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헨드릭스

 


''' 지미 헨드릭스의 주요 수상과 헌액 이력 '''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2><^|1><bgcolor=#ffffff><height=32>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JIMI HENDRIX EXPERIENCE
'''
'''멤버'''
'''지미 헨드릭스, 노엘 레딩, 미치 미첼'''
'''입성 연도'''
'''1992년'''
'''후보자격 연도'''
'''1992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92년
'''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펼치기 · 접기 ]
[image]
'''이름'''
'''지미 헨드릭스
JIMI HENDRIX
'''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91년 11월 14일'''
'''}}}#ffd700 위치}}}'''
'''}}}#ffd700 6627 Hollywood Boulevard.}}}'''















---





}}}}}}}}} ||
[image]
<colbgcolor=#000000> '''본명'''
제임스 마셜 "지미" 헨드릭스
James Marshall 'Jimi' Hendrix[1]
'''국적'''
[image] 미국
'''출생'''
1942년 11월 27일[2]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사망'''
1970년 9월 18일 (향년 27세)
영국 런던 켄싱턴
'''직업'''
가수, 작곡가,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활동'''
1963년 ~ 1970년[3]
'''장르'''
,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블루스, R&B
'''신체'''
180cm
'''학력'''
가필드 하이 스쿨
'''서명'''
[image]
'''링크'''

1. 개요
2. 일생
2.1. 어린 시절
2.2. 세션맨 시절
2.3.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2.4. 익스피리언스 해체, 그리고 사망
3. 앨범
4. 평가와 영향력
5. 여담
5.2. 한국에서의 인지도

[clearfix]

1. 개요



'''피드백 Feedback 사운드로 시작하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대표곡 ‘Foxey Lady’'''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4] 1970년에 약물 투약 이후 토사물로 인한 질식사[5]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현재 '''81세'''이다.[6]

2. 일생



2.1. 어린 시절


'''가족 사진'''[7]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제임스 알렌 '알' 헨드릭스와 어머니 루실 지터 사이에서 태어났다.[8] 루실이 지미를 출산했을 때는 겨우 17살밖에 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지미를 낳은 이후에도 5명의 자녀를 가졌으나 가난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 하나둘 입양시키거나 위탁보호 시설로 보냈다. 어머니가 약물에 중독되어서 3명의 자식은 장애, 기형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나마 바로 아래 동생인 레온 헨드릭스는 6살까지는 가족과 같이 살다가 지미의 집에서 가까운 위탁 가정에 맡겨져 어린 시절 두 형제는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미의 어머니 루실 지터는 밝은 피부와 직모를 가진 빼어난 용모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루실은 알 헨드릭스와 이혼 후 불과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9] 사춘기에 일어난 젊은 어머니와의 사별은 지미 헨드릭스의 성격과 음악에 큰 영향을 준다.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과 끼니조차 잇기 힘든 빈곤으로 어린 지미는 캐나다 밴쿠버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졌다. 할머니는 지미에게 체로키 인디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직접 숄과 판초를 짜서 손자에게 입혀주었다. 결국 지미의 부모는 이혼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 알 헨드릭스가 지미 형제들에 대한 양육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미의 이모, 할머니 그리고 이웃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보살폈고, 지미 헨드릭스는 이들 사이를 떠돌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성장기를 보낸다.[10]
어릴 적 일화 중에, 집이 가난해서 아버지가 기타를 사주지 못했는데, 지미 헨드릭스 방에 들어가보면 빗자루 지푸라기들이 매일 널려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지미가 빗자루를 들고 방에서 미친 듯이 기타 치는 상상을 하면서 빗자루를 "연주"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학교에서 하도 빗자루를 기타라고 상상하며 들고 다녀서, 학교 직원이 "얘 기타 안 사주면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며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악기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요청은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미 헨드릭스가 본격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 지미의 아버지가 잠시 형편이 풀려서 낡은 집을 구입하고 하숙을 쳤는데, 하숙으로 들어온 어느 부부가 레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지미는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로버트 존슨, 라이트닝 홉킨스 등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14살에 쓰레기통에서 주운 '''한 줄짜리''' 우쿨렐레를 찾게 되고, 이걸 가지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 특히 "Hound Dog"를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11] 물론 악보 따위 없고 그냥 귀로 듣고 따서 연주.
15살에 아버지가 선물해준 5달러짜리[12] 어쿠스틱 기타가 첫 기타다운 기타였고, 이때부터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어깨 너머와 귀동냥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라디오와 음반에서 나오는 음악들을 귀로 카피했다. 밴드도 결성해서 연주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밴드 음악을 하면서 어쿠스틱 기타는 음량이 작아서 소리가 묻혀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일렉트릭 기타를 가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마침내 16살 때 그의 아버지가 'Supro Ozark 1560 S'라는 일렉트릭 기타를 지미에게 선물해준다.[13] 일렉 기타를 손에 넣은 지미 헨드릭스는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시애틀의 한 유대교 회당 지하실에서 첫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밴드에서 짤리기도 했다. 이후에 지미 헨드릭스는 벨벳톤스(The Velvetones), 락킹 킹스(The Rocking Kings) 등의 밴드에 가입하고,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지미가 밴드 활동에 몰입할수록 그가 학교에 나타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자연히 학업 성적도 떨어졌다. 결국 지미 헨드릭스는 출석수 미달로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원래 왼손잡이였는데, 처음에 아버지가 오른손잡이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이는 당시 왼손을 쓰는 것은 악마의 상징이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방에 있을 때는 오른손으로 연주를 하다, 아버지가 방을 떠나면 왼손으로 연주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원래 아버지 때문에 오른손으로 연주를 하다가 정확한 리듬감을 요하는 피킹을 왼손으로 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왼손잡이 연주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헨드릭스는 왼손으로도, 오른손으로도 연주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 특이한 스킬은 헨드릭스가 악기점에서 이런저런 기타 오디션을 볼 때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한다.

