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전한)

 


<colbgcolor=#a11><colcolor=#ece5b6> '''한 제7대 황제'''
'''世宗 武皇帝 | 세종 무황제'''

'''묘호'''
'''세종(世宗)'''
'''시호'''
효무황제(孝武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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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建元, BCE 140 ~ BCE 135)
원광(元光, BCE 134 ~ BCE 129)
원삭(元朔, BCE 128 ~ BCE 123)
원수(元狩, BCE 122 ~ BCE 117)
원정(元鼎, BCE 116 ~ BCE 111)[26]
원봉(元封, BCE 110 ~ 105)
태초(太初, BCE 104 ~ BCE 101)
천한(天漢, BCE 100 ~ BCE 97)
태시(太始, BCE 96 ~ BCE 93)
정화(征和, BCE 92 ~ BCE 89)
후원(後元, BCE 88 ~ BCE 87)

'''출생'''
기원전 157년
전한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
'''사망'''
기원전 87년 6월 10일 (70세)
전한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
'''능묘'''
무릉(茂陵)
'''재위'''
'''전한의 태자'''
기원전 157년? ~ 기원전 141년
'''전한의 황제'''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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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
유(劉)
''''''
철(徹)
'''부모'''
부친 한경제, 모친 효경황후 왕씨
'''황후'''
효무황후 진씨, 무사황후 위씨

1. 개요
2. 황제가 되기까지
3. 한무성세(漢武盛世)
4. 한무성세의 그림자
4.1. 토목 공사
4.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4.3. 신하에 대한 원칙없는 대우
4.4.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5. 후일담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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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한 시대를 대표하는 군주이자, 역사가에 따라서 성군이나 명군인지 아니면 폭군이나 암군인지 평가가 갈리는 양면적인 인물.
한나라의 7대 황제. 470여 년 한나라 치세 동안 가장 오랜기간(54년) 재위한 군주기도 하다.[1] 흉노를 토벌하고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굵직한 업적들이 꽤 있어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언급이 많이 되는 황제이며, 한국사에서도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켰기에 중요한 인물이고, 마찬가지로 베트남사에서도 남월을 멸망시켰기에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 체계를 완비하며, 염철 전매법, 균수법, 평준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무제의 정책은 후한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끼첬으며 유학 또한 그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선다. 정리하자면 '''진시황과 유방에 의해 만들어진 중화제국은 무제 시기에 비로소 그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러나 소모적이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능을 짓는 등 큰 규모의 토목 공사를 동시에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심각하게 낭비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와 세금 신설을 단행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게 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큰 업적들도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있지만, 할아버지아버지이룩한 한나라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이기 때문에 명군과 암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쳐져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심기를 거스르게 하면 가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처벌했다. 특히 그의 치세에서 고문당하거나 잔혹한 형벌로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알고 보면 큰 잘못도 없는 사마천고자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였고, 애먼 이릉의 일족을 몰살시켜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게 만들고,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이름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인물.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가 있으나,[2] 그보다는 '''진황한무'''가 더 많이 쓰인다.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독일의 중국사학자 Hans van Ess는 꽤 과감한 내용을 담은 연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 사기에 서술된 진시황의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상당부분이 한무제의 기록된 행적들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많고 의도적으로 배치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해당 구절들에 대한 상당히 꼼꼼한 대조와 분석의 결과, van Ess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의 본래 목적은 진시황과 진나라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의고의 전통이 강한 서구의 중국사학자들의 주장 중에서도 조금 심하게 많이 나간 케이스고, 대다수는 사마천의 서술이 그래도 '대체로' 신뢰할 만한 사료임을 인정하고 있다.[3]

