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양저

 


'''사마양저
司馬穰苴
'''

''''''
(嬀)
''''''
(田)
''''''
양저(穰苴)
'''최종직위'''
사마(司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00년
1. 개요
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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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체계적인 전략·전술가이자 명장.
본래 이름은 전양저(田穰苴)지만 그가 제나라에서 맡은 직책이 사마(司馬, 군사관련 총책임자)였기 때문에 씨족의 이름보다는 관직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다.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가 비록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혹은 전정저[1]라고 적혀있는 역사서도 있다.

2. 행적


진(陳)나라에서 망명온 전(田)씨 가문 출신이라 이도살삼사[2]에 의해 죽은 전개강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전씨 내부에서도 배척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영(晏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사마의 직책을 부여받고 진나라(晉)를 발라버린다.[3]
비슷한 시대의 오나라와 비교하자면 손무(손무자)와 같은 포지션에 있었던 인물로 대대로 제나라 사마들이 저술한 병법을 통합해 사마법[4] 이라는 병서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마법은 유실되어서 현대에 전하지는 않는다.
제나라를 이끈 쌍두마차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나라에 시달린 적이 없었으나 후에 탄핵을 받아 울화병으로 죽은 이후에 안영이 혼자남게 되자 제나라는 급속도로 쇠락하는 계기를 맞게 되고 이 일이 시발점이 되어 제나라는 서서히 전씨 가문에게 빼앗기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5]
[1] 양저의 오기일 가능성이 많다. 고대에는 필사로 기록을 전했기 때문에 복잡한 한자인 경우는 오탈자가 많아서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다.[2] 두 개의 복숭아로 세 무사가 죽었다는 뜻. 복숭아를 하사받지 못한 한 무사가 자결하자 두 무사가 차례로 따라 자결했다. 세 무사 모두 자기 공만 믿고 불손하게 굴었다가 그러한 최후를 맞았다. 이를 기술한 가요가 바로 양보음이다.[3] 안영은 전씨가 이미 공실을 뒤흔드는 것을 고깝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씨들을 견제하였지만 그의 전씨 내부에서의 위상과 능력을 저울질해서 사마에 추천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4] 한서 예문지에는 이 사마법이 병서로 분류되 있지 않고 예(禮)서로 묶여있다. 사기에도 나와있지만 사마양저가 지었다는 사마법은 이미 그 이전의 전승이 있고 사마양저가 여기에 살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들 대부분 그렇지만 이 사마법도 유명한 전술가인 사마양저의 이름을 차용한 책중에 하나이다.[5] 자공의 세치 혀에 의해서 오나라와의 정략적인 전쟁같은 경우는 사마양저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