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국시대)

 




''''''
''''''
'''존속기간'''
222년 ~ 280년
'''별칭'''
동오(東吳), 손오(孫吳)
'''위치'''
중국 동남부, 베트남 북부
'''수도'''
무창(222~229, 265~266)
건업(229~265, 266~280)
'''인구'''
2,562,000명[1]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孫)
'''국가원수'''
황제[2]
'''주요 황제'''
대제 손권,(229~252),
말제 손호,(264~280),
'''언어'''
상고 중국어[3]
'''문자'''
한자
'''종족'''
한족, 산월
'''종교'''
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통화'''
오수전, 대천(大泉)
'''성립 이전'''
후한
'''멸망 이후'''
서진
'''현재 국가'''
중국, 베트남
[image]
삼국의 실제 행정력[4]
[image]
지도의 노란색 영토
1. 개요
2. 역사
2.1. 오나라의 성립
3. 영토
4. 인구
5. 사회
6. 경제
6.1.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6.2. 촉한과의 경제 규모 비교
6.3. 둔전 제도
6.4. 개발영주적 지배체제의 형성
6.5. 화폐, 상업
6.6. 산출되던 물산
7. 군사
8. 문화
9. 해외 교류
10. 오나라의 몰락[5]
10.1. 주종관계의 해체
10.2. 둔전체제의 붕괴
10.3. 오나라의 전력상실
11. 기타
12. 역대 군주
12.1. 계보
13. 창작물 속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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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삼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 수도는 건업(지금의 난징).
강동 손씨 정권을 실질적으로 쌓은 것은 추존손책이며, 공식적인 초대 건국군주는 이를 물려받은 손권, 마지막 군주는 장락공 손호이다. 국호인 오(吳)는 198년 손책이 오후(吳侯)로 책봉되었을때 사용되었던 땅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더 거슬러 올라면 손씨일가의 고향인 오군(吳郡)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군벌 손책이 기반을 닦고, 그의 동생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개국 이후 촉한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조위와 서진에 대하여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성의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합비전선에서 꾸준히 조위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실제로 벌어진 규모나 담론의 거대함, 그리고 지속성 면에서 촉한의 북벌보다 낮게 평가된다.[6] 그리고 단 한 차례조차[7] 성공하지 못했다.[8][9] 여러 사건 사고 끝에 내정 개혁에 실패하였고, 결국 서진에 병합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다른 명칭인 육조시대는 오나라부터 건업에 차례대로 도읍한 여섯 국가들(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에서 유래한다. 오나라는 육조 중 첫 번째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사마씨 진나라가 훗날 북방민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와 오나라의 뒤를 잇는 2번째 남조 정권이 된다.
중국 역사에서 오(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기 때문에 동오(東吳), 손(孫)씨성을 붙여서 손오(孫吳)로도 불리며 간혹 남오(南吳)로 부리기도 한다.

2. 역사


198년
손책, 오후로 책봉.
208년
적벽대전
219년
형주 공방전
221년
손권, 오왕으로 책봉.
222년
이릉대전 / 손권 칭왕.
229년
손권, 황제 즉위.
231년
공손연과 외교 분쟁
242-252년
이궁의 변
265-267년
무창 천도 시도
279-280년
서진의 침공으로 멸망.

2.1. 오나라의 성립


삼국중에 건업(建業)[10]을 수도로 하는 오나라는 오군(吳郡) 부춘(富春)[11]의 손씨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 부춘이라고 하는 토지는 2세기 말경에는 아직 강남에 있어서 한민족의 식민지로서 최전선에 위치하는 마을의 하나였고, 강남의 원주민이었던 산월의 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곳은 마치 서부극에 나오는 개척의 제1선 기지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손씨의 한사람인 손견은 젊었을 때부터 그와 같은 변경 마을의 유력자였다고 여겨진다. 팔힘이 세고 전쟁에서 공적을 올린 손견은 그 공적에 의하여 후한의 정부에 발탁되어 어떤 현의 차관으로서 양자강의 북쪽으로 부임했다.
당시, 회하양자강 사이의 지방에는 환관정부의 압정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중원의 선진지대로부터 많은 빈민이 흘러들어왔고, 그 중에는 무뢰한이 많이 있었다. 마침 184년에 황건의 란이 일어나자 손견은 이 무뢰배 젊은이들을 모아 1군을 조직하고 황건토벌군에 속하여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군웅할거의 혼란속에서 그는 192년에 전사했지만, 그 아들인 손책도 역시 이와 같은 거친 임협자(任俠者)들의 집단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손책은 이를 자신의 중심세력으로 하여 강남에 할거할 의도를 굳혀갔다.
그 무렵 강남에서는 당시의 오, 지금의 소주(蘇州)일대와 회계(會稽),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일대가 일찍부터 개발되어, 오나라에서는 주(朱)씨, 장(張)씨, 고(顧)씨, 육(陸)씨 등과 같은 대호족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회계에도 우씨, 위씨, 공씨, 하씨등의 호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손책은 195년에 본격적인 강남진출 작전을 개시했는데, 그 군의 규율은 정연한 것으로써 약탈하는 일이 전혀 없고 "항복하는 자는 전력(前歷)을 묻지 않는다.
종군희망자가 한사람 있으면 그 일가는 부역을 면제한다. 종군을 희망하지 않는자라도 강제하지 않는다"등의 포고를 내어 강남의 사람들은 손책의 밑에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손책은 또한 오와 회계의 유력한 호족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공작도 동시에 진행시켰다. 그들 토착호족의 입장에 있어서도 강남의 각지에 약소권력이 할거하는 상황보다도 강남전체를 하나로 하는 강력한 정권이 생기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1장에서 기술했듯이 당시의 강남은 개발도상에 있던 식민지이고 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양자강의 북으로부터 들어온 거친 임협자 집단의 군사력과 오와 회계의 재지호족 세력과의 협력에 의하여 손책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권이 탄생한다. 손책은 200년에 죽고, 동생인 손권이 이 정부를 주재하는데, 오오가와 후지오(大川富士夫)의 조사에 의하면 이 손오정권의 인적구성은 강북계와 강남계가 거의 절반씩이라고 한다. 이것은 강남재지의 호족세력만으로는 아직 자립적인 군사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오와 회계이외의 강남에서는 재지호족의 성장이 미숙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손오정권이 수도로 정한 건업, 즉 지금의 남경조차 그때까지는 아직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보았듯이 화북에서는 각지에 호족이 성장하였고, 그에 대하여 자립 농민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향론이 활발했던 것에 대하여, 강남에서는 향론의 활발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보아 거의 없었고, 강남에서의 선진지대인 오와 회계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강남에서는 지식인층이 아직 극히 엷었는데 오의 호족인 고씨, 육씨, 장씨중에는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배출되었으나, 그 사람들도 손오정권하에서는 무장으로서 활약하는 일이 많았다. 화북에서는 이전과 같이 무장이 지식인인 "사"계층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강남에서는 교양인조차 오히려 무장의 길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이 정권에는 이미 화북에서도 이름을 떨친 북방출신의 명사가 정치고문으로서 2, 3명이 가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북의 혼란을 피하여 이주해 온 지식인으로 장소가 그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이 남하해 오는데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큰 문제가 되었을 때 장소가 무기력한 항복론을 주장한데 대하여 조정의 의견을 주전론에 통합하여 조조의 군대를 적벽에서 괴멸하여 오나라의 독립을 확보한 것은 주유노숙등 강회의 임협 출신자였다. 화북 명사의 발언권은 손오정권 중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손씨를 섬기던 냥야제갈근은 촉한의 유비를 보좌한 유명한 제갈량 즉 공명의 형으로 이 형제는 조조에 대한 한오동맹의 체결에 기여한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양양부근으로 이주해 와있던 제갈량이 유비로부터 소위 삼고의 예로서 맞이되었을 때 조조에 대항하는데에는 오와 동맹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 뒤에 형주에서 巴·蜀[四川省]을 취해야 하는 것을 이미 유비에게 진언하고 있다. 208년 남하하는 조조의 군에 쫒기어 겨우 하구를 유지하게 된 유비는 마침 시상에 진을 치고 있던 손권의 군영에 제갈량을 파견하여 무사히 한오동맹을 체결할 수가 있었다. 그 때 손권은 제갈근에게 말했다.

자네는 공명과 형제다. 게다가 동생이 형에게 따르는 것은 사람의 도로서도 순당하다. 어째서 공명을 우리진영에 붙들어 두지 않는가.

