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

 



'''손무
孫武

손자(孫子)'''

''''''
(媯)
''''''
(孫)
''''''
(武)
''''''
장경(長卿)
'''출생지'''
산동성(山東省) 낙안(樂安)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544년? ~ 기원전 496년?
1. 개요
2. 상세
3. 업적과 평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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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오나라의 인물. 춘추시대 최고의 명장. 고대 동양 군사전략의 최고봉이자 당대 최고의 책략가. 제나라(齊) 낙안 출신.[1] 그 유명한 손자병법 13편의 저자.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추측이 있는데, 대략적으로 기원전 544년 ~ 기원전 496년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공자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된다.[2]
조상은 진나라 왕족으로 본래 성은 규성(媯姓). 기원전 627년, 공자 완(公子完)이 제나라로 망명해 정착했을 때 전(田)으로 씨를 바꾸고 100여 년 동안 전씨 일족이 번성했는데, 손무의 조부인 전서(田書)가 거 땅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손(孫)이라는 씨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손무도 조상이 그러했듯 제나라에서 살았으나 손무가 장성했을 때 제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손빙(孫憑)과 함께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2. 상세


손무가 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오왕 합려에게 13편의 병법서를 보인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이에 대한 일화는 사기에 실려 있다.
일화에 따르면 합려는 손무의 병법 13편을 읽은 뒤 손무에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것을 제안하고 손무는 이 제안에 따라 180명의 궁녀를 즉석에서 조련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손무가 처음으로 한 것은 전권위임과 부대의 분리, 부대장 임명, 명령체계와 신호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후 손무는 합려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증표인 도끼를 걸고, 합려가 가장 총애하는 궁녀 2명을 부대장으로 한 2개의 부대에 명령을 내렸으나 궁녀들은 처음에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웃기만 했다고 한다.
이에 손무는 이를 명령이 철처하지 못하고 신호를 똑바로 하지 못한 장수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며 다시금 명령체계와 신호를 확실히 한 뒤 또 한 번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다시금 궁녀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이에 손무는
'''장수의 명령과 신호가 올발랐음에도 명령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부대장의 죄이다'''
라며 부대장 둘을 처형할 것을 명령. 이를 본 합려가 손무를 만류하자[3]
'''장수가 군대를 이끌 때에는 아무리 군주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있는 법입니다.'''
라며 뿌리치고 궁녀 둘을 처형. 직후 다시 명령을 내리자 궁녀들은 손무의 명령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본 합려는 손무의 능력보다는 총애하는 궁녀 둘을 잃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데,[4] 손무는
'''왕께서는 병서의 글자만 좋아할 뿐, 병서의 내용을 활용하지 못하십니다.'''
라며 합려를 꼬집었고, 이에 합려는 손무의 뛰어남을 알아 손무를 등용하였다고 한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에 대해, 국방TV에서 역사학자 임용한이 군사적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군대는 서양의 봉건제도 처럼 사병형태에 가까웠고, 손무의 일화는 국가가 이에 의존하는 대신에 직접 백성들을 모집해 병력을 꾸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5] 하지만 손무가 합려의 단점을 꼬집은 부분에서, 합려가 손무의 제안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고 임용한은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 일화 후 손무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데, 사기에서는 오나라가 당대의 최강국 초나라를 쳐부수고 제후들을 아우르는데 있어서 손무의 공이 컸다고만 표현할 뿐 그 뒤 손무가 어찌 되었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초나라의 수도 영을 공격할 당시 손무가 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공을 가한다는 계책을 내고, 작전을 지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료가 아닌 소설 열국지에서 나온 내용이다.
때문에 손무의 말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해 이에 대해서 손무의 이름이 초나라 전투 이후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근거로,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가 오왕을 자처하여 오나라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오군이 초에서 철수하던 도중 초군의 정규군의 반격을 받는 과정에서 손무가 전사, 혹은 내분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은거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또 한편으로는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가 월을 이기고 자만에 빠져 향락을 일삼자,[6] 이에 실망한 손무는 오를 떠나 은거하였으리라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많은 중국 드라마에서 바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케이블 채널 CHING에서 방송하는 손자병법(원래 명칭은 병성(兵聖)).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초나라 전투 직후 손무가 전란으로 가득한 세상에 회의를 느끼고 은거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손무의 행적에 밝혀진 부분이 너무나 적어 과거 손무와 손빈, 그리고 두 개의 손자병법의 존재가 명확해지기 전에는 일부에게 실존하지 않는 환상의 인물이라 평가받은 적이 있었으나, 손빈병법이 확인됨으로써 현재 이 논란은 종식되었다.

