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데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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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데부르크 대성당. 마그데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 하나이자 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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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마그데부르크의 위치'''
<colbgcolor=#000000> '''행정'''
'''국가'''
독일 [image]
'''시간대'''
(UTC+1/+2)
''''''
작센안할트
'''인문환경'''
'''면적'''
201km²
'''인구'''
237,565명(2019년)
'''인구밀도'''
1,182명/km²
'''홈페이지'''

'''정치'''
'''시장'''
루츠 트륌퍼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3. 근대
2.4. 현대
3. 명소
4. 여담


1. 개요


독일의 도시이자 작센안할트주의 주도이다. 엘베강을 끼고 자리잡고 있다. 자그마치 1200년이나 된 매우 유서 깊은 중세 도시이며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30년 전쟁까지 독일의 굵직한 역사를 함께했으며 한자 동맹의 맹주로서 오랫동안 지역의 중심 도시로 활약했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쇠약해졌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동독 시절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옛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아직도 곳곳에 1200년간의 역사를 품은 유산들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2. 역사


마그데부르크는 중세 독일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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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대제와 왕비 에디트의 조각상.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1250년경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가 805년 이 지역에 거주지를 세우면서 마그데부르크의 역사는 시작된다. 중세 상부 독일어로 '크고 튼튼한 요새'라는 뜻의 'Magadoburg'에서 오늘날의 도시 이름이 유래된다. 이 도시는 본래 인근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이후 962년 오토 1세신성 로마 제국을 성립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게 되고, 사후에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니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이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부터 마그데부르크는 매우 강성해졌으며 13세기 한자 동맹에 가입할 당시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2만여 도시 중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마르틴 루터도 여기서 잠시 활동했었으며 이에 따라 마그데부르크에도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마그데부르크는 독일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영향력은 한동안 꺼지지 않을 듯 했다.

2.2. 30년 전쟁


30년 전쟁 와중이던 1631년 틸리 장군이 이끌던 카톨릭 황제군은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는데 이 때 대학살극이 벌어진다.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를 장악한 1630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 20일까지 황제군은 마그데부르크 내의 식량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시민들까지 무차별 학살한다. 황제군은 당시 폭주하는 군사비로 인해 제대로 된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지 못해 매우 굶주려 있던 상태였고, 이 같은 상태가 엉뚱한 마그데부르크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1] 결국 6달만에 3만명에 달하던 마그데부르크의 인구가 불과 5천명으로 줄어드는 대참극이 일어났다. 30년 전쟁 역사상 늘 약탈이 있어왔지만, 이 마그데부르크 사건은 그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정도로 심각한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개신교 세력을 결집시켜 30년 전쟁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마그데부르크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한자 동맹 시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2.3. 근대


이러한 참변 이후 마그데부르크의 시장이었던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2]는 폐허가 된 마그데부르크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에 의해 대기압의 세기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한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이 1654년 행해졌고(다만 이 실험은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라이히스탁에서 황제가 보는 앞에서 실행되었다) 이 실험은 기체 역학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으며 틸지트 조약에 의해 프랑스의 괴뢰 왕국인 베스트팔렌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한 1815년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되고 이후 독일 제국에 편입된다.

2.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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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마그데부르크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드레스덴 폭격이 이루어지기 1달 전인 1945년 1월 16일 영국 공군에 의해 주도된 폭격으로 인해 1만 6000여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마그데부르크에 남아있던 문화 유산의 대부분이 소실된다. 전쟁 이후 소련군 점령에 마그데부르크가 포함되고 곧이어 동독 정권이 수립되면서 재건 계획에 의해 남아 있던 문화 유산들의 잔해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소비에트 식 건축물들이 들어선다. 이렇게 동독 시절을 거치면서 마그부르크는 그 외형이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만 오토 대제가 대관식을 올렸던 마그데부르크 성당 등 중요한 건축물들은 일부 보존되었다.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통일과 함께 마그데부르크는 부활한 작센안할트 주의 주도로 새롭게 출발한다. 2005년 도시 설립 1200주년 기념 행사가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렸다. 다만 통독 이후에 여느 동독 도시들처럼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같은 주의 할레보다 인구가 아주 약간 적다. 주민들 정서도 구 동독 지방의 그것과 비슷하게 다소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편이다.

3.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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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937년 처음 세워진 매우 유서깊은 성당이다. 이곳에 오토 대제가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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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뤼네 치타델레(Grüne Zitadelle)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물 자체는 훈데르트바서가 2000년 타계한 이후 착공되었으나 설계는 그가 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4. 여담


g가 무성음화하기 때문에 원래대로면 막데부르크라 읽어야 하나, 독일어 표기법에선 마그데부르크가 표준 표기가 되었다. 일본어로도 마크데부르크(マクデブルク).
많은 구 동독 지역이 그렇지만 이곳도 네오나치가 상당히 날뛰는 곳이다. 2006년 이곳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이 네오나치로부터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독일제국 시절에 도시의 이름을 딴 순양함 함급이 있었다.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 참조. 참고로 1번함 마그데부르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3. 리가1. FC 마그데부르크가 이 도시를 연고로 하고있다. 동독시절엔 SG 디나모 드레스덴과 함께 강호로 뽑혔지만 통일후 사이좋게 강등됐다. 그리고 현재도 SG 디나모 드레스덴과의 라이벌의식을 불태우고 있다. 이 둘의 더비를 엘브클라시코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엘베 강 + 엘 클라시코


[1] 당시 제국군 원수에서 해고 당해서 앙심을 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공작으로 인해 황제군이 굶주렸다는 '''썰'''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당시의 미약한 행정력으로는 10만이 넘는 황제군을 먹여살리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발렌슈타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 거대한 군대를 겨우 유지할수 있었지만, 그의 해임으로 인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이 비극은 오히려 발렌슈타인의 해임으로 인해 발생한 일에 가깝다.[2] 참고로 이 사람은 근대 물리학에 상당히 큰 기여를 한 사람인데, 후술할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 말고도 마찰 전기에 대한 연구로 유명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탈레스호박을 천에 문질러서 마찰 전기를 발생시켰던 것을, 게리케가 구리로 된 큰 구를 만들어서 천에다 문질러서 탈레스의 실험을 재현하면서, 금속이 강력한 유전체임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