동생은 그의 몸을 사람을 위하여 버리고 충성계약을 하여 주종의 분을 정했기 때문에 사람의 도로서 두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동생이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쪽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갈근의 이 대답은 “신명을 관철하는데 충분하다”고 하며 손권이 크게 감복했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충성계약을 하였다”고 번역했는데 그 원문은 "질(質)을 위임하여 분(分)을 정한다”이다. "質"이라 하는 것은 "치(雉)"로 통하고 옛날 춘추시대, 주군을 섬길때 을 바쳐서 충성의 약속을 맺는 관례가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실제로 꿩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위지(委質)"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충성계약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에 의하여 맺어진 주종관계는 형제간의 육친관계와 "형에게는 공손한다"라고 하는 윤리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인의 도”라고 여겨졌다. 위의 문답은 그러한 당시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는 개인과 개인과의 사이에 맺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종적관계 즉, 주종관계가 사회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임협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은 지식인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보편적으로 있었다. 즉 "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인정해 준 자로서 제자는 선생에 대하여 아랫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준 윗사람에 대하여 이후 오랫동안 헌신적인 충성을 다하였다. 이를 "문생, 고리"의 관계라고 한다.
"고리"라 하는 것은 일찌기 부하였던 자라는 의미로, 현재에는 이미 부하가 아닌데도 옛날의 윗사람에게 언제까지나 은의를 계속 느끼고 있는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은 문생고리관계는 이후 육조시대를 통하여 인간관계를 규제했다. 그것은 실로 봉건적인 인간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봉건적 종적인 사회관계는, 화북에 있어서 위진의 사회에서도 물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인이 우선시되는 귀족제사회가 만들어져 감에 따라 한말의 전란기에 보여지는 임협적 주종관계가 자취를 감추고 문생, 고리적 주종관계가 눈에 띄게 된다. 일류의 지식인인 제갈량의 경우는 유비를 둘러싼 임협적 주종관계와 삼고의 예를 가질만큼 인격을 인정받은 데 대한 은의감의 혼합상황이 느껴지는데, 이윽고 유비의 사후, 그가 승상으로서 촉한의 유지와 위에 대한 공격에 전심할 때, 촉한에서는 입협적 주종관계보다도 그의 문인으로서의 합리적 통치가 우선되어 간다.
그런데 오나라에서는 입협적 주종관계가 국가로서의 통합을 이루는 근간으로까지 되어 갔다. 그것은 결국 오나라 (말하자면 양자강 하류지역)의 후진성은 촉한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12]

3. 영토


수도는 건업(建業. 오늘날의 난징)이고, 가끔 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 제2수도급 무창(武昌. 오늘날의 우한 부근),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 도시. 그리고 오늘날의 대만하이난 섬도 오나라의 영역이었다.
얼핏 보면 오나라의 영토 크기가 위나라보다도 더 커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양쯔강 남방은 밀림으로 뒤덮힌 지방으로 지배 영역 중 남방의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13] 오의 통제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그러니까 오나라는 면보다는 이런 밀림 가운데 간헐적으로 개척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였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여러 도시들과 비슷한 형태였다. 다만 오나라 영역중의 핵심인 양쯔강 하구지역 (오늘날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부근은 전국시대부터 널리 개척된 곳이었고, 후에 손에 넣은 형주도 곡창지역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오나라가 삼국정립의 한 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양주 지방에 해당되는 강남은 동진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형주도 무릉 쪽은 이민족들 투성이에다가 교주 쪽도 손권 사후에는 폭정으로 인해 막장이 된다. 실제로 오의 강역 수준은 위 지도만큼이 아니라, 동에서는 건업으로부터 서로는 이릉과 자귀에 이르는 장강 유역의 긴 띠의 형태로 보는 의견이 존재하고 양주 쪽은 장강 유역의 긴띠, 형주 쪽은 장사, 영릉, 계양 정도 까지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후한 시절 주를 따진다면 위나라는 9개 주 반[14], 촉한은 익주 하나뿐인데 오나라는 2개주 반[15]였다. 그나마도 교주[16]는 13개 주 중에서 가장 후진 주인 데다가 인구도 거의 없는 수준[17]이었고, 사실상 사섭 일가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라서 없는 것이나 같았다.[18] 그나마 얻은 형주의 반도 전란의 중심에서 수십 년 동안 있었던지라 유표 때의 부유함은 찾기 힘들었다. 삼국전투기에서도 이 점을 지적해서 오의 근거지인 동오 지방만 보면 위나라의 청주 정도밖에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다.
위나라도 서량 지방이나 태원으로 대표되는 병주에 대한 지배력은 약했다고 보여지며, 촉한도 사천 지방의 장강 또는 큰 강의 이남, 운남(남만)은 적지 않는 반란 및 이민족 거주 지역이라[19] [20]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달리 실 통치 영역이나 영토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더 좁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강남 지방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개발되기 시작한 건 손권 치세 중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서진이 캐발살나고 동진이 건국된 뒤 중원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남북조시대며, 강남이 강북을 앞지르기 시작한 건 천년 뒤인 남송때의 이야기.

4. 인구


세력은 촉한보다 조금 나았다는 식으로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ex. 위:오:촉한=6:3:1을 주장한 미야자키 이치사다) 이는 사료상으로도 확인되는 인구에 따른 것이라 보통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서 지리지(전한 시기, AD 2년 기준)에 따르면 형주(3,775,884명)+양주(3,027,598명)+교주(1,372,290명) : 익주(4,548,654명) 사이에는 약 2:1 정도의 차이가 성립하며 후한서 군국지(AD 140년 기준)링크에 따른다 해도 형주(6,315,952명)+양주(4,338,538명)+교주(1,114,444명) : 익주(7,242,028명) 사이에는 약 1.65:1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후한이 전한보다 지역에 대한 통제력 및 인구 파악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호족의 세가 강한 편이었다.) 전한과 비슷한 2:1 정도의 인구비가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다. 인구가 밀집된 형북 일대가 오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인구 피해는 촉한에도 존재함을 감안한다면 통상적으로 2:1,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1 정도의 인구 비례가 존재한다고 예측된다.
또한 촉한이 망할 때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의 인구는 - 호(戶) 28만 / 남녀구(男女口) 94만 / 대갑장사(帶甲將士) 10만 2천 / 관리(吏) 4만 명 하여 약 인구 108만 2천 명에 병력 10만 2천 명, 오의 경우에는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 4개 주(州) / 43개 군(郡) / 313개 현(縣) / 호(戶) 52만 3천 / 관리(吏) 3만 2천 / 병(兵) 23만 / 남녀구(男女口) 230만 하여 약 인구 256만 2천 명에 병력 23만 명으로 촉의 인구가 2배를 넘는다.
또한 통전 7권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아예 촉한은 건무 원년에 인구 90만 오나라는 230만으로 역시나 두 배가 넘는다.[21] 이는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한&후한 시기 지역별 인구 비례와도 유사하다.
동오와 촉한의 인구 비교표
동오
촉한
호(戶)
인구(민간인)
병력
관리
호(戶)
인구(민간인)
병력
관리
52만 3천 호
230만 명
23만 명
3만 2천 명
28만 호
94만 명
10만 2천 명
4만 명

참고로 오는 멸망 직전 영토가 4주, 43군, 313현 정도였다고 한다.

5. 사회


촉한이나 위와 비교하자면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중에서도 일종의 개발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22][23] 이 때문에 손권이 별로 영토 확장을 못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등 이시대의 강남 정권들을 다룬 서적들을 살펴보면 오의 국가 구조는 이러한 개발 영주들과 피란민으로 구축된 측근 세력들 간의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다고 이야기된다.오나라가 조위와 촉한과 비교했을 때 보이는 불안 요소 세 가지- 내부 반란, 장수들의 충성심 부족, 관리 안 되는 황족들 오의 사성을 위시한 지방 호족들이 꾸준히 오나라의 주축이었으며, 개국 공신급이라고 할수 있는 정보, 한당, 반장 같이 고향을 떠나 오나라에서 활약하게 된 자들은 본인이 죽고나면 그 일족이 정계에서 영 힘을 못 쓰는 걸 넘어, 언급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몰락하게 된다.[24]. '''주유'''[25], 주태, 진무, 여몽 등등의 공신들의 일족조차도 언급이 거의 안 된다. 오나라가 건국된 시점부터는, 오의 사성 중 장온의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3성('''육씨'''[26], 고씨, 주환의 주씨)과, 장소의 일족인 장씨, 제갈근의 일족인 제갈씨, 전종의 일족인 전씨, 우번의 일족인 우씨, 주치의 일족인 주씨, 설종의 일족인 설씨, 보즐의 일족인 보씨, 여범의 일족인 여씨, 그리고 황족인 손씨가 아니면 아예 제대로 언급도 안 될 정도. 다양한 성씨의 인재가 넘쳐나는 위나라와 촉한[27]과 비교해보면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막강했고,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암투를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아직 미개척지에 가까운 강남 일대[28]를 기반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한이나 위가 그래도 과거 400년간 중원을 군림한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에[29] 잘 구축된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는 탈봉건적 중앙 집권 국가였던 반면에 한무제시기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던 지역이 많았던 만큼 기반으로 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연립 정권인 오나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앙의 힘이 약하고 지방 호족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오나라 장수들 열전보면 커리어에 이민족 토벌이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이민족도 많았고[30]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며 나라의 건국후에도 행정 구역 정비와 호족들을 관리하는데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손오의 성립은 손책의 강동 정벌에서부터 시작인데 한미한 가문인 손가[31]가 이 지역을 명분없이 무력으로 장악한 데다가 지역 명사들과도 마찰이 심했기 때문에 건국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영천 호족들과 조씨 군벌 세력이 서로 간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결합하여 성장한 조위나 유언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호족들을 때려잡고 유장 시기 혼란을 지나 유비가 입촉한 이후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호족들을 휘어잡고 중앙 정부가 확실한 권위를 잡은 촉한과 달리 기본적으로 황실의 영향력이 약했기 때문에 오의 사성 같은 대가문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황실 구성원의 내분도 촉한이나 위에 비해[32][33] 이런 쪽으로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과는 달리 손책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이후엔 오나라는 일부 세력이 지속적으로 이탈하는 등 홍역을 치루었고 이 때문에 손권은 친위 세력 구축에 많은 힘을 쏟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말년에 이궁의 변으로 본인 스스로가 황족 간의 난리를 조장한 격이 되어 버렸고 손오가 망할 때까지 이는 오나라 황실의 고질병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위에 나타나는 인구 통계자료 이러한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데, 사실 관리호(吏)는 고관대작 만이 아니라 서리, 아전 같은 '지방 행정 공무원'을 통괄한 것이다. 인구는 촉한의 3배 가까이 되는데 관리의 숫자는 오히려 촉한보다 적은 것이다. 당연히 국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호족들은 약한 통제력 때문에 할거할 수 있게 된다.
이게 화북 지방의 피란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의 구성원들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 사실 한(漢)나라 이래로 권위있는 왕권을 추구한 중국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분위기의 사회는 거의 '혐오스러운 무정부 지역', 일본 위진 남북조 개설서의 비유따나 '''총과 황야 대신 검과 밀림으로 배경을 옮긴 서부 개척 시대'''라 할 정도로 신천지나 다름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위에서 언급했듯, 손씨 정권 역시 유교적으로 만족스러운 명분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손책, 손권 시대에 오나라에 살던 명사(화흠 등)나 신하가 조조 측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고, 오나라의 장수가 위나라로 도주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으며 촉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면 촉빠가 되는 신하들이 많았다. 심지어 손권 사후에 손씨들이 난장판을 벌여서 국가가 막장이 되자 주적은 내부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촉한에 밀서를 보내 적당한 때 길을 열어줄테니 군대를 끌고 와서 난리 평정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을 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공적 기록이 많은 위서나 기록 자체는 많이 소실되었지만 그래도 진수가 원래 촉한의 신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정에서의 일을 많이 담은 촉서와는 달리 오서는 뭔가 기이한 일들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그 덕분인지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역사가 아침 드라마 틱한 느낌을 받는다. 황후가 궁녀들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34]
칭제의 명분 자체도 그럴싸하지 못한 편. 오나라의 칭제 자체도 위나라가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것이나, 촉한이 한의 계승을 내세우는 것에 비하면 그럴 듯한 명분이 없었다. , 촉한 두 나라가 모두 칭제하자 자존심에 덩달아 칭제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손가(孫家) 3대의 군사 업적이 있긴 하지만.
박물지에 따르면 예장군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으며,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박물지가 쓰인 시기를 보자면 오나라 때도 이런 풍속이 있었을 것이다.

