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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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주요 저널·여론조사 선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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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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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63]
[image]
<^|1><height=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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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름
비틀즈
THE BEATLES

멤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입성 연도
1988년
후보자격 연도
1988년
후보선정 연도 || '''{{{#ffd700 1988년
''' ||















미국 음반 산업 협회
[image]
Best-Selling musician In America
역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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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장소
출처
비틀즈
약 1억 8,300만
미국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image]
음악상 수상작
제43회
(1970년)

비틀즈
(렛잇비)

역대 그래미 시상식
[image]
올해의 노래
제8회
(1966년)


제9회
(1967년)


제10회
(1968년)

토니 베넷
“The Shadow of Your Smile”

비틀즈
“Michelle”
[1]

피프스 디멘션
“Up, Up and Away”
최고의 신인상
제6회
(1964년)


제7회
(1965년)


제8회
(1966년)

스윙글 싱어즈

비틀즈

톰 존스

[image]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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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비틀즈
THE BEATLES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98년 12월 25일
}}}#ffd700 위치}}}
}}}#ffd700 7080 Hollywood Blvd.}}}

위치
7080 Hollywood Blvd.
}}}
}}}

비틀즈의 기네스북 등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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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image]
Best-selling musician of all time.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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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날짜
출처
비틀즈
약 10억장
2001년 3월 19일
#


Guiness World Records
[image]
Most Recorded Song
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노래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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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날짜
출처
비틀즈, Yesterday
약 1,600회
1986년 1월 1일
#



}}} ||

[image]
비틀즈
The Beatles

}}}
[2][3]
<color=#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다른 사진 보기
1967년, Magical Mystery Tour 촬영 도중
1969년, Abbey Road 앨범 커버

<colcolor=#000> 국적
[image] 영국
결성
1960년 8월 중순[4]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5]
데뷔
1962년 10월 5일 (Love Me Do / P.S. I Love You)
데뷔 앨범
해체
1970년 4월 9일[6]
멤버
존 레논 (보컬, 리듬 기타, 1957 - 1970)
폴 매카트니 (보컬, 베이스, 1958 - 1970)
조지 해리슨 (리드 기타, 보컬, 1958 - 1970)
링고 스타 (드럼, 보컬, 1962 - 1970)[7]
장르
, [8]
레이블
[9]
[image]
[image][10]
[image]
[11]
링크


1. 개요
2. 멤버
4.1. 싱글
4.1.1. 빌보드 1위
4.1.2. 빌보드 2위
4.1.3. 빌보드 3위~10위
4.1.4. 빌보드 11위~20위
4.1.5. 해체 후 멤버별 빌보드 성적(싱글)
4.2. 앨범
4.2.1. 빌보드 1위
4.2.2. 빌보드 2위
4.2.3. 빌보드 3위~10위
4.2.4. 빌보드 11위~20위
4.3. 문서가 분리된 비틀즈 노래들
7. 인기
8. 음악적 행보[12]
9. 기타
9.1. 비틀즈 관계자들
9.2. 대한민국에서의 비틀즈
9.3. 기타 관련 문서
9.4. 갤러리

[clearfix]

1. 개요


영국 리버풀 출신의 록 밴드. 1960년대의 독보적 아이콘이자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록 밴드이다. 영국 출신 뮤지션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을 선도적으로 이끌어내어, 당시 침체되어 있던 록 음악에 새로운 바람과 활력을 불어넣었고 더 나아가 대중음악의 주 장르를 스탠다드 팝에서 로큰롤으로 변화시키며 전 세계에 록 밴드 음악 열풍과 청년 문화의 폭발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더불어 대중음악에 상업성과 예술성이 공존을 모색할 수 있게 기존 음악계에 끊임없는 혁신을 가해 새로운 길을 닦아놓은 문화 예술적 선구자였으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13]로 평가받는다. 음악성, 상업적 성공, 영향력, 시대정신 등 어떤 부문에서도 빠지지 않고 최상위권에 위치하기에 많은 평론가들과 음악 팬들에게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하나로 평가되며,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되던 현대 음악과 스탠다드 팝의 시대를 끝내고 1960년대 이후의 개방적인 문화 사조로 변화시키며 대중음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비단 대중음악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계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극소수의 아티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14] 비틀즈는 존재 자체만으로 대중문화사의 거대한 분기점이기도 한 것이다. 1965년 Rubber Soul의 발매로 한 앨범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취급하는 시도도 하였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최근의 많은 레트로 대중음악 팬들은 비틀즈 시대 이후의 음악을 주도적으로 듣는다.[15]

2. 멤버


<colbgcolor=#ffffff>존 레논
John Lennon

생몰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9일 (향년 40세)
1957년 - 1970년
보컬, 리듬 기타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생몰 1942년 6월 18일 - (81세)
1958년 - 1970년
보컬, 베이스[16]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생몰 1943년 2월 25일 - 2001년 11월 29일 (향년 58세)
1958년 - 1970년
리드 기타, 서브 보컬
링고 스타
Ringo Starr

생몰 1940년 7월 7일 - (83세)
1962년 - 1970년
드럼, 보컬
구 멤버 : 피트 베스트,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17]
역사상 가장 유명한 4인조 밴드이다. 존 레논이 쿼리멘을 결성한 1957년에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멤버가 아니었으나, 1958년 폴 매카트니가 쿼리멘에 가입하고, 이후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존 레논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조지가 합류했다. 중간에 존 레논의 미대 친구였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 클럽 주인의 아들 피트 베스트가 급하게 합류하기도 했으나, 음악이 소질에 안맞았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중간에 밴드를 탈퇴하고 얼마 안가 급사했으며, 피트 베스트는 멤버들간에 불화를 겪다가 밴드에서 쫓겨났다. 이때 피트 베스트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드러머가 링고 스타이다.
많은 4인조 밴드가 그렇듯이 리더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멤버들이 나름대로의 존재감과 상업성, 작품성을 갖추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해체 이후로 판 앨범만 해도 역대 앨범 판매량 12위일 정도로 높은 상업성과 작품성을 지닌 음악가였으며,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역시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꾸준한 음악 활동으로 모두 자작곡을 빌보드 1위에 올렸다. 밴드 해체 이후에도 멤버들이 싱글 아티스트로서 빌보드 1위에 곡을 올린 것은 비틀즈가 유일하다.
현재 멤버중에서 2명은 사망했고, 2명은 아직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존 레논은 1980년 암살당했으며, 조지 해리슨은 담배로 인한 후두암이 뇌종양으로 전이되어 2001년 사망했다. 그러나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있으며, 2021년 현재까지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보이고 있다. 특히나 폴 매카트니는 밴드 해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앨범 발매시 빌보드 top 10에 곡을 반드시 올릴 수 있는 세계구급 싱어송라이터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링고 스타폴 매카트니는 요즘도 자주 만나며, 가끔 같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3. 역사


비틀즈의 초창기[18] 모습
비틀즈의 후반기[19] 모습[20]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 출연하기 위해 그 이틀 전인 1964년 2월 7일 미국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상륙한 비틀즈.
역사적인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1969년 8월 22일 비틀즈 멤버들이 모여 찍은 사진.
이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들 모두가 모여있는 마지막 모습이다.


