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베날 하뱌리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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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베날 하뱌리마나(Juvénal Habyarimana, 1937년 3월 8일 ~ 1994년 4월 6일)
르완다어 발음으로는 쥐베날 하브자리마나라 불린다.
르완다의 독재자.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이후 1973년부터 1994년까지 약 21년 동안 르완다의 독재자 자리에 있었다.
하뱌리미나는 르완다 킨샤사의 로바니움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키갈리군관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했다. 1963년에는 르완다군 참모장이 되었고, 1965년 6월에는 르완다 육군사령관이 1965년 11월 르완다 민족방위장관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73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르완다 대통령이였던 카이반다를 몰아내고 1973년 8월 대통령 겸 총리 겸 국방장관이라는 자리를 꿰차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쿠데타 주도세력은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해 투치족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살과는 별개로 1973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투족의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투치족에 대한 종족 융화정책을 선택했다. 이것은 투치족은 소수파로 조력하지만 정치활동에 관여만 하지않으면 탄압받지 않고 물론 경제활동도 보장되어 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가지는 투치족의 유력 사업가도 출현했으며, 후투와 투치간의 결혼도 추진되어 공존할 수 있었다. 즉, 쿠데타 직후에 죽인 투치족들은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1975년에는 르완다 개발추진민족혁명운동(MRND)을 결성하여 그 당의 지도자가 되어 당 내에서 입지를 다진 다음 1978년 하뱌리마나는 개발추진민족혁명운동(MRND)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헌법을 제정하고 그 해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하뱌리마나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하였고, 의회는 국가개발심의회가 대행하였다.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군부 실세들을 내각에 임명하였고, 1983년 3월 대통령에 3번째로 당선되어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은 '''대단히 의심스러웠는데''' 왜냐하면 3번 선거를 할 때마다 '''약 99%에 가까운''' 지지율이 나왔기 때문이다. 197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치뤄진 투표에서는 98.99%라는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1983년 12월 19일 투표에서는 99.97% 지지율로, 1988년 12월 19일 이뤄진 그의 3번째 투표에서는 99.98%의 지지율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하뱌리마나에 대항하기 위해 1979년 해외로 망명한 르완다인들이 르완다 후투족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투치족의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wandese Alliance for National Unity, RANU, RPF의 전신)이 결성되었다.
이후 1981년에는 총선을 실시하여 르완다는 군사 쿠데타 이후 최초의 입법기관을 갖게 되었다.
한편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대통령에 계속 당선되며 동시에 투치족을 억압하고 있었고, 하뱌리마나 정권은 르완다의 경제를 어느 정도 성장시키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커피가격이 하락하고 르완다 내에서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며 흉작이 계속되자 르완다의 경제는 점차 파탄지경이 되어갔으며, 르완다 내의 빈곤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 와중에 1986년 투치족의 폴 카가메는 르완다민족통일동맹(RANU)를 르완다 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RPF)으로 개칭한 뒤, 프레드 르위게마(Fred Rwigema, 1957~1990)와 함께 우간다로 탈출한 투치족과 요웨리 무세베니의 우간다군에 소속된 투치족, 미국에서 훈련받은 투치족 등 5천명 규모의 반군을 조직하였다.
하뱌리마나는 1990년 6월 다당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우간다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애국전선(RPF) 반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0년 10월 1일부터 르완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 자이르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어 후투족 르완다군과 함께 RPF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르완다군과 자이르군은 르완다의 투치족뿐만 아니라 투치족과 친하게 지내던 후투족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RPF 반군의 공격은 수그러들기는 커녕 계속 증가하자 1991년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더 이상 투치족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자신의 정권이 엎어질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르완다는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1992년부터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남아공, 이집트까지 르완다에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 8월 르완다 정부는 RPF 반군과 탄자니아의 아루샤(Arusha)에서 RPF가 참여하는 과도거국내각 구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르완다 정부군과 RPF군의 통합에 합의하고, RPF는 르완다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후투족 지도자들이 권력배분을 거부하여 과도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양측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RPF 반군에 의한 학살을 모면하기 위해 약 150만명의 후투족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1993년 10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후투족 출신 멜키오르 은다다예(Melchior Ndadaye 1953~1993) 부룬디 대통령이 선출된다.
