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조조의 종제(사촌 혹은 육촌)이다. 딸이 순욱의 아들인 순찬과 혼인하였기에 순욱과 사돈 관계이다.天下可無洪(천하가무홍): 천하에 홍은 없어도 되지만
不可無曹公(불가무조공): 조공이 없으면 아니 된다네
子廉忠與勇(자렴충여용): 자렴은 충성되고 용맹했으니
千古更誰同(천고갱수동): 천고에 또 누가 이와 같으리
1.1. 정사
1.2. 조조의 개국공신
젊은 시절 삼촌 빽으로 기춘현 현장을 지냈다. 동탁#s-1 토벌군이 일어나면서 종형 조조에게 합류해 조인#s-1과 함께 장군이 된다.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낙양을 불태웠다. 이 때 조조는 형양 방면으로 서진하다가 서영에게 대패하고 추격당했다. 말까지 잃어버리고 낙담한 조조에게, 조홍은 자신의 말을 내어주며 독려한다.
이 명대사가 나온 장면은 연의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앙처럼 여긴 내게 맡기고 뒤로를 시전한 건 아니고, 열심히 발로 뛰어서 조조를 따라갔다. 도망가던 중 변수에 이르렀는데 물이 깊어 건널 수가 없자 조홍은 물가를 뒤져 배를 구해 조조와 함께 물을 건너 고향인 예주 패국 초현으로 돌아왔다.'''"천하에 이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귀공 같은 웅걸(雄傑)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왕자년습유기'[1] 에 따르면 조조의 육촌 동생 조홍은 막대한 재산과 준마 여러 필을 가지고 있었다. 반동탁 연합군 당시 조조가 한밤 중에 길을 가다가 말 한 필을 잃어버렸다. 조홍이 즉시 자기가 타고 가던 준마 백학(白鶴)을 조조에게 줬는데 그 말이 달리자 마치 허공을 나는 것과 같았으며 수백리를 달리고 나서 보니 조조는 땀으로 범벅이었으나, 백학은 땀 하나 흘리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으며, '허공을 나는 것이 조씨의 백학과 같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조홍은 가병(家兵) 천 여명을 이끌고 친구였던 양주자사 진온의 도움을 받아 여강과 단양에서 수천 명을 모아온 뒤 조조와 예주 패국 용항현에서 합류했다. 안습하게도 거기서 합류하자 기껏 모은 병력 4천 명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500여 명 빼곤 다 날려먹었다. 이후 패국의 다른 현을 돌아다니면서 간신히 천여 명을 모아 원소가 있는 하내로 의탁한다.
1.2.1. 여러 전투
194년, 역적 착융을 도운 점, 한제의 칙명을 거스른 점 등을 들어 조조는 도겸을 공격한다. 그런데 이때 장막이 여포를 바지로 앉혀 조조의 뒤를 공격한다. 견, 범, 동아 3성을 제외한 연주의 모든 군현이 장막과 상의하는 등 조조에게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조홍은 동평국을 점거하는 데 성공하고 군량을 징발해 군에 공급한다. 이듬해 여름, 조조가 정도 전투에서 여포를 대파하면서 전세가 반전되자 별도로 군을 이끌고 제음, 산양, 중모, 양무를 비롯한 10여 개의 현을 쓸어담았다. 앞뒤의 공적으로 응양교위를 거쳐 양무중랑장이 되었다.
196년, 장안을 탈출해 낙양에 머무르던 헌제를 모셔오는 임무를 맡았다. 원술도 부장 장노 등을 보내 천자를 모셔오려 했다. 헌제의 측근세력인 동승이 원술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조홍은 천자를 모셔오는 데 실패했다. 이에 조조가 직접 나서서 천자를 모셔왔다. 허현으로 천도한 후에는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만총전에 따르면 조조가 대장군이 되자 만총이 허현령이 되었다. 만총이 허현령일 무렵 조홍의 빈객이 조홍의 종실 지위를 빙자하여 수차례 법을 어기므로 만총이 그 빈객을 체포하였다. 조홍이 만총에게 편지를 써 봐주기를 바랐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조에게 알리니 조조가 관계자들을 호출하였다. 만총은 외압이 더 심해지리라 생각해 냉큼 사형을 집행했고 조조는 만총을 칭찬하였다.
