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
[image]
폴란드어 : Wrocław
독일어 : Breslau
체코어 : Vratislav
[image]
중앙광장
1. 개요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로 돌노실롱스키에(dolnośląskie) 주의 주도. 오데르 강변에 있다. 2013년 현재 인구는 62만 명으로 폴란드 제4의 도시다. 역사적으로 실레시아[1] 지방의 중심도시로 기능했고 주인이 몇번 바뀌었기에 부르는 이름 역시 브라티슬라프(체코어), 브레슬라우(독일어), 브로츠와프(폴란드어)로 바뀌었다.
2. 인구 추이
3. 역사
그단스크, 바르샤바, 크라쿠프에 비해 브로슬라프는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에서 역사적으로 폴란드인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짧은 도시다. 초기 약 300여년을 제외하면 이 도시는 줄곧 체코인(중~근세)과 독일인(근세~근현대)의 도시였고, 2차 세계대전 후 약 600여년만에 폴란드에 다시 귀속되었다. 따라서 현재 이 도시는 폴란드 내에서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3.1. 초기, 보헤미아·폴란드·실롱스크 공국의 지배 (800s ~ 1335)
약 800년 경부터 서 슬라브 부족인 실레시아인[2] 들이 이 지역에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 이 마을은 곧 서슬라브 부족들을 상당부분 통합한 대 모라비아 공국[3] 의 지배를 받았고 907년 왕국이 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자르족에 의해 기록도 제대로 못 남기고 멸망하자 보헤미아 공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지배했다. 915~921년 까지 보헤미아 공국을 통치한 브라티슬라프 1세(Vratislaus I)는 이 도시에 목조 요새를 건설하면서 이 마을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브로츠와프는 그의 이름을 따 '브라티슬라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독일인, 폴란드인들도 이 이름을 자국 언어에 맞추어 폴란드인들은 브로츠와프로, 독일인들은 브레슬라우로 불렀다.
960년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들어섰고, 최초의 왕 미에슈코 1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로부터 실롱스크와 마워폴스카를 정복하면서 브로츠와프도 손에 넣었다. 미에슈코 1세의 정복 이래 약 1290년대 실롱스크 공국이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어가던 시기까지 브로츠와프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는 도시였다. 1000년 볼레스와프 1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딸린 실롱스크 최초의 교구를 이곳에 설치했다. 도시는 이때부터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급격히 확장해 나갔다. 이 시기 브로츠와프의 인구는 벌써 1000명에 달했다.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후 폴란드가 이교도 반란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 그간 폴란드에 많은 많은 땅을 빼앗겼던 보헤미아 공 브르제티슬라프 1세(Břetislav I)는 폴란드를 대규모로 침공해 수도 포즈난과 그니에즈노를 파괴하고 많은 가톨릭 유물들을 파괴했다. 군대가 돌아가면서 보헤미아는 실레시아 지방과 대폴란드 일부를 빼앗았고 이 도시는 다시 보헤미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재건자'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하에서(1040–1058)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어느정도 회복한 폴란드는 1054년 브로츠와프를 재탈환했다. 1109년 도시 근방 프시에 폴레에서 볼레스와프 3세의 폴란드군과 하인리히 5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전투를 벌여 폴란드군이 승리하기도 했다.[4]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폴란드가 분열되자,[5] 브로츠와프는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2세의 실롱스크 공국에 속하게 되었고, 1161년에는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201~1241년 실롱스크 공국의 헨리크 1세와 뒤를 이은 헨리크 2세 시기, 공국은 분열된 폴란드의 절반 가까이를 통합했고 폴란드 고공위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브로츠와프는 분열된 폴란드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기능했다. 실롱스크 공들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완전 통합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1241년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폴란드로 쳐들어와 폴란드 공국들의 군대를 각지에서 연파하고 수도 크라쿠프를 불태웠다. 몽골군은 곧 당시 폴란드의 중심지인 실롱스크로 진격했고 4월 초 몽골군이 브로츠와프에 당도하기 직전 시민들은 몽골군의 파괴 행위를 전해듣고 공포에 질려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이때 몽골군이 더 빨리 철수하게 만드려고 헨리크 2세의 지시로 일부러 도시를 불태웠다. 며칠 뒤, 헨리크 2세는 4월 9일 브로츠와프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레그니차[6] 에서 폴란드 연합군으로 몽골군에 맞섰으나 군대는 전멸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몽골의 침공으로 실롱스크 공국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 통합은 저지되었고 브로츠와프는 폐허가 되었다. 침략 후 도시는 복구되었고 1262년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한 도시특권이 부여되었다. 도시는 교회와 성당이 건설되고 상공업이 촉진되는 등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89년 보헤미아 프르제미슬 왕조(Přemyslid)의 바츨라프 2세(Václav II)는 실롱스크 공작위를 얻었고 곧 폴란드 고공위까지 손에 넣었다. 