2.2. 세션맨 시절



'''뒷줄 제일 왼쪽에서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세션맨이 바로 지미 헨드릭스'''

1961년 헨드릭스는 도난당한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당시에는 입대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해주기도 했는데, 지미는 3년 동안 육군에 복무하기로 한다. 그는 제101공수사단에 배치되길 희망했는데, 위험수당으로 달마다 55달러를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그가 바라던 공중강습사단에 배치되었지만, 곧 군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14]와 캐쥬얼스(The Kasuals)를 결성, 밴드 활동을 계속한다. 기타 천재의 대명사인 지미 헨드릭스이지만 군 부대 내에서 지나치게 연습을 해서 상관으로부터 "그만 좀 하지?"라는 빈정을 들었다고도 한다. 군복무 시절 지미 헨드릭스는 하루빨리 제대해서 제대로 음악을 하고 싶어했는데, 결국 소원대로 낙하산 훈련 중 부상을 입고 조기 제대한다.[15][16]
막상 제대하고 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제대하고 받은 급여를 버스비도 안 남기고 술집에서 다 써버렸기 때문. 지미는 다시 부대로 되돌아가 동료에게 팔았던 기타를 되찾고 이런 저런 밴드 들을 거치면서 세션 활동을 한다. 당시 지미와 함께했던 연주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완전히 기타에 미쳐 있었다고 한다. 공연 중 휴식 시간에도 기타를 연습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연습했으며, 각성제를 복용하고 밤을 새서 기타를 치기도 했고, 잠을 잘 때도 기타를 꼭 껴안고 잘 정도로 연습광이었다고 한다. 지미는 만나는 기타리스트들마다 기타 연주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기타를 이빨로 연주하는 퍼포먼스도 이 시기에 익힌 것이다. 한 번은 '지미 제임스(Jimmy James)'라는 이름으로 리틀 리처드의 밴드에서 세션맨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리틀 리처드는 "나보다 옷을 더 멋있게 입는다"는 이유로 지미 헨드릭스를 해고했다. [17] 제임스 브라운의 백밴드에도 몸 담은 적이 있었는데 제임스 브라운한테 쳐 맞고 쫓겨난다.[18] 첨언하자면 리틀 리처드는 자기애의 화신이었고, 제임스 브라운은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다. 자유분방한 지미가 이 둘의 눈 밖에 난 것은 당연할 일인 것이다.
1966년, 헨드릭스는 '지미 제임스 앤드 블루 플레임스(Jimi James and Blue Flames)'라는 밴드를 조직하며 홀로 서게 된다. 당시에는 오리지널 곡이 없어서 하울링 울프의 'Killing Floor',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트록스의 'Wild Thing' 등의 기존 곡을 연주했었는데, 지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곡하여 매번 다르게 연주했었다. 어느 날 린다 키스라는 영국 모델이 지미의 공연을 보고 뻑 가버리는데, 당시 키스 리처즈(롤링스톤즈의 그 양반 맞다...)라는 기타리스트와 사귀면서 음악에 조예가 있었던 그녀는 주변의 음악 업계 종사자들에게 지미 헨드릭스를 소개해준다. 마침 투어차 미국에 와있었던 애니멀스(Animals)의 베이시스트 채스 챈들러(Chas Chandler)가 그녀의 권유로 지미가 연주하는 클럽, '카페 와(Cafe Wha?)'에 들리는데, 헤이 조(Hey Joe)를 연주하는 지미를 보자마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 영국에서 활동하자고 제안을 한다.[19] 그동안 모리스 제임스, 지미 짐, 지미 제임스로 불렸던 이 청년은 마침내 지미 헨드릭스라는 이름으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간다.

2.3.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채스 챈들러는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에서 데뷔를 시켰는데, 이것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블루스 리바이벌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큰롤이 영국으로 들어온 후 당시 영국의 젊은 기타리스트들은 로큰롤의 원류 중 하나인 블루스까지 파고들면서 블루스를 재해석하고 있었는데,[20] 채스 챈들러는 '본토박이'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가 영국에서 활동한다면 성공할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에게도 미국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여러 모로 이점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비비 킹, 앨버트 킹, 머디 워터스, 버디 가이 등의 블루스 거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블루스 기타는 이미 정형화되어 고착되어있었다. 보수적인 미국의 청자들과 음악산업 관계자들에게 지미 헨드릭스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연주는 그저 생뚱맞게 들렸을 뿐이었다.

'''원곡'''

'''지미 핸드릭스의 변형ver'''[21]
런던에 도착한 지미 헨드릭스는 노엘 레딩을 그의 새 밴드의 첫 번째 멤버로 맞아들인다. 노엘 레딩[22]은 원래 애니멀즈의 기타 오디션을 보러 왔었는데, 채스가 베이스도 연주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던 것. 노엘은 베이스는 처음이었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하고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뽑히게 된다. 지미 헨드릭스는 밥 딜런을 닮은 노엘의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뽑았다고 했다.
영국으로 건너간 지 일주일 후,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두 천재 기타리스트들이 처음 만나게 된다. 채스는 에릭 클랩튼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지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미를 크림(Cream)이 공연하는 장소로 데려갔다. 채스는 그냥 서로 인사 정도만 시켜주려고 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순진한 건지 당돌한 건지 크림과 (즉흥 합주)하고 싶다고 부탁한다. 에릭 클랩튼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두 곡 정도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죠. 나는 괜찮다고 대답해줬지만, 속으로는 '별 웃기는 놈 다 보겠네.'라고 생각했어요." 허락이 떨어지자 지미는 무대로 올라와서 하울링 울프의 '킬링 플로어(Killing Floor)'를 에릭이 이제껏 듣도보도 못한 스타일로 연주해버렸다. 에릭 클랩튼은 지미의 연주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곡을 따라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관객석에는 또 한 명의 천재 기타리스트가 직업인으로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프 벡.
노엘 레딩에 이어 드러머 미치 미첼[23]이 가입하여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라인업이 완성된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아직 싱글조차 발매하지 않은 밴드였지만, 기타를 뒤집은 채로 죽여주게 연주하는 왼손잡이 흑인 기타리스트의 입소문은 런던에 금방 퍼졌다.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영국의 뮤지션들이 그를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까지 투어 일정이 잡히고, 훗날 레전드가 되는 음악인들이 지미의 공연을 보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브라이언 존스, 에릭 클랩튼, 더 후, 제프 벡... 비틀즈의 링고 스타는 그의 안 쓰는 아파트를 빌려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가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출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1966년 12월, 밴드의 첫 싱글 '헤이 조(Hey Joe)'가 발매되고 영국 차트 4위까지 오른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투어 도중 짬짬이 곡을 만들고 녹음을 하여 1967년 정규 앨범 'Are You Experienced'을 발표,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른다.[24] 'Purple Haze', 'Foxy Lady', 'Red House', 'Fire' 등이 이 앨범의 대표적인 곡들이다. 그 해 6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출연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간다. 몬터레이 공연의 마지막 곡 'Wild Thing'의 연주 막바지, 기타와 섹스하는 것처럼 기타를 눕힌 채 격렬히 아밍을 하던 지미 헨드릭스는 별안간 라이터 기름을 기타에 붓고 불을 붙인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기타 앞에 무릎을 꿇고 불꽃이 더 타오르게 하려는 듯한 퍼포먼스를 한다.[25] 이렇게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미국 데뷔 무대는 전설이 된다.