1964년 2월 9일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서의 첫 미국 라이브 공연 중[21]
1969년 1월 30일 애플 레코드 사 옥상에서 진행한 마지막 라이브 공연 중[22]


4. 디스코그래피





4.1. 싱글


(괄호 안은 발매년도)
순서는 차트 달성일 순

4.1.1. 빌보드 1위


비틀즈의 빌보드 1위 싱글들을 합치면 총 20곡(더블 A 포함 시 22곡)이 나온다. 이는 역대 가수를 통틀어서 1위이다.[23] 또한 유일하게 활동기간동안 매년마다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비틀즈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1은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1위의 합집합을 한 앨범에 수록했다.
  • I Want To Hold Your Hand (1963)[24]
  • She Loves You (1963)[25]
  • Can't Buy Me Love (1964)
  • Love Me Do (1964)[26]
  • A Hard Day's Night (1964)
  • I Feel Fine (1964)
  • Eight Days a Week (1965)
  • Ticket To Ride (1965)
  • Help! (1965)
  • Yesterday#s-2 (1965)
  • We Can Work It Out[27] (1965)
  • Paperback Writer (1966)
  • Penny Lane (1967)
  • All You Need Is Love (1967)
  • Hello Goodbye (1967)
  • Hey Jude (1968)
  • Get Back (1969)
  • Come Together (1969)
  • Something (1969)[28]
  • Let It Be (1970)
  • The Long and Winding Road (1970)[29]

4.1.2. 빌보드 2위



4.1.3. 빌보드 3위~10위


  • Please Please Me (1964)
  • P.S. I Love You (1964)
  • She's A Woman (1964)
  • Day Tripper (1965)
  • Nowhere Man (1966)
  • Strawberry Fields Forever (1967)
  • Lady Madonna (1968)
  • The Ballad Of John And Yoko (1969)
  • Got To Get You Into My Life (1976)[30]
  • Free as a Bird (1995)

4.1.4. 빌보드 11위~20위


  • I Saw Her Standing There (1963)
  • Ain't She Sweet (1964)[31]
  • And I Love Her (1964)
  • Matchbox (1964)
  • Eleanor Rigby (1966)[32]
  • Revolution (1968)
  • The Beatles Movie Medley (1982)
  • Real Love (1996)

4.1.5. 해체 후 멤버별 빌보드 성적(싱글)


비틀즈는 해체 후에도 4명 모두 빌보드 Hot 100 1위를 한 번 이상 해봤다. 이렇게 활동 중에도 1위를 하고 해체 후에 멤버들 모두 1위를 한 밴드는 비틀즈가 유일하다.
Hot 100 1위만 소개한다.
  • 존 레논(2곡)
    •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1974)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33]
폴 매카트니는 70년대 빌보드 총 결산에서 솔로 아티스트 중 엘튼 존 다음인 2위로 쳐준다.(엘튼 존은 15주, 폴은 13주를 랭크시켰다.)[34]
  • Uncle Albert/Admiral Halsey (1971)
  • My Love (1973)
  • Band on the Run (1974)
  • Listen to What the Man Said (1975)
  • Silly Love Songs (1976)
  • With a Little Luck (1978)
  • Coming Up (1980)
  • Ebony and Ivory with Stevie Wonder (1982)[35]
  • Say Say Say with Michael Jackson (1983)[36]
  • 조지 해리슨(3곡)
    • My Sweet Lord / Isn't It a Pity (1970)[37]
    •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 (1973)
    • Got My Mind Set on You (1987)
해체 이전에 스무 곡을 1위에 올렸고, 해체 후에는 16곡을 1위에 올렸다.

4.2. 앨범


"비틀즈는 해마다 신곡이다."[38]

신해철

(괄호 안은 발매년도)
순서는 빌보드 앨범 차트 달성일 순

4.2.1. 빌보드 1위



4.2.2. 빌보드 2위



4.2.3. 빌보드 3위~10위



4.2.4. 빌보드 11위~20위


사실 비틀즈의 모든 정규 앨범들과 대부분의 라이브 앨범들이 10위 안에 들어서 11위 밖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냥 앨범도 아니고 박스 셋이 2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

4.3. 문서가 분리된 비틀즈 노래들




5. 평가와 영향력




6. 비틀매니아




7. 인기


록 음악, 아니 인류의 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인기가 높은 밴드이다. 비틀즈는 세대와 시대, 지역[40]을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인기를 누려왔다. 심지어는 폐쇄적이었던 구 공산권에서도 비틀즈의 인기를 막을 수 없어, "소련이 무너진 이유는 비틀즈 때문이다"라고 할 정도로 비틀즈의 인기는 높았다.[41]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의 열풍은 말할 것도 없고[42],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는 가장 인기 있던 록 밴드로 자주 꼽히곤 했다. Come Together, Yesterday 등은 아직도 최고의 명곡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당시 비틀즈의 노래만 2곡[43]이 연주되었는데, 상당수의 현대 음악가들이 폐회식에서 공연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비틀즈가 가진 인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빌보드 순위권 역시 비틀즈가 가진 인기를 알려주는 지표다. 비틀즈가 발매한 모든 앨범은 빌보드 1위에 올랐고, 해체 이후 발표한 컴필레이션 앨범도 20위권에 전부 다 올랐고 일부는 1위에까지 올랐다. 심지어 2009년 발매한 모노 CD 세트까지, 비틀즈가 발매한 모든 컴필레이션, 정규, 라이브 앨범들은 빌보드 20위권에 올랐는데, 이는 롤링 스톤스나 레드 제플린을 비롯해 가장 인기있던 음악가들조차 이루지 못한 엄청난 기록이다.
음반 판매량으로 따지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도 음반을 많이 판 역대 1위이며 음반 판매 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는 현재로서 이 기록이 쉽사리 깨질 것 같지는 않다.
세대를 가리지 않는 높은 인기 역시 주목할만 하다. , 레드 제플린과 함께 서구권 20대들에게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고전 록 밴드이며, 굳이 고전 록밴드로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요즘 20대~30대들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 순위를 꼽더라도 10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록 음악이 비주류인 한국에서도 비틀즈만큼은 정말 유명한 록밴드이다. 물론 폴 매카트니의 팝송이 훨씬 유명하긴 하지만, 록 음악을 주류로 삼은 밴드 치고 한국에서 굉장히 히트한 밴드는 , 핑크 플로이드 정도였는데, 그중에서 한국에서의 인기는 비틀즈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순위에서도 YesterdayLet It Be가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후대 음악가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블랙 사바스 같은 헤비 메탈 밴드부터, 에드 시런 같은 팝 아티스트까지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비틀즈를 꼽았으니 그 인기는 정말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드 록부터 소프트 록까지, 아트 팝에서 사이키델릭 록까지, 그리고 발라드부터 헤비 메탈까지 장르와 세대를 가르지 않고 거의 모든 음악가들로부터 비틀즈는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다.

