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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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는 팬들 사이에서도 종종 애정어린 조롱의 대상[2] 이 되지만, 아무도 그가 비틀즈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비틀즈의 뿌리이자 연결고리'''. 사실상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던 비틀즈의 해체를 그나마 막아온 사람이며 해체 이후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3]
1965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함께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아서 이름 뒤에 'MBE'가 붙고, 2018년 신년서훈명단에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이름 앞에 'Sir'가 붙게 되었다. 이로써 비틀즈의 생존 멤버 모두가 기사가 되었다.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링고 스타가 아주 어릴적에 집을 떠났고, 결국 편모가정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건강이 안 좋아서,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전이되는가 하면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꽤 오래 입원하는 동안 기타를 배웠고 간단한 드럼 연주도 배웠다고 한다. 13세가 될 무렵 어머니 엘지 스타키는 해리 그레이브스라는 런던 출신 남자와 결혼했고, 해리는 링고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빅 밴드 음악을 좋아했던 해리가 어린 링고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링고 스타가 살던 리버풀의 딩글 지역은 험한 노동자 동네였기 때문에 범죄도 빈번했고 분위기도 살벌했다고 한다. 링고 스타는 이 시기에 테디 보이 패션을 하고 다녔는데, 이유는 단 한가지, "얕보였다간 큰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리버풀의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을 위해 살벌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링고는 철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객선의 웨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다만 여객선 웨이터 일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배에서 일을 하다가 해군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서였다.[4] 여튼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직장에서 알게된 친구와 함께 스키플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해리 그레이브스는 1957년 크리스마스에 링고에게 중고 드럼세트를 선물하게 되고, 이후 링고의 음악 취향은 미국의 로큰롤로 바뀌게 된다. 이때는 아직 로큰롤이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이었다.
1959년 그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가 되었고 이때 즈음해서 '링고 스타'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1960년경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는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로 성장했고 함부르크 공연에서 토니 셰리던과 비틀즈를 처음 만나게 된다. 평소 자신들과 마찰이 잦았던 피트 베스트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비틀즈 멤버들은[5] 나이도 많고 성격도 좋은 링고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고 토니 셰리던도 링고에게 더 나은 밴드에서 활동하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링고가 비틀즈에 합류하기 까지는 꽤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는 로컬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였고, 비틀즈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보다 한참 낮은 페이를 받는 풋내기들이었다. 게다가 링고 스타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의 스테이지 수입으로 (비록 악기 운반때문에 장만한 싸구려 자동차이긴 해도) 이미 차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먹고 살 수준이었고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나이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링고는 비틀즈의 제안을 수락하여 피트 베스트의 자리를 대신해 영입되었다. 그리고 녹음을 하러 와서도 이미 조지 마틴이 낙점해두고 있던 전문 세션 드러머인 앤디 화이트가 Love Me Do 세션 당시 링고 대신 드럼을 치는 등 자리를 위협받았다. 정식 합류 이후에도 공연 때 돌까지 맞는 등 초기 멤버로 인정받기까지는 험한 길을 걸었지만 비틀즈 역사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초기의 음악 활동은 드럼 연주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나, 데뷔 초기의 비틀즈는 아이돌이었고 그중에서도 귀엽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링고 스타가 소녀팬들이 가장 많았다. '''즉 갓 데뷔했던 시기에는 링고 스타가 최고 인기 멤버였다.''' 비틀즈가 주연한 영화 Help!를 비롯해 비틀즈 주연의 여러영화에서 링고 스타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7] 그러나 왠지 동명의 곡 연주 때는 '''우산받이'''가 되었다.
비틀즈가 아이돌적인 색채를 벗어난 중기 이후에는 몇 번 보컬을 맡았는데,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음색이다. I Wanna Be Your Man, What Goes On,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 Yellow Submarine, 'Good Night' 등에서 대신 보컬을 맡았으며, 특히 'Yellow Submarine'은 아이들에게까지 반응이 무척 좋아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비틀즈 후기에는 2곡을 작곡했다. 더 비틀즈의 'Don't Pass Me By'와 애비 로드의 'Octopus's Garden'은 가벼운 느낌의 곡으로 편하게 듣기 좋다. 이 때 조지 해리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 활동 초기의 "돈 벌면 미용실을 하나 차리고 싶다"는 발언과는 달리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며, 직접 작곡한 'It Don't Come Easy', 'Back off Boogaloo'[8] 등의 곡이 호평을 받았으며 'photograph''는 빌보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링고 스타의 작곡 실력이 절정에 달했을 시절의 앨범은 1973년작 "Ringo"로, 모든 비틀즈 멤버들이 참여해준 앨범이기도 하다. 링고의 인맥이 빛을 발한 또다른 앨범은 1974년작인 "Goodnight Vienna".
1970년대 초중반, 커리어 정점을 찍고서 링고스타는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애플 레코드와의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다른 레이블과 계약하게 된다. 이후 1980년까지 싱글들은 그럭저럭 팔리긴 하지만, 차트 상위권은 아닌 정도의 성과를 냈다. 1981년작 Stop and Smell the Roses도 조지 해리슨과 폴 매카트니의 도움으로 음악적 완성도가 어느 정도 갖춰진 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상업적 실패들을 연이어 맛보게 된다. 야심작으로 준비한 Stop and Smell the Roses의 성과도 부진했으며, 특히 Old Wave 앨범 즈음에는 링고의 활동 본거지인 영국과 미국에서 음반 발매를 거부당하며 완전히 망했어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한동안 앨범의 실패로 인해 링고 스타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링고는 왕년의 로큰롤스타들을 영입해 슈퍼밴드 형식의 '올스타 밴드(All-Starr Band)'를 결성하게 되고 투어를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올스타 밴드 멤버들와 함께 제작하여 9년만에 발표한 앨범 Time Takes Time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링고 스타는 음악적 자신감까지 회복하게 되고, 투어를 중심으로 2-3년 마다 올스타 멤버와 함께 제작한 앨범을 발매하는 형식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중간에 영화 활동을 해보기도 했지만 잘 풀리지는 않았다. 상업적 실패로 인해 낙담하던 1980년대 심한 알콜 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회복하여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새 앨범들을 내주는데 이는 음악적 기본기가 탄탄한 올스타 밴드 멤버들이 작곡과 세션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1970-1980년대의 음악적 동료들과 함께하는 올스타 밴드를 이끌며 활발히 투어를 진행중이다.
