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사택지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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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 시기의 인물 사택지적의 삶이 기록된 금석문으로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였는데 2014년 10월 20일에 보물 제18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부여에 신궁을 건설하려던 과정에서 도로에 깔기 위한 석재들을 모았는데 해방 이후 그 자재들을 처리하지 않고 한쪽에 쌓아 두었다. 이후 1948년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 석재들 사이에서 학자들이 발견했다.
화강암 재질로 높이 102 cm, 폭 38 cm, 두께 29 cm지만 비석이 온전하질 않다. 사택지적비의 가치는 상당히 높다. 현재까지 발견된 비석들 중 '''백제의 금문석으로서는 유일한 비석'''이기 때문이다.
비의 우측상단부에는 직경 20 cm의 원안에 봉황을 새겨 넣었고 여기에 붉은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비석에는 한변에 7 cm인 칸들을 그려 나눴고 그 칸 안에 글자들을 새겨 넣었다. 1행은 총 14자로 앞부분에 해당되는 4행까지 모두 56자가 남았다.
1. 개요
백제 의자왕 시기의 인물 사택지적의 삶이 기록된 금석문으로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였는데 2014년 10월 20일에 보물 제1845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글자체는 구양순체이고 문장은 육조시대의 사륙변려체를 따랐다. 사택지적비에는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옷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라고 했는데, 사택지적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불교에 귀의하려고 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또한 도교의 허무주의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라는 문구에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백제 후기에 도교도 곳곳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른 유물로는 부여에서 발굴된 산경전(山景塼)에는 도교를 상징하는 삼신산(三神山)이 그려져 있었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갑인년[1]
정월 9일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높은(巍巍) 한 자애로운 모습은
吐神光以送雲莪莪悲貇含聖明以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莪莪)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 여기까지가 비석에 남은 부분이라 더 이상 내용은 알수가 없다. 출처 :『역주 한국고대금석문』(1992年)
3. 발견 과정
원래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부여에 신궁을 건설하려던 과정에서 도로에 깔기 위한 석재들을 모았는데 해방 이후 그 자재들을 처리하지 않고 한쪽에 쌓아 두었다. 이후 1948년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 석재들 사이에서 학자들이 발견했다.
4. 형태
화강암 재질로 높이 102 cm, 폭 38 cm, 두께 29 cm지만 비석이 온전하질 않다. 사택지적비의 가치는 상당히 높다. 현재까지 발견된 비석들 중 '''백제의 금문석으로서는 유일한 비석'''이기 때문이다.
비의 우측상단부에는 직경 20 cm의 원안에 봉황을 새겨 넣었고 여기에 붉은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비석에는 한변에 7 cm인 칸들을 그려 나눴고 그 칸 안에 글자들을 새겨 넣었다. 1행은 총 14자로 앞부분에 해당되는 4행까지 모두 56자가 남았다.
5. 바깥고리
6. 보물 제1845호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대의 인물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碑石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大姓八族의 하나인 沙宅氏 출신의 沙宅智積은 "일본서기"에서 大佐平의 지위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사찰의 殿閣과 塔像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관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
[1] 의자왕 14년(654)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