양패전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장사현령(長社―, 지금의 허난성 창거 시)으로 있던 양패도 조홍의 빈객이 저지르던 불법 징수행위를 적발하여 다리를 꺾어 죽였다. 역시 조조에게 칭찬받았다. 이후 양패가 업현령으로 발령을 받자 권세가였던 조홍과 유훈 등은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197년 조조가 원술과의 전투를 재개한 사이 유표와 장수가 남양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조홍이 무음, 섭, 박망, 자양 등 남양군 북부에서 맞섰지만 섭현까지 밀려났다. 진국으로 쳐들어왔었던 원술을 격퇴한 조조가 다시 형주로 내려가 장수·유표 연합군과 싸우자 조홍도 공을 세우고 여봉장군, 국명정후에 올랐다.
관도대전에서는 조조가 오소의 순우경을 공격하는 사이 본진의 수비를 맡아, 장합과 고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만약 여기서 조홍이 뚫려버렸다면 오소가 불타든 말든 원소는 그대로 진격에 임하여 결과적으로 조조의 패배로 돌아갔음이 분명했다. 조홍이 어떻게든 막아내면서 오소가 불타는 것과 추가적으로 장합과 고람의 투항까지의 시간을 벌어냈기 때문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18년, 한중 공방전에선 참군 조휴의 진언에 힘입어 촉장 장비와 마초, 오란과 뇌동을 물리쳤다. 이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얇은 비단옷을 입은 무희들이 발로 북을 밟으며 춤을 추는 음란한 연회였다.[2] 그 자리에 있던 양부가 걸주 같다고 질책하자 연회를 그만두고 조홍이 사과했다.
이것이 조홍의 마지막 군사 활동 기록인데, 한중 공방전 내내 촉군의 움직임을 견제하거나 대치하느라 추가적인 기록이 없던 모양이다.
1.2.2. 엄청난 부자
거물급 부자였다. 조조가 사공으로 재직할 때 고향인 초현 사람들의 재산을 조사했는데 조홍의 재산은 '''조조 본가와 동급'''으로 평가되었다. 조조는 이에 대해 "우리 집이 어찌 자렴(조홍)의 재산과 같단 말인가"라고 불평했다. 이 말은 "내가 재산 단독 1등이 아니라니!"라며 자존심 상해한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아무리 돈이 많기로서니 조홍과 동급 취급될 정도로 많겠냐?"''' 이런 의미에 가깝다. 조조 본가의 재산은 조조의 부친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할 때 재산을 실은 수레가 100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연히 무게가 나가는 것은 처분하고 귀중품들만 들고 갔을 텐데 그게 수레 100대 분량인 조조 본가보다 돈이 많다는 건...[3]
덕분에 삼국지 3개국의 최고 부자를 꼽을 때 촉한의 미축, 동오의 노숙과 함께 3대 부자로 꼽힌다. 미축은 조상 대대로 재산을 늘려 하인과 노비가 1만 명일 정도로 서주 일대에서 잘 나가는 부자였다. 오랫동안 근거지 없는 객장 신세이던 유비가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런 미축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이었다. 노숙은 집안이 호족이지만 베풀기 좋아했고, 난세가 펼쳐지자 가업을 접고 농토를 싸게 매각하며 가난한 농민들을 돕는 한편 지방 명사들과 친분을 맺어 명성을 얻었다.