한국에서 링고 스타가 테크니션이자 뮤지션으로서 잘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테크니션'''에 맞춰져 있는 한국밴드의 관념 때문이다.[10] 달리 말해, 존 본햄이나 진저 베이커는 고평가하면서, 롤링 스톤스의 찰리 와츠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11] , 덜 화려해 보이는 펑크 록이나 뉴웨이브 뮤지션들이 저평가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테크닉에 치중해 링고의 드럼이 평가절하된 나머지 같은 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의 드럼 연주 실력이 링고 스타를 앞선다는 이야기도 도는 편이다. 이는 Back in the U.S.S.R. 녹음 당시 폴이 드럼을 쳤기 때문인데,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 경은 폴이 링고보다 롤주법 테크닉에 한해 더 나은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만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Back in the U.S.S.R.의 드럼 트랙만 분리한 음원에 많은 이들이 폴의 드럼은 프로 연주자 수준은 못 된다고 평가한다. 폴이 다재다능한 연주 실력을 지니긴 했어도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링고 스타의 드러밍의 특징은 언제나 '''탄탄한 기본기'''였다. 항상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감성을 넣어 곡을 잘 채우는 드러머로 평가된다.[12] 사실 당시 록 뮤지션들 중에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고, 대중음악은 언제나 "많이 배우지 못한" 뮤지션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링고 스타는 그러한 시절에도 상당히 기본기를 잘 쌓은 드러머로서 정확한 박자감각을 잘 유지했다고 한다. 링고 본인도 자신의 박자 감각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작업할때 프로듀서였던 제프 린이 클릭 트랙을 사용하길 원했던 것에 링고는 "I am the fucking click!"[13] 라고 반발하며 부딛혔다고 한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라이브 연주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조건 속에 이루어진 것임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열악한 음향 시스템[14] 때문에 밴드의 박자를 제대로 맞춰줄 수 없는 환경에서 링고는 자기 앞에서 기타,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의 엉덩이, 발, 머리 움직임을 보고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고 한다.
또한 그의 드럼 연주와 사운드는 굉장히 개성있다고 평가받는데 링고 스타 본인은 자신이 왼손잡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드럼 킷이 오른손잡이 연주자들한테 맞춰져 있는데 왼손잡이인 자신이 오른손잡이 세팅으로 어떻게든 연주하려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개성있는 연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 예를 들어 "She Loves You"에서는 곡이 시작하자마자 터져나오는 링고의 개성있는 드럼 인트로를 들을 수 있으며, "In My Life"나 "Ticket to Ride"에서는 곡 전체에 깔려있는 링고의 독특한 드럼 어레인지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링고 스타는 항상 루딕(Ludwig) 드럼 세트를 사용했는데, 초기에는 잠시 프리미어 드럼 세트도 사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루딕을 선호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당시의 드러머들이 그러하듯, 초기에는 베이스 드럼의 구경이 20인치의 작은 것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커져서 22인치를 사용한다.[15] 링고 스타의 드럼세트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곳
비틀즈 초기 시절에는 프로모 비디오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병풍처럼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후기에 가서는 나머지 멤버들의 음악적 세계가 뚜렷해진 데 반해 링고는 자작곡이 2개 뿐이라 이따금씩 유머러스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유튜브나 레딧 등지에서는 링고를 놀리는 게 일종의 밈으로까지 정착했다. Help!#나 I Feel Fine#또는 Paperback Writer# 공식 프로모 비디오의 댓글란을 확인하면 링고 놀리기의 향연을 볼 수 있다.[16]
이러한 밈 때문에 지금 와서는 유머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1960년대 당시의 링고 스타는 비틀즈의 일원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뮤지션이다. 비틀즈의 인기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에서 소녀가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풀은 바로 링고 스타가 밟고 지나간 잔디이다.
어린 시절에는 건강이 너무 나빠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나마 심적으로 의존했던 일렉기타와 드럼이 링고의 정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비틀즈 해체 후 발표한 여러곡이 호평을 받았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코드는 3개 뿐이라며 조지 해리슨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이다.
자신의 팬이었던 여성 모린 콕스와 1965년에 결혼했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1975년 이혼했다. 링고는 비틀즈 내에서 그나마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지만(모린과의 결혼 생활 중 아이도 3명이나 낳았다.) 비틀즈 해체 당시 링고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심지어 모린에게 손찌검(wife-beater)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 그러자 링고의 아내인 모린 콕스는 대놓고 불륜을 저질렀는데 '''불륜 상대가 바로 같은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이었다.''' 게다가 조지 해리슨도 유부남으로 자기 아내인 패티 보이드는 내버려두고 있었다. 여기에 또 엮이는 게 에릭 클랩튼.[17] 심지어 모린은 대놓고 조지가 선물한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등 링고를 자극시켰고 마침내는 조지와 모린이 링고와 패티를 불러내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고백까지 한다. 결국 조지와 모린의 관계를 알게된 링고는 1975년 모린과 이혼했다. 이혼 당시 모린은 링고에게 자신은 링고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애걸복걸 했다고 한다.