8. 음악적 행보[4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큰 역할을 해냈고 조지 해리슨은 비록 초반에는 둘에게 밀리지만 중반 이후 곡의 질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후의 앨범 Abbey Road에서 조지 해리슨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을 본 링고 스타는 '이제 비틀즈는 2명의 천재가 아닌 3명의 천재가 이끄는 밴드가 되었다'라며 탄식하기도.
[image]

마틴은 말했다.[45]

"레논은 비틀즈의 영혼이었고, 해리슨은 정신이었다." "또한 매카트니는 마음이었으며, 링고는 드러머였다.[46]" (원문 기사)

다만 링고 스타는 좀 안습. Abbey Road, + a 내에서 작곡한 곡은 달랑 2곡에 불과하며 The Beatles 작업 당시 폴 매카트니보다 드럼 기술에서 밀린다는 평가도 받는 등[47] 쟁쟁한 멤버들 중 가장 이름값이 밀린다. 하지만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 때문에 Yellow Submarine 등 여러 곡의 보컬로 활약을 했다.
그래도 성격이 좋아 사람들과 잘 지냈다고 한다. 조지 마틴링고의 대인배적 성격이 아니었으면 비틀즈는 1집 Please Please Me만 내고 해체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비틀즈 해체 후 서로 사이가 소원했던 멤버들이 화해할 수 있던 것도 링고의 공이 컸다. 게다가 링고 스타도 1971년에는 조지 해리슨과 공동으로 작곡한 곡 "It Don't Come Easy"로 빌보드 차트 2위를 했으며, 조지 해리슨과 공동 작곡한 곡 Photograph는 1973년 1위를 했다.
[image]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우며 미국을 점령한 비틀즈는 1965년부터 음악적인 변화를 겪는다. "노랫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 존 레논도 밥 딜런의 영향으로 노랫말에 속마음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초기의 비틀즈가 쓴 곡은 대부분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노래였으며 가사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초창기에도 지금까지도 빛을 잃지 않는 명곡들도 많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예술적 업적은 러버 소울(Rubber Soul)부터 본격적으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버 소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싱글'보다 '앨범'에 신경을 써서 만든 앨범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러버 소울은 비틀즈 앨범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 한 곡도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으며, 이는 페퍼상사,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 화이트 앨범에서도 계속 지켜진다.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는 역시 해당 문서 참조.
물론 이는 영국에서의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Nowhere Man/What Goes On이 싱글로 발매되어 3위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이 두 곡이 발매된 것은 레이블인 Capitol 때문이다. 비틀즈는 영국에서는 EMI, 미국에서는 EMI의 자회사인 Capitol을 레이블로 삼았는데, Capitol은 비틀즈가 시키지도 않은 곡을 멋대로 싱글로 발매하거나(한두번이 아니다.), 영국에서 발매된 앨범을 따로 떼어내서 얼토당토 않은 유령 앨범을 끼워 파는 등(그러니까 러버 소울리볼버가 있으면 러버 소울에서 몇 곡, 리볼버에서 몇 곡, 거기다 영국에서는 싱글로만 발매된 곡을 포함시키고 하는 식으로 러버 소울과 리볼버 사이에 Yesterday & Today라는 앨범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 만행을 저질렀다. 폭발한 비틀즈와 조지 마틴이 '계속 이따위로 나오면 담부턴 다른 레이블과 계약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페퍼상사' 앨범부터는 영국반과 동일하게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즈의 앨범은 전부 영국반이다. 단,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는 예외로 미국반이다.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곡을 멋대로 싱글 발매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고쳐지지 않아서, 비틀즈가 해체하자마자 1970년 5월에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싱글로 발매해버린다. 비틀즈의 빌보드 차트에서의 마지막 1위 싱글.
'Help!'의 녹음과 영화의 촬영으로 떠난 바하마 여행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인도 악기 시타르를 접한다. 이후 조지 해리슨이 특히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나중엔 힌두교로 개종까지 하면서 담배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image]
이 때까지 비틀즈는 물론 음악적으로는 로큰롤 열풍의 최선두이자 중심에 선 로큰롤 밴드였지만, 또 한 편으론 여성들이 울부짖는 인기 스타의 이미지도 공존했었다. 즉 요즘 말로 하면 아이돌 스타적인 면모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영상 자료들을 보면 알겠지만 60년대는 비틀즈 뿐 아니라 다른 록 밴드들의 공연에서도 수많은 여성팬들이 울부짖고 난리인게 흔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마초적인 이미지였던 롤링 스톤즈도 수많은 여성팬들이 따라 다녔을 정도다. 7~80년대 이후로 록계가 마초화돼서 록음악은 남자들의 음악이고 아이돌 음악은 완전히 구분되어 따로 있는 이미지가 생긴 현대 시대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즉 당시 60년대는(특히 60년대 중반경까지는) 그 어떤 인기 록 뮤지션들도 아이돌스타적인 면을 어느 정도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데뷔 당시 나이가 평균 20살에 이들이 인기를 얻자 갖가지 화보집, 영화 등도 촬영되었다. 그러나 러버 소울부터 이들은 이런 이미지를 거의 모두 떨쳐버린다. 이 이후부터는 히피문화를 사실상 거의 주도하다시피 하였고, 60년대 반전운동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미지 변화를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정도.
1966년도의 마지막 투어 이후부터 비틀즈의 음악은 라이브보단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적인 음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또한 밥 딜런의 영향으로 가사도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고 사회비판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러버 소울(Rubber Soul)이다. 이 앨범에서 조지 해리슨에 의해 인도 음악이 도입되어 퓨전되었으며, 이 러버 소울와 리볼버 시기의 곡들은 사이키델릭 음악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Revolver부터는 라이브로 연주가 불가능한 음악을 하기도 했다. 사실 여기에 큰 기술적 공헌을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음향 엔지니어였던 제프 에머릭이다. 리볼버 녹음 당시 19살에 바로 입사한 그는 EMI 스튜디오의 엄격했던 규칙을 전혀 몰랐었고, 그 때문에 비틀즈의 요구를 전적으로 들어주며 일하게 된다. 제프 에머릭은 그 이 후에 나온 비틀즈의 모든 음반에 함께 일했다.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제작한 컨셉 앨범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정점에 다다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8~9년엔 멤버들간의 불화가 잦아졌다. 그들이 세운 음반 회사 '애플'의 재정 악화 등으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기업이 이익을 환원하듯, 못 사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게 돈을 허공에 뿌리는 수준이라서 오래 가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비틀즈 앨범 중 가장 마지막에 녹음된 Abbey Road의 끝부분에서는 아예 해체를 암시하는 가사를 적기까지 한다. 1970년 4월 멤버들마다 따로 활동하던 비틀즈는 결국 마지막까지 비틀즈를 이어나가려 했던 폴 매카트니의 탈퇴와 함께 해체한다. 당시에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링고 스타는 부모님에게 선물하기 위한 "Sentimental Journey"를 이미 발표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족'이란 주제로 자신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를 비틀즈 탈퇴 선언 후 일주일만에 발표한다.[48] 존 레논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심리 치료를 받은 후 "Plastic Ono Band"를 제작했고, 조지 해리슨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LP 3장짜리 앨범 "All Things Must Pass"를 제작하고 있었다.
비틀즈가 오늘날까지도 현대 대중음악의 대부로 평가받는 것은 가창력이나 연주 실력같은 기교적인 면 때문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창조력과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음악적인 영감과 자극을 줬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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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가 사용했던 악기 변화를 보면 정말 한 밴드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한 시도를 했다. 초기에는 기타, 베이스, 드럼과 가끔 피아노나 하모니카가 쓰이는 정도였지만 중기로 가면 바이올린, 탐부라, 시타르, 리코더, 오르간, 후기로 가면 트럼펫, 개 짖는 소리[49]까지 직접 연주했다. 더구나 원래는 폴이 베이스, 존이 리듬 기타. 조지가 리드 기타, 링고가 드럼이라는 기준이 꽤나 명확했지만 나중에 가면 조지가 베이스를 하기도 하고 존과 폴이 드럼을 치기도 하는 등 구분이 모호해졌다.
인터넷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다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각자의 시대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스탠다드 팝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이 잘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우열을 나누는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 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를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8.1. 레논-매카트니