투치족이 장악한 군부에 의해 암살되자, 부룬디 내전이 발발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수만명이 희생되었다.
부룬디 내전은 르완다까지 영향을 끼쳤고 아루샤 협정은 휴지조각이 되어 양 종족간의 증오심과 적대감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같은 달에 유엔은 아루사 평화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캐나다의 로미오 댈래어(Romeo Dallaire) 소장을 사령관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 UNAMIR) 2천 5백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훗날 댈래어 소장이 쓴 그의 저서 '악마와 악수하다(Shake Hands with the Devil)'에 적혀있는 것처럼 유엔 평화유지군은 두 나라의 내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애초 댈래어 소장이 요청한 병력은 4천명이었다.
1993년부터 르완다 정부가 살인부대인 후투족 민병대를 창설하기 시작하면서 후투족 민병대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굽은 칼, 러시아제 AK-47 소총, 못을 박은 곤봉, 창 등으로 무장하였고, '''프랑스'''는 르완다 정부군에 대한 무기공급을 계속했다.
이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던 르완다가 반프랑스 노선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우대하며 영연방에도 가입했다. 프랑스가 내전을 부추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로펌에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7년에 발표된 뮤즈 보고서(Muse Report).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백인정권은 르완다 정부에 590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공급했으며, 이집트는 600만 달러 상당의 무기구매계약을 르완다 정부와 맺었다.
한편 미국은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RPF 반군에게 무기와 군사훈련을 제공했다.
1994년 1월 아루샤 협정에 따라 과도정부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하뱌리마나가 후투족 출신의 파우스틴 트와기라뭉구(Faustin Twagiramungu)를 총리에 임명하자 RPF는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르완다 정국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94년 4월 6일 부룬디 대통령인 시프리앙 은타랴미라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키갈리 국제공항 근처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이 독재자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폭파된 것은 현재까지도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2012년 프랑스 조사단의 조사 결과로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사망은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악명높고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잔인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청소된 르완다 학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몇몇 르완다 사람들은 하뱌리마나가 르완다 내전을 막으려고 했으나 하뱌리마나가 죽었기 때문에 르완다 학살이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르완다 내전은 하뱌리마나의 장기 독재로 인해 일어난 것이며 훗날 일어나는 르완다 학살 또한 하뱌리마나의 계략에 의해서 발생했다.
'''하뱌리마나는 후투족에게 투치족을 차별하고 학살하라며 후투족들을 선동했으며, 르완다 학살을 조장했던 사람이 바로 하뱌리마나였다.''' 실제로 이미 일어나고 있던 폴 카가메와의 전투도 하뱌리마나가 무자비한 학살과 투치족 차별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였다. 실제로 그의 독재 기간 동안 르완다 학살을 위한 준비들이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르완다 내에서 많은 민병대와 투치족들에게 계속해서 무기가 지급되고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으며 그가 체결한 아루샤 조약 또한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술책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평화조약을 체결해서 전쟁 상황을 중지시키고 내부 재정비를 한 다음 조약을 파기하고 투치족을 쓸어버리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르완다 학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결코 준비되지 않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니라 하뱌리마나에 의해서 차근차근 계획되던 준비된 대학살이였다. 대통령 경호대가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평화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라디오 방송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아가타 우월링기이마나 총리와 총리 부부를 보호하던 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 병사들을 죄다 살해한거나 똑같이 후투족과 투치족 내전을 겪었고 대통령이 죽은 부룬디에서는 적어도 르완다와 같은 수준의 대량 학살까지는 없었다는게 이를 잘 보여준다.[1] 웃긴 건 지금 부룬디의 상황이 학살을 겪은 르완다보다 오히려 막장이라는 거지만.
다만 이 인간이 그렇다 해서 학살의 주범까지는 또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날리는 학살자가 될지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그나마의 명예를 챙길지에 대해서 갈팡질팡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며,[2] 후투족 강경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개인적으로는 학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서서히 변해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건 르완다 학살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원래 계획대로 가지 않고 어설프게 시작됐고, 결국 학살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투치족이 일부나마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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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베날 하뱌리마나(Juvénal Habyarimana, 1937년 3월 8일 ~ 1994년 4월 6일)
르완다어 발음으로는 쥐베날 하브자리마나라 불린다.
