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독일어: 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체코어: Albrecht Václav Eusebius z Valdštejna
(1583~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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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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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슈타인의 문장
1. 개요
2. 생애
2.1. 가난한 귀족에서 독일 지방 최대 세력이 되기까지
2.2. vs 덴마크 전쟁
2.3. 황제의 폭주와 해임
2.4. vs 스웨덴, 북방의 사자왕과의 결전
3. 평가
4. 여담


1. 개요


보헤미아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신성 로마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자 풍운아이자 북방의 사자왕의 숙적으로 30년 전쟁에서 활약을 했던 명장이지만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2.1. 가난한 귀족에서 독일 지방 최대 세력이 되기까지


발렌슈타인의 본래의 이름은 알브레흐트 주 발트슈테이나, 독일식으로는 알브레히트 폰 발트슈타인[1]이었고, 보헤미아의 하급귀족이었다. 유년기 부모를 잃었고, 외숙부의 후원을 받으며 자랐다. 후 30년 전쟁에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그의 가족은 본래는 신교도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구교도가 된 것은 대학을 다니던 때 예수회와 접촉하면서였다.
부유한 미망인 루크레치에 넥쇼바(Lukrécie Nekšová)와과의 결혼으로 갑부가 된[2] 발렌슈타인은 30년 전쟁에서 큰 기회를 잡은 인물이었다. 30년 전쟁의 초반부는 보헤미아 지방을 둘러싼 신교 vs 구교 대립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1차전쟁인 팔츠-보헤미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독일 지방의 가톨릭의 명장이었던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에 의해서 깔끔히 진압된다. 당시 전쟁의 핵심적인 정치인은 페르디난트 2세였는데, 그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 되었으나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신의 땅을 되찾겠다며 전쟁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버렸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지방으로 복귀하면서 돈이 많은 보헤미아를 제외한 다른 영토에는 미련이 사라진다. 그래서 팔츠-보헤미아 전쟁으로 얻은 땅을 구교세력들한테 나누어주고, 그곳의 신교도들의 땅은 빼앗아서 헐값에 팔기 시작했다.
이때 발렌슈타인은 신교도들이 빼앗긴 땅을 대규모로 사들였다. 그는 단순히 땅만 구매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공장을 짓고 엄청난 돈을 모아 거부가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졸부의 스토리 같지만, 이때 발렌슈타인은 군수공장을 차려서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사병 집단을 꾸리게 된다.

2.2. vs 덴마크 전쟁


팔츠-보헤미아 전쟁의 재산정리 과정에서 이득을 본 발렌슈타인한테는 또다른 호재가 찾아온다. 바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독일지방의 신교도 잔당(광인 크리스티안, 용병왕 만스펠트)들과 합류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신교동맹을 지원하려는 30년 전쟁의 2차 전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알거지 신세였으므로, 덴마크와 신교도 선제후들의 동맹을 막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발렌슈타인은 황제한테 접근하여, 타인의 도움없이 자신의 재산만으로 군사력을 일으켜 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했다. 손해 볼 것이 없었던 황제는 유지비의 일부만 내겠다는 조건으로 콜을 외쳤고, 발렌슈타인의 사병들은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정규군이 되었다.
발렌슈타인의 특징은 부유한 재산과 군수공장을 통한 군사 편제의 최적화였다. 그의 최종적인 적수가 되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도 어느 면에서는 닮아 있는 모습인데, 이는 두 사람이 모두 30년 전쟁의 첫번째 전쟁인 보헤미아-팔츠 전쟁에서 네덜란드 정규군이 발달시킨 신식전술과 편제들을 재빨리 도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구스타브 2세의 군사개혁은 이후 현대군인들한테도 영향을 주게 되는데, 발렌슈타인도 그와 비슷한 당시 유럽 최대수준의 사병들을 이끌고 군사편제를 재편했던 것을 보면, 상당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발렌슈타인의 첫번째 상대는 용병왕 만스펠트였는데, 독일 북부의 데자우 강의 다리에서 맞붙는다. 발렌슈타인은 먼저 다리를 점령하였고, 만스펠트는 불리한 상황에서 돌격을 해야했다. 문제는 발렌슈타인이 팔츠-보헤미아 전쟁 때의 네덜란드 신교도 군인들이 보여준 발달한 전술을 아주 제대로 습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발렌슈타인은 효율성 중심의 소구경 야전포, 균일화 된 머스켓 보급을 통한 화력전 중심의 편제를 마친 군대였고, 만스펠트는 상대가 점령하고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 악조건에 맞물려 위의 무기와 무장의 차이에 의해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곧이어 발렌슈타인은 남유럽을 가로질러 끝없이 도망가는 만스펠트를 추적한다. 그는 만스펠트가 의탁한 헝가리 왕실에 외교를 보내어 신교군대들을 추방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틸리 백작과 함께 연합하여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군대를 밀어낸다. 2차 전쟁의 혁혁한 공로자.