그 이후로 실롱스크 공국은 점차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어갔다. 1306년 폴란드 고공위를 브와티스와프 1세에 의해 상실한 보헤미아는 이후 룩셈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폴란드 왕위를 요구했는데[1320년] , 브와티스와프 1세 사후 폴란드의 왕이 된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1335년 보헤미아의 얀 루쳄부르스키(Jan Lucemburský)[7] 와 트렌친 조약(Treaty of Trentschin)을 체결해 보헤미아가 폴란드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는 대가로 수십년간 실롱스크(슬레슈코)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실롱스크(슬레스코)는 폴란드를 떠나 보헤미아에 편입되었고 브로츠와프도 함께 보헤미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48년 카지미에시 대왕은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남슬라우 조약(Treaty of Namslau)을 체결해 1335년의 조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3.2. 보헤미아, 합스부르크의 지배 (1335 ~ 1742)
브라티슬라프는 보헤미아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여전히 무역 중심지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이 시기, 여러 벽돌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올라와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브라티슬라프는 1387년 한자동맹에 가입했으나 내륙 무역 중심지였던 크라쿠프와 마찬가지로 동맹과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었으며 회원비를 내지도 않고 동맹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다가 1474년 탈퇴했다. 1418년에는 장인길드가 시의회의 중과세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켜 다수의 시의원을 살해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2년의 법정 다툼 끝에 후임 왕 지기스문트는 주동자 27명을 처형해 사건을 진압했다. 보헤미아가 한창 후스파의 물결에 휩쓸릴 때, 1458년 후스파였던 포데브라트 가문의 이르지(Jiří z Poděbrad)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자 브라티슬라프는 후스파 왕에 반대해 이르지의 라이벌이자 가톨릭을 믿던 헝가리 왕 마차시 1세[8] 를 지지했다.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가 후스파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왕에서 폐위되었다고 선언하자 그의 전 동맹이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의 마차시 1세는 1468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는데, 브라티슬라프는 1469년 5월 마차시 1세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1490년 마차시 1세가 죽자 브라티슬라프는 다시 보헤미아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보헤미아 전쟁기 헝가리 왕을 지지하면서까지 가톨릭을 고수하던 브라티슬라프도 1520년대 종교 개혁의 물결은 피해가지 못해 도시는 개신교화되었다. 도시에는 1475년부터 이미 활자 인쇄소가 들어섰고 1519년에는 루터 번역의 성서가 인쇄되었다. 또한 1523년 시 의회는 도시의 종교개혁을 결의했다. 모든 성직자는 개신교 교리에 따른 설교를 해야 했고 가톨릭 관습은 폐지되어 가면서 도시의 가톨릭 신자 수는 점점 줄어갔다.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때부터 보헤미아는 야기에우워 왕조 헝가리에 동군연합으로 묶여있었는데 울라슬로 2세의 후계자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러요시 2세의 매제였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보헤미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시키는 것을 왕위 계승의 조건 중 하나로 걸었기에 처음 보헤미아는 큰 자치를 누렸다. 하지만 1540년대 이후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신이 계승받은 왕국 모두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시작하고 1547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반란과 함께 보헤미아의 반란도 진압하면서 보헤미아 귀족과 도시들의 특권과 자유를 대폭 박탈했다. 브레슬라우도 보헤미아 왕국 전역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의 강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9] 1609년 루돌프 2세는 오만가지 사건에 시달리다 보헤미아인들을 달래기 위해 보헤미아와 슐레지엔 전역에 칙서를 내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브레슬라우는 종교적으로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1617년 지독한 가톨릭 신자이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고 보헤미아에 가톨릭을 강제하려 하자 열받은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유명한 30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브레슬라우도 1609년에 부여받은 자유를 잃을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지원했다. 하지만 초반이 지나고 나서 전쟁이 독일 주변의 모든 강국들이 들어와 각축을 벌이는 세력다툼으로 번지자 프로테스탄트가 다수인 가운데 소수 가톨릭이 공존하는 브레슬라우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이 덕분에 한번 작센과 스웨덴 연합군에 점령된 것을 제외하면 전쟁에 의한 큰 피해는 없었다.