2. 황제가 되기까지


원래 한무제는 부황 한경제의 11번째 아들[4]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는 박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박 황후가 폐위된 뒤에 누구를 새 황후로 삼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제의 어머니인 왕지는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자신의 아들 유철을 혼인시킨 후 관도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새 황후가 되고 유철을 황태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관도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관도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 외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지와 관도공주의 공작의 결과 율희가 아닌 왕지가 새 황후가 되었으며,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유철이 새 태자가 되었다. 이후 경제는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효문황후 두씨의 조카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위기후 두영을 실각시키고 왕지의 동생인 무안후 전분을 승상에 앉혔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동생 양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즉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한무성세(漢武盛世)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효문황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위기후 두영을 처형하는 등 효문황후의 친정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한 무제는 절대로 유학을 국가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 도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효문황후는 이러한 통치 체제를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 무제는 오히려 법가적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인 순리와 가혹하게 다스린 혹리를 각각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이 가혹한 법가적 관리인 혹리들의 상당수가 바로 한 무제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육가와의 문답을 통해서 유교를 한나라에 받아들인 한고조의 목적이 유교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위 아래가 없었던 초기 조정의 위상을 잡기 위한 것처럼, 한 무제가 동중서의 제안을 체택한 것도 문경지치의 도가적 지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무제는 유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실제로는 법가적 통치를 하였고, 이 모든 통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진시황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한나라의 특성상 법가의 이름을 대놓고 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것이 바로 유교였다. 이후 전한 시대에도 유교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원제가 유학에 심취하기 시작한 이래[5] 왕망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교 논리가 국가의 통치논리와 합일되기 시작한다.
위청, 이광, 곽거병 등의 명장들을 파견해 한고조 시절부터 한과 대립하던 흉노족을 박살내고, 남월조선을 정복하며,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6]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했다. 또한 한 무제 당대까지도 이민족 국가의 영역이었던 푸젠 성저장 성 일대[7]를 중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킨 것도 한 무제의 공이다. 한 무제의 중요 업적인 흉노 원정에 대해서는 위청, 이광, 곽거병 항목을 참고하고 조선 정복에 대한 내용은 왕검성 전투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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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 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4. 한무성세의 그림자


한무성세라는 말이 존재하면서도 한 무제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비판의 주 대상인 것은 한 무제 본인과 그의 통치 시기에 나타났던 문제점들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명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만 잘못해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한무제는 자신의 치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긴커녕 오히려 인성질과 대책없이 사고치고 다니는 좌충우돌 행태로 더 악화시킨 책임을 도저히 면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무능하고 부지런한 상사였던 한 무제는 사마천과 이릉처럼 자기몫을 다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사람들이 거슬린다며 잡아죽이거나 쫓아냈고, 이광리 같은 간신배 친척을 우대했으며, 그 결과 국가가 막장테크를 타자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열심히 일했으니 나라가 잘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건 신하들이 일을 제대로 안해서라며 신하들한테 책임전가를 하며 자기 딴에 무능하다 싶은 신하들을 제대로 파악도 안하고 감잡히는 대로 또 잡아 족쳤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나라 치세 내내 해결되지 않아 왕망신나라, 그리고 위진남북조시대를 탄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4.1. 토목 공사


한 무제의 화려한 군사 원정과 로망을 자극하는 기린아 곽거병의 원정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한 제국의 강대함과 위대함을 칭송하게 하며 한 무제-곽거병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하지만 한 무제 당시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들을 고통의 나락에 밀어 처넣어주신 폭군'''이다. 문제, 경제 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원수'''에 가깝다. 특히 즉위 초의 백성을 위해 베풀던 선정의 시절은 할머니인 효문황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며, 효문황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폭군으로서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무제는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능을 일찍 건설하는 것 자체는 평균 수명이 짦았던 그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효문황후가 죽은 뒤로는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중국 CCTV의 서한제릉이라는 서한 황제들의 황릉 건설과 사회 정치사 등 12부작 가량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황장제주로 지하궁을 꾸미고 방마다 제물이 가득하며 능침 주변으로 수백 마리 이상의 동물 순장갱이 나온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기린아 곽거병의 우주를 뚫는 화려하고도 찬란한 대군을 이끈 군사 원정은 한 제국의 국고를 아낌없이 탈탈탈 털어주셨는데 여기에 추가로 한 무제 본인이 벌이는 대규모 토목 공사들이 겹치면서 재정이 엄청나게 낭비되었고 이를 메우기 위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하였다. 게다가 곽거병의 군사 원정을 비롯한 한나라의 흉노, 남월, 고조선 공격은 한 제국의 엄청난 재정 낭비 부담을 덜어줄 추가적인 재정 마련의 일환이 된 것도 아니었다.

