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엡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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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Samuel Epstein (브라이언 세무얼 엡스타인)
1934년 9월 19일 ~ 1967년 8월 27일 (32세)
1. 개요
영국의 사업가이자 비틀즈의 매니저. 비틀즈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섯번째 비틀'로 자주 불린다. 독일계 유대인이다.
2. 비틀즈를 만나기 이전의 삶
어렸을때 배우가 되는 꿈을 가지고 왕립 극예술 학교에 진학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리버풀에 있는 집안이 운영하는 가구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이 음반 부서를 열게 되었을때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그 담당을 맡게 되었다. 엡스타인의 사업 수완으로 좋은 수익을 얻게되자 가족은 음반만을 판매하는 가게로 업종을 전환하고 가게 이름을 NEMS (North End Music Stored)로 정하였으며 엡스타인은 가게 사장을 맡게 된다.
3. 비틀즈와의 만남
1961년 말, 비틀즈의 팬이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으나 NEMS에는 비틀즈의 음반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비틀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팬들에게 비틀즈가 '캐번 클럽'이란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을 듣고 찾아간다. 비틀즈를 만난 엡스타인은 큰 감명을 받아서 그들에게 매니저가 없으며, 현재 구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다.
'''라는 설이 앱스타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설이기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NEMS는 당시 리버풀 최대의 음반 매장이었기에 리버풀의 음악 소식을 담은 잡지인 'Mersey Beat'가 매번 판매되었고, 심지어 브라이언은 해당 잡지에 음악 칼럼을 기고하고 있었다. 비틀즈는 해당 잡지에서도 상당히 관심있게 다루고 있었던만큼,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고 음반사를 경영하는 위치에서 그런 히트 밴드의 음반을 판매 안 할리가 없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애초에 리버풀의 젊은이들의 관심이 비틀즈에 몰리는걸 알고 있었고 관심을 지니게 되어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2002년, Mersey Beat의 탄생에 관한 기사에서 폴 매카트니는 이에 대해 "브라이언은 이미 비틀즈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인 '비틀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나'를 보면 'Mersey Beat'를 만든 빌 해리는 존의 학교 친구였고, 비틀즈에 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잡지를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관해 묻자 그를 캐번 클럽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비틀즈 멤버들과의 만남이 있었다고 말했다.
비틀즈와 매니저 계약을 맺은 직후, 브라이언은 거친 로커스 스타일을 하고 무대에 나오던 비틀즈에게 깔끔한 도련님 스타일[1] 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후, 당시 대형 음반 매장을 경영한다는 위치를 이용해서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에서 오디션을 볼 기회를 주선했으나 데카측에서는 비틀즈 같은 록 밴드들은 곧 유행이 다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계약을 맺지 않았다.
당시 데카 레코드에서는 오디션을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제공했고, 브라이언은 이를 사용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어떠한 레코드사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브라이언은 기존 밴드들처럼 오디션용 커버곡을 연주하지 말고 차라리 자작곡들을 제대로 녹음하여 밴드의 실력을 홍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되고 EMI 산하 팔로폰 레코드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록 밴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브라이언은 조지 마틴을 찾아가 시험 음반을 만들게 한다. 브라이언의 예상대로 조지 마틴은 비틀즈의 실력에 감명을 받아서 비틀즈와 음반 계약을 채결한다. 이후 비틀즈는 조지 마틴의 요구대로 드러머 피트 베스트를 추방시키고 링고 스타로 교체 한다.
1963년 이후 비틀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엡스타인은 셜리 블랙을 위시한 다른 가수들과도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엡스타인은 레코드 가게 이름을 따서 'NEMS 엔터 프라이시스'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만들었으며, 이 회사에는 비 지스, 지미 헨드릭스, 크림이 계약하기도 했다.
4. 약물 복용과 사망
그러나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NEMS 소속의 다른 가수들이 비틀즈만 차별 대우한다면서 항의하고 폴 매카트니가 점점 매니지먼트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비틀즈가 더 이상 자신과 매니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거라는 불안감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수면제와 정신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밴드는 매니저를 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1967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한 시점에서 발매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기존의 비틀즈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 시장에서 실패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2] 자신이 비틀즈에 사업관계 이상으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을 자신의 성적 지향인 게이와 결부시킨 후에는 약물 복용량이 더욱 증가했다고 한다.
결국 비틀즈 멤버들이 웨일스에 휴가를 가있던 8월 마지막 주에 바르비투르산의 과다 복용으로 사망, 시나고그(유태교 사원)에서 장례식이 치뤄졌다. 사망 전날 어머니와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했고 검사결과 또한 자살로 판명되진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약물을 복용한 것이 사인으로 확정되었다. 비틀즈와 여러 가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당시 비틀즈 멤버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모두 넋이 나간듯 멘붕에 빠져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비틀즈 멤버들의 구심점으로 존재하던 그의 죽음은 이후 폴 매카트니의 프로젝트 주도와 그에 대한 멤버들의 반발로 이어져 비틀즈 해체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유태교인이라 그의 장례식을 유태교 랍비가 참가하여 유태교 장례로 열렸다.
5. 기타
그래픽노블 <다섯 번째 비틀즈: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이야기>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생애를 다루었다. 비틀즈가 아닌 브라이언의 복잡했던 내면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비틀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내용이 불친절한 편.
[1] 비틀즈가 이 스타일로 바꾼 건 '''모드족과 관계가 없다.'''[2] 그의 유언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매할 때 자켓을 갈색 종이 봉투로 포장하여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할것'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