'''기타 박살!'''

'''당시 박살났던 기타의 현재 모습[26]'''
이후 'Axis :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앨범을 내놓으며 2년간 활동한다. 헨드릭스의 명곡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한마디로 리즈 시절.

2.4. 익스피리언스 해체, 그리고 사망


1969년, 급조한 밴드의 한계였는지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해체하게 된다. 그 후 헨드릭스는 솔로 활동을 하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참여하였다.
1970년 필모어 이스트에서, 친구였던 빌리 콕스(베이스)와 버디 마일스(드럼)와 함께 결성한 '''밴드 오브 집시스'''의 데뷔 공연을 한다. 또 다시 전설이 시작될 것 같았으나, 같은 해 9월 18일 헨드릭스는 런던의 스마르칸트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 후 토사물로 인한 질식사.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27]
그의 사망 전날 사진들이 꽤나 많이 찍혀있는데,[28] 보통 이렇게 급사한 사람들의 사망 직전 사진이 이렇게 많이 찍히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즐거운 휴식을 보내고 있는데, 그 다음날 그가 어떻게 되는 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들.
지미 헨드릭스 사망 50일 전의 마지막 마우이 공연. Voodoo Child(Slight Return)을 연주하고 있다.

3. 앨범


헨드릭스 생전에 나온 정규 음반은 4개가 있다.
2010년 3월,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지미 헨드릭스의 새로운 앨범 ''''Valleys of Neptune''''이 공개되었다. 2009년 8월, 계약 기간 만료로 유니버셜 뮤직 그룹에서 소니 뮤직으로 판권이 이적되어 발매되었다.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명의로 낸 앨범들도 모조리 딜럭스 에디션으로 발매. 한국에서도 살 수 있다.
2013년 3월 5일, 마찬가지로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People, Hell And Angels'가 전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2018년 3월 9일, 'Both Sides Of The Sky' 앨범이 발매되었다.

4. 평가와 영향력


'''지미 헨드릭스는 틀림없이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다. 헨드릭스는 일렉트릭 기타의 범위와 어휘를 음악가가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확장했다. 그의 무한한 추진력, 기술력, 그리고 창의적인 적용은 로큰롤의 소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역사상 최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로,''' '일렉트릭 기타의 역사는 이 사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렉트릭 기타하면 떠오르는 '좡좡좡' 거리는 거친 소리는 지미 헨드릭스를 통해 음악으로 새로 탄생했다고 보면 된다.[29] 그의 진취적인 음악으로 인하여 비단 일렉트릭 기타 뿐만이 아닌,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전체적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당시에 막 개발되었던 퍼즈(Fuzz), 와우 페달(Wah Pedal), 유니바이브(Univibe) 등의 기타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개성적인 기타 톤(음색)을 만들었는데, 이후 톤 메이킹(연주자만의 개성적인 톤을 만드는 것) 실력도 기타리스트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연주 중 피드백 사운드나 격렬한 아밍으로 음정을 벗어난 음, 기타를 앰프 스피커에 부딪히거나 마이크 스탠드에 비벼서 생기는 소리 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정확한 음이 아닌 노이즈도 강렬한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레코딩에서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는 싸이키델릭 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블루스를 바탕으로 했지만 더욱 더 공격적이고 거칠게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시도와 결과물은 블루스를 넘어 록 음악, 특히 싸이키델릭, 하드 록, 헤비메탈같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동한 강렬한 장르의 주요 정체성이 되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드 록,메탈의 정체성중 하나인 '귀를 거칠게 찌르는 굉음으로 관중들을 압도하는 기타리스트의 음악'이라는 정의는 최소 5년 이상 늦게 자리잡고, 지금과는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른다.[30] 왼손잡이였던 지미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연주했었는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타와 한 몸이 된 듯 신기에 가깝게 연주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지미 헨드릭스는 1960년대에 새로운 기타 연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기타를 넘어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 위대한 아티스트들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27년이라는 그의 짧은 일생 중 마지막 4년 동안[31]에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그는 27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남들보다 늦은 '''15세'''[32]에 기타를 시작하였으며, 즉 Are You Experienced를 만든 것은 그가 기타를 배운 지 '''9년'''이 된 해이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이 대부분 10세 전후에 기타를 처음 접한 것을 감안하면 지미 헨드릭스가 얼마나 천재인 지 알 수 있는 부분.[33]
즉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기타의 본좌''''로 꼽히는 인물이다. 동시에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도 '''제일 위대한 거목 중 하나'''로 꼽힌다. 일렉트릭 기타의 주요한 주법들 중 대부분을 창조해 냈으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항상 1위로 선정될 만도 하다.[34]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나 그 주법만이 아닌 '''음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의 주 장르인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재즈 뮤지션[35]들도 그의 독특한 화성 방식이나 주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하드 록,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는 헨드릭스를 통해 지금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사실상 후대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의 발자취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헨드릭스 이후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들은 알게 모르게 당연히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력 안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지미 헨드릭스가 현역이던 시절 에릭 클랩튼, 제프 벡, 더 후피트 타운젠드, 브라이언 메이(대학교 시절, 스마일 소속 당시) 등 지금에서는 올타임 레전드라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조차 지미 헨드릭스의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혁신적인 음악을 기타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른 듯 연주하는 장면을 본 후에 ''''기타를 접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지미의 스킬과 곡 해석력, 감성을 따라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갖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영국의 록 계, 아니 '''지구의 락 음악'''이 발전을 할 수 있었다.