9. 기타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공식적으로 Beatles[bi:tlz]를 비틀스라고 표기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50] 존 레논도 "존 레넌"이라고 적는다. 그러나 팬들 사이에서는 비틀"즈"와 존 레"논"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특유의 바가지 머리가 비틀즈 초창기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데, 바가지 머리를 영어로 하면 Mop(대걸레) Top였기에 헤어스타일로 인해 종종 개그소재가 되곤 했다.

존 : (대걸래를 흔들며) 폴, 너 어떻게 된거야? 뼈만 남아버렸잖아!

폴 : 그건 대걸레야. 나 여기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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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영국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영국이 고세율 정책을 취해 수익의 96~97%를 세금으로 냈다고. 이 점을 리볼버 1번 곡인 'Taxman'에서 깠다. 이 덕분에 영국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는데,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이나 여간 고깝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받은 이유가 외화를 많이 벌어서였다. 즉 문화 활동(음악) 때문에 준 게 아니란 얘기. 게다가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망나니같은 대중 음악 가수에게 훈장이 웬 말이냐"라며 반발했다고. 여담이지만 존 레논은 반전 운동 등 사회 활동을 하던 중 이 때 받았던 훈장을 반납했다.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준 거라서 싫다고.
물론 비틀즈 해체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 3~4%인 수익이 지금 가치로 수천억에 달한다.
의학계에도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CT를 만든 사람(Godgrey Hounsfield, 후에 노벨상을 탄다.)이 비틀즈의 레코딩 회사인 EMI 소속이었다. EMI는 Electric and Music Industries의 약자로, 전자제품 및 음악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EMI가 돈이 넘쳐나서 CT 만드는데에 투자를 했다고 카더라. CT는 1960년 경에 연구를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 시제품이 나왔으니 비틀즈가 활동한 시기와 일치한다.
시그내처라기보단 대부분 릭켄베커 혹은 에피폰 기타베이스를 애용하였는데 투어 시기에는 존 레논은 릭켄베커의 325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호프너의 바이올린 베이스를 조지 해리슨은 그래치의 듀오 모델을 링고 스타는 블루 옥토퍼스 색상의 루딕 드럼세트를 메인으로 사용했다.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1964년 미국 방문 시 릭켄베커사로 부터 선물받은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가 공연 때 바이올린 베이스를 애용한 것은 여타 베이스들 보다 무게가 가벼워서 휴대가 간편하고 왼손잡이인 자신에게 있어서 좌우대칭인 바디모양이 연주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버 소울 레코딩 시점 부터 존 레논은 에피폰의 카지노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릭켄베커의 베이스 4001S를 메인으로 사용하였다. 메탈리카의 클리프 버튼이 애용한 것도 같은 모델. 그러나 렛잇비/애비로드 시점의 후반기에는 폴은 호프너 바이올린 베이스로 돌아가고, 현재도 호프너 베이스를 가지고 투어한다.
워낙 유명한 존재이다 보니 비틀즈와 관련된 음모론 및 황당한 루머들도 많다. 대표적인게 "존 레논 살해 배후설"과 "폴 매카트니 사망설"이다. 전자의 경우 극우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때 좌파성향이었던 존 레논 살해를 조종했다는 건데, 명확한 증거가 있는 얘기가 아니라 단지 몇몇 호사가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 비틀즈 곡들 사이사이에 흩어진 실마리를 모아 짜맞추면 "폴 매카트니는 1966년 말에 이미 죽었고, 지금 그의 자리는 폴 매카트니 닮은 꼴 찾기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거두었던 윌리엄 캠벨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란 말인데, 당연히 뻥이다...음모론자들은 몇몇 증거도 들이밀지만 어거지성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외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연관이 있다는 둥 요상한 밑밥이 많다.
비틀즈 멤버들 주연으로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될 뻔했었다. 반지의 제왕을 인상깊게 읽은 존 레논의 제안으로 1969년에 계획된 프로젝트였다. 존은 골룸, 폴은 프로도, 조지는 간달프, 링고는 역할로 나올 예정이었고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으로 정해졌으나, 원작자인 J. R. R. 톨킨이 자기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계획단계에서 무산됐다. 또한 큐브릭 감독도 반지의 제왕을 읽은 뒤 영화화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51] 비틀즈와 만남을 가져 그들에게 영화화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여 멤버들 역시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해당 프로젝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회원가입 필요)
존 레논을 제외한 나머지 비틀즈 멤버들은 심슨 가족에서 각자 본인 역할로 목소리 출연을 한 적이 있다.# 존 레논은 심슨 가족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기에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생존해있었다면 심슨에서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지도.
존과 폴이 비틀즈 시절때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르다가 녹음하기도 전에 까먹어서 노래로 만들지 못한 멜로디만 수십개가 된다고 한다.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 중 하나가 내한 공연을 한적도 있다.
영화 아이 엠 샘과 'Across the Universe'는 비틀즈 곡으로 OST 전곡을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Across the Universe'는 작중 등장하는 인물 이름까지 전부 비틀즈 음악 관련으로 해놓아서 비틀즈 들을 설레게 했다.
많은 노래가 저작권 문제랑 직접 맞물리기 때문에[52] 2010년 말까지 전세계적으로 합법적인 온라인 다운로드가 매우 어려웠다. 곡들의 저작권은 비틀즈 멤버 4명뿐만 아니라 곳곳의 기업, 개인이 나누어 갖고 있다. 마이클 잭슨도 비틀즈 곡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오노 요코폴 매카트니는 이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법정투쟁까지 벌였으나 결국 판결은 마이클 잭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2016년 2월 22일 유니버설 뮤직에 따르면 29일 부터 한국 음원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거나 다운로드 할수 있다고 한다.
칼 세이건보이저에 관련해서 밝힌 일화에서 보이저 호에 실으려고[53] 비틀즈 곡 'Here Comes the Sun'의 저작권을 사러 멤버 4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 모두에게 저작권이 없었다고. 물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려니 골치가 아파져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 저작권료는 현재 엄청나게 비싸진 상태로, 대한민국 최초로 광고 음악에 비틀즈 음악 'I Will'을 사서 쓴 결과 4개월에 4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특별히 싸게 준 거라고 한다.[54]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사정상 링고 스타가 아닌 앤디 화이트라는 사람의 드럼이 들어갔는데, 이 사람이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다가 2천년대에 들어서 한꺼번에 몰아서 받았는데, 그 사람이 평생동안 번 돈보다 노래 하나 참여해서 나온 저작권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무지막지한 저작권료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두 영화에서도 모두 커버 곡을 사용했다. 커버 곡이 훨씬 싸서 원곡을 넣으면 제작비가 몇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인 'The Mentles'의 커버 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뮤지션들에게 워낙 영향력이 큰 밴드이다 보니 어느 시대의 뮤지션들간에 비틀즈 팬들이 엄청나게 많다. 오아시스같은 경우는 단지 팬 수준을 넘어서 빠돌이 느낌이 날 정도... 아이러니한 것은 조지 해리슨이 오아시스를 30년 지나면 잊힐 밴드라고 혹평하자 리암 갤러거도 지지 않고 조지 해리슨을 깠다.
1974~1982년까지 일본에서도 비틀즈 아류 밴드 '즈틀비(ずうとるび)'가 활동했는데, 쇼텐 방석 나르미 야마다 타카오가 데뷔해 1977년까지 활동했다. 애니 <마루코는 아홉살>에도 언급되었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L 288-1에게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루시#s-5'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55] 1993년에는 새롭게 발견된 삼엽충 종들에게 비틀즈의 멤버들의 이름을 딴 학명이 지어졌다.
현재 비틀즈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소행성대의 궤도를 돌고 있다. 2008년 2월 4일에는 NASA가 "Across the Universe"를 전파 형태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리기도 했다.
2009년 3월, 리버풀 호프 대학 석사과정에 '비틀즈 학과'가 개설됐다. 또한 리버풀 알버트 독에는 The Beatles Story라는 비틀즈 박물관이 있다.
몬티 파이선에서 The Rutles라는 이름으로 비틀즈를 패러디한 개그 소재를 사용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실제로 러틀즈라는 밴드를 만들게 되었고 앨범도 여러장 발매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이 좋아해서 러틀즈의 Roof Top Concert 촬영에 BBC 기자 역할로 까메오 출연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동인게임인 디아볼로의 대모험에 등장하는 스탠드 중 착용시 비틀즈의 음악이 나오는 스탠드는 화이트 앨범, 데스 13, 옐로 템퍼런스, 허밋 퍼플의 4개이다. 참고로 이 스탠드들은 메이드 인 헤븐을 합성하는 데 필요하다. 자세한 건 메이드 인 헤븐 참조.
명탐정 코난 극장판 '칠흑의 추적자'에서도 후반부에 중요한 밑밥의 단서가 되었다. 앨범 커버까지도 저작권료가 비쌌는지 비틀즈 앨범 커버의 등장인물들을 몽땅 소년 탐정단 멤버로 바꿔치기했다. 이 사진은 아가사 히로시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신문 기사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이름은 모두 독일식으로 바뀌어있다. 밴드 이름도 '디 케퍼'(Die Käfer, 독일어로 딱정벌레라는 뜻)로 바뀌어있다. 나치가 공연을 허가해주려고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개명했다고. 작중에서 Mond Mond ja ja와 Change over day가 디 케퍼의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그중 Mond Mond ja ja는 A Hard Day's Night와 비슷한 느낌이 나게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56] 다만 수집 요소에 따르면 앨범에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저항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들어가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대체 역사 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흑인 풍의 해로운 울부짖음"(...)이라며 주류 언론들의 비난을 받는다.
방일 공연을 했을 때 당시 국민애니였던 오소마츠 군의 캐릭터 이야미의 셰에에~ 포즈를 했다고 한다.