예장군豫章郡의 사대부들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그런데 그 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한 푼 까지도 다투며 돈을 벌어 그 남편의 수레, 말, 옷 등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 남편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다시 부잣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도, 여자들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바친다. 먼저 들어온 아내들이 비록 몇년을 부지런히 하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 집안에 가득할 정도일지라도, 오히려 방출되어 자리를 뒷사람에게 피해준다. 박물지 314(10-4)


6. 경제



6.1.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국가 구조는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삼국지 자체만을 다룬 기록의 경우 아무래도 촉한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오지만, 위진남북조의 사회 경제사 측면에서 본다면 오는 거의 위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다뤄진다.[35] 이는 중국 경제사 측면에서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점을 오나라, 개중에서도 손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 이 시기 오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강동 지역인 남방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지역을 넓혔다. 당대의 오 지역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아서 행정 구역을 쉽게 늘릴수 있었다.
특히 건업을 수도로 정한 일은 반드시 다뤄질 정도로 중요시된다. 손권이 수도로 정하기 전까진 도시 근처에도 미개척지가 존재할 정도로 별볼일 없던 지역이 손권이 수도로 정하고 오나라 시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남 지역 정권들의 수도로 사용될 정도로 발전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위진 남북조 시대에서 건업을 수도로 한 남조를 가리키는 표현인 육조시대의 선두로 오나라가 꼽힌다.
전한 시기 아주 강성한 제후왕이자 오초칠국의 난의 주동자였던 오왕 유비의 영지였던 오나라의 부유함(<사기> 오왕 비 열전에 따르면 구리와 소금이 많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손권의 강남 개발 이전에도 강남은 개발이 많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한 시기 오나라는 생각처럼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대략 장강 하류 삼각지와 그 주변 지역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다른 왕들에 비하면 아주 크고 강성한 것이었다.
또, 양자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고, 특히 남쪽은 고온다습하여 농사를 지어 작물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북쪽보다 유리했다. 특히 하류지역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엄청나게 넓게 자리잡고 있어 그 옛날 상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읍락을 이뤘던 유적과 유물이 있을 만큼 역사 깊은 곳이다. 따라서 인구부양력은 중원에 비해 그다지 밀리지 않았으며 촘촘한 국경선을 서로 맡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전란은 더욱 적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나라의 춘추전국쟁패기를 보면 동원하는 군대의 양이 다른 나라의 몇 배는 될 때가 자주 나오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나타난 군벌들 중 상당수가 초나라 유민[36]들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인구수 하나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오나라가 풍요로운 화이난(회남) 지방을 손에 넣지 못하고 회수를 방어선으로 삼지 못한 탓도 있다. 실제로 초나라부터 시작해서 동진, 유송, 남제, , 등 다른 육조 왕조와 달리 오나라는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왕조였다. 남송도 회수를 경계로 삼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거기에 손오 정권 시절 강남 개발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춘추전국시기 장강 유역인 형초, 오월 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경제와 문화는 어느 정도 발전했으나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생산력은 낮은 상태였다. 그래도 적어도 생계를 꾸리는 데 큰 곤란은 없어 토지 개간에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손오 시기에 북방의 선진 농업 기술이 강회 이남 지역에 전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러한 혜택을 입은 지역은 넓디넓은 남방 지역의 일부일 뿐이며 그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삼국 시대만 하더라도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동진 시대에 들어서야 화북에서 난을 피해 대규모의 유이민이 이주해 북쪽의 생산 도구와 기술이 남방의 논 농사와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영토를 개발하기엔 오나라는 영토에 비해 인구 부족에 시달릴수밖에 없었고 행정 장악력도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손권은 지방의 주요세족에게 행정력과 개발을 위임했고 그 결과, 사족에게 소속된 이들은 중앙 정부에 소속되지 않아 조세와 요역,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개인의 부곡(部曲)이 되어 호족 중심의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과장해서 반란이 일년 열두달 일어났다. 인적 자원을 채우기 위한 어쩔수 없는 방편으로 손권의 인간 사냥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이 때문에 대만까지 가서 대만 원주민들을 끌여들여 인구를 늘리려다 실패해서 목숨을 잃는 장수도 속출했다. 이는 동진 시기에 많은 유이민이 들어오면서 이런 인구 부족은 어느 정도 해결을 보게 된다.
이 오나라의 존재가 후에 남북조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만약 오나라가 장강이남을 개발해놓지 않았다면, 오랑캐의 침입으로 장강 이남에 쫓겨온 동진은 존립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조시대의 남조는 거의 오나라를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오나라 멸망 후 겨우 30년만에 동진이 같은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동진은 오나라와 마찬가지로 건업(건강)을 그대로 도읍으로 삼았고, 오나라가 닦아놓은 기반으로 강남을 개발을 계속한다. 다만 동진 문서에도 나오지만 화북에서 내려온 유이민 귀족들에 의해서 오나라 유민, 호족들은 차벌을 받게되고 그에 따른 반항심도 높았다.
경제 개발에 따른 환경의 변화도 있었는데 한나라 이래 진행되어 서진 말에 이르러 대규모로 인구가 이주했던 강남에서는 특기할만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본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땅은 넓지만 인구는 희박했고, 죽목(竹木)이 우거진'(사기, 권 129) , 강북보다 큰 규모의 산림을 가졌던 강남에서 산림의 부족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러한 문제를 촉발했던 것은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적벽, 이릉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화공, 장강과 한수, 회수 일대에서 발생한 수전에서 사용될 전함의 건조 등은 그 일대의 산림을 크게 훼손했다.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손오 정권[37]과 그 이후의 남조 국가들은 목재 부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재의 조달과 소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산림의 부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후한 말~삼국시대에도 목재 부족과 관련된 일화가 몇 차례 소개되는데, 손권은 건업에 궁궐을 건설하면서 무창에 있는 자신의 궁궐을 헐어서 목재를 충당했으며, 손휴 시대에는 광릉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지역의 무덤들을 도굴해 목재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현지 조달, 타지에서의 목재의 공급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6.2. 촉한과의 경제 규모 비교


이렇게 연구가 되면서 불거진 문제가 위, 촉한, 오 삼국의 경제력 순위. 과거에는 인구와 영토를 기준으로 해서 삼국의 경제력을 위 > 오 > 촉한 순으로 평가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자 아직 저개발 상태의 장강 유역이 이미 500년간 개발이 되었고[38][39] 토질도 비옥했던 사천 지방보다 어떻게 더 부유할 수 있냐는 주장을 하는 촉빠들도 있다.
그러나 오나라의 인구는 200만이 넘어서 100만에 불과했던 촉한보다 두배나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40]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력이었으므로, 인구수로 보면 촉한이 오보다 경제적으로 나았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일단 장강 이남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에 반해 장강(양쯔강) 하류는 춘추 전국 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41], 오나라가 장악한 형주 남부 지역(현재의 호남성지역) 하나만 가지고도 촉한이 장악한 익주 전체의 면적과 맞먹기 때문에, 아무리 촉한이 국가 운영을 탄탄히 해도 근본적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오나라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촉한이 그렇게 잘 버틴 것은 절대적인 국력의 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그 작은 영토에서 최대한 국력을 창출하고 그 국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3. 둔전 제도