전쟁 기간 ~ 전쟁이 끝난 뒤 슐레지엔이 빠르게 재가톨릭화 되었지만 브레슬라우는 여전히 프로테스탄트가 강세였다. 또한 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서 브레슬라우의 인구는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폴란드인들도 도시로 간간이 들어왔지만 이들 중 다수는 독일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데르 강 건너편에 폴란드 타운이 존재해서 소수 폴란드인들이 모여 살았다. 어쨌든 도시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브레슬라우는 인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독일 문화가 번성했고 특히 독일 바로크 문학의 중심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1701년에는 레오폴드 1세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 '레오폴드 학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도시의 인구는 30년 전쟁 직전 30,000명으로 중부유럽에서 손꼽히게 큰 도시 중 하나였다.
3.3.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지배(1742 ~ 1918)
7년 전쟁으로 1741년 슐레지엔 지방이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면서, 이후 브레슬라우는 독일 동부의 최대도시이자 베를린 다음가는 프로이센 왕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등 서부지방의 산업화에 따라 쾰른, 에센에 밀리면서 프로이센 제4의 도시로 내려앉았지만, 독일 동방영토에 있는 도시들 가운데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3.4.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1918 ~ 1945)
1939년 당시의 인구는 629,565명으로 독일 8위권 도시였다.[10]
1939년 브레슬라우를 담은 컬러영상
1945년초부터 독일 국방군은 여기를 요새로 만들어 소련군에 대항했고, 5월 6일까지 브레슬라우 공방전이 이어졌다.
3.5. 폴란드의 영토 (1945 ~ )
이후 포츠담 선언에 따라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당초 미국,영국 등은 오데르 강[11] 과 글라처나이세 강[12] 을 새로운 독일-폴란드 국경으로 하기를 바랬고, 그렇게 되었다면 브레슬라우는 독일 영토(국경도시)로 잔류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서쪽으로 더 떨어진 오데르-라우지처나이세[13] 강을 국경으로 삼자고 한 소련의 주장대로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데르-나이세 선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고, 폴란드인들이 대신 정착하였다. 정착한 폴란드인들은 소련령이 된 지역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75%였으며, 주로 빌노(현 리투아니아),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 실향민들이 많았다.[14] 르부프의 유명 도서관 오솔리네움(Ossolineum)[15] 도 브로츠와프로 옮겨왔고, 전쟁으로 파괴됐다 재건된 브로츠와프 대학교는 독일 본토로 피난가거나 쫓겨난 독일계 교수진 대신 르부프의 얀 카지미에시 대학교(Uniwersytet Jana Kazimierza, 현 이반 프란코 리비우 국립대학교(Львівський національний університет імені Івана Франка))에서 온 교수진이 정착해 대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1997년에는 홍수피해를 당하기도 했으며, 유로 2012의 경기가 개최되기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LG그룹이 이 도시에 LG화학과 LG디스플레이, LG전자 등의 공장이 위치한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어서 도시 전역이 LG의 영향권 하에 들어 있다고 한다.
4. 출신 인물
5. 기타
2017 브로츠와프 월드 게임이 열렸었다.
독일어 이름인 브레슬라우는 폴란드에 넘어오면서 다시 브로츠와프로 개명되어서 이젠 독일어권 출신 사람들만 사용하는 명칭이지만, 의외로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아직도 브레슬라우라고 불리는 읍 규모의 작은 타운이 있다. 19세기에 브레슬라우 출신 사람들이 이민와서 고향을 따라 지었다고 한다. 인구가 4천명도 채 안되는 작은 곳이지만 독일인 입장에서는 북미대륙에 아직도 예전 이름을 이어나가는 타운이 있다는 점이 반가울 듯. 그 외 미국 네브라스카주와 텍사스주에도 같은 이유로 브레슬라우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들이 있다.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이 처음으로 확인된 도시이기도 하다.[16]
[1] 독일어 명칭 슐레지엔, 체코어 명칭 슬레스코, 폴란드어 명칭 실롱스크. 이 지역의 역사를 고려할 때, 가장 중립적인 명칭인 실레시아로 쓴다.[2] 실롱스크, 슐레지엔, 슬레스코 등 각 민족의 언어에 따라 이 지역을 칭하는 수많은 명칭이 있지만, 국가 개념이 아직 희박할 때이므로 가장 보편적인 실레시아로 쓴다.[3] 870년 부터 왕을 칭한다.[4] 1079년 볼레스와프 2세는 귀족 반란으로 추방당했다. 따라서 뒤를 이은 브와티스와프 1세의 통치기엔 귀족들의 힘이 강했는데, 그 중 궁정백(Palatine) 시에치에흐(Sieciech)가 왕에게 지록위마하며 폴란드의 실권자로 행세했다. 그런 가운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장자 즈비그니에프(Zbigniew)는 브와디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의 유디트(Judith)와 새로 결혼해 브와티스와프를 낳자 계승권이 약해졌다. 