4.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한무제 치세 전반에 걸쳐, 흉노 원정은 지속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나라는 흉노를 파멸시키거나 혹은 복속시키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후, 최초의 대규모 장거리 원정을 시행했다. 전쟁 첫 십년에 걸쳐 한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차례 거두었다. 허나 흉노와의 전쟁은 서서히 결말이 나지 않는 지리한 혈투로 고착화되어갔다. 기원전 129년 이뤄진 첫 대규모 원정을 보면, 각기 다른 4개의 기병부대가 동원되었고 각 한 개 기병군단의 숫자는 1만 정예병이라 보고된다. 기원전 119년 원정을 보면 두 개의 독립적인 기병부대가 동원되었는데, 각 기병군단의 숫자는 5만 정도였다. 기원전 97년에 이르면, 총 7만에 달하는 기병과 14만 보병대가 흉노 원정에 파견되었다. 한나라 군대의 공세는 막강한 기병대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다만 사서에 나온 숫자를 꼭 문자 그대로 신뢰할 필요는 없는데, 한의 사관들은 말버릇처럼 기병에 대해 "수만수만" 읊조리기 때문이다.[8][9]
기원전 119년의 원정에서는 을 14만 필 동원했는데 살아돌아온 건 고작 3만 필뿐이었다고 하니 원정의 소모가 어마어마했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대규모 기병공세는 수양제가 113만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을 갔을 때 중기병만 10만을 동원했다든가, 원명교체기인 1372년쯤에 홍무제기병 15만을 3등분해서 몽골 원정을 시켰던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나라를 제외하면 고대의 그 어떤 정주 제국도 보병은 몰라도, '10만'에 이르는 '기병'을 지속적으로 '장거리' 원정에 투사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 마우리아 제국 어디도, 보병은 몰라도 10만 혹은 그에 육박하는 기병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그것도 수비가 아니라 '장거리 원정'에 투입한 사실은 없다. 무제 때는 아니고 나중인 한선제 때의 일인데, 흉노가 퇴각하다가 잘못 걸려서 선우의 친족들과 공주까지 포함된 3만 9천 명이 사로잡힌 적이 있다.[10] 이런 물량공세에 흉노 역시 무작정 도망가는 작전을 맘놓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무제가 흉노와 치킨게임하며 끝내 격퇴하여 밟은 것이 꽤 여파가 길게 가고 북방 민족에 대해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긴 하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과 토목 공사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 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흉노 원정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제나라 출신 소금거물 동곽함양(東郭咸陽), 그리고 남양 출신 거물 철상인 공근(孔僅)이라는 특출난 재무적 역량을 가진 인재 두 명을 뽑았고, 이 둘을 탁월한 재정능력을 지닌 낙양의 대상인 가문 출신 인물인 상홍양에게 붙여주었다. 무제는 상홍양을 기용하여 소금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상홍양의 정책은 후일 '막대한 국방비 재원 마련을 위해, 비정상적 경제계획과 재정정책, 특별세의 고안과 시장통제계획을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중국학자 창춘수의 비판).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11]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 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 대신[12]들의 권력 투쟁의 장이었고,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일제 사후 내조의 제2인자인 상관걸과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왕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을 당했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 정책들은 곽광의 측근인 두언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염철의 국가 개입과 경제 정책의 국가 주도는 이미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 중국 왕조, 한국 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에서도 2017년까지도 소금 전매제가 유지되어오다가 시대의 변화로 소금전매가 더 이상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가 되어서야 폐지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 무제의 지나친 씀씀이와 흉노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 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 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 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
토목 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 원정은 한 제국의 국가 재정에 기여분은 그냥 병아리 눈꼽만큼조차도 없었다.[13]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기린아 곽거병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 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때문에 한 제국의 재정 상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4.3. 신하에 대한 원칙없는 대우