비틀즈를 소재로 한 더 비틀즈: 락 밴드(The Beatles: Rock Band)라는 게임이 2008년에 발매되었다. 하모닉스가 제작하고 MTV가 배급을 맡았다. 비틀즈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리듬 게임이다. 적절한 비틀즈 곡 선곡[57]과 전기 영화 같은 현실적인 풍경에서 몽환적인 스타일로 넘어가는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비틀즈가 추구한 음악세계의 변화를 따라가는 듯 하다.
BBC 드라마 닥터 후의 11대 닥터는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비틀즈에 들어가야 되니까 죽을 수 없다나?
2013년 5월 23일, 링고 스타Ringo 2012 앨범 문서화를 끝으로 비틀즈 모든 멤버들의 솔로 정규 앨범이 문서화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멤버의 음반 목록 문서가 분리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중에 비틀즈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름은 비트 벅스.
존 레논집에 비틀즈 멤버끼리 할일이 없자 다같이 집단자위(!)를 했다고한다. 자위하면서 영감을 주는 사람을 서로 외치는데 존 레논이 윈스턴 처칠이라고 외쳤다고한다.#
침착해! 스쿠비 두에서는 비틀즈의 폰트로 이루어진 팀 비들스의 보석상이라는 가게가 시즌 1 9화에서 등장했으며, 25화에서는 섀기스쿠비가 역관광을 시전하는데, 해체 과정이 섀기가 존 레논 포지션, 스쿠비가 음반 회사 사장, 오노 요코 포지션을 맡아 제대로 역괸광을 시전한다.

4인조 팝밴드 비틀즈의 모습.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얼마나 품위있게 생겼는가?
하지만 그들이 비틀즈를 결성했을때는 반바지 수영복을 입고 변기를 목에 건 채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들은 친절한 천사인 런던의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났다.
그는 이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돈이 될 것임을 알았다.
정신병에 걸린듯한 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히스테리, 비명... 사람들은 완전히 사로잡혀있고, 반달리즘폭동은 공연의 말미를 흔히 장식한다.
긴 머리를 한 4명의 사진으로 벽의 4면을 도배하기도 한다.
그래, 춤춰라, 계속 춤춰라! 사회 문제는 다 잊어버리고! 팬들은 세상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관심조차 없다.
더 빠르고 더 시끄럽게!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마라!

1966년 소련의 선전 영화 中
소련에서도 아주 인기있었던 밴드인지라 소련 정부에서 비틀즈를 비난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 정도였다. 내용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음악으로 돈 버는 장사꾼(...) 취급하고 비틀즈 팬들을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 없는 정치적 무관심의 극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58]. 그러거나 말거나 소련 팬들이 너무나도 열광적으로 비틀즈를 사랑한 덕분에 자유주의, 히피 물결이 소련에 많이 유입되었다는게 아이러니.