위의 경우 둔전이 군현 지역내에 있더라도 군현의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손오는 둔전관이 군현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258년 손휴가 내린 조서(既出限米,軍出又從)를 보면 둔전병은 따로이 조세(限米)를 납부해야했다. 이듬해 내린 조서에는 주군의 관원과 백성 그리고 둔전병들이 농사를 등지고 장삿꾼이 된 것은 과중한 세납 때문(由租入過重)이라고 했다.
강북의 거친 임협자들이 일군의 장군으로서 강남으로 진출한 후, 그들은 세습을 허락받은 그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기초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장군들에게는 처음에 봉읍(奉邑)이 주어졌다. 또한 몇 개의 현이 어떤 장군의 봉읍으로 되면 그 장군은 그 현의 상급관리를 자유로이 임명할 수가 있고, 그로 부터 생기는 조세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장군은 사실상 그 봉읍 전체를 완전히 지배하는 영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렇듯 손권은 오왕에 즉위하기 전까지 봉읍제를 실시, 손가 정권의 휘하에 들어온 장수들 개개인에게 일정한 영역의 봉읍을 나누어주고, 그 봉읍에서 거둔 세금과 인력으로 장수들마다 제각기 병력을 편성하고 군비를 갖추도록 했다.
후한 시대 어느 한 지역에 고정적으로 부임한 장군은, 그 지역 지휘관 및 병사들과 끈끈한 의존적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오 또한 비슷한 군사모험가의 손으로 성립된 정권이었고, 북쪽과 마찬가지로 오의 병사들도, 자신을 지휘하는 장군들과 농노 비슷한 세속적 예속 관계를 형성했다. 비슷하게 오의 장군들은 총사령관 손권과 충성심을 매개로 묶였다. 일단 건업을 중심으로 손오 정권이 수립되자, 오 왕조는 장강 일대의 군사호족들을 통합했고, 그들의 사병을 국가의 군대로 재조직했다. 각 호족 가문의 우두머리는 장군 혹은 궁중관료로서 작위를 수여받았고, 북쪽의 조위 정권과 달리,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그 아들이 그대로 사병을 인수받았다.
타지역에서 온 망명자 출신의 장군들은 특정 지역 봉토를 과세소득의 일종으로 받았고,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이는 아마 강북, 혹은 양주 외부 출신의 사족, 대성들에게 식읍과 봉지를 줬던 손권의 방향성(대표적으로 장소에게 식읍 1만호를 떼준다던가하는 식의)을 말하는 것이다. 장군이 거느린 병사들은, 숲의 벌목, 늪지 개간, 남부 밀림지대를 농지로 바꾸는 각종 노역에 투입되었다. 군대가 개척한 토지는 이후 북조와 마찬가지로 둔전으로 전환되었고, 평시에는 병사들 자신의 생계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부역과 군역의 보조수단으로서 토착이민족 집단도 존재했는데, 이 집단은 "산월족(山越族)"이라 불렸다. 한족 정복자에 감화된 산월족 무리는 그들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남쪽의 유력 호족들은 보다 강력한 토지소유권의 확립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 와중 많은 농부들이 대가문의 통제 밖에서 작은 농지를 꾸려나갔다. 장강 유역의 경우, 오직 호족 소유의 대토지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222년에 정식으로 오나라가 성립되자 봉읍제는 폐지된다. 그렇지만 오나라의 병사는 단순히 전투에 종사하기 위한 전사가 아니라 전투가 없을 때에는 농경의 의무를 지게 되어 있었다. 오왕에 즉위하면서 손권은 이를 둔전제로 개편하는데, 각 지역에 독을 임명하여 장수들을 상주시키고 저마다 군을 편성하게 한 것은 봉읍제와 다를 바 없으나, 둔전제를 시행함으로써 아직 개간이 되어있지 않던 강남 일대를 조직적으로 개간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러면서 오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각자의 지휘관들 휘하에서 둔전 개간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군인으로 징집되어 각자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아 집결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즉, 장군들이 이끄는 사병적인 세습군단은 각각 원칙적으로 둔전하면서 자급에 노력하게 되어 있었다.
오나라가 봉읍을 폐지하고 모두 둔전으로 전환한 것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초창기를 지나면서, 군대의 작전행동에 여유가 생기고 병사를 농경에 종사시킬 수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고, 가가의 장군이 비용을 다 대어주는 봉읍보다도 둔전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처음 수도 건업 동쪽의 비릉(毗陵, 강소성)은 봉읍이었으나 이윽고 그곳에는 지금의 무석(無錫)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토지에 둔전이 일으켜지고, 또 수도 주변의 단양(丹陽), 진릉(晉陵)일대도 대규모의 둔전지대가 되었다. 단순히 수도 주변뿐만 아니라 심양(尋陽)과 위, 촉한에 대한 국경방위군의 주둔지를 비롯하여 군대가 있는 곳에서는 각지에 둔전이 열려져 갔다.
이와 같이 각지에서 둔전을 일굴 수가 있었던 것은 당시의 강남에는 아직 광대한 황무지, 미개간지가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각지에 배치된 둔전군은 오히려 토지개발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손오정권하의 병사는 이처럼 개발을 위한 노동력이라고 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말할 것도 없이 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노동력의 보급원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보급원이 당시의 아직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강남의 원주민인 산월(山越)의 거주지였던 것이다.

손오정권의 구성하는 장군들은 저항하는 산월을 자주 토벌했다. 그들에 의하여 정복된 산민들은 정벌한 장군과 부장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중의 강한 자는 병사로서 둔전군에 넣고, 약한 자는 군현에 호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병역은 면제되었지만 논밭을 할당하여 강제적으로 농경노동에 종사시켰다. 따라서 일반의 군현에도 이와 같은 둔전민이 있었고, 또 둔전군을 이끄는 장군이 군현 장관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요컨대 개발도상에 있었던 강남의 많은 지역에서는 장군들이 세습을 허락받은 사병적인 둔전군을 통솔하여 각각 미개발지에 군림하고, 그 무력과 재력을 기초로 하여 엄한 군정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장군이 군현의 장관이면 원래 공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던 군현의 지배도 사병적인 색채가 강한 둔전군을 중핵으로 한 관할하의 군현에, 부적된 피정복민을 둔전지에서의 농경에 묶어 놓고, 이를 사역으로 구사하는 개인적인 군정지배로 기울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이들 군현에 아직 유력한 토착호족도 없고 또 자가경영농민도 광범위하게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또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엄한 군정지배는 오히려 자립농민의 성장을 방해했다고 할 수 있다.[42]

6.4. 개발영주적 지배체제의 형성


오와 회계등 일찍부터 개발이 진행된 곳에서는 오의 고씨, 육씨 등과 같은 대호족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그곳에 예속되어 있던 다수의 전객(佃客)을 언제라도 사병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병은 평시에는 전객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또한 그 곳에는 무기고의 설비도 있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강남재지의 호족으로서 오나라의 장군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육손등이 그러한 인물로, 강북에서 온 개척 둔전군장과 마찬가지로 산월 토벌과 같은 사람사냥 전쟁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그들도 또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와 회계등의 재지호족은 화북의 호족보다 영주화가 앞서 진행되어 있었고 개발영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들은 강북으로부터 들어온 손씨 통솔하의 무장등 개척둔전군과 협력하여 개발영주제라고도 해야 할 지배체제인 손오정권때의 형태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은 강남사회의 상황은 화북의 사회와는 꽤 달라지고 있었다. 선진화 된 화북의 사회에서는 한편으로 호족의 힘이 커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숙한 자가경영 농민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구하는 향론이 활발해져[43] 호족의 영주화경향에 저항하고, 이를 무인영주가 아닌 문인적인 귀족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44] 이에 대하여 강남에서는 자립농민의 전반적인 미성숙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오와 회계등의 재지호족의 개발영주화를 허락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의 무장들에게 둔전군을 중핵으로 하는 개발영주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즉, 강남은 개발도상에 있는 후진적인 사회이므로 개발둔전군에 의한 군정지배와, 오와 회계의 토착호족의 개발영주화 경향이 두가지 기둥위에 손오정권이라고 하는 개발영주제적인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45]

6.5. 화폐, 상업


동탁이 화폐 제도를 말 그대로 개박살낸 이후, 중국 전토에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현물 거래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위에서 오수전을 다시 제대로 발행하고 촉한에서 직백오수, 태평백전 등의 당백전을 발행했던 것처럼 오는 가화 5년(236)에 대천오백大泉五百전을 주조했는데 가치는 하나 당 오수전 500전, 적오 원년에는 대천당천当千, 대천이천二千, 대천오천五千까지의 당백전들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화폐 경제를 되살리려 한 손권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화폐보다는 실물 거래를 더 신뢰했고, 마치 훗날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과 비슷하게 화폐 장려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대천오백은 결국 적오 9년(246) 금대전(禁大钱)령을 내려 사용을 금했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동전들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인다.
한편 촉한에서 만든 태평백전등이 오나라 일부 지역에서 유통되기도 했는데, 이 태평백전 역시 크기와 중량이 일정하지 않은 악화(惡貨)[46]였으므로, 오나라 내에서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는 많은 자료가 추가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이미 화폐 경제 자체가 박살난 상황에서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아예 유통이 안 된 동탁의 소전과 달리 촉한의 직백오수와 그것을 계승한 화폐들은 촉한 내부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유통되어, 비록 이전 시대에 비하면 악화였으나 이미 화폐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가 가능했기에 촉한 경계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유통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나라 중앙 정부가 유통한 화폐가 아니었으므로 오나라 전체에 줄 수 있었던 영향은 크지는 않았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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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화폐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이 목간은 236-237년(오 가화 5-6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사오간 혹은 주마루오간 등으로 불리는 14만점의 목간 중 하나이다.[47] 이 목간은 창고 담당 관리들이 그 해 12월 분의 세금 얼마치를 걷어서 군으로 보낸다는 보고서 같은 것인데, 정확한 양은 쌀 44곡 3두라고 되어 있다.
문제는 동전(錢)으로 따지면 8억전이라고 써 있다는 것인데 동탁이 소전을 만든 이래로 당시 인플레이션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저런 인플레이션 수준이면 오나라에서 찍어낸 돈의 의미가 없을거 같고, 오나라 인들이 촉한의 화폐를 썼다고 하는 이야기나 손권이 고액전을 발행했다고 하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듯 하다.장사간독박물관 사이트 참고
미야자키 이치사다에 따르면 손권은 이런 문제를 형주와 양주를 합쳐서, 그러니까 장강을 교역 통로로 만들어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일껏 장강을 손에 넣었더니 촉한과 위의 전쟁 연발로 사람들이 다 죽고 도망가서 비었다는 안습한 일화도 있다.