2.3. 황제의 폭주와 해임


큰 공을 세운 발렌슈타인은 프리들란드-자간-메클렌부르크의 공작이 되었고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 발렌슈타인의 군세는 10만이 넘었으며, 이는 당시 유럽에서 '''최대규모'''였다. 이렇게 군대가 많았던 것은 발렌슈타인의 사업가 재능이 충만했던 것. 그리고 겉으로만 종교전쟁일 뿐, 큰 돈을 버는 자유도시의 징세권을 땅따먹기 하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30년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이득과 소득분배를 아주 잘 투자하여 챙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는 것처럼 정점에 선 후 발렌슈타인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페르디난트 2세는 과대망상에 빠져서 발렌슈타인을 시켜서 덴마크를 우회하지 않고 북해발트 해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북독일 한자동맹 도시들의 이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으므로, 그들을 철저한 반 황제파로 돌려놓았다. 또, 페르디난트 황제는 발레슈타인을 총사령관으로 한 황제군을 설립하려고 했는데, 제후들은 이것을 전제정치로 보고 반발하며 발렌슈타인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를 못이긴 페르디난트가 받아듣이면서 발렌슈타인은 해임되었다.
다만 발렌슈타인 본인의 책임도 없진 않다.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 영주들의 친분을 쌓지 못한 것인데, 특히 전통적인 귀족 군인이었던 틸리 백작은 발렌슈타인을 매우 의심하고 질투했다. 왜냐면 발렌슈타인은 신앙심이 적고, 애국자보다는 사업가의 기질이 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암군에 가까웠던 페르디난트 2세의 막나가는 과대망상적인 행보에 불만을 품은 독일의 유력자들은, 이것이 황제의 바보짓이 아니라 발렌슈타인이라는 신흥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발렌슈타인이 모든 비난과 증오를 받는다.
게다가 발렌슈타인의 야심 또한 상당했다. 그는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지만, 그와는 별도로 독일 북부 지방의 이권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여 이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군의 대다수를 차지한 병력들이 자신의 병사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다녔으며, 자신의 군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이런 태도는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가 단순한 독일 지방의 영주이자 군인이 아니라, '''왕'''이 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3]

2.4. vs 스웨덴, 북방의 사자왕과의 결전


그러나 다시 기회가 찾아왔는데, 발렌슈타인의 후임이 된 틸리 백작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싸우다 전사해버린다. 군대가 전혀 없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다시 발렌슈타인을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다시 총사령관이 된 발렌슈타인은 장기전을 계획한 후 일부러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스웨덴 군의 전력을 크게 깎아먹었다. 그러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32년 9월 4일 퓌르트를 쳤지만, 오히려 3000명의 군대를 잃는 참패를 당한다. 반대로 발렌슈타인은 반격을 개시해 작센을 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병력을 분산시키는 우를 범했고 기회가 온 것을 안 구스타프는 뤼첸으로 진격해 발렌슈타인과 일전을 벌이기로 한다.
1632년 11월 16일에 두 영웅뤼첸 전투에서 격돌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 군대는 발렌슈타인한테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발렌슈타인도 녹록치는 않아서, 오히려 싸움을 걸어왔던 구스타프 2세는 승리에도 불구하여 사망하여, 전략적으로는 승리에 가까운 입장이 된다.
문제는, 이 전투가 끝나자 발렌슈타인은 황제한테는 눈엣가시가 되는데, 이유는 '''발렌슈타인이 스웨덴 군대와 전쟁 협상을 맺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발렌슈타인으로서는 독일 측이 스웨덴-프랑스라는 2대 강국을 상대로 싸우는 상황에서 주력군도 와해되자 나름대로 외교 수완을 발휘하려는 것일수도 있었으나, 본인의 영지가 몰려있던 독일 북부에서의 이권을 지키려는 행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라서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반역자로 선언한다.[4] 결국 그는 황제가 보낸 자객들한테 암살당하며[5] 생을 마감하게 된다.[6]

3. 평가


'''발렌슈타인은 병적일 만큼 자기 중심적이었으나 천재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지는 못하였다.'''

30년 전쟁의 저자이자 영국의 사학자 C.V. 웨지우드의 평가

반역죄를 짓고도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아쉬운 입장에 처해 발렌슈타인을 재기용했을 정도로 군사적인 식견과 조직력이 뛰어났다. 특히 전성기 때의 발렌슈타인 용병대는 황제군 최대의 세력이었기에 황제는 마음에 들지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를 기용하고 지원해야만 했다. 초창기에는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치면서 황제의 입지를 다지는데 기여한 인물이였고, 정치적인 협상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언제나 자신의 이권과 재물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월권 행위를 일삼으며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반하자 거리낌없이 황제를 배신하는 행동을 저지르면서 스스로 무덤을 팠다. 그는 어디까지나 용병이었고 재물과 이권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갈수록 이와 관련된 요구가 심해지자 황제 측이 부담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발렌슈타인을 불신하며 그를 희생할 수 있는 패로 간주하게 되어 가차없이 숙청당했다.

