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략
1. 개요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서. 지은이는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인 어환(魚豢)이다. 당나라(唐) 때 유실되었으나, 청나라(淸) 시대에 들어와 역사가 왕인준(王仁俊)과 장붕일(張鵬一)이 각각 흩어진 기록들을 한 데 모아서 각각 집본(輯本)을 편찬하였는데, 이 중에 장붕일의 집본을 제일로 친다. 총 25권에 보유(補遺)편에 6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내용
위략은 삼국이 통일되기 전의 시기를 다룬 역사서이며,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위나라 사람이라 주로 위나라 시대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현재는 사라진 책이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을 통해 그 내용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특징은 위나라(魏), 진나라(晉) 시대의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적을 때, 보통적으로 군주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을 적을 때에 피휘를 하는데, 모종의 이유로 저자 어환이 피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대의 1차 사료이므로 가치가 대단히 높으며, 진수의 ≪삼국지≫ 위서 부분에선 왕침의 ≪위서(魏書)≫와 함께 주요한 참고 문헌이다.
저자 어환은 삼국시대 위나라 낭중(郎中)을 지냈고, 위략과 또 다른 역사서 ≪전략(典略)≫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며, 이 두 역사서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전체 분량에 대한 기록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데, 각각 ≪구당서≫에서는 38권, ≪신당서≫에서는 50권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편찬 시기로는 대략 위나라 말기부터 진(晉)나라 초기일 것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구체적으로는 서진 사마염(司馬炎)의 재위 기간인 태강(太康) 연간(280년 ~ 289년)에 지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그 외에 여러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다. 당나라의 학자 유지기(劉知幾)는 조예(曹叡) 시대까지 기록되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 시기 이후의 기록도 존재한다. 가장 마지막의 기록이라고 여기지는 것이 ≪삼국지≫ 가규전(賈逵傳)의 주석에 인용된 조모(曹髦)의 제위 시기인 감로(甘露) 2년(257년)의 기록이므로, 그 이후에 책이 완성되었거나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 서술된 역사서라서 적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촉(蜀)이나 오(吳)등에 대해서는 뻘글급의 기사를 쏟아낼 때가 있다. 교차검증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위험한 기록이다. 대표적인 뻘글로는 제갈량이 유비를 만난 삼고초려와 기록이 전혀 다른 대목, 유선이 어릴 때 노예로 팔렸다가 유비가 입촉한 후에 다시 만나서 태자가 되었다는 '유선 벤허설'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유선에 관한 기록은 촉한의 기록과는 도저히 일치하지 않는다. 어쩌면 유선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도 있다.
해당 기사와 배송지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당초 유비가 소패에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조공(曹公-조조)이 당도하자 황거(遑遽-황급)하여 가속들을 버렸고 그 뒤 형주로 달아났다. 유선은 이때 몇 살(數歲)의 나이로 달아나 숨었는데, 다른 이를 따라 서쪽으로 한중으로 들어왔다가 팔려 넘어갔다. 건안 16년(211년), 관중(關中)에서 난이 일자 부풍사람 유괄(劉括)이 난을 피해 한중으로 들어왔다 유선을 사 들였는데, 그가 양가(良家)의 자식임을 물어서 알고는 그를 기르며 자식으로 삼고 처를 얻어주니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처음 유선이 유비와 서로 헤어졌을 때 (유선은) 자기 부친의 자가 현덕(玄德)임을 알고 있었다. (유비의) 사인(舍人-문객,측근) 중에 간(簡)씨 성을 쓰는 자가 있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얻자 간씨를 장군으로 삼았다. 유비가 간씨를 한중으로 보내자 간씨는 도저(都邸)에 머물렀다. 이에 유선이 간씨를 방문했는데, 간씨가 서로 물어서 검증해보니 일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간씨가 기뻐하며 장로(張魯)에게 말하자, 장로가 씻겨서 익주로 보내주었고 이에 유비가 그를 태자로 세웠다. 당초 유비는 제갈량을 태자(太子) 태부(太傅)로 삼았는데,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고 제반 사무를 맡겼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정치는 갈씨(葛氏)에게서 비롯되고 제사는 과인(寡人)이 맡겠소."(政由葛氏, 祭則寡人)
제갈량 또한 유선이 정치에 익숙치 않다 여겼으므로 마침내 안팎을 총괄했다.