6.6. 산출되던 물산


장강 일대는 예로부터 벼농사에 적합해 쌀이 많이 생산되어 식량이 풍족하였다. 또한 강과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각종 생선들도 많이 잡혔다. 진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이 소부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어업세를 거둔 지역 중 하나가 바로 회계로, 동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또한 국가에서 중요시 여기던 자원인 소금 또한 많이 산출되었다. 앞서 말한 사기에도 나왔듯 이 땅은 구리와 소금이 많은 땅이었고 전한 시기 오나라는 소금과 구리를 수출하며 ''''해염'''현'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현도 존재할 정도였으며 더군다나 202년에 주유가 "우리 땅은 소금과 동이 나와 부유하기 때문에 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소금은 풍족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동오 지역은 개발은 덜 되어 있을지언정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잠재성을 인정받은 지역이었다. 괜히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논할 때 오나라가 지리를 얻었다고 평한 것이 아니다. 소금의 생산량은 대단해서 대장군 주환이 죽었을 때 손권은 장례비로 쓰라고 소금 5천 곡(斛)을 더해주었다.
또 가는 실로 정교하게 짠 갈포가 유명했다. 조비가 사신을 통해 요구한 적도 있고 삼도부에도 오의 갈포 칭찬이 나온다고, 건안군에는 조선공장이 있어 전선교위도 두었는데 노동강도가 엄청 쎄서 많은 범죄자들이 배 만드는데 차출했다고 한다. 황제에게 죄를 지은 경우 고관이 건안에 보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손호 시기의 임해태수 해희와 회계태수 곽탄. 어쨌든 오나라는 다양한 종류의 배를 많이, 잘 만들어냈고, 대형선의 경우엔 높이가 5층에 3천명이 탈 수 있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큰 배가 줄줄이 바다로 나가는 모양은 마치 섬이 떠있는 듯 했다고.
그외에 오나라는 기후 조건과 남방 교역 덕분에 진귀한 사치품을 다양하게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말[48]과 같이 부족한 자원들을 거래했다. 특히 교주는 오나라가 남방의 물품을 생산하거나 들여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사섭 사후 손권이 사씨 가문을 내치고 교지를 직할 통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씨 가문을 내친 것이 교주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손오 멸망 때까지 교주 지역은 손오 정권에 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7. 군사


[image]
동오의 병사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병제를 취했는데 군대가 사병화되어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는 점이 큰 약점이었다. 오나라의 장군들은 부자형제 사이에서 휘하의 군대를 세습해 가는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나라 일대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오나라가 정식으로 발족하기 이전 손책의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군대는 그것을 이끄는 장군의 사병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게되고 또한 각각의 군대가 독립성을 더해가게 되는 것이다. 즉 무력을 기초로 하는 오나라는 사병집단의 연합체라고 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연합시키는 핵심은 앞서 기술한 손권과 여러 장군 사이의 주종관계였던 것이다.
오왕 즉위를 기점으로 봉읍제가 폐지되지만, 호족들의 사병 연합군이라는 오군의 편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다만 군량을 비롯한 보급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관장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제갈각과 고담 등 손권 친위세력이 맡았던 절도의 역할이다.
이는 호족 연합체인 오의 국가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족들 개인이 이끄는 군대를 모아서 오군으로 편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군의 지휘 체계 아래에 또 별개의 지휘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방어전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반면, 외정을 나갔다하면 발리는 게 일이었다. 특히 통합된 지휘 체계를 요구하는 야전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쑨 다른 원인은 남중 평정 후 말을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기병을 대신해 보병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던 촉한[49]과 달리, 오는 이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손오의 체제를 일종의 일본의 개발 영주(사무라이와 다이묘의 전신격)와 유사한 체제로 보았다.
둔전제를 통해 노동력과 군사력이 일치되고, 휘하 병력의 규모가 장군의 영향력과 비례하게 되는 사병 연합군의 형태를 취하다보니 장수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적극적인 싸움을 피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병사들이 평시에 농사에 종사하는 덕에, 정기적인 훈련을 거치던 촉한이나 위의 중앙군에 비해 그 정예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심지어 병사들이 다루는 제식 무기나 군의 편제조차 각 지휘관별로 다를 지경이었다고 하니까, 이래서야 체계적인 전쟁이 될 수가 없었다. 서진의 침공 당시 도준 등의 군대가 하룻밤새에 홀라당 도망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경우가 아니었나 보인다.
군사 지휘관들마저도 제멋대로이며 당시 기준으로 봐도 용맹함과는 별개로 규율은 상당히 엉망이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감녕여몽이 다툰 일화에서 이러한 군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녕의 하인인 어린애가 여몽에게 도망쳐 있다가 감녕이 그 아이를 붙잡아 죽이자, 분노한 여몽은 '''군사를 몰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리자 감녕과 화해하였다는 일화인데, 어떻게 보면 서로의 그릇을 드러내는 훈훈한 일화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국가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무슨 조직폭력배들처럼 사소한 다툼으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원한을 품고 휘하 군을 함부로 동원해 전투를 벌이려다가 그만둔 엽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미담'으로 취급된다. 이런 고위급 인물들이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서로 죽이려던 걸, '어머니의 중재로 참았다'고 자뭇 훈훈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짓을 벌였던 여몽과 감녕마저도 오나라에서는 분명 매우 양식있고 비중이 높은 용장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손권이 오왕에 즉위한 뒤에는 보급 체계라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손권이 오왕 즉위하기 전까지는 아예 봉읍제라 하여 각자 땅 나눠주고 '''적절히 관원 임명하고 각자 무기 조달해서 군대 편성하는 체제였다.'''
당시 위는 문무에 이름있는 장수들을 대촉 전선에 배정하였는데 촉한과 위의 대결은 아무래도 옹, 양주의 유동적인 상황을 촉한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민족, 현지인 포섭으로 계속 영향력을 늘리려 하고 위가 군사,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선도 유동적이어서 서로 병력을 기동하는 일이 잦아 장수들이 활약을 주도 할 수 있었다. 반면 손오와 위의 싸움에선 장강이라는 거대 지형의 문제로 서로 대치하는 국면이 주가 된 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위가 공격하게 만들어 승리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육손의 석정 전투와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50]
오나라의 굴욕으로 대표적인 게 료래래(遼來來)로 유명한 합비 공방전이지만, 최대의 굴욕은 촉한 멸망 후에 익주나 먹자고 보협과 육항에게 병력 3만 명을 줘서 영안으로 쳐들어가게 했는데, 겨우 2천 명 이끌고 있는 나헌한테 쩔쩔 매다가[51] 진에서 보낸 형주 자사 호열에게 발린 것.
손오의 전쟁을 보면, 대체로 야전을 피하고 매복/기습이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적의 일정한 거점을 포위하는 공성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 역시 야전을 할 수 없는 오군의 특성 때문이다. 이것 역시 합비/소요진 전투 등에서 보이듯 장료 등의 숙장들이 지휘하는 정예병들의 강습에 손쉽게 당해버리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물론 조인을 격퇴하고 남군을 빼앗은 주유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 주유조차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국 주유 자신도 명을 줄여야 했다. 육손이나 여몽, 제갈각 등의 장군들도 대부분 유인/매복/기습 등의 기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또 호족들의 연합이나 다름없는 정권이다보니, 손권은 권신들의 존재를 상당히 경계했다. 주유만 하더라도 손책 생전에는 양주 일대에서 손책과 주유를 일종의 공동 CEO 정도로 볼 정도였고, 관위로만 보면 손권은 일개 군의 태수에 불과했다.
이런 취약한 기반에서 정권을 다져나가다보니, 손권은 위나 촉한과는 달리 신하에게 일정 이상의 군권을 맡기는 일이 없거나, 맡기더라도 자신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군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234년 북벌 때만 해도 손권은 합비에 10만 병력을 동원하면서 별동 부대에는 각 1만 명만 편성시켰다. 오의 군사 동원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제갈각이 3년만에 단양 1개 군에서 4만 명을 뽑아내고, 1만 명을 거느렸다는 장군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합비 공격에 제갈각이 20만을 동원했다는 것도 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물론 대군을 모으는 것과 대군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다르지만.).
문제는 후자의 경우인데, 군을 맡기더라도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 손권의 신임이 기준이 되다보니, 태상인 반준이 무릉만이 토벌을 지휘하고, 제갈근이 대장군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람들은 자기 세력이 없이 연합군을 지휘하는, 속된 말로 낙하산들이었는데, 제갈근의 소극적인 군지휘나 반준의 무릉만이 토벌이 장기간 이루어진 것은, 이런 총사령관 인선의 문제가 아닌가 보인다.
한편 손오는 건국 과정에서 강남 토착민인 산월(山越)의 저항을 받았다. 산월은 고대 백월(百越)의 후예로 지금의 강소성, 안휘성, 복건성, 강서성 등지의 산악 지역에 분포했다. 이들은 농사뿐 아니라 무기 제조도 할 줄 알았으며 전투에 뛰어났다. 손오는 병력 충원과 재원 마련을 위해 산월이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던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했다. 제압한 산월인들 중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민호(民戶)로 편입'시키는 방침을 세워 전쟁과 생산에 활용했다.