이때 링고는 조지를 용서하는 대인배적 성격을 보였고 전 부인인 모린 역시 이혼 후에 용서해주었다. 관계도 모린이 48세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원만했다고 한다. 이후 링고는 1981년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본드걸이었던 바버라 바크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링고가 마흔, 바버라가 서른 넷이었다. 바크도 링고와의 결혼이 두번째 결혼이며 1975년 이혼한 전남편 아우구스토 그레고리니가 있었고 둘 사이에는 1남 1녀도 두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라는 세 명의 괴물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안습한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다. Help! 영상에서의 우산받이 링고도 그렇고, 1971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언급도 안 됐다...호머 심슨이 '됐어! 그래, 난 필요없는 존재야! 비틀즈로 치면 링고 스타 같은 존재라고!'라는 대사를 치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해당 에피소드를 봤는데 저 대사가 나오는 부분에서 호쾌하게 웃더니 '저런 소리 20년도 넘게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뭘'이라는 대인배스러운 성격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비틀즈 멤버중 유일하게 위대한 영국인 명단이 들지 못했다. 존은 '''8위''', 폴은 19위, 조지는 62위였는데 링고는 그 밑도 아니고 순위에도 못들었다(...). 나무위키 멤버들 중에서 문서도 제일 짧고, 역링크 수도 가장 적다(...). 여러모로 안습.
500일의 썸머에서도 이 같은 발언이 나오는데 작중 조이 데이셔넬이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무도 안 좋아해서...
사실 링고 스타는 2000년대 들어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정규 앨범을 내고있다. 폴 매카트니는 텀이 4~5년으로 꽤 길다. 하지만 이걸로 폴을 깔 수도 없는 게 폴은 중간에 '파이어맨(Fireman)'이란 이름으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내기도 했으며, 라이브 음반까지 따지면 링고 스타보다 더 자주 음반을 냈다. 나이 많은 레전드 팝 스타들은 대부분 신보 안 내고 과거 곡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는게 보통이다. 링고 스타의 창작 활동이 특출나게 부지런한 편. 또한 링고 스타 신보에는 폴 매카트니가 피처링한 곡도 있다.
주름살 때문에 상당히 많이 나이들어 보이는 폴 매카트니와는 달리[19] 검은 머리, 구레나룻, 수염, 선글라스 등으로 호쾌한 외모를 계속 갖추고 있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수준의 동안인데, 20년 동안 외모의 차이가 거의 없다. 차이라면 주름살이 조금 늘은 수준.
외모의 특징은 그 거대한 코로써, A Hard Day's Night 등의 시절부터 이미 그 코로 놀림을 받았다. 아이언맨 3에서도 토니 스타크가 코 큰 악당 만다린을 보고 링고라 부른다.
이름 덕분에 일본 사과 음료 광고에도 출연했다. 그의 이름인 '링고'는 일본어로 '사과'라는 뜻이고, '스타'와 발음이 비슷한 '슷타'는 '갈았다'라는 뜻. 그러니까 '사과를 갈았다'라는 뜻이다.
그의 아들 잭 스타키는 더 후 등의 밴드에서 객원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아시스의 객원 드러머로도 활동한 바 있다. 두 밴드 다 스타키에게 정식으로 가입하라고 제안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 실력도 뛰어난 축이다.
세 명의 굇수들 사이에 있다보면 질투심에 당장 때려치웠을 텐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세 명과 친하게 잘 지낸 대인배. 혹자는 링고덕분에 비틀즈가 10년 가까이 갔다는 말을 할 정도.[20][21] 심지어 그룹 해체 후 따로따로 떨어졌을 때도 멤버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그들 사이의 다툼을 조정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나머지 세 멤버들과 친분을 지속하며 멤버들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축 역시 링고 스타였다. 물론 비틀즈 해체 당시 링고 또한 폴과 불편한 일화가 있긴 했고,[22] 존 레논이 주도하던 예술가 모임에 참여하거나 조지의 앨범 및 콘서트 세션으로 참가하는 등 폴 보다는 존과 조지와 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솔로 앨범 Ringo 작업 당시 존, 폴, 조지 세 사람을 전부 참여시키는 등 비틀즈 전 멤버로서 가장 뛰어난 사회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생전에 나머지 세 멤버 모두와 작업물을 남긴 유일한 비틀즈 멤버 역시 링고 스타이다.#
존 레논이 How Do You Sleep?으로 폴 매카트니를 신랄하게 디스할 때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 역시 링고이다. 다만 존과 폴이 1974년에 재회한 이벤트는 당시 존 레논의 정부였던 메이 팡의 기여가 조금 더 직접적이다. 1974년 당시 존은 요코와 별거하던 때였고 여자친구 메이 팡에게 친구 관계에 대한 조언을 듣고 폴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를 로스 엔젤레스의 스튜디오에 초대했다.[23] 폴은 화해를 받아들여 해리 닐슨의 앨범을 작업하고 있던 존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 있던 링고도 둘의 대화에 참여하며 둘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링고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존과 폴의 극적인 만남을 성사시킨 직접적인 공은 비서 메이 팡에게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과 폴이 만난 장면을 담은 유일한 사진을 찍은 장본인도 메이 팡이다.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실린 "Helter Skelter"가 끝나기 직전에 링고 스타의 외마디 절규를 들을 수 있다[24] . "I got blisters on my fingers! (손가락에 물집 났어)" 별로 어려운 연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매된 곡이 4분 내외 정도라 그렇지 실제 녹음은 30분 내외로 연속해서 세 태이크나 녹음되었다. 즉 한 곡을 논스톱으로 1시간 30분 가까이 연주한 것. 그러니 물집 나는 게 당연하다. 인터뷰를 들어보면 총 3시간 연속으로 드럼을 치고 있었던 듯.
토마스와 친구들의 초기 나레이터였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1~2시즌의 나레이터를 맡았다.
