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공손씨 정권

 


1. 개요
1.1. 상세
2. 공손씨 일족
3. 매체에서


1. 개요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요동에 할거했던 공손씨 일족의 정권. 존속기간은 189년 ~ 238년 6월이다.[1] 중심지는 양평성(襄平城)[2]으로 현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 연(燕)나라라고도 하며 구별할 때는 성씨를 붙여 공손연(公孫燕), 동연(東燕)이라 칭한다.

1.1. 상세


중국이 후한 말의 난세로 혼란한 틈을 타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중국 동부의 이민족을 관리하였다. 스스로 왕을 칭하기도 하고 거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위나라 사마의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만다.
같은 공손씨지만, 후한 말에 유주를 중심으로 할거했던 공손찬과는 관련이 없다. 요동에는 '제후의 후손'이라는 뜻의 '공손(公孫)'씨를 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3] 공손도를 양자 취급했던 집안도 공손씨이고, 공손도를 벼락출세한 놈 취급하고 공손강을 하인처럼 부렸던 것도 공손씨인 공손소이다. 물론 공손강이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태수가 된 다음에는 공손소를 제거해버렸다.
한국사에도 꽤 엮이는 부분이 많은데,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요동군뿐 아니라 그보다 동쪽에 있는 현도군, 낙랑군의 명목상의 종주권자였기 때문. 변방인 낙랑 지역에 고구려가 침입하고 인구가 대거 삼한으로 요동으로 이주하는 걸로 봐서, 보다 남쪽에 있던 낙랑군의 대방현 외 6개 현을 분리해 대방군을 신설하였다. 고구려와 선비족에 대항해 공손도의 종가 딸(宗女)과 부여 위구태왕 사이에 혼인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산동 지역의 진출도 꾀했는데 원소가 원담을 파견해 청주를 장악하게 한 시점에서 잃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는 산상왕 시기 고구려 왕위계승에 고발기를 지원하면서 내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 보았지만 고발기가 패하면서 시도에만 머물렀다.
고구려나 위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족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유화 정책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때, 요동 공손씨 세력을 한화#s-3.1(漢化)한 선비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진위는 불명이다. 공손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요동은 위와 서진의 지배를 거쳐서 모용선비가 차지하게 된다.
공손씨 정권과 관련된 유적들도 의외로 많은 편이다. 요서, 요동, 산동 지역에서 후한 중기부터 나타나는 석판으로 벽을 만들고 여려 공간 구성을 갖추고 벽화를 장식한 석판묘들이 그것이다. 요서, 요동, 산동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으며, 확인된 석판묘는 약 100여 기에 달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요양에서 확인된 것이며 시기적으로도 공손씨 정권의 존속기간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요양 삼도호, 남환가, 상왕가촌 고분군 등이 있다. 북한의 안악 3호분도 묘제의 유형 상으로는 석판묘에 해당하며, 천정구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2. 공손씨 일족


'''연의 역대 국왕'''
공손도 | 공손강 | 공손공 | 공손연
  • 공손도(公孫度): 공손씨 정권의 첫 번째 군주.
    • 189년: 요동 태수가 된다. 중원의 혼란을 틈타 왕을 자칭한다.
    • 204년 사망. 아들 공손강이 계승했다.
  • 공손강(公孫康): 공손도의 아들. 공손씨 정권의 두 번째 군주.
    • 204년 낙랑군 남부의 7현을 대방군으로 독립시켰다.
    • 207년: 원소의 아들들인 원상#s-1, 원희가 귀부해오자 그들의 목을 베어 죽이고 조조에게 머리를 숙였다.
    • 221년 대사마로 추증된 점을 미뤄보면 221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공손공(公孫恭): 공손강의 동생. 공손씨 정권의 세 번째 군주.
    •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 공손연이 나이가 어려 그가 대신 군주가 되었다. 음경이 위축되는 고자였다.
    • 공손강 시기에 위나라로부터 영녕향후라는 직책을 받았다.
    • 228년 공손연에 의해 축출되었다.
  • 공손연(公孫淵) : 공손강의 차남. 마지막 군주.
    • 228년: 공손공을 쫓아내고 요동의 군주가 된다.
    • 232년: 오나라에서 보낸 사신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 237년: 위나라가 보낸 관구검의 침공을 받았으나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 238년: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하고 연왕(燕王)을 자칭하여 독립한다. 하지만 그 해에 사마의에게 진압당하고 모든 일족이 참살되었다.
  • 기타 인물
    • 공손연(公孫延): 공손도의 아버지. 한나라의 관리였으나 아들과 현도군으로 도망쳤으며, 아들이 현도군의 군리가 되는 것을 도왔다. 일찍 죽었다.
    • 공손황(公孫晃): 공손강의 장남. 공손공이 위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역하자 살해되었다.
    • 공손수(公孫脩): 공손연(公孫恭)의 장남. 잠깐 세자가 되었다가 참살되었다.

3. 매체에서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국 영토 바깥의 세상이 구현되지 않은 탓에, 원래라면 성 2~3개 정도에는 해당하는 이 세력이 요동(양평) 하나 딸랑 가지고 있는 하드코어급 난이도의 가난뱅이 세력으로 전락했다. 유일한 영지인 양평이 비옥하지 못한 지역인 데다가 인재도 부족한 판에 세력 확장을 위해서는 강대 세력인 공손찬, 원소, 조조 세력을 순서대로 뚫고 지나가야 하며, 시리즈에 따라서는 오환족 등 이민족의 침략까지 감수해야 한다. 특히 조조가 하북을 제패한 상황에서 능력치도 암울한 군주인 공손공 혼자 존재하는 210년 이후 유비 입촉 시나리오에서는 그야말로 불지옥 난이도를 자랑한다.
예외적으로 삼국지 7편에선 양평 동쪽에 낙랑군이 추가로 있고 디폴트로 비어있는 공백지라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얘네들 사정이 좀 낫다.[4] 그리고 삼국지 7편이나 11편은 동중국해 해상으로 성양, 오와 낙랑이 연결돼 있어서 원소나 위나라에 막혀 나갈 길도 없는 다른 시리즈보다는 좀 더 전략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3.2. 토탈 워: 삼국


190년 군웅할거 캠페인과 194년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논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하며, 공손도가 세력을 이끌고 있다. 출시 당시에는 요서지역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1.6.0 패치로 본진인 요동이 추가되면서 요동도 점거한 상태. 182년 천명 캠페인의 경우 유주 전역이 유우(삼국지)의 영토이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1] 각각 공손도가 서영에게 요동태수로 천거된 시점과 손자 공손연이 사마의에게 토벌당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해당된다.[2] 후의 고구려요동성.[3] 성씨는 같지만 본관이 다른 것. 간단히 말해 우리나라의 수많은 김씨, 이씨를 보면 된다. 성이 같다고 반드시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는 건 아니다.[4] 삼국지 10 한국어판에서도 등장하긴 하나 공백지가 아닌 단순 거점으로 나올뿐더러 당시 동북공정 논란 때문에 게등위의 태클로 짤리고 대신 동답이라는 지역으로 개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