'''Jimi Hendrix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Live)'''
다른 곡 커버에도 역시 능한데 페퍼상사에 수록된 첫 곡인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가 나온지 '''2일 만에''' 자신 만의 하드 락 스타일로 커버하였다. 실제로 원곡자 폴 매카트니도 이를 듣고선 매우 놀라워하였으며, 이를 언급하였다. 또한, 밥 딜런의 곡인 'All Along The Watchtower'는 원곡보다도 지미 헨드릭스 버전이 더 유명하다.
여러 매체에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순위를 정하는 자리를 가질 때 2위부터는 순위 변동이 다소 잦지만[36] 1위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미 헨드릭스로, 앞으로 영원히 만세불변할 절대적인 1위라는 평이 지배적이다.[37] 무엇보다 흑인이 아직 많은 차별을 받던 시대'''[38]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인해서[39] 영국이 음악 시장을 주로 점령하고 있던 시대'''에 '''현재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영국계 백인 밴드인 롤링 스톤즈, 비틀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타덤에 오른 흑인 미국 아티스트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가?'''
비슷한 시기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와 함께 소울이나 힙합 쪽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커먼은 Jimi Was Rock Star라는 곡으로 헌정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5. 여담


  • 트레이드마크는 아프로 헤어스타일이다. 이 헤어스타일은 곧 수많은 미국의 젊은 흑인들이 따라하였다.
  • 당시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그랬듯 그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 등 당시 잘 나가던 로큰롤 아티스트블루스의 세 거장인 3킹(앨버트 킹, B.B 킹, 프레디 킹)에게도 영향을 심하게 많이 받은 인물이나, 그의 연주 주법이나 와우 페달, 옥타비아, 퍼즈 박스 등의 이펙터의 적절한 사용과 놀라운 퍼포먼스는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록이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꼭 빠지지 않는 락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다.
  • 그의 연주 스타일은 펜타토닉 기반의 블루지한 솔로였으나[40], 당시에 그처럼 록에 걸맞은 빠르고 스타일리쉬한 주법은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그의 스타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면 처음 배우는 게 펜타토닉이고, 그 다음이 지미 헨드릭스가 애용하던 프레이즈일 정도로 그의 주법은 이미 정석 중의 정석.[41]
  • 다만 기타 연주 실력관 별개로 보컬에는 핸디캡이 있었는지, 자신을 '백만 달러짜리 기타 실력과 5달러짜리 보컬 실력을 가진 뮤지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2] 뭐 그렇게까지 심하게 못 부르는 건 아니고 무난한 수준.[43]게다가 자타공인으로 보컬 실력이 그저 그런데도 뜬 밥 딜런이 있어서 묻힌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노래는 안하려고 했으나,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저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못 할 게 뭔가'라고 생각해서 보컬까지 하게 되었다고.
  • 헨드릭스는 록 음악R&B의 보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했다고 평가되는 리틀 리처드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으며, 보컬을 겸한 선배격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이 보컬적인 역량으로써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컬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나, 딜런의 노래를 듣고 보컬에 있어서 기교보다 표현력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보컬을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 시대를 앞서간 기타 연주 실력과 이펙터 사용, 그리고 락 역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 덕분에 지금도 기타리스트 중에 존경하지 않으면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며, 기타 매거진에서 다른 록 기타리스트를 인터뷰할 때, 다소 식상한 질문인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가 누군가요?' 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하나다.
  • 현대 기타리스트에 있어서 록의 첫 번째 혁명은 그가 일으켰다고 해도 좋을 만큼 록 음악대부, 혹은 시초라 불린다. 록 음악 이외에 흑인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에도 재즈계의 거물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헨드릭스를 위시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같은 후배 록 뮤지션의 음악을 듣고 삘받아서 재즈 펑크를 창시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불후의 명작 앨범 'Bitches Brew'에서 재즈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에게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로 연주해줘"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 SF장르를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UFO를 목격한 뒤로는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고.
  • 아직도 살아있는 대부분의 전설적인 기타 연주자들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기타를 시작한 이유의 대부분이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은 실로 무서울 정도.

  • 그의 영향력이 대단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실제로 5년도 안 되는 활동 기간에 이 모든 걸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정규 앨범은 고작 세 장에 라이브 앨범 한 장뿐이지만 하나하나가 다 락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대우받는 걸작이며, 기타리스트라면 꼭 한 번쯤은 들어봐야 할 불후의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타 연주를 1970년대도 아니고 무려 1960년대 말에 해냈다. 이 때 대한민국은 아직 유신 정권도 되기 전이다.