무제의 문제는 성격이 매우 좋지 않았고 우생학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하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14] 또한 한 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의 성격이 있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이릉사마천'''이다. 이릉은 해당 항목에서 나오듯이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트린 것에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한 무제는 분노만 터뜨려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한테 책임을 물어 강제로 자살하게 하였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 같이 출정한 이광리[15]를 폄하[16]했다는 이유로 처음엔 사형에 처했지만 여기서 사마천에게 알량한 아량을 베푸는 척 하면서 몇 가지 선택지를 줬는데 그 선택지들이라는 게 참으로 골때렸다. 사마천에게 50만 전의 벌금,[17] 궁형, 사형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는데 알다시피 어지간한 재력가들조차도 갖고 있을리가 없는 큰 돈을 관리에 불과한 사마천이 보유했을리가 없고[18] 그래도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굴욕도 감내하고 살아남아야만 했으므로 결국 궁형을 택했고 무제는 사마천이 택한 대로 궁형을 집행했다. 이후 다시 후회하였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하였지만, 문제는 무제가 이릉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헛소문만 듣고는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은 큰 충격을 받고는 분노하여 탈출할 생각을 접고 정말로 흉노에게 전향해서, 흉노의 장군이 되버린다.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 이 이릉과 사마천 이야기는 한 무제의 성격의 문제점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렇게 이릉과 사마천을 천시하면서까지 한 무제가 편애했던 이광리는 훗날 흉노로 군사들을 이끌고 망명했다는 것. 물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한 무제는 장안에 남아 있던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했다고 한다.[19] 결과론적으로 볼 때 훗날 서구권에서도 인정하는 역사가로 이름을 새긴 사마천을 인성질로 조지고, 당대에나 후대에나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광리를 싸고돈 점에서 한무제의 인재 안목은 좋게 봐주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한 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제는 신하들에게 무자비하며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은 무제의 인척이었고...[20]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 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이 오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로 이루어졌고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며,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져 이로서 유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작 한무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조선 정벌 시기의 일을 들 수 있다. 한무제가 양복을 누선장군, 순체를 좌장군으로 삼아 고조선을 침공하게 했을 때, 양복은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했다가 격파당해 10여일을 숨어있었으며, 그나마 수도 왕검성 내부의 갈등을 이용해 조선 멸망의 공을 세운 순체조차 양복과 대립하다가 공손수에게 양복을 모함해 공손수에게 양복을 체포하게 만드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순체와 양복의 중재자로 파견된 공손수는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양복을 독단적으로 체포하는 성급한 면이 있었다. 당연히 순체와 공손수는 사형당했으며, 양복은 벌금을 납부한 덕에 사형은 면했지만 평민으로 강등됐다.

4.4.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게다가 무제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무제는 가족들에게도 냉혹하고 무자비했는데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나라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황후를 폐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도 간통 및 저주 행위를 했다하여 참수형에 처하였으며, 뒤이어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후궁인 구익부인을 총애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유불릉을 낳았는데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의 태자를 싫어했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과 무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에 강충 일행과 작당을 하였던 소문이라는 환관이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무제에게 알린다. 무제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에 충격을 받았으나 이때까지도 "걔가 두려운데다 강충이랑 원수를 져서 한 일일 것이다."라며 사신을 보내 태자를 다독이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은 두려워서 태자가 있는 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제에게 태자가 모반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이에 노발대발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의 호위 군사 및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자 분노한 무제는 관군을 소집했으며 소집된 관군으로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하지만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태자를 배신하고는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병사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관군을 이끌고온 승상 유굴리와[21] 5일간 혈전을 벌였다. 나중에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휘하 병사들까지 관군에 항복하자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반란을 진압한 무제는 명을 내려 여태자의 어머니 위황후의 인수를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은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있었다.[22] 그런데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기에 상소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태자는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치다가 신발 장수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자 목을 매어 자살한다. 태자의 두 아들도 관군과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태자와 아들들을 숨겨준 신발 장수도 관군에게 살해된다.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23]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대거 처형당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하고 폭군 창읍왕을 쫓아낸 원로 대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최종적으로 막내 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구익부인은 아무 죄도 없는데 있지도 않은 역모죄로 처형된터라 신하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유를 묻자 무제는 '구익부인은 여태후처럼 국정을 농단할 것이니 이를 방지하려고 그랬는데 왜 모르냐'며 오히려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강충의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전부 조작에다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24]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 가 실의에 빠졌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병을 않다가 곽광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BCE 87년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진시황 시즌 2. 아니, 진시황은 중국통일의 업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보는 안목 등 통치력이 만렙이었으니 시즌 2도 아니고 그냥 열화버전이다. 진시황은 적어도 거슬리는 말이라도 일단 머리를 식힌 다음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나서 죽일지 말지 결정했지만[25] 한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다행히도(?) 한나라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사실 그러니까 미화를 해서 한무성세니 하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겠지만, 실제론 무제는 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 한무성세를 위해 한나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5. 후일담