과거 팬들이 보내는 팬레터에 사인 답장을 거의 다 해줬으나 2008년 10월 20일부터는 길거리 사인조차도 더 이상 안해주고 있다. 이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상을 올림으로서 알렸는데, 영상의 대략적인 내용이 "너무 바쁘니까 제발 그만 좀 보내달라. 이제부터 오는 팬레터는 죄다 쓰레기통에 버릴거다" 라는 내용이라 비난을 좀 받았다. 영상
2014년 방영된 파워퍼프걸의 15주년 기념 에피소드인 'Dance Pantsed'에 목소리 출연을 하였고 I Wish I Was a Powerpuff Girl이라는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불렀다.
빌보드 Hot 100위 안에 든 곡이 4곡 있다. You're Sixteen(1위), Photograph(1위), Only You(6위), Snokeroo(3위). 참고로 비틀즈는 4명 모두 해체 후 빌보드 Hot 100 1위에 한 번씩은 올라봤다.
2015년 3월 새 앨범을 발표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25] 함으로서 비틀즈 멤버 모두 개인으로서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016년 11월 5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내한공연을 하였다.[26] 2015년 폴 매카트니에 이어 이듬해 링고 스타까지 내한공연을 가지며 한국은 비틀즈 내한의 불모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콘서트에 앞서 11월 3일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에 생방송으로 출연하여 손석희와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위시한 중대 보도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양 측의 조율 끝에 인터뷰를 취소했다. 인터뷰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 올스타 밴드는 링고 스타만의 밴드가 아니라 말 그대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동하던 여러 세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슈퍼밴드 개념에 가까운데, 내한 당시 기타리스트가 '''토드 런그렌'''에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라서 다른 의미로도 눈길을 끌었다.
일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이적이 링고의 팬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외국인 한 명을 링고 스타로 분장시킨 다음 몰래카메라를 진행한 적이 있있었지만 보기좋게 실패했다. 우선 시나리오부터가 링고 스타같은 세계적인 거물급을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현실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내용인데다[27] 분장은 포털사이트 기사에 올라온 사진만 봐도 분장티가 팍팍 날 정도로 어설펐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적은 이미 가짜 링고스타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몰래카메라에 속고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덕에 잠시 링고 스타가 실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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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드러머. 본명은 리처드 스타키(Richard Starkey)로, 링고 스타는 예명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가, 밴드라고 평가받는 비틀즈의 드러머로 유명하다.'''평화와 사랑을!(Peace and Love)'''
— 히피들의 모토이자 링고의 말버릇. 유튜브 인사영상이나 트위터에서 많이 쓴다.
링고는 팬들 사이에서도 종종 애정어린 조롱의 대상[2] 이 되지만, 아무도 그가 비틀즈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비틀즈의 뿌리이자 연결고리'''. 사실상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던 비틀즈의 해체를 그나마 막아온 사람이며 해체 이후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3]
1965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함께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아서 이름 뒤에 'MBE'가 붙고, 2018년 신년서훈명단에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이름 앞에 'Sir'가 붙게 되었다. 이로써 비틀즈의 생존 멤버 모두가 기사가 되었다.
2. 경력
2.1. 비틀즈 이전의 링고 스타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링고 스타가 아주 어릴적에 집을 떠났고, 결국 편모가정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건강이 안 좋아서,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전이되는가 하면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꽤 오래 입원하는 동안 기타를 배웠고 간단한 드럼 연주도 배웠다고 한다. 13세가 될 무렵 어머니 엘지 스타키는 해리 그레이브스라는 런던 출신 남자와 결혼했고, 해리는 링고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빅 밴드 음악을 좋아했던 해리가 어린 링고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링고 스타가 살던 리버풀의 딩글 지역은 험한 노동자 동네였기 때문에 범죄도 빈번했고 분위기도 살벌했다고 한다. 링고 스타는 이 시기에 테디 보이 패션을 하고 다녔는데, 이유는 단 한가지, "얕보였다간 큰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리버풀의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을 위해 살벌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링고는 철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객선의 웨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다만 여객선 웨이터 일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배에서 일을 하다가 해군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서였다.[4] 여튼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직장에서 알게된 친구와 함께 스키플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해리 그레이브스는 1957년 크리스마스에 링고에게 중고 드럼세트를 선물하게 되고, 이후 링고의 음악 취향은 미국의 로큰롤로 바뀌게 된다. 이때는 아직 로큰롤이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이었다.
1959년 그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가 되었고 이때 즈음해서 '링고 스타'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1960년경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는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로 성장했고 함부르크 공연에서 토니 셰리던과 비틀즈를 처음 만나게 된다. 평소 자신들과 마찰이 잦았던 피트 베스트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비틀즈 멤버들은[5] 나이도 많고 성격도 좋은 링고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고 토니 셰리던도 링고에게 더 나은 밴드에서 활동하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링고가 비틀즈에 합류하기 까지는 꽤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는 로컬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였고, 비틀즈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보다 한참 낮은 페이를 받는 풋내기들이었다. 게다가 링고 스타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의 스테이지 수입으로 (비록 악기 운반때문에 장만한 싸구려 자동차이긴 해도) 이미 차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먹고 살 수준이었고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나이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링고는 비틀즈의 제안을 수락하여 피트 베스트의 자리를 대신해 영입되었다. 그리고 녹음을 하러 와서도 이미 조지 마틴이 낙점해두고 있던 전문 세션 드러머인 앤디 화이트가 Love Me Do 세션 당시 링고 대신 드럼을 치는 등 자리를 위협받았다. 정식 합류 이후에도 공연 때 돌까지 맞는 등 초기 멤버로 인정받기까지는 험한 길을 걸었지만 비틀즈 역사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2.2. 비틀즈 시절
초기의 음악 활동은 드럼 연주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나, 데뷔 초기의 비틀즈는 아이돌이었고 그중에서도 귀엽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링고 스타가 소녀팬들이 가장 많았다. '''즉 갓 데뷔했던 시기에는 링고 스타가 최고 인기 멤버였다.''' 비틀즈가 주연한 영화 Help!를 비롯해 비틀즈 주연의 여러영화에서 링고 스타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7] 그러나 왠지 동명의 곡 연주 때는 '''우산받이'''가 되었다.
