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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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후버는 FC 라사라즈(La Sarraz)와 FC 블루 스타즈 취리히를 거쳐 1933년에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 입단했다. 후버는 19살의 나이에 입단하자마자 주전 자리를 꿰찼고 그 시즌의 스위스 컵 결승에서 무실점 방어를 펼치며 그라스호퍼가 세르베트 FC를 2대0으로 누를 수 있도록 했다.
1936-37 시즌에 기록한 더블#s-7을 시작으로 그라스호퍼는 3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에는 세베리노 미넬리와 후버가 버티는 수비진의 공이 컸다. 특히 1941-42 시즌에 그라스호퍼가 다시 더블을 기록할 때에 후버는 26경기에 출전해서 23골을 실점하기도 했고 1942-43 시즌에 팀이 골득실 +69를 기록할 때 22골만을 허용하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후버는 1945년 그라스호퍼의 지역 라이벌 FC 취리히에서 축구화를 벗었다.
1.1.2. 국가대표
후버는 1933년 11월 19일에 처음으로 나티[4] 의 멤버가 되어 독일을 상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좋은 기량을 선보였지만 스위스는 독일에 0대2로 패했다. 게다가 후버의 앞에는 스위스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선배 프랑크 세슈에가 있었고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레나토 비초체로와 함께 세슈에의 백업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1935년 11월, 세슈에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스위스 대표팀 골키퍼 자리가 그대로 후버의 차지가 되지는 못했다. 그 자리는 1937년까지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고 후버는 1937년 9월에서야 4년여의 공백을 뚫고 다시 대표팀 골문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후로 후버는 대표팀 내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밀라노에서 열린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 포르투갈전에서 스위스는 후버가 골문을 지키는 가운데 2대1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월드컵 개막 2주를 남기고 치른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스위스는 2대1로 승리를 거두며 본선에서의 좋은 성적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높였다.
스위스는 1라운드의 상대였던 독일을 상대로 재경기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이어진 8강전에서 스위스는 헝가리에 0대2로 패하며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8강에 만족해야 했다. 후버는 대회 최우수 골키퍼 중 후보에 들 정도의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스위스의 또 다른 역대급 골키퍼 에르윈 발라비오가 기량을 끌어올리면서 대표팀에서 후버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게 되었다. 후버는 1942년에 헝가리를 상대로 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2. 수상
2.1. 클럽
- 스위스 슈퍼 리그 우승 4회: 1936–37, 1938–39, 1941–42, 1942–43(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우승 6회: 1933–34, 1936–37, 1937–38, 1939–40, 1940–41, 1941–42, 1942–43(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슈퍼 리그 준우승 2회: 1933-34, 1937-38(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 EU 풋볼, 트랜스퍼마크트 기준. 월드풋볼넷에선 1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스위스 대표팀의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