9.1. 비틀즈 관계자들


※ 위에서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은 서트클리프와 베스트, 매니저 엡스타인, 그리고 기타 인물들에 대해선 요약해서 여기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 비틀즈의 전 베이시스트.
  • 아스트리드 키르헤 - 스튜어트의 애인이자, 비틀즈의 초기 모습을 찍었던 사진가.
  • 피트 베스트 - 비틀즈의 전 드러머.
  • 브라이언 엡스타인 - 1967년까지 비틀즈의 매니저.
  • 오노 요코 - 존 레논의 부인. 일본계 전위예술가. 비틀즈 말기 녹음까지 관연하고 존 레논과 함께 음반까지 발표. 존 레논이 밴드 활동보다는 좌파운동 등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고, 여기에 인종차별적인 편견이 덧붙여져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 일컬어기도 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패티 보이드 - 모델. 조지 해리슨의 전 부인. 에릭 클랩튼까지 포함된 3각관계가 유명.
  • 린다 매카트니 - 폴 매카트니의 아내로 비틀즈 해체 이후 매카트니와 함께 윙스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 조지 마틴 - 프로듀서. Let It Be를 제외한 모든 비틀즈 음반을 프로듀스했다.
  • 필 스펙터 - 프로듀서. 'Let It Be' 음반에서 오케스트라 위주의 사운드를 만들었지만 폴 매카트니와 마찰이 심했다. 2000년대 들어서 폴 매카트니는 필 스펙터가 덧입힌 사운드를 모두 제거한 'Let It Be...Naked'라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 빌리 프레스턴 - Get Back 세션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했던 흑인 키보디스트. 원래 비틀즈 곡들의 키보드 연주 녹음은 주로 폴 매카트니가 맡았었지만, Get Back 세션에선 라이브 연주를 원했기 때문에 베이스기타를 연주해야 하는 폴 매카트니 대신 키보드를 연주할 세션맨이 필요해서 선택된 뮤지션이었다. 프레스턴의 키보드 연주에 만족한 비틀즈는 그를 세션맨 이상가는 대접을 해주어 싱글 Get back에서는 비틀즈와 함께 공동 뮤지션으로도 이름을 올려주었다. 이 뮤지션의 솔로 대표곡으로는 'Outa-Space', ‘Nothing from nothing’ 등이 있다. 훗날 링고 스타의 백밴드인 올스타밴드의 일원으로 링고 스타의 순회 공연에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 알란 파슨스 - 페퍼 상사 앨범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앨범에 표기는 안돼있지만 'White Album'과 'Abbey Road' 음반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중요한 명반들의 작업에서 얻는 노하우와 실력을 바탕으로 핑크 플로이드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었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는 독자적인 프로젝트 음악 활동도 하였다.
  • 에릭 클랩튼 - 조지 해리슨과 친구였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기타를 치기도 하였으며 Here Comes The Sun의 작곡의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티 보이드라는 여자를 두고 개막장 사랑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 롤링 스톤즈 -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락음악계의 쌍두마차. 언론에 의해 라이벌 관계가 부각됐었고 실제로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걸로 알려졌으나, 사적으론 꽤 친한 사이였다. 롤링스톤즈의 첫 히트곡I Wanna Be Your Man은 레논-매카트니가 써 준 곡이고, 그 후로도 서로의 레코딩에 게스트로 우정 참여하기도 했었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다. 원래는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 기존의 포크에 락을 접목시킨 포크락으로 음악 인생을 전환하게 된다. 비틀즈도 밥 딜런에 자극을 받아 자의식이 강하고 보다 깊이 있는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마리화나도 밥 딜런이 선물로 준걸 계기로 접하게 된다.
  • 브라이언 윌슨 - 비치 보이스 역시 비틀즈와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이 그러한 관계였다. 초창기엔 서프음악 전문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을 듣고 그 완성도와 예술성에 감명과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단순한 서프음악을 넘어선 그러한 명작을 만들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만든게 바로 명반 Pet Sounds 앨범이다. 이 앨범은 다시 비틀즈에 영향을 줘서,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앨범인 Sgt. Pepper앨범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불운의 명작 SMiLE에 관한 사연도 비틀즈와 얽힌 것이 많다.
  • 마하리시 - 비틀즈가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인물. 비틀즈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어 했지만, 마하리시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The Beatles 앨범의 Sexy Sadie는 마하라시를 까는 곡이다. 여담으로 마하라시는 UV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요기 다니엘의 스승이기도 했다.
  • 클라우스 부어만 - 함부르크 시절 만난 동료 뮤지션. Revolver 앨범 표지 드로잉이 이 사람의 그림이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의 솔로 작업에도 참여했다.
  • 빌 해리 - 존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로 'Mersey Beat'란 음악 잡지를 만들었다. 비틀즈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만든 잡지였고, 이걸 읽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연결되어 비틀즈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비틀즈의 탄생과 해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본 증언자로서 비틀즈 관련 다큐멘터리나 영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살아있는 비틀즈 사전이다. 학교서 남들과 전혀 다른 차림새와 행동거지로 다니던 존 레논이 마음에 들어 친해졌다고 한다.