그는 곧 볼레스와프와 계승권을 놓고 다투지만 나중에 시에치에흐와 유디트가 왕을 쫓아내고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하려 하자 둘을 동맹을 맺고 시에치에흐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궁정백을 몰아내고 부왕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즈비그니에프는 대폴란드 등 중북부, 볼레스와프는 소폴란드 등 남부를 가져갔는데, 두 아들들은 부왕이 이후에도 궁정백을 두둔하자 군대를 일으켜 남은 부왕의 땅마저 삼켜버렸다. 브와디스와프 1세가 1102년 죽자, 둘이 폴란드를 여전히 나눠 지배했지만 즈비그니에프가 연장자로서 폴란드 공이 되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곧 다퉜고 1107년 즈비그니에프는 패배하여 땅을 잃고 신성로마제국으로 쫓겨나 볼레스와프 3세가 폴란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가 신성로마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보헤미아에서 망명 온 귀족들을 받아주고 헝가리와 동맹을 맺자, 헝가리와 적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즈비그니에프의 복위를 명분으로 1109년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는 그워구프(Głogów)와 프시에 폴레(Psie Pole) 모두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쳐부수고 침공을 격퇴했다.[5]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왕의 유언에 따라 네 아들들, 미망인이 폴란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 중 크라쿠프가 있는 마워폴스카(소폴란드),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동부, 그단스크가 있는 동 포메른(그단스크 포메른) 등 핵심지역은 '연장자령(크라쿠프 공작령)'으로서 자식들 중 최연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추가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전체 폴란드를 대표하는 고공(High Duke)이 되도록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아들들이 땅을 가지고 싸우지 않도록 유언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나, 이것들은 곧 무시되었고 아들들은 '연장자령'을 가지기 위해 싸워댔다.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 나서도 각 공국들은 이 지역에 있는 수도 크라쿠프, 그리고 고공의 타이틀을 놓고 다퉜으며 각종 외교적, 군사적 이유로 고공들이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잦았다. 이때의 폴란드 고공 중에는 3번이나 물러났다가 다시 복위하여 재위가 4파트로 나뉘는 산도미에시 공작 레셰크 1세,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 같은 자들도 있었다. 이 와중에 기존의 공국이 쪼개져서 새로운 공국들이 형성되기도 했고, 고공위을 차지한 마조프셰 공 콘라드 1세가 1226년 이 지역에 독일 기사단을 불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혼란은 쿠야비야(Kujawia) 공 브와티스와프 1세가 크라쿠프와 폴란드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1320년 폴란드 왕으로 대관하면서 끝났다. 아들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1351년 마조비아 공국을 속국화하며 폴란드의 통합을 마무리했다.[6] 엄밀히는 레그니차에서 남쪽으로 5km떨어진 레그니키에 폴레(Legnickie Pole). 독일어 명칭 발슈타트.[1320년] 브와티스와프 1세가 폴란드의 분열을 수습하고 왕으로 대관함에 따라 폴란드는 왕국으로 바뀌었다.[7]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 초대 왕[8] 헝가리가 1526년 오스만 제국에 대패하기 전 마지막으로 헝가리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었다.[9] 페르디난트 1세는 친형이던 전설적인 카를 5세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금기를 만든 인물이다. 제국 황제의 타이틀은 카를 5세가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배후에서 종교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분열을 막으며 오스만의 침략을 격퇴하고 땅을 추가로 계승받아 판도를 넓히고 이 영토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사람이 이 페르디난트 1세였다. 그의 형이 죽은 뒤 그도 제국 황제가 되지만 황제로서의 재위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자세한 사항은 페르디난트 1세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10] 안슐루스로 독일 땅이 된 빈은 제외했다. 드레스덴(629,713명)과 규모가 비슷했고, 프랑크푸르트(548,220)보다 인구가 많았다.[11] 폴란드 어로 오드라 강.[12] 폴란드어로 니사 키워즈카 강.[13] 폴란드 어로 오드라-니사 우시츠키예.[14] 특히 르부프 출신 실향민들이 브로츠와프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를 주제로 한 씁쓸한 농담이 있다. A: 자네 말투가 왠지 낯설지가 않구만. 어디에서 왔나? B: 브로츠와프에 살아. A: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르부프 출신인데!'''[15]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교 도서관에 이어 폴란드에서 두번째로 큰 도서관이다.[16]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첫 환자가 이곳에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은 전염에 의한 발병은 드물고 무작위 발병이나 가족력에 의한 발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첫 번째 환자가 이 곳에서 확인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