조씨 본가도 재벌이었던 만큼 단순히 물려받은 재산이 엄청 많았을 수도 있지만 수완이 좋아서 개인적인 사업을 통해 재산을 불려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재산이라는 것이 그냥 놔둔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늘리는 수단을 동원하고 결과를 얻어야 늘어나니까. 조홍전에 따르면 성정이 인색하였다 한다.
조비 즉위 후 위장군에 임명되었다가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224년 조비가 총애하는 오질이 연회에서 조진을 뚱뚱하다며 놀리자 왕충과 함께 오질 편을 들기도 했다. 오질은 조비가 총애하는 것을 넘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입지였기에 조홍과 왕충은 좋든 싫든 오질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원로인 조홍이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조비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조비가 태자 시절에 조홍에게 비단 백 필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절한 적이 있었다. 226년 이걸 기억하고 있던 조비가 조홍이 거느리던 빈객의 죄를 트집잡아 조홍을 죽이려 했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모든 군신이 반대했다. 조홍의 인색함 이전에 조비는 5촌 당숙인 조홍에게 돈을 여러 차례 빌리고서는 갚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사적으로는 조카고, 공적으로는 두 번째 주군이 될 사람이라지만 누가 돈 빌리고 안 갚는 사람한테 돈을 쉽게 빌려주고 싶겠는가. 빌린 게 설령 푼돈이었어도 그게 쌓이면 결코 적지 않게 빌렸을 거다.
조홍이 아무리 개인적인 흠이 있더라도 일단은 조조의 혈육으로 조비의 친척 아저씨고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한 일화까지 있는 데다가, 군에 복무한 최고참 개국공신 중 한 명이자 집안 최고 연장자다. 개국자인 조조부터 거병동지인 하후돈과 하후연, 초기부터 활동한 조인 등 친인척 1세대들은 조비 시절에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당시 위나라 1세대 친인척 개국공신은 조홍이 유일했다.[4] 이 때문에 이 처분을 원망한 이들도 많았다 한다. 오죽하면 조홍에게 조롱당한 적이 있던 조진마저도 "지금 조홍을 주살하면 조홍은 필시 내가 참소했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며 말렸을 정도. 하지만 조비는 "내가 직접 작살내는 것뿐인데 왜 댁이 걱정하고 난리야"라고 그냥 씹고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던 조조의 아내 무선황후 변씨가[5][6] "양국과 패국에서 자렴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없었다.(조홍이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일찌감치 죽었을 거다.)"며 질책하고 조비의 황후 곽여왕에게까지 "오늘 조홍이 죽는다면 내일 황제에게 조칙을 내려 너를 황후에서 폐하겠노라"라고 강경하게 나선 덕분에 간신히 죽지는 않고 제명으로 끝났다.[7]
처음에는 조홍을 석방한 대신 재산을 몰수했는데, 변씨가 다시 조비를 꾸짖자 재산도 돌려줬다. 조홍은 억울하게 죽을 뻔했다가 관직과 작위 박탈로 끝나자 매우 기뻐하며 조비의 덕을 찬양하는 매우 비굴한 내용의 글을 써서 바쳤다. 더러워도 결국 절대적 윗선인 황제에게 괜히 트집거리를 제공하느니 말년이라도 편히 보내기 위한 아부라도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이 해에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였다. 복직되어 후장군을 거쳐 다시 표기장군이 되었고 특진까지 받았다. 다만 조조 시절의 거병동지이자 개국공신인 조홍이 제갈량의 북벌 시기 때 촉이나 오를 상대로 한 전선에 투입됐다는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능력과는 별개로 전선에서 구르기에는 몸상태나 연령대가 버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조와 같은 세대였고, 조조가 220년 60대 중후반 나이에 사망했으니 조홍도 조비와 조예 시기면 적게 잡아도 70에서 80대 사이 정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조조의 '''"종제"'''라고 했으니 조조보단 어린, 즉 155년 이후 태생일 확률이 높으니 죽을때는 최대 70대 후반이였을 것이다. 똑같이 조조 때부터의 장수이고 황건적의 난 무렵부터 임관했던 장합이 말년에 촉군과 싸우던 것을 감안하면 조홍은 몸상태가 온전치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232년에 죽어서 야왕후 작위는 자식이 물려받았다.
