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왕

 


'''왕호'''
부태왕(夫台王)
''''''
해(解)
''''''
부태(夫台)
'''생몰 연도'''
불명
'''재위 기간'''
불명
1. 개요
2. 행적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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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세기 중후반에 등장하는 부여의 왕.

2. 행적


桓帝 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의) 조정에 나아가 하례하고 조공을 바쳤다.

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영강(永康) 원년(167)에 왕 부태(夫台)가 2만여인을 이끌고 현도를 노략질하자,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니, 참수함이 1천여 급(級)이었다.

至靈帝 熹平三年, 復奉章貢獻.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이르러 다시 봉장(奉章)하고 조공해왔다.

167년에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현도군을 노략질하자 현도태수 공손역[1]가 이를 격퇴하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침략은 기록상 몇 안 되는 부여의 대외 원정이다. 이후 부여는 174년에 공물을 바쳐 후한과의 국교를 재개했는데, 부태왕이 이 시기까지 재위했는지는 알 수 없다.

3. 기타


본래 부여는 오랫동안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다가 전한한무제 때 부여의 요청으로 요동군의 관할로 바뀌었는데,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부여사, 조선 전사 2권에 따르면 이는 부여가 현도군(고구려)이 아니라 요동군(요동 공손씨 정권)을 통해 후한 황실과 거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부여와 현도군 사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악화되었고 167년에 일어난 부여의 현도 공격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후대의 위구태왕과의 관계는 불명확한데, 위구태왕과 동시기에 즉위한 공손도의 양부 현도태수 공손역과 동시대의 사람이므로 한 세대 위의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1] 후일 요동 공손씨 정권을 수립하는 공손도가 이 사람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