9.2. 대한민국에서의 비틀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등의 주제로 설문 조사를 하면 최상위 순위에 'Yesterday', 'Let It Be'가 위치한다.[59]
보통 사람들이 아는 비틀즈의 곡은 위의 두 곡 + 'Hey Jude', 'Ob-La-Di, Ob-La-Da', 'I Will', 'All You Need Is Love'[60] 정도라서 예전에 KBS '신발장'에 비틀즈 신동(하영웅군)이 나왔을 때 비틀즈 곡이 200곡이 된다고 하자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패널도 있었다. 냉정히 말해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인식하는 비틀즈는 '옛날에 유명했던, 달달한 선율의 러브송을 부르는 서양 팝송 밴드' 딱 여기까지다. 비틀즈가 록 음악을 한다는 사실에도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61]
한국 케이블 방송사에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제목으로 이들을 재현한다는 주제의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Hey Jude'를 부르면서 'Hey Jude ~ 나나나나 ~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등의 가사만 읊는다든지, 멤버 이름으로 매카트니를 댄다든지, 초기 프로필만을 참고해 '폴 매카트니는 구운 돼지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는 내용을 방송했다든지(폴 매카트니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다.), 전혀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듯한 내용만을 내보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한마디로, 비틀즈라는 이름과 대표적인 히트곡 몇 곡 정도는 유명하지만 정작 비틀즈 음악의 핵심인 정규앨범들을 알고 찾아 들을 정도의 진짜 팬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근데 이건 비틀즈 뿐 아니라 다른 60년대 뮤지션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서양 록/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와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게 70년대부터였기 때문에 그 전인 60년대의 밴드들은 한국의 음악팬들에게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애초에부터 한국이 록의 불모지라고 불릴정도로 록의 인기가 없는 나라다. 한국 내에서 록 밴드/록 뮤지션은 영화로 유명해진 , 50년대 대중 문화의 상징인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만이 인지도 있는 편이고, U2, 레드 제플린, 엘튼 존, 척 베리,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AC/DC, 너바나, 지미 헨드릭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등 전설적인 록 아티스트들의 인지도는 밑바닥을 치는게 한국 음악계의 현실이다. 그나마도 비틀즈는 록밴드가 아니라 팝 밴드로 사실상 인지도가 더 높고, Helter Skelter 같은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비틀즈가 락 밴드라는 사실도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렇기 때문에 비틀즈의 곡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록 음악이 유명세를 얻지 못한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왜인지 남자 연예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도 남자 연예인은 거시적 관점에서는 맞으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음악으로 분류된 건 잘못. 비틀즈는 영국 밴드이다. 비틀즈 갤러리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불평이다.
비틀즈 멤버 중에서 공식적인 내한공연을 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으나, 2014년 5월 28일 폴 매카트니의 내한이 결정되면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비틀즈 멤버가 내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문제로 2014년 내한공연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2015년, 다시 내한 소식이 들려왔고 내한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세한건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 참조. 이듬해인 2016년 11월 5일 링고 스타도 내한공연을 가짐으로써 한국은 비틀즈 멤버의 공연 불모지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원래는 JTBC 뉴스룸에도 출연해 인터뷰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촛불집회 열기가 한창일 때라 인터뷰는 무산되었다.
비틀즈 곡의 무지막지한 저작권으로[62] 인해 한국에서는 아이튠즈를 빼고는 음원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불가능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부터 iTunes, Spotify를 비롯한 여러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어떤 서비스도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먼나라 이야기인줄만 알았다...였는데 하지만 2016년 2월 29일부터 한국의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17개의 앨범을 서비스 시작한다고 한다. 포함되는 음반은 정규 음반 13개를 포함하고 1, 1962-1966, 1967-1970, Past Masters 이렇게 17개의 음반이라 한다. 비틀즈 커뮤니티는 당연히 흥분모드에 들어갔고, 많은 젊은 층에게 비틀즈를 홍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단, 음원 서비스가 풀리면서 유튜브에 있던 비틀즈 노래들과 라이브 영상들 대부분이 유니버설 뮤직의 요청으로 삭제되는 큰 단점도 생겼다.
그런데 2018년 6월 17일, 유튜브 공식 채널에 모든 앨범이 무료 스트리밍으로 업로드되었다. 이로 인해 비틀즈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2018년 4월부터 2020년 5월 11일까지 MBC 라디오를 통해 조PD의 비틀즈 라디오가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비틀즈 전문 방송으로 비틀즈 노래는 물론 비틀즈 멤버들이 개인 활동으로 발표한 곡이나, 다양한 버전의 비틀즈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들 혹은 비틀즈에 영향을 받은 곡 등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9.3. 기타 관련 문서



