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텐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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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31년 9월 17일 수요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정도 떨어진 브라이텐펠트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장군이 지휘하는 황제군과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지휘하는 신교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30년 전쟁의 최대 분수령 중 하나로 꼽힌다.
사상 최초로 선형진이 테르시오를 격파하고 그 위력을 알린 전투이며,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위용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전투이기도 하다.
2. 전투 이전
30년 전쟁에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는 틸리 백작의 군대에게 루터 전투에서 참패한뒤 이후 발렌슈타인과 틸리백작이 이끄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 밀려 덴마크로 돌아가게 된다. 이 무렵 또다른 야심가였던 구스타프 아돌프 역시 이 때를 노려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루터파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다는 명목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포메른에 상륙, 독일 침공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제후들의 반발로 인해 발렌슈타인을 황제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역전의 노장 틸리 백작을 앉혔다.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황제군의 식량이 떨어지자 황제군은 발렌슈타인에게 식량보급을 요청했지만 발렌슈타인도 궁핍한건 마찬가지라[2] 보급을 못했다. 결국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황제군은 신교도 도시인 마그데부르크를 약탈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 학살이 벌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신교도들은 똘똘 뭉쳤고 네덜란드 연합주와 작센의 요한 게오르그 1세도 구스타프를 지지했다. 그러자 틸리백작은 요한의 변심을 이유로 작센을 침공했으며 1613년 9월 13일에 라이프치히에 맹공을 퍼부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틸리 백작은 스웨덴군과 작센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라이프치히의 성채에서 농성하기로 결심했지만 부사령관인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이 대규모 정찰대를 이끌고 나가다가 스웨덴군과 마주친 것. 결국 파펜하임의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전갈을 받은 틸리 백작은 별 수 없이 전군을 이끌고 맞서기로 한다.
3. 개전
황제군의 포격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스웨덴 역시 응사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틸리 백작의 황제군은 수적으로는 유리했지만 기병대가 양 날개에 포병대가 후미에 보병대는 50열 횡대로 서는 전통적인 블록대형을 이루고 있었고 반면 스웨덴 군은 구스타프 아돌프가 고안한 전략에 따라 5~6열 횡대로 넓고 얕게 퍼져 있었다. 그에 따라 황제군의 포격은 스웨덴군에 생각만큼 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양측은 오후 2시까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파펜하임이 스웨덴 군의 사격범위 밖으로 크게 원을 틀어 후미를 공격했다. 당대 최고의 기병대장 파펜하임이 이끄는 카라콜 기병대는 당대 최강의 총기병대로, 흑기병이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의 강군이었다. 스웨덴군이 이 공격을 막느라 방향을 튼 사이 틸리 백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요한 게오르그 선제후의 작센군 쪽으로 전방위적 공격을 가했다. 작센군은 대부분 신병으로 이뤄진 탓에 이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선제후를 포함한 작센군은 전원이 도망치고 말았다. 참고로 이때 작센군은 퇴각하면서 스웨덴군의 보급마차를 약탈했다
그렇게 작센군이 전선에서 이탈하자 남은 것은 스웨덴군 뿐이었다. 스웨덴군은 수적 열세에서 양방향으로 위협당하면서도 위치를 고수하는 데 성공했고[3] 오히려 황제군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후 4시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황제군 병사들의 얼굴에 흙먼지를 뿌리기 시작했고 구스타프는 1,000명 정도의 기병대 예비 병력을 지휘해 총공격에 나서 황제군 보병대와 기병대를 분리해 전열을 무너뜨렸다. 틸리 백작은 세 군데나 몸에 상처를 입은 체 전장에서 후퇴했고 파펜하임은 후위를 보호해 끝까지 살아남은 4개 연대를 이끌고 라이프치히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7시에 전투가 종료되고 황제군은 7.6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부상자는 12400명 또 6,000여명이포로가 됐다 사실상 전멸의 가깝다 . 전투 중에 시골 마을로 흩어져 도망친 황제군 병사들의 운명도 가혹했는데, 잔인한 약탈에 분노한 작센의 농민들이 그들을 붙잡아 수백명씩 학살했다. 황제군은 라이프치히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투 다음날 철수했으며 구스타프 아돌프는 당당하게 라이프치히에 입성했다.
4. 결과
신교군에게 있어 구교군과 전면적으로 붙어 첫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스웨덴 진영에서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 구스타프의 보병들이 황제군에 종군했던 사제들에게서 빼앗은 교회 종이었다. 이 소리에 구스타프는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라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1] 또는 제국군[2] 발렌슈타인이 라이벌인 틸리 백작한테 의도적으로 보급을 거부했다는 야사가 있지만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일단 당시 보급품은 아무리 자신의 영지라도 강제 징발이 아닌 구입으로 구했다. 30년 전쟁의 군사비는 현재와 비슷하게 엄청나게 비쌌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 발렌슈타인은 독일 제후들 한테 세금을 거두는 한편 자신의 방대한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발렌슈타인은 제국군 총사령관 지위를 잃고 메클렌부르크 영지를 막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중에 자금이 거의 없었다. 카톨릭 군대가 패배하면 자신의 영지도 공중분해 될수 있는데, 발렌슈타인이 바보도 아니고 케케묵은 라이벌 감정때문에 보급을 거부했을리는 없다. 그보다도 황제도, 틸리의 돈 많은 주군도 폭주하는 군사비를 대지 못했는데 영지 반토막난 발렌슈타인이 보급을 제대로 대줄수 있을리가... [3] 구스타프가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서도 신속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전열을 배치했고 잘 훈련된 정예 머스킷 총병이 믿을 수 없는 발사속도를 유지했던 것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