3. 업적과 평가


'''내가 병서와 전략 전술을 많이 보았지만 손무가 저술한 것이 매우 깊이가 있다.'''

조조[7]

'''오늘날 전략의 상호관계, 고려해야 할 문제 그리고 받을 수밖에 없는 제한 등에 대해 손자보다 더 심각하게 인식한 사람은 없다.'''

미국의 군사 이론가 존 M. 콜린스

손무는 춘추시대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인물로서, 전차가 위주였던 당시의 전투체계가 보병 위주로 전환되던 시대상황을 가속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원에 전차를 운행하기 편리한 평원이 많았던 반면, 오나라는 습지가 많아 전차를 운용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었고 문화권이 중원과 달랐다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8]지형에 알맞은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오나라의 정복을 가속화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특히 비록 보병의 역할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보병이 전력의 보조역할에 머물렀던 중원과는 달리 보병이 독립부대로서 주력이 된 오나라는 전차로는 넘을 수 없던 산악과 숲 등을 통과하는 등 폭넓은 진군이 가능해졌고 전차에 비해 군의 은폐성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로써 효율적인 양동작전과 분진합격, 기습, 매복이 가능해졌고 장거리 원정 및 빠른 기동전이 가능해지게 되어 전쟁의 패러다임을 한 차례 바꾸어낸 것이다.
또한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은 서양 군사학에서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대전략의 개념을 일부나마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용병술을 넘어 전쟁술 그 자체를 논함에 따라 2천 년 이상의 시대 속에서 동양의 병법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뿐더러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상적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동양군사학 최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시대 흐름의 변화에 따라 춘추시대와 달리 공성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기병의 주목성이 높아짐에 따라 손무의 후손인 손빈은 기존의 손자병법에 공성전이나 기병의 운용 등을 첨가, 또한 구체적인 진법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손자병법을 한 차례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병성(兵聖) - 2008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된 41부작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손자병법 이라는 제목으로 수입되어 채널 칭에서 방영하였다.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서론의 설명과는 달리, 아버지 손빙이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국,고씨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반격으로 두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켜 버렸고, 손무가 이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자신의 포부를 이루고자 제나라를 떠났다는 설정으로 되어있다.[9] 그래도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들과 기본적인 틀은 거의 같으므로 손무의 전반적인 인생과정과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조감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손무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다 보니 사료의 기록들이 손무에 비해선 풍부한 오자서합려, 부차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현재 네이버 시리즈온이나 왓차 등에서 제공하고 있다.
  • 도미네이션즈 - 영웅과 유니버시티의 지도자 중 하나로 등장한다.
[1] 조엽의 <오월춘추>에 따르면 오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2] 1980년대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이나 새소년에 연재한 이두호의 만화 손자병법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평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이로 그리고 있다.[3] 이때 합려가 한 말이 "그대의 능력이 뛰어난 건 잘 알았으니 그만두어 주시오. 과인은 저 두 궁녀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오."[4]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제일 아끼는 애들이었는데..."라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백미.[5] 저 시기의 일화들이 그렇듯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사실이라면 합려와 궁녀들 입장에선 너무 지나친 처사일수도 있다.[6] 이두호의 만화에서는 합려가 향락을 일삼는 것으로 그린다[7] 실제로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오늘날 전해오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8] 물론 오나라에서 전차가 운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원전 584년, 신공무신의 아들 호용이 오나라에 전차 운용술을 전수했고 오나라는 오나라 특유의 지형에서의 전차 운용법에 대한 연구 등을 거쳐 전차를 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춘추좌씨전오자서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했을 때, 초나라 중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전차는 오나라에 비해 약하니 속전속결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9] 이로 인해 손무는 자신의 절친으로 등장하는 국무구와 의도치않게 원수지간으로 남게 된다. 원래 국무구도 죽을 운명이었지만 당시 제나라의 상국인 안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초나라로 망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