1.3. 평가
여타 무장에 비하면 명확하진 않고, 인성 면에서 다소 의심을 받으나 '''전반적인 공적'''은 무시하지 못할 인물.
1.3.1. 군공의 측면
조조의 인척이며 충성심은 확실했던지 초중반 조조가 부재한 주요 전선에서 자주 조조의 대리역을 맡았고 다양한 활약을 하였다. 다만 패전이 더러 있고 아주 두드러지는 군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관도 본진의 수비를 맡으면서 강화된 원소의 공세를 막아낸 것이 큰 공훈 중 하나인데 오소의 순우경 군이 조조에게 하룻밤 사이에 전멸하면서 계산이 전부 꼬여버린 원소군 지휘부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을 일으킨 덕분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만약 조홍이 관도 본진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원소군은 오소가 날아갔음에도 전력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닥돌하여 승리를 거머쥐었을 것이 분명했으며, 관도전투 자체가 천하의 큰 판세를 가르는 전투였기에 더더욱 그 분기점에서 본진을 맡기고 그걸 해냈다는 공적이 큰 의미를 가짐은 분명하다.
한중 공방전에서 장비와 마초를 동시에 내쫒고 오란과 뇌동을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하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장비와 마초가 거느린 병력이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어쨌든 관도 본진의 수비, 무도에서 장비, 마초를 패퇴시킨 공적이 있는데 공적에 비해 평가가 좋지는 않은 인물.
1.3.2. 인품의 측면
대놓고 인색하다는 평가가 정사 삼국지에 남았을 정도고 만총이 허현령일 무렵 조홍의 빈객이 조홍의 종실 지위를 빙자하여 수차례 법을 어기므로 만총이 그 빈객을 체포했다는 기록과 조홍이 주변에 조심하라고 일러도 양패가 조홍의 빈객이 저지르던 불법 징수행위를 적발하여 다리를 꺾어 죽였다는 걸 보면 주변관리를 잘 못했던 듯 싶다.
그러나 조홍과 마찬가지로 사치럽다는 평가를 받는 석숭은 기분에 따라 노복을 죽이거나 반장은 아예 부하들의 재물을 탐하여 죽이고 재산을 적몰하기 일쑤었지만 조홍은 사치스럽고 주위 관리를 못 했을지언정 자기 이름을 팔아대는 빈객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여인들이 맨발로 북을 두드리는 음란한 연회를 벌이자 양부에게 일갈을 듣기도 했는데 그 인품 좋은 하후돈도 한때, 위진에게 아내를 연회에 대려오라고 했다가 올바른 예절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격노해서 감금했다가 풀어준 적이 있었지만 조홍은 양부에게 곧바로 사과하고 연회를 파하였다.