9.4.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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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곡을 한 존 레논폴 매카트니만 수상[2] Beatles for Sale이 발매될 즈음인 1964년 말에 촬영된 사진이다.[3]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순으로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존 레논, 조지 해리슨[4] 쿼리멘 결성 이후인 1960년 7월 초에 이름을 실버 비틀즈(Silver Beatles)로 변경했고 8월 중순에 비틀즈(The Beatles)로 줄였다. 쿼리멘의 결성 년도인 1957년을 비틀즈 결성 년도로 보기도 한다. 애초에 이름을 바꾼 것 외에는 밴드 구성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 다만 1960년함부르크 공연을 거치며 아마추어 밴드가 아닌 어엿한 프로 밴드로 자리매김한 상징적인 년도로서의 의미가 있다. [5]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6] 언론 공식 발표 기준, 데뷔로부터 2743일[7] 구 멤버로는 피트 베스트,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있다.[8] 팝과 록 외에도 수많은 장르를 시도했다. 이들이 시도한 장르만 따지면 팝 록, 사이키델릭 록, 사이키델릭 팝, 아트 팝, 아트 록, 펑크 록, 메탈, 하드 록, 클래식, 바로크 팝, 인도 음악, 컨트리 뮤직, 프로그레시브 록, 블루스 록, 로큰롤, 발라드, 챔버 팝, 아방가르드까지 다양하다. 사실상 현대 음악 장르 대부분을 거의 처음으로 시도한 밴드라고 봐도 좋다.[9] 자체 설립[10] 팔로폰 레코드. 영국 음반. 그러나 2012년 이후 EMI 매각 과정에서 비틀즈 및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Apple 레코드 레이블 솔로 음반에 대한 권리를 제외한 팔로폰 레코드 전체가 워너 뮤직 그룹으로 편입되면서 재발매가 아닌 비틀즈 앨범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팔로폰 레이블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비틀즈 녹음물에 대한 발매 권리는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그 자회사 Calderstone Productions가 갖고 있다. Apple 레이블을 달고 나왔던 폴 매카트니의 솔로 음반들은 예외적으로 폴 매카트니가 설립한 MPL Communications가 갖고 있다.[11] 캐피톨 레코드. 미국 음반[12] 본문의 다른 부분에도 이미 나오는 내용들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서 전체적인 내용 정리 필요. 역사 문단에서 이미 다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반복할 뿐인 이 문단이 굳이 필요한지도 의문.[13] 빌보드 차트 No.1 싱글 21개로 역대 1위(2위는 머라이어 캐리의 19개), 음반판매량 최소 2억 5,000만 장 이상, 추정치 6억 장으로 2위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약 1억 장 차이로 상회한다. 물론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상업성을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척도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14] 실제로 1960년대 이전까지는 검열 등의 보수적인 풍조가 만연해있었다. 비틀즈 이후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같은 개방적인 사회 풍조가 유행하고 결정적으로 마돈나의 등장으로 문화적 자유주의가 대두되어서 지금의 자유로운 이미지가 생긴 것.[15] 물론 1950년대의 로큰롤 시대의 음악을 듣는 경우도 당연히 있지만, 1958년 빌보드 차트 개편 이후로 대중문화를 전반적으로 크게 바꾼 것은 비틀즈이기 때문에 상당수 비틀즈의 음악을 듣거나 그 이후 새로운 아이콘이 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듣는다. 이는 50년대 로큰롤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비틀즈(엄밀히 말하자면 폴 매카트니링고 스타)가 현존하는 아티스트들 중 최고참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 1950년대의 경우 1930~40년대 고전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클래식 시대의 특징과 50년대 특유의 반항아적 특징이 결합된, 대중문화적인 과도기로 평받는다.[16]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탈퇴하기 전까지는 리듬 기타를 맡았다.[17] 사진은 The Beatles 앨범 당시 촬영된 것이다.[18] 1962년부터 1966년까지를 말한다. 다만 1962년~1964년 까지만 초창기로 보고 1965년부터 1967년 까지는 중기로 보는 시각도 많다.#[19] 1967년부터 1970년 까지. 다만 상술했듯 1967년을 중기에 포함시키고 1968년부터 1970년 까지를 후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20] 초창기, 후반기로 나누기는 하나 사실 4-5년 정도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21] 영상의 곡은 싱글로 나온 I Want To Hold Your Hand이다.[22] 영상의 곡은 싱글로 나온 Don't Let Me Down이다. 정식으로 발매되기 약 2-3개월 전에 이 공연을 통해 첫 공개했다.[23] 2위는 19곡의 머라이어 캐리[24] 이 곡을 시작으로 비틀즈의 미국 음악 시장 정복이 시작되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을 알린 대표곡이다.[25] 영국 차트 1960년대 결산 1위.[26] 물론 이 곡의 원래 발매년도는 1962년이며, 미국에서 1위를 한 버전은 1962년 싱글 버전이 아닌 1963년 발표된 Please Please Me 앨범 버전이다.[27] Day Tripper와 힘께 더블 A사이드 싱글로 발매. 둘 다 1위로 치는 경우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We Can Work It Out만이 1위이다.[28] Something이 빌보드 넘버 1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원래는 위의 Come Together과 같이 AB 싱글로 발매되었었고 빌보드가 원래는 A싱글곡과 B싱글곡을 따로 차트를 매겼었다. 실제로 이 싱글이 발매될 때만 해도 따로 매겼는데, 몇 주 뒤에 AB 통합 차트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현재는 둘 다 1위로 보는게 일반적이다만 반론의 여지가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29] For You Blue와 같이 더블 A 싱글로 발매되었으나 보통은 이 곡만 1위로 친다.[30] 싱글 발매일이 1976년이라는 것이지 곡 자체는 1966년 Revolver를 통해 발매된, 당시로서는 10년이 된 노래다.[31] 토니 셰리든과 함께 한 싱글로 19위에 올랐다.[32] 영국에서는 1위까지 오른 노래다.[33] 이 싱글을 발매하고 며칠 뒤에 존 레논이 피살당했다. 1위에 오른 것도 존 레논 사후의 일이라 존 레논은 생전에 이 곡이 1위하는 것을 못 보고 죽었다.[34] 그룹까지 포함할 시 70년대 1위는 9개의 싱글을 27주동안 1위에 랭크시킨 비 지스이다.[35] 스티비 원더와의 듀엣곡. 인종 화합에 대한 노래.[36] 마이클 잭슨과의 듀엣곡.[37] 더블 A 싱글[38] 사실 신해철이 처음 했던 말은 아니라 신해철의 지인이 말했던 걸 본인의 라디오에서 대신 언급한 것. 세월이 얼마나 흐르던 처음 듣는 대중들을 팬으로 만드는, 그만큼 그들의 히트곡들이 첨단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39] 제목은 비틀즈 65면서 64년 발매인 이유는 연말에 발매되었기 때문이다.[40] 가령 의 경우 영국에서는 히트를 쳤지만 미국 음반 판매량으로만 따지면 U2에도 밀린다.[41] 서구권의 자유주의적인 문화가 유입되어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는 소리다. 당시 비틀즈는 자유진영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로 여겨져왔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공산권에서 록 음악이 반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42]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는 음반의 60%가 비틀즈 앨범이었다.[43] Come Together, Hey Jude[44] 본문의 다른 부분에도 이미 나오는 내용들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서 전체적인 내용 정리 필요. 역사 문단에서 이미 다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반복할 뿐인 이 문단이 굳이 필요한지도 의문.[45] 기사 원문을 보면 이 말을 한 사람은 기타리스트인 래리 마틴 (Larry Martin)이라고 한다.[46] 드럼 연주자라는 말이 아니고, 비틀즈의 기운을 북돋아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했던 존재라는 의미.[47] 어디까지나 오해다. 조지 마틴이 롤주법 테크닉에 한해서 폴 매카트니가 링고 스타에 비해 낫다고 얘기했을 뿐 매카트니가 링고 스타처럼 기본기가 탄탄한 프로 드럼 연주자라고 보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48] 때문에 자신의 솔로음반의 홍보에 비틀즈 탈퇴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들었지만 첫 솔로 앨범은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상업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족으로의 회귀를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는 폴의 시도였다. 이는 존의 Plastic Ono Band와 유사한 케이스.[49] Yellow Submarine 앨범의 Hey Bulldog에서 폴의 개소리를 들을 수 있다.[50] 참고[51] 이 당시는 1960년대다. 2000년대 그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면 안된다. 그때는 변변한 그래픽조차 없었으며, 따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작은 호빗들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52] 한 예로, 비틀즈의 흩어진 저작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소니뮤직은 비틀즈와 메탈리카를 카피/패러디 한 밴드인 비탈리카가 데뷔앨범을 발매할 즈음에 거액의 저작권 소송을 걸기도 했다. 다행이도 메탈리카가 나서 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하긴 했지만 비탈리카 같은 사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다.[53] 먼 미래에라도 보이저호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소리를 알려주려고 보이저호에 탑재된 오디오 속의 음반에 지구의 각종 자연음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 등과 함께 음악도 넣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들이었고 대중음악 중에선 비틀즈의 곡을 넣으려고 했던 것.[54] 저작권료가 보편화된 현재는 한 곡당 기본 1억원 이상으로 저작권료를 줘야 하는데, 이 당시는 저작권 초창기였던지라 저작권료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55] 루시를 발견한 날 고인류학자들이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56] 참고로 작중에는 The comet tails가 작곡한 Weltraumsurfen(벨트라움서펜, 우주 서핑)이라는 곡도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곡 이름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를 패러디한 것이다.[57] 순서대로 A Hard Day's Night(1964), Paperback Writer(1966), Here Comes The Sun(1969), I Am the Walrus(1967). 초반에 지나가듯 Maxwell's Silver Hammer가 옷 드라이 가게 이름으로(...), Back in the U.S.S.R.가 노래 안의 비행기 구동음으로 등장한다. 초반 연출은 영화 A Hard Day's Night#s-2의 장면을 그대로 오마쥬하였다.[58] 정작 비틀즈 멤버들은 정치, 환경,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의 사회 운동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존 레논은 현재까지도 아나키즘평화주의의 대명사로 꼽힐 정도.[59] 다만 유튜브 조회수를 보면 비틀즈 노래들중에서 저 둘이 각각 최다 조회수 3, 4위를 차지한다. 1위는 루프탑 콘서트 영상 버프를 받은 Don't Let Me Down.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는 증거이다. 다만 외국에선 그런 제일 대중적인 히트곡들 외에도 비틀즈를 정규앨범 위주로 감상하는 리스너들도 많은 반면, 한국엔 그런 후자의 케이스가 드물다는게 결정적인 차이다.[60] 이마저도 비틀즈 버전이 아니라 커버 곡인 러브 액츄얼리 버전을 많이 안다.[61] 소위 '록 스타' 하면 생각나는 반항적이고 과격하게 소리지르는 이미지와 국내에서 인식되는 비틀즈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62] 이에 대해+N.ex.T가 표절시비에 휩싸였을때 신해철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음악의 역사에서 오선지에 적을수 있는 모든 좋은 멜로디는 비틀즈가 싹 긁어가서 더이상 좋은 멜로디가 나올수 없다."라는 발언까지 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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