1. 개요
르완다의 독재자.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이후 1973년부터 1994년까지 약 21년 동안 르완다의 독재자 자리에 있었다.
2. 생애
하뱌리미나는 르완다 킨샤사의 로바니움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키갈리군관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했다. 1963년에는 르완다군 참모장이 되었고, 1965년 6월에는 르완다 육군사령관이 1965년 11월 르완다 민족방위장관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73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르완다 대통령이였던 카이반다를 몰아내고 1973년 8월 대통령 겸 총리 겸 국방장관이라는 자리를 꿰차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쿠데타 주도세력은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해 투치족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살과는 별개로 1973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투족의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투치족에 대한 종족 융화정책을 선택했다. 이것은 투치족은 소수파로 조력하지만 정치활동에 관여만 하지않으면 탄압받지 않고 물론 경제활동도 보장되어 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가지는 투치족의 유력 사업가도 출현했으며, 후투와 투치간의 결혼도 추진되어 공존할 수 있었다. 즉, 쿠데타 직후에 죽인 투치족들은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1975년에는 르완다 개발추진민족혁명운동(MRND)을 결성하여 그 당의 지도자가 되어 당 내에서 입지를 다진 다음 1978년 하뱌리마나는 개발추진민족혁명운동(MRND)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헌법을 제정하고 그 해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하뱌리마나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하였고, 의회는 국가개발심의회가 대행하였다.
2.1. 독재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군부 실세들을 내각에 임명하였고, 1983년 3월 대통령에 3번째로 당선되어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은 '''대단히 의심스러웠는데''' 왜냐하면 3번 선거를 할 때마다 '''약 99%에 가까운''' 지지율이 나왔기 때문이다. 197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치뤄진 투표에서는 98.99%라는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1983년 12월 19일 투표에서는 99.97% 지지율로, 1988년 12월 19일 이뤄진 그의 3번째 투표에서는 99.98%의 지지율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하뱌리마나에 대항하기 위해 1979년 해외로 망명한 르완다인들이 르완다 후투족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투치족의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wandese Alliance for National Unity, RANU, RPF의 전신)이 결성되었다.
이후 1981년에는 총선을 실시하여 르완다는 군사 쿠데타 이후 최초의 입법기관을 갖게 되었다.
한편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대통령에 계속 당선되며 동시에 투치족을 억압하고 있었고, 하뱌리마나 정권은 르완다의 경제를 어느 정도 성장시키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커피가격이 하락하고 르완다 내에서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며 흉작이 계속되자 르완다의 경제는 점차 파탄지경이 되어갔으며, 르완다 내의 빈곤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 와중에 1986년 투치족의 폴 카가메는 르완다민족통일동맹(RANU)를 르완다 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RPF)으로 개칭한 뒤, 프레드 르위게마(Fred Rwigema, 1957~1990)와 함께 우간다로 탈출한 투치족과 요웨리 무세베니의 우간다군에 소속된 투치족, 미국에서 훈련받은 투치족 등 5천명 규모의 반군을 조직하였다.
2.2. 민주주의 선언
하뱌리마나는 1990년 6월 다당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우간다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애국전선(RPF) 반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0년 10월 1일부터 르완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 자이르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어 후투족 르완다군과 함께 RPF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르완다군과 자이르군은 르완다의 투치족뿐만 아니라 투치족과 친하게 지내던 후투족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RPF 반군의 공격은 수그러들기는 커녕 계속 증가하자 1991년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더 이상 투치족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자신의 정권이 엎어질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르완다는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1992년부터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남아공, 이집트까지 르완다에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 8월 르완다 정부는 RPF 반군과 탄자니아의 아루샤(Arusha)에서 RPF가 참여하는 과도거국내각 구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르완다 정부군과 RPF군의 통합에 합의하고, RPF는 르완다에 상주하게 되었다.
2.3. 르완다 정치 분쟁
그러나 극단적인 후투족 지도자들이 권력배분을 거부하여 과도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양측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RPF 반군에 의한 학살을 모면하기 위해 약 150만명의 후투족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1993년 10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후투족 출신 멜키오르 은다다예(Melchior Ndadaye 1953~1993) 부룬디 대통령이 선출된다.