이걸보면 조홍이 비록 성정이 인색했으되 잘못을 시정할 줄 아는 풍모가 있었다고 보인다. 빈객 문제로 조비에게 트집잡혀 죽을 뻔했을 때 많은 관료들이 조비의 결정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보면 조홍이 공신이고 조비의 결정이 타당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저러한 조홍의 풍모 또한 조홍이 주변에게서 비호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북당서초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조홍에게 교제를 요구받자 굽히고자 찾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해, 병이 있다고 지팡이를 잡았다. 한을 품은 조홍은 조조에게 말했다. 이에 조조가 사마의를 벽소(辟召, 등용)했고 그러자 사마의가 바로 지팡이를 던지고 명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1.3.3. 조비와의 악연에 대한 이해
조비가 잘 대우한 공신도 많고 개국공신같이 중한 사람을 하찮은 이유로 트집 잡아 죽이려 한 것을 보면 그만큼 조홍은 막장이라며 조비가 조홍을 죽이려 든 것까지 옹호하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다. 조비는 굉장히 단순하고 유아틱한, 조조의 단점만 빼닮은 사람이었다. 그가 대우해줬다는 공신들은 조비와 원한이 없었기에 잘 대접받은 거고, 일단 조비가 앙심을 품은 사람은 지위고하와 막론하고 해를 입었다.[8]
반면에 조홍은 재물 문제로 조비와 원한관계가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9] 그럼에도 조홍이 다른 공신보다 대우를 못 받았으니 조홍이 막장이라며 다른 공신과 조홍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조홍이 조비에게 받은 처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홍은 평소에 사고를 쳤음에도 인망과 평판이 나쁘진 않았던 것이다. 설령 조홍이 막장이 맞다쳐도 많은 사람들이 행실이 개판인 사람을 편들었다면, 조비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처분을 내렸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비는 애초에 상대를 봐 가며 납득이 가게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다. 조비가 과거의 원한으로 트집잡아 죽인 포훈도 아버지가 조조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공신이자 은인이었다. 그리고 포훈이 죽을 때 사람들이 구명하려 했고 또 포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한탄했다. 그 원한이라는 것도 조비의 처인, 곽여왕의 동생이 절도를 하자 법대로 주살한 것과 사냥을 자제하라고 간언한 것이다. 반면 조홍이 법을 어긴 자신의 빈객들을 죽였다고 만총과 양패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기록이나 자신의 행동을 지적한 양부를 원망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리고 개국공신은 아니지만 조강지처인 문소황후도 자신을 원망하는 말을 했다는 하찮은 이유로 트집 잡아 죽인 게 조비가 아니던가. 포훈이나 문소황후를 조비가 하찮은 이유로 죽였다고 이들을 막장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개국공신인 조홍이 오질의 눈치를 봤다고 조홍이 입지가 낮았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홍이 문제인 게 아니라 일개 중랑장에 불과한 오질이 조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마구 위세를 부렸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군부의 실세였던 조진조차 오질에게 화만 낼 뿐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즉 공신들이 공적도 없는 오질의 눈치나 봐야했을 만큼 조비의 비호가 심했다는 뜻이므로 규율을 엉망으로 만든 조비와 방자함이 지나친 오질의 문제이지 조홍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오질이 죽고나서 처음으로 받은 시호는 추후로 이는 위세만 믿고 멋대로 까불었다는 뜻이다.
1.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은근히 일기토에서 활약이 많다. 여남에서는 하만과 50합을 싸우다 타도배감(拖刀背砍)[10] 으로 벤다든가 남피에서는 원담을 베어 죽이고 마초를 상대로 50합을 버티는 등 조조 휘하의 용장으로 묘사된다(하지만 한당에겐 30합 만에, 감녕에겐 20합 만에 패했다).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싸잡아 놀릴 때 '조자효는 인색하니 요전태수라고 부르자'라고 말했는데, 요전태수는 '돈에 환장한 태수'라는 뜻이다. 실제로 돈을 밝히던 조홍 대신 잘못 욕을 먹었다(조인의 검소함을 인색하다고 조롱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저 상황은 조조가 언급한 장수들을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언급이 안 되었을 뿐 헷갈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조홍이 인색하다는 사실은 연의에서 일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예형은 나머지 장수들도 '입만 아프지만 굳이 말하자면' 식으로 까댄다. 이 나머지에 조홍이 낀 셈이다.