  • 대표곡은 'Purple Haze', 'All Along the Watchtower'[44], 'Foxy Lady', 'Little Wing', 'If 6 Was 9', 'Crosstown Traffic', 'Hey Joe', 'Third Stone from the Sun', 'Voodoo Child (Slight Return)', 'Wild Thing' 등이다. 특히 'Purple Haze'는 한국존 레넌이라 불리는 포크 뮤지션 한대수가 외국의 한 카페에서 듣다가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괴성을 질렀다는 일화도 있다.
  • 주로 사용하던 악기는 그 유명한 Stratocaster. 가끔씩 Flying VSG연주하기도 했다.[45][46] 앰프는 그 유명한 플렉시 마샬 앰프. 지미는 마샬 앰프의 게인을 극도로 높여 오버드라이브 사운드를 내기를 좋아했는데, 가까이서 들으면 귀가 터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무 게인을 높여 앰프에서 연기가 날 때도 있었다고 한다.[47] 또 앰프에 구멍을 뚫어 잡음이 섞인 지직거리는 소리를 만드는 것 역시 좋아했다. 결국 그 비싼 앰프를 태워먹고 찢어놓는 짓이 무의미하다고 여겨, 이 소리들을 재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달라고 의뢰한 것이 오늘날 페달형 드라이브 이펙터의 조상 격 되시겠다. 이후 그의 스타일은 하드 록과 헤비메탈 기타 사운드메이킹에 기본으로 자리잡게 된다.
  • 기존 문서에 Fender에서 지미 헨드릭스 트리뷰트 스트랫을 생산한 적이 없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구글에 'Jimi Hendrix Stratocaster'라고 치면 분명히 이미지와 연주 동영상이 뜬다! 1997년에 판매되어 늦은 감이 있지만, 펜더 시그니처 모델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이므로 헨드릭스 생전에 펜더사와 어떤 논의도 할 사이 없이 요절했다는 것과 레오 펜더가 헨드릭스의 연주를 싫어했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다. 사용한 68년 스트라토캐스터가 헨드릭스의 메인 기타로 인식되고 있는 편. 헨드릭스가 쓰던 방식의 반대로 왼손잡이용 68 스트랫을 오른손잡이용으로 뒤집어놓은 트리뷰트 아닌 트리뷰트가 잠깐 발매되었던 적이 있긴 있었다.
  • 멕시코 Fender에서 정식으로 시그네쳐 모델이 출시되었다. 색상은 그가 생전에 쓰던 올림픽 화이트/블랙에 메이플 지판의 두 가지 사양이며, 바디나 컨트롤부는 편의를 위해 오른손잡이용 그대로이지만 위아래가 뒤집힌 리버스 헤드에 리어 픽업이 오른손잡이용을 뒤집어 왼손잡이용으로 만든 것처럼 경사가 기존과는 반대로 져 있어 오리지널의 사운드 특징은 잡되, 연주는 더 편하게 만들었다.
  • 헨드릭스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1967년도에 개최된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무대에 서면서부터였다. 당시 무대에서 엄청난 고출력 사운드와[48] 핵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발적인 연주와 기타를 불태우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49] 여담으로 재니스 조플린도 이 페스티벌에서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또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의 미국 국가 연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50] 관한 투표에서 초반에는 정상적으로 연주한 듯한 미국 국가 멜로디가 나오는 듯 싶더니 기타음을 최대한 왜곡시켜서 폭격기가 폭격하는 소리 같은 전장의 소음처럼 들리게 해서 당시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진 미국 정부를 풍자했다.[51] 이건 60년대 미국 히피 문화를 넘어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반체제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http://youtu.be/sjzZh6-h9fM

  • 사실 그의 퍼포먼스는 혁신적이긴 하나, 기타를 박살내고 태우는 정도의 광기 어린 짓을 많이 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뭔 미친놈이 저 좋은 기타에 휘발유를 뿌려서 태우나' 할 정도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몇몇 락 매니아들은 이것도 그의 연주기법 중 하나로 분류한다. 확실히 기타가 탈 때 특유의 소리가 나긴 하지만... 흠좀무. 이 행동은 약물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무대에 오르는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당시 매니저들은 흑인인 헨드릭스를 차별대우를 하거나, 출연료를 받으면 술과 마약을 사서 헨드릭스에게 주고 나머지 돈은 꿀꺽하는 막장 행보를 보였다고. 참고로 기타를 박살내는 건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가 원조이다[52]. 하지만 다른 퍼포먼스를 보면 기타를 단순히 연주하는 게 아닌, 쇼맨십에서도 매우 훌륭한 프론트맨였다는 걸 알 수 있다.[53][54]
  • 성기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본을 뜬 모형도 있을 정도니... 같이 한 판 한 여자가 묘사하기를 길지 않았지만 엄청 두꺼웠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참고로 이빨 연주도 바로 지미 헨드릭스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중 하나로, 1967년 스톡홀름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55] 록 음악 기타리스트의 상징적인 퍼포먼스. 참고로 함부로 따라하지 않는 게 좋다. 이거 기분이 굉장히 더럽고 무엇보다 잘 안 된다(...) 게다가 라이브에서 하면 튜닝도 다시 해야 하니 그냥 쇼맨십으로 하는 것이다.[56] 사실 이빨로 줄 퉁기는 게 아니라 손가락만으로 풀링 오프를 하는 것이다.
  • 여담으로 지미 헨드릭스도 천재라고 인정한 사람이 있다. 누구냐면 롤링 스톤즈의 멤버인 브라이언 존스이다. 그래서 같은 롤링 스톤즈의 멤버인 믹 재거를 굉장히 싫어했다. 이게 뭔 소리냐면 롤링 스톤즈 항목 참고. 모 토크쇼에 나와서 "세상에서 가장 잘 치는 기타리스트가 된 기분이 어때요?" 라는 질문에 "그건 이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라고 대답한 것도 유명. 다만 이는 루머이고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 유달리 앨범 아트에 곡절이 많았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앨범은 영국판 커버가 마음에 안 들어 미국판은 새로 커버를 만들었고, 두 번째 앨범도 앨범 커버를 마음에 안 들어했고[57], 세 번째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아내였던 린다 매카트니가 센트럴 파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상에 애들 앉혀놓고 찍은 사진을 원했다가 빠꾸 먹었고, 영국판으로 나온 벌거벗은 여자들 커버는 싫어했다.[58] 어째 영국판 앨범 커버하고는 악연인 듯.