비틀즈가 아이돌적인 색채를 벗어난 중기 이후에는 몇 번 보컬을 맡았는데,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음색이다. I Wanna Be Your Man, What Goes On,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 Yellow Submarine, 'Good Night' 등에서 대신 보컬을 맡았으며, 특히 'Yellow Submarine'은 아이들에게까지 반응이 무척 좋아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비틀즈 후기에는 2곡을 작곡했다. 더 비틀즈의 'Don't Pass Me By'와 애비 로드의 'Octopus's Garden'은 가벼운 느낌의 곡으로 편하게 듣기 좋다. 이 때 조지 해리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2.3. 비틀즈 이후의 링고 스타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 활동 초기의 "돈 벌면 미용실을 하나 차리고 싶다"는 발언과는 달리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며, 직접 작곡한 'It Don't Come Easy', 'Back off Boogaloo'[8] 등의 곡이 호평을 받았으며 'photograph''는 빌보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링고 스타의 작곡 실력이 절정에 달했을 시절의 앨범은 1973년작 "Ringo"로, 모든 비틀즈 멤버들이 참여해준 앨범이기도 하다. 링고의 인맥이 빛을 발한 또다른 앨범은 1974년작인 "Goodnight Vienna".
1970년대 초중반, 커리어 정점을 찍고서 링고스타는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애플 레코드와의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다른 레이블과 계약하게 된다. 이후 1980년까지 싱글들은 그럭저럭 팔리긴 하지만, 차트 상위권은 아닌 정도의 성과를 냈다. 1981년작 Stop and Smell the Roses도 조지 해리슨과 폴 매카트니의 도움으로 음악적 완성도가 어느 정도 갖춰진 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상업적 실패들을 연이어 맛보게 된다. 야심작으로 준비한 Stop and Smell the Roses의 성과도 부진했으며, 특히 Old Wave 앨범 즈음에는 링고의 활동 본거지인 영국과 미국에서 음반 발매를 거부당하며 완전히 망했어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한동안 앨범의 실패로 인해 링고 스타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링고는 왕년의 로큰롤스타들을 영입해 슈퍼밴드 형식의 '올스타 밴드(All-Starr Band)'를 결성하게 되고 투어를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올스타 밴드 멤버들와 함께 제작하여 9년만에 발표한 앨범 Time Takes Time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링고 스타는 음악적 자신감까지 회복하게 되고, 투어를 중심으로 2-3년 마다 올스타 멤버와 함께 제작한 앨범을 발매하는 형식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중간에 영화 활동을 해보기도 했지만 잘 풀리지는 않았다. 상업적 실패로 인해 낙담하던 1980년대 심한 알콜 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회복하여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새 앨범들을 내주는데 이는 음악적 기본기가 탄탄한 올스타 밴드 멤버들이 작곡과 세션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1970-1980년대의 음악적 동료들과 함께하는 올스타 밴드를 이끌며 활발히 투어를 진행중이다.
3. 드러머로서의 링고 스타
어째 한국에서는 드러머로서 별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록 드럼의 기본을 정리한 시초 격 인물이다. 그러니까, '''링고 스타를 거치며 비로소 록 드럼이라는 것이 정립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존 본햄도 록 드럼의 교과서로 불리기에 링고 스타가 묻히는 감도 있지만, 존 본햄보다 링고 스타가 선배이며, 존 본햄이 활동할 당시엔 이미 많은 밴드의 드러머들이 링고 스타가 정리한 기본에 자신의 스타일을 가미해 연주하던 때였다. 즉, 링고 스타가 록 드럼의 기초를 정립했고 진저 베이커와 존 본햄과 같은 후배 드러머들이 그 위에 독창적 스타일을 가미하며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링고 스타는 기존의 재즈 드럼이나 R&B 드럼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록 드럼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한다. 기본 비트에 충실하고 절제된 필인으로 곡 자체의 흐름을 잘 타는, 소위 말하는 밸런스가 잘 정리되어있는 드러머라는 평가를 받는다.'''링고는 감성의 왕(king of feel)이었다.'''[9]
- 데이브 그롤
한국에서 링고 스타가 테크니션이자 뮤지션으로서 잘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테크니션'''에 맞춰져 있는 한국밴드의 관념 때문이다.[10] 달리 말해, 존 본햄이나 진저 베이커는 고평가하면서, 롤링 스톤스의 찰리 와츠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11] , 덜 화려해 보이는 펑크 록이나 뉴웨이브 뮤지션들이 저평가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테크닉에 치중해 링고의 드럼이 평가절하된 나머지 같은 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의 드럼 연주 실력이 링고 스타를 앞선다는 이야기도 도는 편이다. 이는 Back in the U.S.S.R. 녹음 당시 폴이 드럼을 쳤기 때문인데,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 경은 폴이 링고보다 롤주법 테크닉에 한해 더 나은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만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Back in the U.S.S.R.의 드럼 트랙만 분리한 음원에 많은 이들이 폴의 드럼은 프로 연주자 수준은 못 된다고 평가한다. 폴이 다재다능한 연주 실력을 지니긴 했어도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링고 스타의 드러밍의 특징은 언제나 '''탄탄한 기본기'''였다. 항상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감성을 넣어 곡을 잘 채우는 드러머로 평가된다.[12] 사실 당시 록 뮤지션들 중에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고, 대중음악은 언제나 "많이 배우지 못한" 뮤지션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링고 스타는 그러한 시절에도 상당히 기본기를 잘 쌓은 드러머로서 정확한 박자감각을 잘 유지했다고 한다. 링고 본인도 자신의 박자 감각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작업할때 프로듀서였던 제프 린이 클릭 트랙을 사용하길 원했던 것에 링고는 "I am the fucking click!"[13] 라고 반발하며 부딛혔다고 한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라이브 연주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조건 속에 이루어진 것임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열악한 음향 시스템[14] 때문에 밴드의 박자를 제대로 맞춰줄 수 없는 환경에서 링고는 자기 앞에서 기타,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의 엉덩이, 발, 머리 움직임을 보고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고 한다.