유명한 일화로는 동관을 10일간 지키라는 조조의 명을 받고 서황과 함께 주둔 중 마초의 지속적인 도발에 넘어가 9일 만에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 동관을 뺏기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조조가 서황에게도 "조홍은 나이 어려서 그렇다 쳐도 너는 사리분별을 알아야 할 게 아닌가"며 책임을 묻자 서황은 사실대로 대답했고,[11] 이에 조조는 화가 나서 조홍의 목을 베려다 부하들의 만류로 관뒀다. 이후 조조가 마초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마초에게 죽을 위기에 놓이자[12] 마초와 50합을 겨루는 기염을 토한 덕분에(앞서 장합이 단 30합만에 캐발린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활약이다) 시간을 벌고 조조의 목숨을 구한다(조홍이 밀리는 상황이라 계속 싸우면 끔살당했을 것이지만 위급한 순간에 하후연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마초를 쫓아버려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조조는 "어제 내가 조홍의 목을 베었더라면 오늘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조홍을 칭찬한다.
한중 공방전 즈음에선 침착한 숙장이 되어 마초와 장비를 상대로 무턱대고 싸우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오란의 정찰대를 쳐부수고 임기도 참하지만 더이상 덤비지 않고 남정으로 돌아온다. 반면에 장합은 장비를 업신여기며 자꾸 출전하려고 하기에 조홍이 말린다. 하지만 결국 장합이 나가서는 소소하게 뇌동만 잡았을 뿐 처절하게 관광당한다. 당연히 조홍은 그런 장합에게 열불을 낸다. 과연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 못 하는 것인가.
한참 뒤인 조비의 황제 찬탈 시점에선 화흠 일당과 함께 궁궐로 쳐들어갔고, 이때 부보랑(옥새지기) 조필을 불러냈으나 그가 옥새를 내놓길 거부하자 즉석에서 참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1.5. 미디어 믹스
2. 후한 말의 황건적
趙弘
(? ~ 184년)
후한 말의 황건적으로, 장만성이 진힐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무리들 중에서 두목이 되어 완성(하남성 남양)을 점거하면서 주준과 형주자사 서구의 공격을 6월부터 2달간 막았지만 주준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다. 이 문서의 1번 항목의 인물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다. 성의 한자도 달라서, 이 쪽은 조운이나 조범과 같은 조씨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충, 손하와 함께 장보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완성 일대를 약탈하다가 완성을 점거했으며, 유비, 주준이 이끄는 토벌군의 공격을 받자 한충을 보내 싸우게 하였다가 완성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토벌군이 완성을 포위했다가 군사를 물리는 척 하면서 공격해 한충이 전사할 때 손하와 함께 토벌군을 기습하여 완성을 되찾는다. 그러나 이후 손견이 가세하여 완성을 공격하면서 맞서 싸웠지만 손견에게 죽는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선 당연히 좌절감이 키우는 사나이에 비하면 능력치가 휠씬 낮다. 황건적 출신답게 무력에만 특화된 능력치. 일러스트가 쥐를 닮아서 낮은 능력치에 비해 캐릭터성은 확실한 편.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9/무력 73/지력 35/정치력 26. 분전, 충차를 가지고 있긴 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7/무력 71/지력 30/정치력 25/매력 11에 보유한 특기는 보수, 삼단. 그래도 무력이 71이니 보수 셔틀로 쓸 수는 있겠지만 전방이 아닌 이상 보수 특기는 의외로 별로 쓸 일이 없는 특기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6/무력 72/지력 28/정치력 22/매력 19으로 무력 70은 넘겼지만 적성 A가 없어 애매하다. 일러스트가 바뀌어 수염이 없어지며 특징이 많이 죽었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6/무력 72/지력 28/정치력 22에 전법은 마공격강화. 전법이 같은 변희보다 지력이 많이 낮아 전법을 발동할 일이 없다. 일러스트를 보면 전작에 없어졌던 수염이 돌아왔으며 교활한 얼굴로 관군을 놀리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훈련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훈련이고 전법은 궁속약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6, 무력 72, 지력 28, 정치 22, 매력 13이며 개성은 견뢰, 적도, 주의는 아도, 정책은 공법개혁 Lv 3, 진형은 장사, 전법은 철벽, 교란, 친애무장은 손중, 한충, 혐오무장은 없다.