  • 그런데 위의 이야기들과는 상반되게도 생전에 찍은 백인 여성 2명과 쓰리썸하는 영상이 존재한다(...) 참고로 이 영상을 유포한 비비드 엔터테인먼트는 파멜라 엔더슨과 토미 리가 나오는 영상을 유포한 전적이 있다.
  •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 쓰던 기타 중 하나는 생전에 녹음실 음향기사에게 줬다고 한다. 이게 여러 사람을 거쳐 2015년 한 경매 관련 프로그램에서 해당 기타와 판매자를 방영하여 감정 결과 완벽한 진품이 인정되었다. 해당 방송에서 판매자는 75만 달러 정도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경매로 가서 160만 달러에 팔렸다.
  • 에피소드도 많고, 워낙 미친듯한 퍼포먼스로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사생활에선 오히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정중하고 예의바르고 정도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B.B. 킹이나 버디 가이 같이 만나서 협주도 해본 뮤지션들은 한결같이 약간 쑥쓰러워 하지만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가정생활 면에서도 좀 불행한 의미로 전형적인 불안정한 흑인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유명인이 돼서도 가족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재혼한 새엄마쪽 의붓, 이복형제 자매들도 따뜻하게 챙겨줬다고 한다.*
  •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흑인이면서 백인에게 아첨하는 배신자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따라서 흑인을 위한 음악을 방송하던 라디오에선 그의 음악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헨드릭스가 선배 기타리스트 하울링 울프(흑인)와 함께 공연했을 때, 울프는 헨드릭스를 "백인과 짜고 돈벌이를 하고있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헨드릭스는 울프의 발언에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고한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살아있었을 때부터 헨드릭스을 높이 평가했던 흑인 아티스트도 존재한다.
  • 한 번은 영국의 명문대인 임페리얼 대학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재학 중이던 스마일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브라이언이 해당 공연의 스텝 중의 한 명으로 참여했었다. 훗날 브라이언은 지미 헨드릭스를 매우 쿨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현란한 기타 솜씨를 보고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 일본 만화 나루토에 등장하는 구름 마을의 초대 라이카게가 지미 헨드릭스처럼 생겼다. 작가가 딱히 언급한 적은 없지만 구름 마을에는 헐크 호건을 닮은 닌자가 있는 등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캐릭터가 있다.
  • 일본의 락 밴드 MAN WITH A MISSION은 지미 헨드릭스의 실험체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5.1. 왼손잡이


왼손잡이로 유명하다. 오른손잡이였단 이야기도 있지만 여러 소스들[59]을 볼 때, 그는 원래 왼손잡이였지만 이후 오른손잡이로 교육받았고, 이로 인해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게 된 사례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원래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잡이 기준 운지법으로, 기타 연습을 하던 중 오른손으로는 도저히 피킹이 안 돼서 왼손 기타리스트로 돌아온 사례가 많다.
이는 그의 기타 톤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기타를 보면 스트라토캐스터의 브릿지 픽업이 살짝 기울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높은 현(1번 줄)의 높은 소리를 픽업하고, 낮은 현(6번 줄)의 낮은 소리를 픽업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 기타를 거꾸로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운드 쉐이핑이 반대로 된다.
또한 스트라토캐스터의 헤드를 보면 6개의 헤드머신이 일렬로 되어있다. 즉 제일 저음인 6번줄이 브릿지-헤드머신의 거리가 제일 짧고 최고음인 1번줄이 제일 길다. 하지만 헤드가 뒤집힘으로서 반대로 저음줄이 더 길어지고 고음줄이 더 짧아져서 저음이 좀 더 타이트해지고 높은 음을 연주할 때 텐션이 낮아 테크니컬한 연주가 용이해진다.
다음은 기존 문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 헨드릭스가 왼손잡이라고 알고 있다.[60] 그러나 그는 '''오른손잡이'''이다.[61] 물론 지미가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쪽이 내 심장과 더 가까우니까.'''"라는 왼손잡이 최고의 명언을 남긴 건 사실이다.
유튜브에 지미 헨드릭스가 처음으로 TV에 나왔던 영상이 있고, 그곳에서 오른손으로 기타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영상에서 오른손으로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은 그냥 다른 사람이고(...) 헨드릭스는 뒷줄 가장 왼쪽에서 재즈마스터를 왼손으로 치고 있다. 링크 4.
그가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왼손으로 치는 이유는 평소 알버트 킹을 매우 존경하여 그렇게 했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단, 알버트 킹은 기타를 그대로 뒤집어서 1번 줄이 위로 가도록 쳤지만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를 뒤집은 다음 줄을 반대로 껴서 사용하였다."

5.2. 한국에서의 인지도


해외 등지에서 '''기타 부문 불변 최고의 인물'''이라 평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인지도는 높지 못하다. 밴드 음악을 좀 알면 모를까.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당시 유행했던 사이키델릭 록 자체가 한국에서 마이너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는 1970년 죽었는데, 당시에는 대중음악 검열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접하기 쉽지 않았던 감도 없잖아 있다. 결정적으로 대한민국은 미8군 스탠다드 팝 이후로 미국처럼 록큰롤,사이키델릭,디스코 같은 장르가 순차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짧은 포크록 시대를 거쳐서 바로 마이클 잭슨이 이끈 팝 음악으로 유입이 이어졌기 때문에 지미 헨드릭스 같은 6~70년대 레전드 록큰롤,사이키델릭 음악가들과 음악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62]
물론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타 교본에서 소개하는 이름으로 알 것이다. 전술한 대로 기타 이펙터들의 활용에 있어 거의 대다수 교본을 만들어낸 사람이니. 그래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존경하는 캐릭터가 나오고, 앨범도 라이센스 발매되는 등, '''위대함 대비 인지도가 낮은 것이지, 인지도가 제로인 것은 아니다.'''
존 본햄과 더불어 지식채널 e에 등장하기도 했다. #