8. 문화


수신기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다. 괴상한 사건이나 괴물은 높은 확률로 오나라에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괴물들을 물리치는 사람들도 많다. 계낭을 죽인 제갈각이라거나, 팽후를 삶아먹은 육개라거나, 낙두민이라는 괴인을 하녀로 둔 주환이라거나 무릉만이나 산월 같은 이민족이나, 중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동물을 접한 경험이 이러한 전설들을 낳게 했을 것이다.
종교 면에서는 손권의 치세에서 불교가 진흥되었으며, 손책의 기록으로 보아 우길을 숭배하는 태평도 계열의 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호가 세운 비석이 몇개 있는데 탁본이 남아있다. 과도기적이고 특이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 해외 교류


고구려와 접촉하여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반도의 삼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과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으며[52], 애초에 삼국 시대 자체가 중국이 갈래갈래 찢어진 시기이다 보니 주변국들도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줄타기를 많이 했다. 고구려가 그런 식으로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운을 띄우다가 관구검한테 한방 먹기도 했고, 베트남 지역의 사(士)씨 정권도 사섭의 통치 아래 위와 오 사이에서 외교전을 벌였다.

10. 오나라의 몰락[53]



10.1. 주종관계의 해체


손오정권은 위에서 보아왔듯이 개척둔전군과 오와 회계의 토착호족을 두개의 기둥으로해서 성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사병적인 세습군단을 이끄는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장군들이었다. 이를 손오정권으로서 하나로 통일해주는 것은 손권과 여러 장군간의 주종관계였다. 따라서 이 주종관계에 금이 가면 이 정권에 위기가 도래할 것이다. 주종관계는 손권의 만년에 있어서 제위계승 문제부터 심각해져 온 것이다.
241년에 황태자인 손등(孫登)이 병사하고 242년에는 손화가 태자로 세워졌다. 그런데 손권은 손화의 동생인 노왕 손패를 총애하여 태자 손화와의 사이에 대우상 명확한 격차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노왕을 내세우려고 하는 일파가 책동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노왕당과 태자를 지키려고 하는 태자당과의 사이에 10년 걸쳐 다툼이 계속되고 이 문제로 인하여 "중외의 관료, 장군, 대신은 나라 전체를 완전히 두개로 갈랐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분열상태는 250년에 태자인 손화를 폐위하고 노왕인 손패에게는 죽음을 내리는 양쪽 모두에게 벌을 내리는 형식으로 결론이 나고, 겨우 9세의 막내아들인 손량이 새로이 태자로 세워졌다. 그 2년후, 252년에 손권이 죽고 11세의 손량이 제위를 이었을 때, 겨우 2년전까지만해도 두파로 갈리어 긴 전쟁을 해 왔던 분열의 상처는 중대한 결과로 나타났다.
손권의 유조를 받아 어린왕을 보좌하게 된 중신중에 대장군인 제갈각 등은 옛날의 태자당이고, 손준등은 노왕당이었다. 그때까지 손오정권이라고 하는 통일체의 중심이었던 손권을 잃은 직후, 유왕을 내세워 그 통일체의 중심을 또다시 확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 중심에 있는 주요한 중신들은 두파로 분열된 상처를 안은 채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않고 있었다. 또 원래 세습군단을 옹립하여 상당한 독립능력을 가진 각지의 장군과 토착의 호족들은 종래의 주종관계의 중심이었던 손권을 잃은 후,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말것인가, 매우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어린 황제을 보좌하는 중신들 가운데, 손권으로부터 주로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각은 유능한 군략가이기도 했으므로, 화북은 위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켜 일발의 대승리를 올림으로서 중앙정부의 권위를 높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권위의 확립을 초조해하여 무리하게 일으킨 전쟁은 오히려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제갈각은 그래도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원래 반대파였던 손준은 전쟁반대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제갈각을 죽였다(253년). 그 후 256년까지는 손준이, 이어 256년부터 258년까지 손준의 사촌동생인 손침이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초조해할 뿐 이미 권위를 확립하는 유효한 방책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저 무턱대고 권력을 휘둘러 약자를 괴롭히는 능력 밖에 없었다.
포악한 손침을 주살한 3대째의 황제인 손휴(258-264)는 정치로부터 오히려 도피하여 독서학문에 심취했으나, 실제로 그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손준이나 손침과 비슷한 자들이었다. 이어 즉위한 손호(264-280)는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기도 하고, 신하를 함부로 참살하기도 하는 등 광폭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천자였다.
그들은 모두 영주와 같은 존재가 각지에 할거하여 분열될 수 밖에 없는 객관정세로 극히 불안정한 정국속에 있었고, 게다가 권위의 확립을 필요로 하는 입장에 놓여진 지배자가 아무런 유효한 시책도 간구하지 못한채로 무리한 권위확립을 재촉받아 단지 권력의지만을 맹목적·자의적으로 발동시킨 모습일 뿐이었다. 그 무리는 결국 주종관계의 해체를 촉진하고 손오정권의 중심인 인간관계를 전면적으로 붕괴시켜 오나라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10.2. 둔전체제의 붕괴


손권의 죽음은 세습적인 군단을 가지고 각지에 존재하는 개발영주적인 여러 장군의 분립경향을 촉진하고, 지배자는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한 권위의 확립을 초조해 왔다. 그와 같은 중앙정부의 무리한 자세는 강인한 전쟁에 의한 쓸데없는 손해를 초래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무리한 징발이 이루어져 또 무의미한 권력의지를 발동시킴으로써 관하에 대한 수탈을 강화한다. 중앙정부의 무리한 징발과 수탈의 강화는 가장 명령이 미치기 쉬운 둔전지역으로 향해진다. 원래 손권의 시대부터 엄한 군정지배하에 있었던 둔전병과 둔전민은 강화된 수탈에 의하여 더욱 참담한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한편 강남이 손오정권하에 통일되고, 개발이 진행되어 소운하도 갖추어 감에 따라 물자의 교환이 늘어간다. 배가 항해하기에 편리한 양자강및 그와 연결되는 소운하의 정비는 물자의 이동을 용이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수도 건업의 인구는 증가하고 그곳은 소비도시의 양상을 띠어 간다. 손권의 시대에 이미 새로운 화폐가 발행된 것도 물자의 교환을 자극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정부의 수탈이 더욱 심하게 가해져 온 둔전지역에서는 수탈되고 남은 나머지의 농산물로는 도저히 자급할 수 없었으므로 보다 유리한 상업에 의하여 생활을 보충해 가게 된다. 둔전 대장은 그 지휘하의 병과 민을 부려서 관하의 생산물을 수송시키고, 상판 행위에 노역봉사시켰다. 병, 민은 단지 농업에 종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사 행위까지 노역 봉사를 하게 되었으므로 점점 부담은 과중되어 갔다.
그러나 병, 민은 상업에 종사하여 시장에 나가는 것으로서 다른 지역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그들의 정보는 둔전지대의 병, 민에게 퍼져 이윽고 그들 빈궁의 밑바닥에 있는 둔전민, 둔전병은 압정하에 있는 둔전지역에서 탈주하여 보다 부담이 가벼운 지역을 향하여 유망하기 시작했다. 상업활동은 병, 민을 농지에 묶어 두는 둔전체제를 어떻게든 붕괴시켜 갔던 것이었다.