박봉성 삼국지에서는 손견이 싸우면서 졸개들은 비키라고 하자 조홍은 "이 애송이 놈, 내가 조홍이다."라고 외치면서 달려들지만 손견에게 죽는다.
[1] 습유기 자체가 전설을 모아 만든 책이다.[2] 군 연회에서 스트리퍼들을 불러서 스트립쇼를 주최한거나 마찬가지다.[3] 저 본가와 동급이라는 언급도 조조의 체면을 봐서 저렇게 표현했지 조조의 불평도 그렇고 실제로는 조조보다 훨씬 많았을 걸로 추정된다.[4] 이게 얼마나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소리냐면 촉으로 치면 유선이 태자시절 자기한테 마음에 안들게 굴었다고 '''진동장군 조운이나 그에 준하는 짬을 가진 정서장군 진도'''에게 관직 빼앗고 죽이겠다고 깽판을 친 것이다.[5] 엄밀히 말하면 변씨가 정치에 아주 관여를 안 한 건 아니다. 남동생 변병의 관직 좀 더 올려달라고 조조에게 요구했다가 조조가 '처남이 지금 자리에 있는 것도 그나마 내가 있으니까 가능했는데 거기서 더 올려달라고?' 하거나, 돈과 비단 좀 더 보내달라니 '당신이 훔쳐다 가져다 주는데 더 주라고?' 면박을 준 흑역사가 존재한다. 다만, 조금은 참작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변병은 조조의 처남임에도 굉장히 검소하게 살았기에 누나 입장에서는 욕을 먹더라도 동생을 챙겨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조조의 입장에선 자신이 아무리 황제와 마찬가지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엔 황제와 '''마찬가지'''인 것이지 황제가 아니기에 자신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세력이 존재할 것이고 그렇기에 알아서 처신 잘하는 처남을 괜히 누나가 동생을 챙겨준다는 명목으로 흔들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6] 물론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조조 본인이 극도로 외척을 배척하는 인물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7] 이때 굳이 곽여왕에게 황후에서 폐하겠다는 소리까지 한 건 변씨와 친한 문소황후가 조비에게 죽을 때 곽여왕이 관련되어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8] 조비는 조홍, 포훈 등 조조 시절 공신들도 자기 맘에 수틀리면 치워버리려 드는 인간군상이었는데, 언플은 잘 했으며 위의 두 형이 빨리 죽어서 삼남임에도 사실상 조조의 장남 취급이었기에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을 수는 있었다.[9] 그것도 조비 측에서 먼저 비단 백 필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이를 거절했고 이걸 조비가 문제삼아서 죽이려 했다는 건데 애당초 조비는 이전에도 조홍에게서 여러번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사적으로는 숙질간이고 공적으로는 주종 관계라 하더라도, 빌려가 놓고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떼먹은 사람에게 선뜻 돈을 빌려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10] 약칭 '타도계'로 불리는 싸움의 기술. 일부러 도망치는 척 하다가 베어버리는 기술이다. 한중 정벌에서 하후연도 양임을 상대로 써먹었고 관우의 경우 황충을 상대로 쓰려 했으나 황충의 말이 엎어지면서 무마. 형주 공방전에서 방덕도 관우를 상대로 시전, 관우도 모를 리 없어서 "타도계 따위를 내가 두려워 할 것 같으냐"라고 하였지만 방덕은 화살을 날렸다(…).[11] 서황은 9일 동안 계속 조홍의 출전을 말렸다. 그런데 9일째 되는 날에 서량군이 일부러 빈틈을 보였고, 마침 서황은 군량을 점검하러 가고 없어서 조홍이 덜컥 출전해 버렸다.[12] 전포를 입고 있는 것이 조조라는 말에 '''전포를 벗어던졌으며''', 수염이 긴 사람이 조조라는 말에 '''수염까지 스스로 잘라버리는''' 등 말 그대로 마초를 상대로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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