투치족이 장악한 군부에 의해 암살되자, 부룬디 내전이 발발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수만명이 희생되었다.
부룬디 내전은 르완다까지 영향을 끼쳤고 아루샤 협정은 휴지조각이 되어 양 종족간의 증오심과 적대감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같은 달에 유엔은 아루사 평화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캐나다의 로미오 댈래어(Romeo Dallaire) 소장을 사령관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 UNAMIR) 2천 5백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훗날 댈래어 소장이 쓴 그의 저서 '악마와 악수하다(Shake Hands with the Devil)'에 적혀있는 것처럼 유엔 평화유지군은 두 나라의 내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애초 댈래어 소장이 요청한 병력은 4천명이었다.
1993년부터 르완다 정부가 살인부대인 후투족 민병대를 창설하기 시작하면서 후투족 민병대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굽은 칼, 러시아제 AK-47 소총, 못을 박은 곤봉, 창 등으로 무장하였고, '''프랑스'''는 르완다 정부군에 대한 무기공급을 계속했다.
이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던 르완다가 반프랑스 노선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우대하며 영연방에도 가입했다. 프랑스가 내전을 부추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로펌에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7년에 발표된 뮤즈 보고서(Muse Report).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백인정권은 르완다 정부에 590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공급했으며, 이집트는 600만 달러 상당의 무기구매계약을 르완다 정부와 맺었다.
한편 미국은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RPF 반군에게 무기와 군사훈련을 제공했다.
1994년 1월 아루샤 협정에 따라 과도정부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하뱌리마나가 후투족 출신의 파우스틴 트와기라뭉구(Faustin Twagiramungu)를 총리에 임명하자 RPF는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르완다 정국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2.4. 최후
그러다가 1994년 4월 6일 부룬디 대통령인 시프리앙 은타랴미라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키갈리 국제공항 근처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이 독재자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폭파된 것은 현재까지도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2012년 프랑스 조사단의 조사 결과로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2.5. 이후, 르완다 내전
그의 사망은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악명높고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잔인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청소된 르완다 학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3. 평가
몇몇 르완다 사람들은 하뱌리마나가 르완다 내전을 막으려고 했으나 하뱌리마나가 죽었기 때문에 르완다 학살이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르완다 내전은 하뱌리마나의 장기 독재로 인해 일어난 것이며 훗날 일어나는 르완다 학살 또한 하뱌리마나의 계략에 의해서 발생했다.
'''하뱌리마나는 후투족에게 투치족을 차별하고 학살하라며 후투족들을 선동했으며, 르완다 학살을 조장했던 사람이 바로 하뱌리마나였다.''' 실제로 이미 일어나고 있던 폴 카가메와의 전투도 하뱌리마나가 무자비한 학살과 투치족 차별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였다. 실제로 그의 독재 기간 동안 르완다 학살을 위한 준비들이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르완다 내에서 많은 민병대와 투치족들에게 계속해서 무기가 지급되고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으며 그가 체결한 아루샤 조약 또한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술책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평화조약을 체결해서 전쟁 상황을 중지시키고 내부 재정비를 한 다음 조약을 파기하고 투치족을 쓸어버리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르완다 학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결코 준비되지 않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니라 하뱌리마나에 의해서 차근차근 계획되던 준비된 대학살이였다. 대통령 경호대가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평화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라디오 방송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아가타 우월링기이마나 총리와 총리 부부를 보호하던 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 병사들을 죄다 살해한거나 똑같이 후투족과 투치족 내전을 겪었고 대통령이 죽은 부룬디에서는 적어도 르완다와 같은 수준의 대량 학살까지는 없었다는게 이를 잘 보여준다.[1] 웃긴 건 지금 부룬디의 상황이 학살을 겪은 르완다보다 오히려 막장이라는 거지만.
다만 이 인간이 그렇다 해서 학살의 주범까지는 또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날리는 학살자가 될지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그나마의 명예를 챙길지에 대해서 갈팡질팡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며,[2] 후투족 강경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개인적으로는 학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서서히 변해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건 르완다 학살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원래 계획대로 가지 않고 어설프게 시작됐고, 결국 학살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투치족이 일부나마 생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