10.3. 오나라의 전력상실


그러면, 둔전지역보다도 부담이 가벼운 지역(적어도 부담이 가벼울거라 기대받은 지역)은 어떤 곳이었을까. 번잡한 수도 건업의 마을,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던 유협의 근거지 등은 좋은 도피처였겠지만, 그 수용력은 얼마되지 않았다. 오의 말기 특히 손호의 치세가 눈에 띄는데, 환관을 비롯한 궁중관계자, 및 그와 관계를 맺은 관리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광대한 점유지를 설정하고 그 경작과 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대토지소유자의 밑이야말로 둔전지역으로부터 유망하는 병, 민이 갈 곳이었다.
게다가 환관들은 황제직속의 임시 징세관이 되어 자신의 점유지 이외의 일반군현으로부터 가혹한 징세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둔전지역의 주민 뿐만 아니라 일반서민까지도 심하게 착취함으로서 자신들, 및 그와 관계있는 사람들의 장원에 그들을 징발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둔전체제를 결정적으로 붕괴시킨 원인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앙의 위령이 미치는 지역에 있어서 이와 같은 둔전체제의 붕괴와 그곳에 사는 병, 민의 유동현상등이 진행되어 상업의 활발화와 그에 의한 일부지배층의 사치한 풍조가 퍼져가면서 곧 다른 지역에도 파급되었다. 개척둔전군을 이끌고 밖에서 위로부터 군림하고 있던 장군들이 지배하는 지역 - 그 중에는 중앙의 위령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도 생겨났겠지만, 그곳에서도 같은 현상이 진행되어 갔음에 틀림없다. 둔전군은 그 기반이 붕괴되어 감에 따라 전력을 상실해 갔다.
요컨대 손오정권은 한편으로는 개척둔전군에 의한 군정지배와 다른 한편으로는 오와 회계등의 토착호족에 의한 개발영주적인 지배, 이 두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그 중 하나의 기둥, 즉 개척둔전군을 지탱하는 둔전체제가 위와 같은 경과를 거쳐 붕괴되어 갈때, 손오정권 그 자체가 이윽고 전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폭군인, 손호 아래에서 환관을 비롯 이에 연결되는 일부의 특권자들이 개인적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둔전체제의 붕괴에 의하여 전력의 태반을 상실한 여러 장군이 국가를 위하여 일할 마음을 잃는 것도 당연했다.
이리하여 280년에 서진이 이와 같은 오나라의 내정을 틈타서 대군을 파견해 왔을 때, 진군은 이미 저항다운 저항을 받지않고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강남을 정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1. 기타


요절 징크스가 유명하며, 심지어 촉한으로 양자가 되어서 와도 요절하는 나라. 요절이 많은 이유로는 원래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기생충[54]이나 질병이 창궐하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은 강남 지방의 토착병에는 면역력이 없어서 급사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오나라의 요절징크스 참조.
나관중삼국지연의를 지을 당시, 왕조를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왕조가 장강 이남, 건업(당시 금릉)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오나라의 비중이 높아지고, 오나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는 말도 있다.[55]
삼국지 연의가 촉한주인공인데 여기서 오나라는 아군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최후에는 제갈각의 의도에 의해 손이정봉 형제가 촉한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에는 빠와 까가 툭하면 충돌했고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충돌하는 촉한과 위와 별다른 옹호론자들이 없는 게 특징이다. 오죽하면 관련 유머에서 오빠는 '''손권을 깐다'''가 나온다.
본 삼국지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의하면 오는 멸망 직전 비축된 곡식은 280만 섬, 배는 5000여 척 정도였다고 한다. 덤으로 후궁은 5000여 명 정도됐다고 한다.


12. 역대 군주


※ 황제가 아닌 왕으로 추존된 손종, 손책은 표에서 생략한다.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사후 추존
시조(始祖)
무열황제(武烈皇帝)
손견(堅)
손권의 아버지.
156년 출생, 192년 사망. 37세.
1대
229-252년
태조(太祖)
대황제(大皇帝)
손권(權)
오나라의 초대 황제.
222년 칭왕, 229년 칭제.
182년 출생, 252년 사망. 71세.
2대
252-258년
 
회계왕(會稽王)
손량(亮)
손침에 의해 폐위.
243년 출생, 260년 사망. 18세.
3대
258-264년
 
경황제(景皇帝)
손휴(休)
손량의 이복형.
235년 출생, 264년 사망. 30세.
사후 추존
 
소헌문황제(昭獻文皇帝)
손화(和)
손호의 아버지.
224년 출생, 253년 사망. 30세.
4대
264-280년
 
귀명후(歸命侯)[56]
말황제(末皇帝)
손호(皓)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242년 출생, 284년 사망. 43세.