조선세종은 "대체로 사람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조선의 세종의 둘째 아들인 본래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는 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한나라 황릉 중 최대 규모이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은 자금이 없자 무릉을 털어 확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무덤을 가지고 환빠들은 '''이것은 사실 고조선피라미드이며 중국 정부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나, 그 근거는 없다(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 참고 - 한 무제의 능묘인 무릉(茂陵, 일명 서안 피라미드)
그의 증조할아버지창업군주이고 그의 할아버지가 국가의 기반을 쌓은 훌륭한 명군이며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남긴 기반을 통해 전성기를 완성한 훌륭한 명군이고 본인은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해서 전성기를 파괴한 암군이라서 주소왕이랑 비슷하다고 평가받는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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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를 소재로 중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제목은 <한무대제(漢武大帝)>. 중국의 여섯 방송국이 연합해 3년간 제작했으며 66억 위안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총 58부작. 감독은 옹정제를 다룬 드라마인 <옹정왕조>의 감독을 했던 호매.

한 무제 역은 유명 배우인 진보국으로 작중에서 가공할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드라마 내내 소년 시절부터 판단력이 혼미해져 태자와 대립하는 등의 노년기의 모습까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첫 화의 첫 장면은 말년의 한 무제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고 사마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여기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그대가 쓴 책을 보았다. 너는 짐이 너를 죽여버리기를 바라겠지. 천추 만대가 모두 너의 충성과 절개를 찬양하고, 짐을 폭군이라 욕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너는 이 책을 가지고 가도 좋다... 어떤 이들은 짐에게 너의 책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지만, 짐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짐이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의 말로 남길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애초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든 것도 한 무제고, 사마천의 최후 중 현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다시 한 번 황제를 비판했다가 처형당한 것'''의 실행자가 한 무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마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병주고 약 주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삼국전투기 비류 전투 1편에서 흰 수염 기른 유비의 모습으로 딱 한 컷 등장하여 한의 변군(대방군, 낙랑군)에 대해 설명했다.