[1]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조니 앨런 헨드릭스(Johnny Allen Hendrix)'[2] 현재, 생존해 있었으면 80세이다.[3] 전성기는 1967년 ~ 1970년이다.[4] 소위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5] 주로 '''볼케이노'''라고 불린다. 똑같은 사인으로 사망한 사람으로는 영국 밴드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 호주 밴드 AC/DC의 전직 보컬 본 스콧 등이 있다.[6] '''조 바이든, 해리슨 포드, 백인천, 폴 매카트니, 마틴 스콜세지, 브라이언 윌슨, 브라이언 존스같은 년도'''에 태어났으며 브라이언 존스 제외 앞의 인물들이 현재 고령의 할아버지가 된 것을 감안하면 지미 헨드릭스와 브라이언 존스의 경우는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남은 사진은 젊은 시절 사진밖에 없지만 만약 죽지 않았다면 이미 자연사하거나 생존해 있다면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둘 다 대중음악계를 바꾸어서, 현재 음악의 조류가 다르게 흘러갔을 확률도 있다.''' 물론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7] 왼쪽부터 아버지 알 헨드릭스, 어린 지미 헨드릭스, 어머니 루실 헨드릭스, 동생 레온 헨드릭스.[8] 지미 헨드릭스의 혈통에는 다인종의 피가 섞여있다. 그의 외조부, 조부는 모두 전직 노예와 백인 주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외조모와 조모도 둘 다 인디언과 흑인 노예의 혼혈이었다.[9] 지미 헨드릭스는 아버지가 장례식에 보내주지 않아서 장례식 당일에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울었다고 한다.[10] 고등학교 퇴학 후에도 친구가 일하는 햄버거집에 마감 시간에 나타나 그날 팔리지 않아 버려진 햄버거감자튀김을 얻어갔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걸음걸이가 어정쩡했는데,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커서 그렇다고 한다.[11] 실제로 지미는 1957년쯤에 엘비스의 공연을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또한 영어 위키에서도 지미가 커버한 'Hound Dog'는 엘비스의 버전을 듣고 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본래 'Hound Dog'는 여성 흑인 가수 빅 마마 쏜튼이 발표한 것이고, 리틀 리처드도 리메이크한 적이 있다.[12] 여담으로 당시 Stratocaster 한 대의 가격이 200달러 초중반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13] 지미 헨드릭스 사후 저작권을 비롯한 그의 유산이 아버지에게 상속되었다. 이 양반은 2002년에 타계했는데, 그 당시 아들이 남겨준 유산은 무려 8천만 달러로 불어나있었다!!![14]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해체 후 지미는 빌리 콕스와 밴드 오브 집시스(Band of Gypsys)를 결성한다. 전설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15] 이 사실을 바탕으로 나온 곡이 마츠토야 유미 1집 (당시엔 아라이 유미)에 실린 '사랑의 파라슈트'다. 유밍은 지미 헨드릭스 팬이다.[16] 찰스 R 크로스가 집필한 지미 헨드릭스의 전기(국내에서는 <지미 헨드릭스:록스타의 삶>으로 번역 출간)에 따르면 사실은 정신과 군의관을 만나서 정신과적 꾀병을 부려 조기 제대에 성공했다고 한다. 동료에 대한 애정, 잦은 자위 횟수, 지속적인 몽정...[17] 사실 이건 핑계고 불성실한 태도땜에 쫓아낸것이다.[18] 이 당시 제임스 브라운은 백밴드가 자기가 요구하는 연주를 어기면 벌금을 물리고 수틀리면 후드려패기로(...) 악명이 높았으니(나중에 이 때문에 백밴드 멤버들이 집단 탈퇴를 하고 나서야 이 성향을 고치게 되지만), 지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안 맞은 건 당연했다.[19] 나름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 지미 헨드릭스는 영국행을 망설였다고하는데, 채스는 영국에 가면 에릭 클랩튼을 소개시켜준다고 꼬드겼다고.[20] 대표적인 예가 에릭 클랩튼이었다.[21] 이렇게 연주하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미국인들은 손사래를 쳤지만 영국의 기타리스트들은 엄청난 컬처쇼크를 먹었다.[22] 1945~2003. 원래 기타리스트였으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에서는 베이스를 치게 된다. 게다가 <Electric Ladyland>의 몇 곡을 녹음할 때는 녹음 빨리 끝내서 제작비 아끼려고 헨드릭스가 직접 베이스를 치기도 했다.[23] 본명 존 그래엄 미첼. 1946~2008. 밴드의 프론트맨이었던 헨드릭스에 비해 묻힌 감이 없잖아 있다만 이 사람도 3살 때부터 드럼을 친 헨드릭스 못지않은 천재이다. 가입당시 고작 18살이었던 최연소 멤버였으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슈퍼밴드 ELP(Emerson, Lake and Palmer) 가입을 제안받았지만 헨드릭스와 계속 연주하고 싶다고 가입을 거절했다. 만약 그가 가입을 승낙했다면 그룹의 이름은 Emerson, Lake and Mitchell이 되었을 것이다. 헨드릭스 사후에는 특별히 한 밴드에서 연주한 적은 없지만 동시기 여러 밴드와 음반에 참여한 세션맨으로 활동했고.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드러머 8위로 선정되었다.[24] 당시 1위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참고로 지미 헨드릭스는 이 앨범이 발매되고 사흘 뒤에 동명의 타이틀 곡을 커버했다.[25] 이 퍼포먼스는 지미가 즉흥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기타 부수기는 이미 피트 타운젠드가 선점하고 있어서 더 튀어보이려고 기타에 불을 붙였다고.[26] 프랭크 자파의 아들인 Dweezil Zappa의 소유인데, 몇 번을 고쳐서 지금의 상태라고 한다. 아빠가 '너 가질래?'라면서 줬다고(...).[27] 28세 생일이 2개월 앞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천재 뮤지션재니스 조플린, 도어즈짐 모리슨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을 3J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천재 뮤지션이 한 시기,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천재들은 스물일곱 살을 넘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28] 약 10~20장 정도[29] 지미 헨드릭스 이전의 일렉 기타 소리는 지금의 재즈 기타, 초창기의 일렉트릭 블루스,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의 초기 락큰롤 사운드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30] 아이러니한 것은, 헨드릭스를 통해 하드 록,헤비메탈의 정체성이 확립된 이후로 정작 헨드릭스의 뒤를 이을 흑인 하드 록,헤비메탈 뮤지션이 거의 나오지 못했다는 것. 그로 인해 하드록,메탈씬은 다소는 백인 위주의 문화가 되었고 지금도 지속되는 중이다.[31]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결성 시기인 1966년부터 사망할 시기인 1970년.[32] 한국 나이로 중3에 기타를 처음 배운 것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아주 늦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지미 헨드릭스는 유명 기타리스트, 아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는 것. 대부분의 유명 기타리스트들은 더 이른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잭 화이트의 경우 지미와 비슷한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하여 테크닉을 내세우는 연주보다는 간단하고 중독성 있는 리프를 개발하는 데 능하다. 그런데 지미의 연주는 간단한 리프보다는 '''새로운 기법과 화려한 연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단 것을 감안하면... 