4. 여담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그의 몰락을 다룬 희곡 "발렌슈타인"이 유명하다.
전술된 바와 같이 야심으로 점철된 그였지만, 오세영 작가의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인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는 세간에 드러난 그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30년 전쟁에 참전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스웨덴이 프랑스에게 판매하려는 군함 바사 호의 설계도를 스웨덴 견제 겸 주인공인 안토니오 꼬레아를 돕기 위해 넘겨준 것.
물론, 이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싸워야 하는 그에게 엄청난 리스크를 각오한 행위였는데, 자신이 힘들여 매수한 스웨덴 고위층을 잃을 각오까지 하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국의 참전을 지연시킨다고 해도 적국 내부의 협조자가 주는 메리트를 모두 잃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러고 하는 말이 진정한 폭풍간지인데......

"......아까 빚을 갚는다고 했던 말 생각나시오? 당신도 8년 전에 가진 거라고는 입밖에 없던 날 믿어 줬잖소?[7]

하지만,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다 그때 당신이 나를 믿고 돈을 맡겼기 때문이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던 나를 믿고 말이오.'''"

"잘 가시오, 동양인 친구. 나도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누군가가 발렌슈타인 당신도 신의라는 걸 아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겠소. '''나에게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진정한 친구가 있노라고.'''"

이해타산에 따라 배신과 모략이 판치는 인간 세상 속에서 그야말로 눈물이 찡하게 날 정도로 진정한 의리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대사. 200만 부나 판매됐을 정도의 베스트셀러답게 역사상의 실화와 문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혼합한 대사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상당히 점성술에 심취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1]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 백작과 같은 가문.[2] 루크레치에는 모라비아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부유한 귀족이었다. 결혼한지 5년만에 루크레치아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영지와 재산을 물려받아 발렌슈타인은 부자가 될수 있었다. 나중에 발렌슈타인은 하라흐 백작의 딸 이자벨라 폰 하라흐와 재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아들은 어렸을때 사망하여 딸만 살아남았다.[3] 특히 발렌슈타인은 황제파 제후들이 군비를 부담하도록 페르디난트 2세한테 건의했고 페르디난트 2세가 받아들였기에 황제파 제후들은 이 군비를 댄다고 고생한터라 하나같이 발렌슈타인을 증오했다.[4] 사실 그 이전부터 발렌슈타인은 황제가 수여한 징세권을 이용해서 거둔 세금의 일부를 자신이 착복하며 직권을 남용해서 황제가 허가하지 않은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특히 황제의 추천서를 받은 황제군 장교가 찾아오자 권총을 꺼내며 부하들 앞에서 ‘이 친구들 중 하나를 죽여서 자리를 마련해야겠구만’(= 너에게 줄 자리는 없다)이라며 부하들과 낄낄대는 식으로 대놓고 무시하며 쫓아내기까지 해서 페르디난트 2세가 이 일이 아니더라도 발렌슈타인을 증오하고 있었는데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한것이다.[5] 원래는 체포해서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대규모였던터라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 암살하기로 결정했다.[6] 페르디난트 2세가 사전에 발렌슈타인의 부하 장교였던 스코틀랜드인 월터 레슬리, 존 고든, 영국인 월터 데버루, 아일랜드인 월터 버털루를 매수하여 발렌슈타인을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이들은 병사들을 매수하여 반란을 일으켜 발렌슈타인이 신뢰하는 부하 장교들과 호위병들을 죽인다음 발렌슈타인을 암살한다. 이때 발렌슈타인은 잠을 자다가 소리를 듣고는 잠에서 깨어 검을 빼어들고 저항했으나 월터 데버루와 병사들의 검과 창에 찔려죽고 만다. 발렌슈타인을 암살한 장교들과 병사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약속한 관직과 재물을 하사받는다.[7] 30년 전쟁 초반에 구교 동맹에 줄을 댔던 안토니오가 알베르토의 공작 때문에 자금줄이 끊겨 위기에 몰렸을 때 발렌슈타인이 제안한 서부전선 신교연합군 철수 공작에 50만 두카트라는 거금을 넘긴 것.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급여에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싸우게 하는 데 필요한 군수품 조달도 빠듯한 상황에 '''당시에도 소문이 안 좋은데다 보헤미아 지역 내의 영지를 비롯한 전 재산을 잃고 입만 남아있던 발렌슈타인을 믿고 교황청 유리납품 입찰 때보다도 더 큰 거금 50만 두카트를 맡겼으니 당시의 안토니오에게는 상사원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모든 인생이 걸렸을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다행히 공작이 성공하면서 알베르토가 배팅한 근거였던 서부전선 신교연합군의 중심인 만스펠트 용병대는 사보이 공국으로 철수하고, 동부전선에 있던 안토니오는 서부전선 소식을 알고 쉬쉬하면서도 돈을 짊어지고 투자하러 온 유태인들을 선별해야 할 정도로 돈줄이 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