7. 둘러보기





[1] 2위는 40여 년을 재위한 촉한의 효회황제 유선.[2] 물론 상기했듯 한 경제의 업적을 한 무제가 날로 먹으려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많긴 하다.[3] 그러나 van Ess이 내놓은 주장의 가치도 분명하다. Pines은 van Ess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특히 교차검증을 할 수 있는 독립된 사료가 부재할 때)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4] 한서 제후왕전에서 10번째로 나오기 때문에 10남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11번째로 나오는 광천혜왕이 한서 경십삼왕전 중 광천혜왕전에서 무제의 형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광천혜왕과 무제의 순서만 바꿔보면 11남이 된다. 12번째로 나오는 교동강왕은 대놓고 한무제의 동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11째 밑으로는 가지 않는다. 결국 이복형보다 왕에 봉해진 순서가 먼저라는 건데, 광천혜왕의 어머니가 한 무제의 어머니의 동생으로 지위가 낮아서 그런 듯.[5] 한선제는 태자가 유학에 심취한다는 말을 듣고는 "나라 말아먹을 짓"이라고 굉장히 짜증냈다.[6] 원래는 흉노에 맞설 동맹을 구하려 했던거지만.[7] 민월과 동월이 위치해 있었다. 명목상으로 한나라의 제후국이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도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8] -데이비드 A. 그라프(2001), 『중세 중국의 전쟁에 관하여, 300-900년』, Routledge-[9] 중국학자 창춘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비군 60~70만에 보유한 기병만 30만이었다는데, 상비군은 아마도 항구적으로 주둔하는 둔전병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기병의 경우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 병력은 호분 100만, 병거 1천 승, 기마 1만 필이라고 해서 기병 비율이 1%도 채 못 되는데 이후에 늘어났다고 해도 서양학자 데이비드 그라프가 언급한 대로 어느 정도는 뻥튀기가 감안된듯 싶다. 한 제국이 기병 10만씩을 동원한 것도 전례없는 영역이다.[10] 기록에 따라서는 단위가 '급'이어서 포로가 아니라 살해된 인원 수일 수도 있다.[11] 위안싱페이 저, 장연 역, 《중국문명대시야 1 (中华文明大视野)》[12] 내조의 수장인 곽광, 내조의 제3인자 상관걸과 외조의 사실상 수장인 상홍양, 그리고 내조의 제2인자 김일제. 김일제는 소제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13] 흉노가 그 이후로 깨갱해서 한나라에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국방비 절감 효과를 낳아 재정에 기여했겠다만 흉노는 계속 맞섰다(...). 물론 흉노로서는 한나라가 예전과 달리 정말로 멸망시키려하는 터라 살아남기 위해서 맞설 수 밖에 없었지만.[14] 무능한 자들을 제거하거나 죽이면 유능한 자들만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15] 한 무제가 총애했던 이부인의 동생.[16] 사실 이게 더 메인이었다.[17] 말이 벌금이지 이 돈이면 오늘날 2021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 중견기업을 세울 정도의 큰 돈이다. 당대 기준으로조차 병력 5,000명의 1년 유지 비용(직업군인중사 5,000명의 연봉+a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거액이었다.)이었을 정도이니 일반인이 쉽게 구경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큰 돈이다.[18] 저 당시 기준으로 관리로서 저런 돈을 보유하려면 그 직급이 대장군이나 대사마 이상은 되어야 한다. 참고로 둘이 같은 계급장이지만 대장군은 무관직, 대사마는 문관직이라는 차이가 있다.[19] 이광리가 자신의 외조카인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 이를 내자령 곽양이 무제한테 고발하는 바람에 무제한테 찍혔으며 연연산 전투의 대패와 투항으로 인해 제대로 화가 난 무제가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시켰다. 이때 이광리의 형 이연년과 동생 이계도 이광리 가족들과 함께 참수된다. 실제로도 연연산 전투의 패배는 한나라에게 타격이 컸는데 이광리가 이끌던 한나라의 정예 병력 7만이 흉노의 호록고 선우의 5만 흉노군한테 대패하여 궤멸되었기에(기록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이 천 명에 한두 명이라 할 정도라고 적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무제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흉노 정벌을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무제가 일으킨 전쟁과 토목공사로 인해 악화된 재정 문제가 컸지만. 특히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서 일어난 폭동들까지 발생한 상황이었다.[20] 곽거병이나 위청 같은 경우도 무제의 안목이 뛰어났다기보단 낙하산 인사가 의외로 능력이 있었던 운좋은 경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21] 무제의 이복형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이 이광리의 딸과 결혼했기에 이광리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유굴리는 여태자 사건 이후 이광리와 함께 창읍애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 곽양의 폭로로 들통났고 이로 인해 무제의 분노를 사서 조리돌림당하고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형에 처해진다. 유굴리의 가족들도 전부 참수되어 저잣거리에 목이 내걸려 효수된다.[22] 특히 무제는 신하들이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무자비하게 처벌한만큼 간언을 할 수가 없었다.[23] 양제는 이름이 아니라 태자의 후궁이 받는 품계 가운데 하나다.[24] 구익부인을 죽인 것도 강충의 배후에 구익부인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25] 분서갱유도 그렇고 나름 진시황 기준에는 나라를 위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한무제처럼 내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중요 관료들에게 '너 사형'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특히 아들인 부소가 간언을 했을 때도 크게 화를 내며 변방으로 쫓아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