만약 10년만 더 살아있었어도 그의 작품 세계에 맞는 어마어마한 음반들이 더 많이 나왔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33] 대부분 기타리스트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구력을 가지고 나서 서서히 메인스트림에 올라오며, 20년은 쳐야지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수준까지 가는 것을 감안하면 9년만에 기타라는 악기의 모든 기법을 정립한 지미 헨드릭스는 단순히 기타라는 악기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전체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한 천재들 중 하나이다.[34] 그것도 그가 기타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 연주한 기간은, '''고작 12년이다!''' 12년만에 일렉트릭 기타의 거의 모든 주법을 만들고 대중음악계를 크게 바꾼 다음에 장렬하게 요절한 것이다. 그야말로 '단명한 천재'의 상징격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35] 특히 마일즈 데이비스.[36]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 키스 리처즈 등... 물론 이분들 역시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다.[37] 당장 맨 위에 있는 수상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다.[38] 물론 40년대 후반에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성공과 60~70년대에 무하마드 알리가 복싱계를 호령한 덕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당시에도 많은 차별을 받던 건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인종차별은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부터 제대로 나아졌다.[39] 여담으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매니저였던 채스 챈들러 역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들 중 하나였다.[40] 따라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분류되며, 만들었던 음악의 형식 등으로 미루어보아(대부분이 12마디 블루스) 스스로를 블루스 음악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대부분 록 기타리스트로 인정받는다.[41] 혹자에 따르면 지미가 나타났기 때문에 코드만 맞추며 베이스를 깔던 기타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보컬과 겨루는 악기가 되었다 평한다.[42] 를 녹음할 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뒤돌아 서서 녹음을 했다고 한다.[43] 목소리가 상당히 허스키한 편으로 듣다 보면 상당히 괜찮다.[44] 원곡은 밥 딜런.[45] 플라잉 브이의 경우는 사이키델릭 페인팅, SG는 아이보리 색의 트리플 험버커 픽업으로 둘 다 그 유니크함으로도 유명하다.[46] 세션 활동 때는 재즈마스터도 사용했으며, 간혹 Les Paul을 연주하는 사진들도 보인다.[47] 초기 라이브 영상을 보면 헨드릭스가 관객들에게 기타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되면 귀를 막아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였다. #[48] 무대에서 앰프게인을 한계가 넘어설 정도까지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연주를 마치고 나면 무대에 셋팅된 음향장비가 모두 맛이 가버리곤 해서 페스티벌 등에선 대부분 마지막 순서였다고 한다.[49] 다만 연주 후에 기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는 언론 노출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 유명 뮤지션들의 이런 기행이나 퍼포먼스 중에는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인 경우도 많다. 출연료 대신 마약을 사다주면서 기행을 부추긴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 이야기도 있다.[50] 유명 잡지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국가 공연에서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휘트니 휴스턴.[51] 덧붙여 이것은 지식채널e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FPS 게임 스펙 옵스: 더 라인의 오프닝 BGM으로도 쓰이는데, 같이 나오는 화면의 성조기는 뒤집혀진 채 너덜너덜해져있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기존 콜 오브 듀티배틀필드류의 FPS 게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게임이다. 현대판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려보라. 정의인 줄 알았던 것이 광기의 모습을 드러내가는 게임에 걸맞는 BGM.[52] 피트 타운젠드가 공연 중에 기타를 높이 들었는데 천장에 닿아 부숴지자, 일부러 그랬다는 듯이 모두 때려 부숴버린 것이 시초이다.[53] 당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에는 고정 1위로 선정되어 있을 뿐더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에서도 5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54] 여담으로, 현재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겸 보컬로 평가받는 록 밴드 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존경한 퍼포머 중 한 명이 지미 헨드릭스였다. 같은 팀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의 증언에 따르면, 지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본 적도 있다고...[55] 이때 연주했던 곡은 'Purple Haze'.[56] 국내에선 N.EX.T 1기 멤버인 기타리스트 정기송이 라이브에서 간간이 보여주었다. 3분 11초에 1초 동안 나온다.[57] 좀 더 아메리칸 원주민 풍으로 원했다고 한다.[58] 다른 버전인 지미 헨드릭스 본인 얼굴 사진에 대한 코멘트는 알려진 게 없다.[59] 링크 1, 링크 2, 링크 3 [60] 그렇게 알고 있을 만 하기도 하다. 왼손잡이 천재로 늘 뽑기도 하고, 기타 치는 모습이 다 왼손으로 피킹하는 것이기에...[61] 정확하게 말하자면 딴손잡이형. 오른손잡이로 일상적인 생활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나, 악기 연주 같은 특수한 동작에서는 왼손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62] 사실 해외 록밴드 자체가 한국에서는 마이너다. 그나마 보헤미안 랩소디덕에 퀸은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고 레드 제플린토르: 라그나로크의 삽입곡 'Immigrant Song'을 부른 밴드 정도로만 알 것이다. 물론, 지미 헨드릭스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는 군사정권 시기고 한국이라면 바로 마약 투약으로 잡혀가서 감옥살이 하다가 음악을 접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제대로 들어왔더라도 음악성은 높지만 대중성이 다소 떨어지는 음악을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특히 음악 감상에 있어서 대체로 악기 파트보다 보컬의 영향력을 더 크게 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거기다 지미 특유의 느낌 가는대로 가버리는 자유분방한 연주는 다소 보수적인 음악 씬에서 인정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지미가 영국에서 금방 인정받은 것도 마침 그타이밍에 영국에서 로큰롤 부흥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오리지널 사운드에 관심있던 비틀즈의 형님들을 위시한 70년대 록 씬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초대했고, 그의 기타실력을 보자마자 시쳇말로 '뻑'가서 앞다투어 같이 공연하려고 들이대서 매우 빨리 받아들여진거지 기존 음악계와 트러블이 없었던건 행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