 있는 옷도 전체적으로 마멸되어 그 형체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양어깨에 의복을 걸치고 있으며 이는 왼팔을 전체적으로 덮고 쭉 이어져 내려와서 가부좌를 튼 양다리 및 무릎, 그리고 그 아래 대좌까지 늘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복의 디테일은 잘 안보이지만,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왼팔의 옷자락과 주름은 어느 정도 판명 가능하게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의복의 표현 방식은 신라 불상의 고식(古式) 양식이라고 한다.[14]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의 광배와 화불은 기반 암반에 새겨져 있다. 광배는 머리 뒤의 두광과 몸체 뒤의 신광이 모두 존재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두광은 절반 가량이 깨져서 두광의 좌측 부분은[15] 사라지고 없다. 남아 있는 두광의 우측에는 화불(化佛)로 추정되는 작은 부처 둘이 남아있다.[16] 또한 두광에는 연꽃 무늬 장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본래의 두광은 화불 다섯과[17] 연꽃 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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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우하단의 화불[18]
신광의 경우, 본 마애불상 좌우편의 상하로 화불이 둘씩 있어 총 넷이 있다. 이 역시도 안타깝지만 전체적으로 마멸된 정도가 심해 상세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다.[19] 그나마도 좌측 상단의 화불은 두광 부분과 함께 절반 이상이 깨져버려서, 대좌에 올라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다. 그래도 두광과 신광에 있는 화불들은 모두 연꽃 대좌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며 머리 뒤로 두광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은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이외에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의 주변으로도 마애조각들이 존재하는데, 지림사 원통전 뒤편 암벽에는 불상 네 구와 탑 한 기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중 마애탑은 상당히 희귀한 사례로 경주 남산 탑곡 부처바위의 구층마애탑과 칠층마애탑[20], 경주 백률사 삼층마애탑, 2011년 발견된 신라시대 대구 마애암각군의 9층탑 부조등 극소수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2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에 대해 전해지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제작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만들어진지 천 년도 훨씬 넘어 세월의 풍파 속에서 불상이 여기저기 많이 훼손되기는 했다. 다만 불상의 표현 기법은 여전히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기에, 이를 통해서 제작 시기를 대략적으로 추정한다. 불상의 얼굴이나 의복 표현 등으로 보아 7세기 전반기의 양식이 드러나지만, (비록 백제의 불상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보물 제45호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에서 본 마애불상을 거쳐 보물 제221호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로 이어지는 흐름이 발견되고,[22] 불상의 얼굴 및 몸체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조각력을 고려해보면 실제 제작시기는 대략 7세기 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23]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비록 그 보존상태가 양호하진 않지만 7세기 중후반 신라 불상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영주와 봉화 일대의 불상을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 9월 16일에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201호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 지금도 지림사가 있긴 하지만 이는 현대에 들어서(1949년경) 재건한 것이다. 본래의 지림사는 조선 중후기 경의 알 수 없는 시기에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참조 : 두산백과 - 지림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 지림사(봉화)[2]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1966년에 보호를 위해 경북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89년 보물 제997호로 지정되었다.[3] 본 마애불상과 석조반가상의 크기가 거대하며 이와 같이 큰 불상은 거찰에서나 모신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본래의 지림사가 동네 평범한 작은 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5]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북지리 마애불[6] 문서 상단의 사진과는 다르게 현재는 보호각에 축대도 올리고 기둥도 더 세워서 보호각을 더 크게 개축해놨으며 주변도 깔끔하게 정비되어있다.[7]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북지리 마애불[8] 본 마애불상은 본래 감실 안의 본존불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감실 혹은 전각이 있었을 것이지만(다만 돌벽으로 된 감실이었을지 아니면 현재의 보호각처럼 나무로 된 것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중후기 지림사가 폐사된 이후 1947년 발견 전까지는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왔다.[9]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북지리 마애불[10] 與願印 : 손바닥을 편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이 위를 향하도록 하여 밖으로 향하는 자세[11] 施無畏印 : 손바닥을 펴고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전하는 듯한 자세[12] 양손으로 두 수인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 시무외여원인이라고 합쳐서 부르거나 통인(通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13] 참고문헌에 따라서는 항마촉지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조 : 두산백과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1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15] 이하에서 말하는 좌우는 본 마애불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한다.[16] 참조 : 미술대사전(용어편) - 화불[17] 참고문헌에 따라 일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조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북지리 마애불[18] 화불들 가운데 형태가 그나마 가장 잘 남아 있는 편이다.[19] 화불들의 얼굴은 심하게 마멸되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20] [image][21]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북지리 마애불[2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23]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