또한 그의 드럼 연주와 사운드는 굉장히 개성있다고 평가받는데 링고 스타 본인은 자신이 왼손잡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드럼 킷이 오른손잡이 연주자들한테 맞춰져 있는데 왼손잡이인 자신이 오른손잡이 세팅으로 어떻게든 연주하려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개성있는 연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 예를 들어 "She Loves You"에서는 곡이 시작하자마자 터져나오는 링고의 개성있는 드럼 인트로를 들을 수 있으며, "In My Life"나 "Ticket to Ride"에서는 곡 전체에 깔려있는 링고의 독특한 드럼 어레인지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링고 스타는 항상 루딕(Ludwig) 드럼 세트를 사용했는데, 초기에는 잠시 프리미어 드럼 세트도 사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루딕을 선호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당시의 드러머들이 그러하듯, 초기에는 베이스 드럼의 구경이 20인치의 작은 것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커져서 22인치를 사용한다.[15] 링고 스타의 드럼세트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곳
4. 여담
비틀즈 초기 시절에는 프로모 비디오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병풍처럼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후기에 가서는 나머지 멤버들의 음악적 세계가 뚜렷해진 데 반해 링고는 자작곡이 2개 뿐이라 이따금씩 유머러스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유튜브나 레딧 등지에서는 링고를 놀리는 게 일종의 밈으로까지 정착했다. Help!#나 I Feel Fine#또는 Paperback Writer# 공식 프로모 비디오의 댓글란을 확인하면 링고 놀리기의 향연을 볼 수 있다.[16]
이러한 밈 때문에 지금 와서는 유머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1960년대 당시의 링고 스타는 비틀즈의 일원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뮤지션이다. 비틀즈의 인기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에서 소녀가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풀은 바로 링고 스타가 밟고 지나간 잔디이다.
어린 시절에는 건강이 너무 나빠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나마 심적으로 의존했던 일렉기타와 드럼이 링고의 정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비틀즈 해체 후 발표한 여러곡이 호평을 받았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코드는 3개 뿐이라며 조지 해리슨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이다.
자신의 팬이었던 여성 모린 콕스와 1965년에 결혼했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1975년 이혼했다. 링고는 비틀즈 내에서 그나마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지만(모린과의 결혼 생활 중 아이도 3명이나 낳았다.) 비틀즈 해체 당시 링고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심지어 모린에게 손찌검(wife-beater)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 그러자 링고의 아내인 모린 콕스는 대놓고 불륜을 저질렀는데 '''불륜 상대가 바로 같은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이었다.''' 게다가 조지 해리슨도 유부남으로 자기 아내인 패티 보이드는 내버려두고 있었다. 여기에 또 엮이는 게 에릭 클랩튼.[17] 심지어 모린은 대놓고 조지가 선물한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등 링고를 자극시켰고 마침내는 조지와 모린이 링고와 패티를 불러내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고백까지 한다. 결국 조지와 모린의 관계를 알게된 링고는 1975년 모린과 이혼했다. 이혼 당시 모린은 링고에게 자신은 링고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애걸복걸 했다고 한다.
이때 링고는 조지를 용서하는 대인배적 성격을 보였고 전 부인인 모린 역시 이혼 후에 용서해주었다. 관계도 모린이 48세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원만했다고 한다. 이후 링고는 1981년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본드걸이었던 바버라 바크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링고가 마흔, 바버라가 서른 넷이었다. 바크도 링고와의 결혼이 두번째 결혼이며 1975년 이혼한 전남편 아우구스토 그레고리니가 있었고 둘 사이에는 1남 1녀도 두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라는 세 명의 괴물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안습한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다. Help! 영상에서의 우산받이 링고도 그렇고, 1971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언급도 안 됐다...호머 심슨이 '됐어! 그래, 난 필요없는 존재야! 비틀즈로 치면 링고 스타 같은 존재라고!'라는 대사를 치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해당 에피소드를 봤는데 저 대사가 나오는 부분에서 호쾌하게 웃더니 '저런 소리 20년도 넘게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뭘'이라는 대인배스러운 성격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비틀즈 멤버중 유일하게 위대한 영국인 명단이 들지 못했다. 존은 '''8위''', 폴은 19위, 조지는 62위였는데 링고는 그 밑도 아니고 순위에도 못들었다(...). 나무위키 멤버들 중에서 문서도 제일 짧고, 역링크 수도 가장 적다(...). 여러모로 안습.
500일의 썸머에서도 이 같은 발언이 나오는데 작중 조이 데이셔넬이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무도 안 좋아해서...
사실 링고 스타는 2000년대 들어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정규 앨범을 내고있다. 폴 매카트니는 텀이 4~5년으로 꽤 길다. 하지만 이걸로 폴을 깔 수도 없는 게 폴은 중간에 '파이어맨(Fireman)'이란 이름으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내기도 했으며, 라이브 음반까지 따지면 링고 스타보다 더 자주 음반을 냈다. 나이 많은 레전드 팝 스타들은 대부분 신보 안 내고 과거 곡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는게 보통이다. 링고 스타의 창작 활동이 특출나게 부지런한 편. 또한 링고 스타 신보에는 폴 매카트니가 피처링한 곡도 있다.
주름살 때문에 상당히 많이 나이들어 보이는 폴 매카트니와는 달리[19] 검은 머리, 구레나룻, 수염, 선글라스 등으로 호쾌한 외모를 계속 갖추고 있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수준의 동안인데, 20년 동안 외모의 차이가 거의 없다. 차이라면 주름살이 조금 늘은 수준.