또한 어환이 위·진의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동시대 적국에 대해 세세한 기록을 남길 수 없다'며 염행의 마초폭행설이나 위연의 자오곡계책 등이 비판받기도 한다./ 신 송지가 보건대,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선주,후주의 부인과 자식들의 열전. 삼국지 권34)에서
"후주는 형주에서 태어났다"
고 하고 후주전에서
"처음 제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7세"
라 하니 즉 건안 12년(207년) 생이다. 건안 13년(208년)에 장판(長阪)에서 패하자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고 조운전에서 이르길,
"조운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화를 면했다"
고 하니 즉 (이 어린아이가) 후주다. 이와 같다면 유비는 일찍이 유선과 서로 헤어진 적이 없다. 또 제갈량은 유선이 즉위한 다음 해 익주목을 겸하고(영 익주목) 그 해에 주부(主簿) 두미(杜微)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정께서 금년에 18세"
라고 했으니 유선전(후주전)과 상응하고 이치에 맞아 헛점이 없다. 그런데 어환은 유비가 소패에서 패했을 때 유선이 막 태어났다고 하고 (유비가) 형주로 달아났을 때 능히 그 부친의 자가 현덕임을 알았다고 하니 5-6세는 되어야 한다. 유비가 소패에서 패했을 때는 건안 5년(200년)이고 유선이 처음 즉위한 때는 앞뒤로 24년이니 유선은 응당 20세를 넘는게 된다. 이 일들을 서로 증험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 이는 즉 위략의 망설(妄說-그릇된 말)인데 2백여 자에 이르니 괴이하구나! 또 여러 서(書), 기(記)와 제갈량집을 살펴보면 제갈량은 또한 태자 태부가 된 적이 없다.[1]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위략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들이고, 일단 그의 감수를 한 번 거친 상태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유선 벤허설'같은 경우는 '괴이한 망설(妄說)'이라며 대차게 비판했고,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내용도 '괴이하다'며 의문을 표했다. 아예 말도 안되는 얘기같으면 배송지가 이를 인용하되 반박 역시 준비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위략의 기록이라도 배송지가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료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오류가 없을 경우 받아들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뻘글들이라도 당시 위나라 관점에서 본 시선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다.
몇몇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허황돼서 그렇지 전체적으로는 신뢰성이 있는 기록들이 더 많다. 학자 유지기(劉知幾)도 기록의 신뢰성을 문제를 삼기보다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세세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내용이 번잡하다고 비판하였다. 다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민족과 관련된 진귀한 기록들도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현재까지도 한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지어 대진국(大秦國), 즉 로마 제국에 대한 기록까지 존재할 정도인데, 이는 중국 측에서 타국에서 로마 제국의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하는 문헌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이다.
3. 한국사와 위략
한국사에서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고조선에 대해 남긴 위략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 조(條)에 인용되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다. 기자조선설에 따른 윤색된 기록 등이 일부 보이기는 하나,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무슨 이유로 위만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기원전 2세기의 고조선에 관한 기록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위략의 기록을 배제하면 고조선의 역사 절반은 추측만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외에도 삼한 및 낙랑군 등에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도 중요하다. 애초에 한국 고대사는 사료 자체가 원체 귀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둔황 석굴에서 발견된 돈황문서(敦煌文書) 중 하나인 7세기 경의 ≪토원책부(兔園策府)≫에서 위략의 인용문이 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동예의 풍속으로 알려진 무천은 고조선의 풍속이며, 부여의 제사 풍속으로 알려진 소 발굽을 이용한 점도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링크 사실이라면 고조선 연구에 새로운 가설 몇 개쯤은 세울 수 있는 자료다.
4. 그 외
사승(謝承)의 ≪후한서≫와 어환의 위략이 고려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퍼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나라에서 귀국해, '송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선본(善本)이 많다는 말을 듣더니 관반(舘伴)[2] 을 시켜 필요로 하는 서적 목록을 주면서 비록 완질이 아니더라도 필히 베껴서 부쳐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고려사 선종 8년(1091) 신미년 6월 병오일) 이 말은 그 서적들이 고려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으면 보내달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 목록 중에 송나라로 보낸 책이 하나가 있는데, 바로 유향(劉向)이 지은 책인 ≪설원(說苑)≫만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