12.1. 계보



13. 창작물 속의 모습


가족사 드라마의 소재로는 최적의 국가이나 오나라 자체가 워낙 조연 포스로 무장했기 때문인지 너무 활용되지 못한다. 사실 주된 역할은 유비 Vs 조조의 메인 스토리 라인에서 양측이 좀 잘 나가려하면 딴지를 걸어주는 역이다… 삼국지 공명전만 해도 제갈량오장원에서 살아남고 위나라를 개박살내려고 하자 촉한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촉한을 뒷치기하려고 해서 제갈첨이 활약할 기회를 준다.[57]
김용이 오나라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쓰려다가 때려쳤다고 한다(…). 힘들기도 한 게 한 명의 주인공에 스포트라이트를 줄 수 있는 촉한이나 위하고는 다르게 군주가 3번이나 교체되고, 주역급으로 밀어줄만한 인물들은[58] 단명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주인공급으로 밀어줄만큼 장수하는 손권이나 육손이 나오면 오나라가 버로우한다(…).
단지, 역사 소설보다는 막장 드라마를 쓰겠다고 작정하면 아직 연의에 반영되지 않은 풀어낼 이야기가 꽤 많이 있다.
애꿎은 손책여성화되어 벗겨지는 만화인 일기당천과 BL 강철삼국지 정도가 오나라를 소재로 삼은 경우라 하겠다. 한국 만화 중에는 손영기 정도.
그 많은 웹소설 삼국지물 판에서도 오나라는 인기가 없다. 오나라가 주역인 소설보다 여포가 주역인 소설이 더 많을 정도.
게임상에서도 그나마 손견손책 정도만 상당한 후빨을 받을 뿐 '''대부분의 장수들은 그저 안습할 뿐이다'''. 특히 주연은 삼국지 연의에서 모든 활약을 삭제당하고 조운에게 썰리는 걸로밖에 안나오며 주유여몽 등 대부분이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통에 나오는 게임은 촉한이나 위에 비해 적다. 그나마 육손은 주유-노숙-여몽의 후임으로 이릉 전투의 주역으로 푸시를 받고 있는것 빼면 .
삼국지 시리즈에선 주위 땅이 공백지 투성이며, 특히 군웅할거 시기에는 주위에 약한 세력 밖에 없어서 순식간에 땅을 얻고 다른 군주들과 달리 초반에도 거대 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다. 적벽대전 이후는 수춘 지역을 점령하고 조조를 공격 하거나, 유비를 공격 해서 장수진 흡수하고 천하 이분을 몸소 실현하면 된다. 장수진들도 상당히 강력하고 주변에 바보들 밖에 없어서 플레이어가 잡든 AI가 잡든 거대 세력으로 자라나는 진영 중 하나.
삼국지 3에서는 채모제갈탄 정도를 제외하고는 오나라 장수들만 유일하게 수전 지휘가 육전 지휘보다 높다. 특히 주유는 육전 지휘는 73에 불과한 주제에 '''수전지휘가 100'''이다. 채모(육전 지휘 67 '''수전 지휘 85''')야 삼국지 연의에서는 해상전 전문가로 나오니 그렇다 쳐도 주유는 아마도 적벽 대전 때문에 수전 지휘가 극에 달하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위는 황조 계승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촉한은 충의를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오는 모에 덕후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삼국지 갤러리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오나라의 별명은 '''아이돌 군단'''. 주유, 육손 같은 미남 계열부터 시작해서 불멸의 커플 능통감녕, 목소리와 검법이 간지나는 주태[59], 그리고 여캐 4총사인 대교, 소교, 손상향, 보연사 등 비주얼이 좋은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섬나라가 오나라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나왔다.사실 일본은 오빠가 꽤 많은 편이다. 그런데 6부터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의 거의 다 괴물(정봉), 아저씨(노숙, 한당)들이라서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촉한의 어린 신세대들로 대체시키려는 듯.
SD건담 삼국전에서는 '굉(轟)'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손상향 가베라가 먼저 죽은 손견 제피랜서스손책 사이살리스에게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1]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위략에 의하면 삼국 시대 말기 군인의 숫자는 23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2] 229년부터 칭제[3]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4] 오의 상당수인 남방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 중앙의 통제력이 크지 않은 이민족의 산월무릉만의 영역이었다.[5]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6] 이후 남북조 시대의 전개를 볼 때 합비는 남조의 영역이었고, 체제가 내부적 요인으로 망가진 양(梁)나라 시대 외엔 북조에게 빼앗긴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남조 국가들은 합비보다 북쪽 축선에서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공격의 성과는 생각보다 미미했다.[7] 다만 선공이 아닌 위를 끌어들여서 싸워 대승한 경우는 있다. 석정 전투와 동흥제 전투 등.[8] 이는 촉한의 북벌 실패와 일치한다. 제갈량 사후(정확히는 비의 이후 진지시대까지) 촉의 북벌이 촉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오나라의 북벌 역시 오나라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손권대부터 시작해 제갈각 때 절정을 이룬 합비 전투. 그리고 위가 오의 침공을 다소 가볍게 생각한 정황도 있다. 대표적으로 234년 촉한-오의 위 침공에 대해 삼국전투기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서 '아 놔 왜 우리는 변변치 않게 합비 침공을 하는데 왜 위협적인 제갈량 놔두고 조예가 친정을 함?'이라고 디스를 하는데, 조예 스스로 '어차피 손권은 내가 도착도 하기 전에 달아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9] '우린 기병이 약하고, 수군이 강하므로 장강 끼고 수상 방어진을 구축하면 영토는 못 늘려도 영토 보전은 가능하다'는 논지를 피며, 손오는 안일하게 군사를 관리하다 결국 진나라에 먹히게 된다. 손오의 수군이 경험이 풍부하고, 이들의 수군이 위진보다는 우월한걸 알고있기에 사마씨가 손오를 정벌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 '저 망할 장강 때문에 손오를 함락 못시키면 역으로 우리가 장강으로 공격하면 되잖아?'였다. 촉한을 정벌한 서진은 파촉지방에서 함선을 여럿 건조한 뒤 장강을 따라 연안 공격을 개시하면서 결국 난공불락의 장강 방어선을 넘는데 성공했다.[10] 지금의 난징(南京)[11] 항주시(杭州市) 서남부[12]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13] 교주(현재 베트남 지역 )는 주변에 홍강이 있어 비옥한 곳이 많아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 다만 사섭 일가의 지배 지역인 데다 이민족 즉, 베트남인들의 땅이라…[14] 사례(후한의 수도), 예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량주(서량), 병주, 유주, 형주 북부[15] 형주 남부, 양주(서량이 아니라 강동 지역의 주), 교주[16] 오늘날의 베트남, 광둥 성 인근.[17] 명색이 주(州)인데도 어지간한 군(郡)과 인구가 비슷했다.[18] 손권이 사섭 사후 여길 잘못 건드려서 교주가 반란의 온상이 된 것 덤. 덕분에 손오는 멸망 때까지 이 지역의 반란에 고생하게 된다.[19] 애초에 춘추 전국시대 때는 중국의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전한 때에도 남월과 민월, 동월이라는 국가가 존속해있었다. 이 지역이 중국의 영역하에 편입된건 한 무제 때의 일. (정확하게는 진나라도 점령한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가 붕괴되어서 다시 독립하게 된 것.)[20] 제갈량의 남만정벌을 두고 봐도, 제갈량과 남만세력(맹획)은 "남만이 촉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남만인의 자치권은 인정되는 선"으로 적절히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운남이 촉한의 익주에 포함되어 있었어도, 촉한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는 곳은 아니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듯. 오나라 영역 내의 여러 이민족들도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오나라의 행정력과는 무관하게 독립상태를 이뤘을 것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동화되지 않고 남아있는데, 당시 형주인 현재 호남, 호북성에 남아있는 묘족, 투자족, 이족 등등이다. 오나라 이후 천년이 지난 명나라 시기에도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오는 한족에 대해 번번히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나라 당시에는 다루기가 더 까다로웠을 것이다. [21] 이걸 근거로 병사가 남녀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2] 단지 지방의 강력한 세력이 아니라 아예 중앙의 군사권을 호족들이 직접 분점하다시피 하였다.[23] 일본에서는 중세 일본의 무사 정권 시기와 유사하다고 보기도 한다.[24] 물론 한당의 경우는 아들이 사고치고 적국으로 투항한거라 이야기가 다르지만[25] 오나라의 최고 개국 공신에 귀족 출신, 거기다가 황족인 손씨 가문이랑은 반 가족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이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했다. 그나마 딸이 손등과 결혼해 태자비가 되고 아들이 손권의 딸인 손노반하고 결혼한 정도가 끝. [26] 오나라에서 대도독, 재상 급만 3명(육손, 육항, 육개)을 배출한 사실상 황족인 손씨에 이은 2인자 집안이다.[27] 촉한은 오히려 중원으로부터 유입된 지식인 계층들이 사회의 핵심 주류였다. 원래 파촉지역을 근거로한 토착세력들이 딱히 중앙정권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연의 등에서 토착세력인 것처럼 묘사되는 인물들 또한 대부분 중원 출신 가문들이다.[28] 그나마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이 오초칠국의 난의 중심지였던 오국. 다만 그 오국조차 한고조 유방이 통일을 이룩한 이후에 각지 에 유씨 왕족들을 분봉할 때 자신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서 오국의 거친 사람들을 다스리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미 장성한 조카를 오왕으로 봉한 것이었다. 한고조의 통일 시점에도 오군 일대는 낙후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다만 오국은 중국에서 부족했던 금이 산출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요성이 있었다. 한무제가 제사에 쓸 황금을 제대로 진상하지 못하는 제후왕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던 것을 생각하면...[29] 촉한이 위치한 사천 일대는 전한시기에 수도권이었던 관중을 부양하는 배후지로 집중 관리되면서 한나라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고조 유방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섰는지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온다.) 화북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위는 두말할 것도 없다.[30] 특히 이민족을 노예화 한 위나 이민족을 회유하고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한 촉한의 경우, 이민족을 관리한 인물들 개인적으로 보면 문무와 덕을 고루 갖춘 장수들이 있어서 이민족의 인심을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위나라의 장기나 소칙, 전예, 창희 등이 그렇고 촉한에서는 최고 권력자 유비, 제갈량부터 시작해 강유, 마충, 장억, 왕사 등이 그렇다. 근데 오나라에선 '오랑캐를 토벌하고 거기 이민족들을 군사로 편입시켜 군대를 보충했다' 뭐 이런 식의 기록뿐이다. 오나라의 방침이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 .[31] 원래 해당 지역의 토호라고 봐주기 어려운 가문이다. 손이라는 성씨자체가 공손씨처럼 과거의 지배층의 후예임을 사칭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성씨였다.[32] 물론 유선이 그만큼 잘했다는 뜻은 아니고 촉한은 한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명분이 있었고(그래서 나온게 촉한정통론이다) 또 유비가 기반을 다져놓기도했고 제갈량을 비롯한 나머지 신하들이 잘해줬기에 가능한것이였다[33] 재위기간이 40년을 넘는데 삼국시대 군주들 중에 최장 기록이며 '''이 장기집권 기록은 수백년간 깨지지 않았다.''' 물론 한 세력의 지도자로써는 손권이 52년으로 더 길기는 했다.[34] 물론 이게 황후인 반부인이 궁녀들을 개판으로 다룬 영향도 있었다.[35] 반면 촉이 차지한 익주, 지금의 사천 지방은 한나라 때 이미 개발이 대부분 끝난 탓에 사회 경제사에서 촉한은 별로 안 다룬다. 안습. 익주가 이미 삼국시대에 중원 1개주 이상으로 내실있게 개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촉한이 고작 1개주만 가지고도 삼국 중 하나로 대충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36] 후한시기 예주 패국 패현 사람이었던 한고제가 초나라 사람이었다.[37] 손호가 2천석 이하 관리까지 직접 보내서 벌목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38] 기원전 316년 파촉 정벌로 사천 지방을 손에 놓은 은 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이 기원전 256년 촉군 태수 '''이빙'''의 '''관개수로 도강언 건설.''' 사천 지방의 주요 하천인 민강의 유량을 통제하게 되면서 연례 행사였던 홍수까지 사라지자 개발 속도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도강언 건설로부터 불과 50년이 흐른 초한전쟁에서 사천 지방은 유방의 경제적 배후 기반이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39] 이때 건설되고 역대 왕조가 계속 보수해온 관개수로 도강언은 220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5,300㎢의 토지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가 되었다.[40] 바이두 백과가 인용한 (진양추)에 따르면, 오나라의 남녀 인구가 2백 30만이라고 밝혔다... 정사 삼국지 촉서에 의하면 촉한 멸망시 28만호였으므로, 100만 정도로 보는게 합리적이다.[41] 춘추시대 오(춘추시대)월나라의 영역이었고 전국 시대에는 초나라의 영역이 된다.[42]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43] 화북에서는 소농민층조차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향론에 민감하였다.[44] 화북에서 좋은 향론을 얻기 위해서는 소농민층을 착취해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세를 불리기 위해서 농민 수탈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균형을 찾아 좋은 향론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45]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46] 중국을 말한다 7, 251p 여기서는 태평백전이 서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태평백전은 촉한때부터 만들어졌다.[47] 장사의 옛 우물에서 발견된것으로 232년부터 237년까지의 기록들이 있다고 하는데 출토가 1996년이고 기초 판독은 끝난 듯 보인다고 한다. 대부분은 징세나 호적 등 지방행정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 같다. 현재 소장처는 장사간독박물관.[48] 말은 촉한의 말을 수입했다고 한다. 남중의 준마는 한대에는 궁중 진상품이었다고도 하고.[49] 유명한 팔진도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다.[50] 실제로 강릉 근처의 방어곤란한 평야지대에 둑을 쌓아 아예 침수시켜 버린다던가 강에 제방 쌓고 거기서 농성하는 모습도 보인다.[51] '''보협은 아예 출전한 나헌에게 발렸다.''' 이건 농성전 변명도 안 통한다. 육항은 먼저 나간 보협이 못 뚫고 빌빌거리니 추가 병력 끌고 지원 나간 것이다.[52]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오나라가 일본에게 조공을 바쳤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위나라에게 매년 조공을 바쳤던 것처럼 오나라에게도 매년 조공을 빌미로 접근한 것에 가깝다. 일본 서기가 워낙 일본 위주로 역사가 기술되어 있기에 과거 일본과 교류했던 나라들을 어떻게 보고 기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53]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54] 특히 강가나 습한 지역에서 창궐하는 주혈흡충이 기생충의 주요 비중을 차지했다. 오나라는 위나라나 촉한과는 달리 고온다습하고 강이 많다. 주혈흡충은 유럽에 있는 빌하르츠 주혈흡충, 미주 지역과 아프리카에 창궐하는 만손 주혈흡충, 아시아에 분포되어있는 일본 주혈흡충 이렇게 3종류인데 이 지역에서는 일본 주혈흡충이 창궐했다.[55] 참고로 장강 이남을 본거지로 한 왕조 혹은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사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주원장의 명 왕조와 장개석의 남경 국민 정부 정도.[56] 서진에서 받은 시호.[57] 근데 사실은 사마의가 흑막이었다는 묘한 반전이 나온다.[58] 여몽, 주유, 손책 등[59] 물론 진삼국무쌍5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