외모의 특징은 그 거대한 코로써, A Hard Day's Night 등의 시절부터 이미 그 코로 놀림을 받았다. 아이언맨 3에서도 토니 스타크가 코 큰 악당 만다린을 보고 링고라 부른다.
이름 덕분에 일본 사과 음료 광고에도 출연했다. 그의 이름인 '링고'는 일본어로 '사과'라는 뜻이고, '스타'와 발음이 비슷한 '슷타'는 '갈았다'라는 뜻. 그러니까 '사과를 갈았다'라는 뜻이다.
그의 아들 잭 스타키는 더 후 등의 밴드에서 객원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아시스의 객원 드러머로도 활동한 바 있다. 두 밴드 다 스타키에게 정식으로 가입하라고 제안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 실력도 뛰어난 축이다.
세 명의 굇수들 사이에 있다보면 질투심에 당장 때려치웠을 텐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세 명과 친하게 잘 지낸 대인배. 혹자는 링고덕분에 비틀즈가 10년 가까이 갔다는 말을 할 정도.[20][21] 심지어 그룹 해체 후 따로따로 떨어졌을 때도 멤버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그들 사이의 다툼을 조정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나머지 세 멤버들과 친분을 지속하며 멤버들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축 역시 링고 스타였다. 물론 비틀즈 해체 당시 링고 또한 폴과 불편한 일화가 있긴 했고,[22] 존 레논이 주도하던 예술가 모임에 참여하거나 조지의 앨범 및 콘서트 세션으로 참가하는 등 폴 보다는 존과 조지와 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솔로 앨범 Ringo 작업 당시 존, 폴, 조지 세 사람을 전부 참여시키는 등 비틀즈 전 멤버로서 가장 뛰어난 사회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생전에 나머지 세 멤버 모두와 작업물을 남긴 유일한 비틀즈 멤버 역시 링고 스타이다.#
존 레논이 How Do You Sleep?으로 폴 매카트니를 신랄하게 디스할 때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 역시 링고이다. 다만 존과 폴이 1974년에 재회한 이벤트는 당시 존 레논의 정부였던 메이 팡의 기여가 조금 더 직접적이다. 1974년 당시 존은 요코와 별거하던 때였고 여자친구 메이 팡에게 친구 관계에 대한 조언을 듣고 폴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를 로스 엔젤레스의 스튜디오에 초대했다.[23] 폴은 화해를 받아들여 해리 닐슨의 앨범을 작업하고 있던 존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 있던 링고도 둘의 대화에 참여하며 둘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링고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존과 폴의 극적인 만남을 성사시킨 직접적인 공은 비서 메이 팡에게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과 폴이 만난 장면을 담은 유일한 사진을 찍은 장본인도 메이 팡이다.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실린 "Helter Skelter"가 끝나기 직전에 링고 스타의 외마디 절규를 들을 수 있다[24] . "I got blisters on my fingers! (손가락에 물집 났어)" 별로 어려운 연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매된 곡이 4분 내외 정도라 그렇지 실제 녹음은 30분 내외로 연속해서 세 태이크나 녹음되었다. 즉 한 곡을 논스톱으로 1시간 30분 가까이 연주한 것. 그러니 물집 나는 게 당연하다. 인터뷰를 들어보면 총 3시간 연속으로 드럼을 치고 있었던 듯.
토마스와 친구들의 초기 나레이터였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1~2시즌의 나레이터를 맡았다.
과거 팬들이 보내는 팬레터에 사인 답장을 거의 다 해줬으나 2008년 10월 20일부터는 길거리 사인조차도 더 이상 안해주고 있다. 이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상을 올림으로서 알렸는데, 영상의 대략적인 내용이 "너무 바쁘니까 제발 그만 좀 보내달라. 이제부터 오는 팬레터는 죄다 쓰레기통에 버릴거다" 라는 내용이라 비난을 좀 받았다. 영상
2014년 방영된 파워퍼프걸의 15주년 기념 에피소드인 'Dance Pantsed'에 목소리 출연을 하였고 I Wish I Was a Powerpuff Girl이라는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불렀다.
빌보드 Hot 100위 안에 든 곡이 4곡 있다. You're Sixteen(1위), Photograph(1위), Only You(6위), Snokeroo(3위). 참고로 비틀즈는 4명 모두 해체 후 빌보드 Hot 100 1위에 한 번씩은 올라봤다.
2015년 3월 새 앨범을 발표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25] 함으로서 비틀즈 멤버 모두 개인으로서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016년 11월 5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내한공연을 하였다.[26] 2015년 폴 매카트니에 이어 이듬해 링고 스타까지 내한공연을 가지며 한국은 비틀즈 내한의 불모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콘서트에 앞서 11월 3일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에 생방송으로 출연하여 손석희와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위시한 중대 보도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양 측의 조율 끝에 인터뷰를 취소했다. 인터뷰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 올스타 밴드는 링고 스타만의 밴드가 아니라 말 그대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동하던 여러 세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슈퍼밴드 개념에 가까운데, 내한 당시 기타리스트가 '''토드 런그렌'''에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라서 다른 의미로도 눈길을 끌었다.
일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이적이 링고의 팬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외국인 한 명을 링고 스타로 분장시킨 다음 몰래카메라를 진행한 적이 있있었지만 보기좋게 실패했다. 우선 시나리오부터가 링고 스타같은 세계적인 거물급을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현실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내용인데다[27] 분장은 포털사이트 기사에 올라온 사진만 봐도 분장티가 팍팍 날 정도로 어설펐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적은 이미 가짜 링고스타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몰래카메라에 속고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덕에 잠시 링고 스타가 실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앨범
- 링고 스타/음반 목록 참고.
5.2. 싱글
5.2.1. 빌보드 1위
- Photograph (1973)
- You're Sixteen (1974)
5.2.2. 빌보드 3위~10위
- It Don't Come Easy (1971)
- Back Off Boogaloo (1972)
- Only You (1974)
- Oh My My (1974)
- No No Song/Snookeroo (1975)
[1] 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2] 조롱이란 어감이 굉장히 나빠서 오해할수 있는데 사실 장난삼아 놀리는 것에 가깝다. 비틀즈 시절동안 그가 만든 곡이 2개밖에 없고 비틀즈 후기로 갈수록 존재감이 없어져서 이다. 그러나 그가 작곡을 제대로 시작하자마자 비틀즈가 해체되었고 그가 없었다면 비틀즈의 연결고리가 사라지는 셈으로, 아마 화이트 앨범, 과장하자면 페퍼상사때 해체되었을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폴 매카트니의 독주로 인해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3] 특히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불화가 심했고 '''1년 안에 해체될 위기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비틀즈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4] 당시 영국은 아직 징병제가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배에서 일한 경력이라거나 특정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특정 병과나 군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5] 피트 베스트는 다른 멤버들이 모두 머리를 내릴 때 본인만 올림 머리를 유지했고 특히 조지 해리슨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지가 링고의 밴드 가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고, 피트가 밴드에서 쫒겨나자 분노한 피트 빠순이들에게 링고 영입의 주범으로 주목되어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조지와 링고의 친한 사이는 비틀즈 해체 후까지 이어져 조지가 링고에게 곡을 써주기도 하였다.[6] 정작 나이로 따지면 존 레논과 동갑으로 레논보다 생일이 빨라서 최고령이었다. 제일 늦게 들어왔으니 연공서열로 따지면 막내 맞기는 하다.[7] 링고 스타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 연기를 가장 잘했던 것도 이유.[8] 이 곡을 잘 들어보면 30년 뒤에 프란츠 퍼디난드가 발표한 Take Me Out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9] 위의 영상 55초에 나온다.[10] 한국인들은 유난히 음악적 기교에 집착하는 편이다. 보컬도 무조건 고음이 잘 올라가야 하며(고음병)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는 손 돌아가는 게 빨라야 하고, 드러머도 그루브보다는 더블베이스 난타 속도 등을 실력의 척도로 본다.[11] 이는 상대적으로 1960년대 이전의 뮤지션들에 대한 평가가 박한 한국의 흐름도 관련이 있는듯 하다. 사실 연주해보면 알겠지만, 악기를 절제해서 적재 적소에 노트를 쏙쏙 박아넣어가며 치는것이 더욱 어렵다. 이러한 연주는 헤비메탈의 속주연주 도래 이전까지는 오히려 더 중요한 척도였다.[12] 참고로 그의 아들 잭 스타키도 링고처럼 기본에 충실하는 드럼 연주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3] 욕설을 순화해 해석하면 "내가 빌어먹을 클릭 그 자체다!"[14] 연주자와 가수가 본인들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의 사운드를 확인할 수 있는 인이어 이어폰은 당연히 없었고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쏴주는 모니터 스피커도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브 공연은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관객 소리에 묻혀서 자기들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15] 사실 대부분의 록 드러머들이 60년대 중반까지는 재즈나 블루스 뮤지션들이 사용하는 드럼과 별 다를바 없이 작은 드럼 세트를 사용했다.[16] 모두 영상 속에서 링고가 드럼을 치지 않는다.[17] 락계를 빛낸 비틀즈, 크림, 롤링스톤즈 등은 여자 문제가 여러모로 복잡하다.[18] 흔히 링고를 폄하하는 개그로 오해받는 문장이지만, 영어에서 드러머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드럼 연주자'라는 뜻외에도 힘든 상황에서 모두를 독려하며 계속 나아가게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고수#s-4항목에도 나와있듯, 현대전 이전까지 전장에서 아군의 명령을 북소리로 전달했기 때문에, 드러머의 역할은 밴드의 음악 밑바닥을 지탱하는 임무를 맡는 것. 즉 링고는 비틀즈가 와해되지 않도록 연결고리로서 결속력을 제공했다는 의미... 라지만 영어권에서도 링고를 놀리는 짤로 통용된다. 레딧에서도 해당 짤을 유머소재로 보고 있다.[19] 정작 나이는 본인이 더 많다.[20]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 경은 링고 스타가 없었다면 비틀즈는 1집만 내고 해체했을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21] 천재형 굇수들만 모인 팀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최초의 슈퍼트리오 크림(밴드)부터 증명된 사실이다. 견해차이로 라이브 한번, 앨범 한장으로 끝나는게 보통이다.[22] 비틀즈 해체 직전 매카트니가 자신의 솔로 앨범 McCartney를 Let It Be보다 앞서 발매하려 하자 링고가 폴의 집을 찾아가 발매를 늦추자는 메시지의 편지를 전달했다. 이때 멘탈이 나가 있던 폴은 편지를 읽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링고를 내쫓았다고 알려져 있다.[23] 마침 폴도 아내 린다 및 스티비 원더와 함께 로스 엔젤레스를 방문하던 때라 타이밍이 잘 맞았다.[24] 스테레오반 기준으로, 모노반에는 잘려서 들리지 않는다.[25] 다만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는 5가지 헌액 카테고리가 있는데, '공연자(Performers)' 자격으로 입성한 나머지 멤버와 다르게 링고 혼자 '사이드맨(Sideman. 2010년에 Award for Musical Excellence로 이름이 바뀜.)' 부문으로 입성하였다.[26] 입국 당시 공항에 마중나온 팬들이 스무명 정도밖에 안됐다고 한다. 폴 매카트니때와 비교하면 그저 안습..[27] 몰카 촬영 당시 링고가 내한 공연으로 한국에 있을 시기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